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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전씨 경주산내 화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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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전씨 뿌리알기 주요 인물 스크랩 정선전씨 육파계도
[포항]全용수[洙杓] 추천 0 조회 30 09.06.30 19: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제1파: 판서공파(判書公派)

 

             대표인물은 전수송(守松)이고, 평북 의천군(宜川郡)을 중심으로 전국 각 지방에 살고 있다.  

♡ 전수송(全守松)

정선전씨 25세손으로

고려 신종(제20대 고려왕,1197년 - 1204년) 때 호부상서를 역임하였다.

▷호부 

고려 말기에, 호구(戶口), 공부(貢賦), 전량(錢粮)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상서 

 고려 시대에 둔 육부(六部)의 으뜸 벼슬. 성종 14년(995)에 어사(御事)를 고친 것으로 정삼품이며, 뒤에 판서(判書), 전서(典書)로 고쳤다.  

 

♧ 제2파: 복야공파(僕射公派)

 

              대표인물은 전길()이고, 평북 정주군(定州郡)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 전길(全佶)

정선전씨 28세손으로,

공께서 밀직부사로 재임 시인 고려 고종18년(서기 1231년) 8월에 몽고 태종은 고려국을 침략할 계략을 세우고, 몽고의 장군 살례탑으로 하여금 고려국을 치게하였다.

몽고 장군 원수(元帥) 살례탑이 별군을 이끌고 우리나라 의주 땅에 침범하였을 때,

문무를 겸비한 공께서는 이들 침략자들을 좌시할 수 없어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정신으로 휘하군졸을 거느리고 용약출정(勇躍出征)하여 의주에서 몽고병을 맞아 격전 끝에 몽고군 다수를 살육하고 포로로 붙잡아 크게 전공을 세워 고려국의 위맹을 떨친바가 있었다.

 그 후 조정에서 논공행상을 함에 있어 공의 훈공을 인정하고  첨의부좌복야(僉議府左僕射)로 제수하였다.

▷첨의부

고려 후기 중앙의 최고 행정관청으로,

1275년(충렬왕 1) 원의 간섭에 의해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합해져 첨의부로 되었다. 1293년에 도첨의사사로 개칭되었으며, 1356년(공민왕 5) 반원개혁정치의 일환으로 문종 때의 관제를 복구할 때 첨의부가 없어지고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각각 복구되었다. 그러나 1362년 다시 합해져 도첨의부로 되었다가 1369년에 문하부로 바뀌었다.

▷좌복야

고려시대에는 백관(百官)을 총관하던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정2품 벼슬이었다. 상서좌복야의 줄인 말이다. 문종 때에는 상서령(尙書令) 다음가는 차관직이며, 1275년(충렬왕 1) 상서도성이 첨의부(僉議府)로 개편될 때 폐지하고, 1298년(충렬왕 24)에 다시 첨의부에 두었다가 곧 폐지되었다.

1356년(공민왕 5) 상서성이 다시 설치됨에 따라 여기에 다시 두었다가 폐지되었다.  

 

♧ 제3파: 채미헌공파

            (採薇軒公派)

 

             대표인물은 전오륜(五倫)이고, 경남 거창군과 강원도 정선군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전오륜(全五倫)

  정선전씨 29세로서  채미헌공파 파조이며, 고려 말기의 문신이며, 호는 채미헌(採薇軒)입니다.

  고려 공민왕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외직으로는 합천군수, 진주목사, 경상도안렴사, 내직으로는 국자감제주, 한림학사 집현전 대제학 보문각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1391년(공양왕 3) 우상시(右常侍)·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형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으며, 태조 이성계가 조선에 협조할 것을 회유 하였으나, 듣지 아니함으로 정선으로 본향안치(本鄕安置)의 처벌을 받았다.

  후에 풀려나서 서운산(瑞雲山)에 은거하였다. 두문동 72인 중의 한 사람이며, 뒷날 경상남도 안의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두문동 72현중 7현이 정선 서운산(瑞雲山)으로 내려와 산나물 등을 뜯어먹고 살면서 절개를 지킨 곳이 거칠현동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採薇軒實記  

 

♧ 제4파: 석릉군파(石陵君派)

 

             대표인물은 전윤장(允臧)이고 정선군

 

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 전윤장 (全允臧) 

 정선전씨30세로, 고려의 문신이시다.

  공은 천안군 삼태리에서  태어났으며 고려시대에 3명의 정승 전성안(全成安), 이승인(李崇仁), 전윤장(全允臧) 이 태어났다고 하여  지금도 삼태리로 불리고 있다.

   고려시대  충숙왕(1332-1339)때 출사하여   충혜왕(1339-1344),   충목왕(1344-1348),충정왕(1348-1351),   공민왕까지 5대에 걸쳐  역사의 격변기 동안 국가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여 왔으며, 특히 원나라의 부당한 간섭을 교묘하게 대처하여 후환이 없도록 노력하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조적(曺頔)이 반역을 꾀하였을 때 상호군(上護軍)으로서 왕을 시종한 공으로 2등공신이 되었다.

  1343년우상시(右常侍)에서 서해평양도순위사(西海平壤道巡尉使) 가 되었다가

  1347년(충목왕 3)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교주도도순문사(交州道都巡問使)가 되어 쌍성(雙城)의 인구를 조사하였다.

  1348년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

  1349년(충정왕 1) 원나라에 가는 강릉대군(江陵大君: 뒤의 공민왕)을 호종한 공으로

  1351년(공민왕 즉위년)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임명되었다.  

♤첨의찬성사: 고려 후기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의 정2품 관직.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이 복위하여 관제를 개편할 때 기존의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와 첨의찬성사를 통합해서 고친 이름으로 정원은 3명을 두었다. 뒤에 다시 찬성사로 복원하였다. 1356년(공민왕 5) 관제개혁 때 평장사로, 1362년 도첨의부가 문하부로 개편될 때 문하찬성사로 개칭되어 고려 말까지 존속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 제5파: 호군파(護軍派)

 

              대표인물은 전영부(英富)이고, 함북 경성군(鏡城郡)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 전영부(全英富)

정선전씨 30세로,

고려조에서 80명에서 경서에 밝은 사람 9명을 선발하는데 한 분으로 뽑혔으며,

조선 태조 이성계는

1397년 7월11일 순녕군(順寧君) 이지(李枝), 중추원 상의 이천우, 첨절제사 전영부(全英富)· 장철(張哲) 등을 바다에 보내 갑사·척석군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왜구를 쫓아내게 명령하였으며, 공은 왜구를 효과적으로 격퇴한 공을 세웠습니다.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셨다.

▷첨절제사

 출처: 브리태니커

조선시대 종3품 지방 무관직(武官職).

약칭은 첨사(僉使)이다. 병마첨절제사와 수군첨절제사가 있었다. 이들은 조선 초기 군사체제적인 진관체제(鎭管體制)에서 거진(巨鎭)의 장(將)이었다. 거진은 각 도(道)의 군사거점으로 주변의 제진(諸鎭)을 통솔했다. 이들은 무예시험을 통과해야 선발되었으나 무과급제자·겸사복·내금위는 이 제한을 받지 않았다. 근무일수는 900일이었으며 가족을 동반하여 부임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 직을 역임한 사람은 수령을 지내지 않았더라도 품계를 올려주는 특전을 받았다. 먼저 육군을 맡았던 병마첨절제사는 군사특수지역인 양계에서 경관직(京官職) 겸직으로 부임하여 군사문제만 전임했고, 나머지 지역은 모두 그 지역의 목사나 도호부사가 겸임했다. 1395년(태조 4) 3품의 수령관이 겸임했던 병마단련사(兵馬團練使)를 두었고 1458년(세조 4) 진관체제를 확립하면서 명칭을 병마첨절제사로 바꾸었다. 병마첨절제사가 파견된 곳은 경기도에는 광주·수원·양주·장단이며, 충청도에는 충주·청주·공주·홍주이다. 전라도에는 나주·장흥·남원·순천이며, 황해도에는 황주·해주이고, 강원도에는 강릉·원주·회양(淮陽)이다. 영안도에는 갑산·안변·삼수·혜산·경원·회령·종성·온성·경흥·부령·훈융·동관·고령·유원·미전 등이다. 평안도에는 성천·강계·위원·이산·벽동·영원·만포·안주·창성·삭주·인사·귀성·방산·벽단·창주·고산리 등이다.

한편 수군을 맡은 수군첨절제사는 주요한 포구(浦口)에 설치된 거진에서 인근의 제진을 이루는 수군만호(水軍萬戶)를 관장했다. 고려말 수군이 재건되면서 도단위로 몇 명의 도만호(都萬戶)가 임명되었다. 조선에 들어서자 이들은 각도의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가 생긴 후에도 그대로 존속했다. 그후 진관체제가 확립되면서 도만호를 수군첨절제사로 개칭했다. 한편 〈세종실록〉에 따르면 경기도·황해도는 수군첨절제사가 수군의 최고직으로 만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수군도절제사가 임명되지 않는 경기도·황해도에서는 수군첨절제사가 수군의 최고직으로 만호들을 거느렸다. 경기도는 월곶진(月串鎭), 충청도는 소근포진(所斤浦鎭)·마량진(馬梁鎭), 경상좌도는 부산포진, 우도의 제포진, 전라좌도는 사도진(蛇渡鎭), 우도는 임치도진(臨淄島鎭), 황해도는 소강진(所江鎭), 강원도는 삼척포진이다. 그리고 영안도에는 없으며, 평안도는 선사포진(宣寺浦鎭)·노강진(老江鎭)·광량진(廣梁鎭)이다. 이후로 각 진의 배치상 변화와 군사제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첨사직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 존재했다.

 

 

♧ 제6파: 임하군파(臨河君派)

 또는 후석릉군파(后石陵君派 

             조선시대 3등 호성공신인 석릉군(石陵) 전용(全龍)의 후손으로 경기도 시흥시(始興市)를 중심으로 성주(星州), 칠곡(漆谷), 대구(大邱), 강릉(江陵) 등지에 살고 있다. 

성주(星州)에는 후석릉군 용()의 4자() 어모장군부호군(禦侮將軍副護軍) 대붕공(大鵬公)과 5자() 군자감정(軍資監正) 대봉공(大鳳公) 형제가 임란때(1592) 시흥으로부터 남하(南下) 성주(星州)에 이거(移居)하였으니 곧 입향조(入鄕祖)가 된다. 금수면(金水面) 무학리(無鶴里) 선암(船岩)(배바위)를 중심으로 용암면(龍巖面) 중거(中巨), 월항면(月恒面) 인촌(仁村), 초전면(草田面) 봉정(鳳亭) 등지에서 400여 년 동안 살고 있다.

♡전용(全龍 ) 

  정선전씨42세로, 자는  여견(汝見)이시고  호는   석천(石泉)이시다.

  안동 하회마을 유성룡 댁에 들리면 공신록에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선조때 3등 호성공신입니다.   호성공신(扈聖功臣)은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님을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하는데 공이 있는 사람에게 내린 훈호이며, 1604년(선조 37)에 86명을  3등으로 나누어 녹훈(錄勳)하였다.        1등에는 이항복·  정곤수의 2명,     2등에 신성군(信誠君)·  이원익·  윤두수·  심우승·  이호민·  윤근수 · 유성룡· 김응남 등 31명,

  3등에 전룡(全龍), 허준(許浚)  정탁·  이헌국·  유희림·  이유중·  임발영·  기효복  등 53명이시다.  

공은  선조 임금님의  신하로서 의주까지 피난하는데 가까이서 모시고, 종묘의 사주(위패)를 모시고 오는 과정에서 왜군들에게 왼쪽뺨과  왼쪽귀가 떨어져 이빨이 드러나는  중상을 입고 임무를 완수 하는 등 큰 공을 세워   호성공신으로 되었으며,  벼슬이 2계급 특진하였으며, 상으로 노비7명, 토지60결,  말1필, 은자 등을 하사 받으셨다. 

대익음서로 경상북도 청송부사, 평안북도 벽동군수를 역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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