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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설교의 특징 연구(글: 박양수 목사, Th.D)
들어가는 말
죤 메이어 목사는 말하기를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나님이 보내신 목사는 하나님 이름으로 말한다. 그가 말한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말씀 하신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이 말씀을 선포하려 나갈 때 “너의 말을 듣는 자는 나의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멸시하는 것은 나를 멸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든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입술에 집어 넣어준 말씀만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설교자가 말씀을 따라서 선포하도록 하나님이 붙들어 주신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린 것에 대하여 칭찬했다.(살전2:13) 개혁자들은 설교를 하고 “복음의 전달자, 혹은 말씀의 선포자”인 누구라고 서명을 했다. 이렇게 그들은 설교 사역을 영광스럽게 생각했고, 실재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했다.
1. 청교도 설교 사역의 특징
개혁자들의 설교 사역의 특징은 문체에 있어서 애매모호 하지 않고 명확한 것이 청교도 설교의 특징이다. 강조점에 있어서 교리와 실제가 놀랍게도 균형을 이루었으며 그들이 선택한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강해하는 일에 충성과 헌신을 다 했다. 청교도 설교는 명확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설교가 단조롭거나 깊이가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예를 들면 청교도들은 성경 신학적인 토론과 논쟁을 하는데 승리하는 사 람이 되게 설교 했다.
또 그들은 선포되는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잘 훈련 시켰다. 그들은 “아첨 하는 설교”와 미사여귀와 수식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명확한 말씀의 교훈과 위로를 청중들이 쉽게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얻어지는 은유와 직유들로 가득채운 설교를 했다.
그들이 그렇게 설교한 것은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바르게 전하는 것은 설교자들에게 맡겨진 책무이고 영광이다. 성경에 신중하게 되면 어떤 미사여귀나 간증이나 체험보다도 진실한 말씀을 선택할 것이다. 금고에 잠겨진 열쇠를 여는데는 열지 못하는 금 열쇠보다 열수 있는 구리열쇠가 훨씬 더 유용한 것이다. 신중한 용어 선택이나 행동에 있어서 세심한 주의로 사람의 양심과 심령을 노크하여 달콤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했다.
청교도 목사들은 이해하도록 설교하는 사람들이 였다. 설교를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비유, 은유 직유 등을 사용하여 청중들의 정신을 집중시켰고, 그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하여 청중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데 최선을 다 했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설교가 명확한 만큼 그들의 삶이 명확했으며, 그들이 설교한 내용을 생활 속에서 확인하는 삶을 살았다. 즉, 그들이 설교한 내용과 일치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선언하기를 설교의 제일 되는 목적은 인생들의 영혼과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킴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죤 오웬 목사는 설교의 주 된 목적으로 성도들에게 있어서 “빛과 지식과 경건함과 엄격성 및 대화의 진실함”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제안 했다. 토마스 맨튼 목사도 “말씀을 행하는 자가 말씀을 가장 장 들은 사람이다”이라고 했다. 교인들의 경건한 삶은 그 교회 목사의 가장 큰 자랑거리이다.
선포된 말씀이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필립 구두윈 목사의 [복음적인 성도]라는 책 속에 잘 묘사 되어 있다. 그 내용인즉, 한 착한 목사가 설교를 하고 내려오는데 한사람이 목사에게 다가가서 “목사님은 그 설교를 생활 속에서 실행하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그 때 목사님은 한숨을 길게 내 쉬며 대답하기를 “설교는 전했지만 행하지는 못 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성경말씀을 바탕으로 설교한 경건한 삶을 통하여 모범을 보였으며 모든 선한 일들도 건전한 교리위에서 이루어 졌다. 그들은 교리적인 논쟁에서도 탁월했지만 실천신학에 있어서도 불빛을 밝혔던 것이다. 그들은 결코 경건한 생활의 모든 특성을 묘사하는데 실증을 내지 않았다. 악을 멀리하는 양심의 전환과 모든 노동 자유 및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추구하는 심령의 기쁨 등을 기술하는데 뛰어 났다. 따라서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경건의 연습을 거듭했다.
청교도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여 생활에 실천하도록 설교 했다. 즉, 적용이 없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제임스 더할 목사(스코트랜드 언약도 목사)는 요한 계시록을 주해하면서 “적용”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적용은 설교의 생명입니다. 성도들의 양심의 문제의 핵심을 적용시킴에 있어서 필요한 연구 지혜 권위 및 명확성이 있어야하듯이 어떤 심오한 진리를 들어내는 데에도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이것저것을 공부해야 합니다. 청중들은 때로는 가장 특별한 말들에 의해서 요동됩니다. 그러나 짧고 평범한 말들이 그들의 가슴에 닿을 때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설득하는 것이요 증거하는 것이며 간청하는 것이요 탄원하는 것이며, 훈계와 요청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설교는 문제들을 매우 특별하게 해결해 줄 뿐 아니라 청중들의 양심에 숨겨져 있는 문제들을 생각나게 만들어 회개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교는 설교자의 신실함과 지혜와 그리고 설교자의 은사의 권능과 효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설교의 적용 부분에 있어서;
1) 설교자는 자신이 목회하는 교인들의 상태에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상태에 맞추어야 한다. 실수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더욱 설득력 있게, 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보다 예리하게, 상처받은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좀 더 위안을 주는 설교를 해야 한다. 마치 우리 주님이 대하시는 것처럼 그들을 대해야 한다.
2) 여러 분야에 있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침에 있어서 설교자는 교훈하고 책망을 적용해야 한다.
3) 여러 분야에 사람들에게 적용함에 있어서 지혜와 신중함으로 적용할 때 모든 사람이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설교자는 혼란을 초래할 언어나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뒤죽박죽 적용시키는 것은 삼가해야 한다. 바른 적용은 (1) 목이 곧은 사람들이 더욱 강팍해지지 않도록 적용하며, 온유한 사람들은 확신에 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적용해야 한다.
오만한 위선자들을 강하게 내리칠 때 잘 훈련 받은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적용해야 한다. (2) 선한자와 악한자가 모두 같이 한 가지 죄에 빠져 있을 때 전자와 후자는 각각 다르게 책망을 받으며 회복해야 한다. 갈6:1,3에 있는 규칙을 따르면 라오디게야 교회보다 에배소 교인들이 더 온유하게 다루어졌음을 볼 수 있다. (3) 성도들은 그들이 처한 상태에 따라서 책망을 받게 된다. 그들의 행위에 있어서 칭찬받을 만한 일이 무시 되어서는 안 된다.
성도들을 책망할 때 상처를 받지 않도록 주님의 말씀으로 교훈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잘 못을 꾸짖는 것 이상은 하지 말아야 한다. 책망을 할 때 인정할 것은 칭찬 해주고, 칭찬과 책망을 섞어야 한다. (4) 경우에 따라서 구별해야 한다. 외적인 고통과 내적인 아픔이 엄습해 있는 사람에게는 책망에 있어서 보다 더 인자해야 하고, 부드러워야 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다루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4) 이러한 적용은 각 사람의 문제에 따라 온유하든지 강한 어조로 책망하든지 해야 한다. 그 결과 듣는 사람들의 심령에 깊이 박히게 될 것이다. 적용에 있어서 명백하고 분명하며 지나치지 않는 책망과 무게 있는 것은 설교자가 지켜야할 덕목이다.
이렇게 적용할 때 성도들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어 목사가 지나가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말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죄악을 책망하는 것과 죄악의 증거를 보여 주실 때 허공을 내려치는 것같이 하지 않았다. 양심이 메시지를 거부하지 않도록 적용에 있어서 더욱 확실하게 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죄악들을 들추어내어 버리게 했다. 예를 들면 “첫사랑을 버렸노라” “나는 부자라고 너희가 말하지만, 네가 살았다는 이름을 가진 자나 실상은 죽었느니라”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 등...이러한 말씀들은 진리의 빛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죄의 세력으로부터 끌어내어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능력 있는 말씀이다. 바로 이러한 말씀이 히4:12절의 간절과 골수를 질러 쪼개는 말씀이다.
2. 청교도 설교의 내용
설교는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것처럼 선언하는 것이다. 선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비한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그윽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모든 사람들에게 퍼지도록 옥합을 깨뜨리는 것이 설교이다. 그리스도의 속성과 성품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공생애 기간에 무슨 일을 하셨을까? 첫째, 그리스도는 가르치는 선지자 였다. 둘째,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제사장 이였다. 다음은 그가 제사장으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린 후 만왕의 왕이 되었다. 그는 통치하시는 왕으로서 더 공개적으로 영광스런 존재로 알려지셨다. 그의 제사장직과 희생 제물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후에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신 것이다.
설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하신 일을 설교하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영적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다. 그의 자녀들에게 행하시는 기이한 일들 곧 자녀들을 가르치시고, 변화시키는 것들과 자녀들이 천국에 합당한 생활을 하도록 준비시키는 기이한 일들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약속들을 열어 보이는 것이다. 그 약속들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나누어 주는 것들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약속들은 진실로 예(고후1:20)가 되기 때문에 그것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들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실행되는 것들이다.
설교자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드러내야 할 뿐 만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모든 은사와 역량을 다 사용하여 신부된 성도를 그리스도께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낄 때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인간과 그리스도 사이에 막힌 담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해야 한다.
설교는 정죄와 위로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서 하나님의 분노와 자비를 동시에 나타내야 한다. 모든 설교자들은 위로 자가 되기 전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밝히고 그것들을 버리고 떠나는 방법을 가르치고, 교훈하여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하는 것이다.
1) 설교의 표현 방법
청교도들의 설교의 표현은 평이한(Plain style)방법을 사용했다. 설교를 평이한 표현으로 말함으로 무지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고, 매우 진지하게 말함으로 가장 무감각한 사람들도 느끼게 하며, 매우 확신 있게 말함으로 반항적인 트집쟁이들도 침묵하게 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 구성에 있어서 불필요한 복잡성, 모호성, 허황된 공상과 비유들을 금하고, 신소리와 익살로 하나님의 말씀을 희롱하는 일을 금하며, 괘사스러운 재치와 모순에 가까운 역설, 성경의 근본에서 이탈하는 우화적 해석, 국가나 권력자에게 아첨하는 설교, 존재하지 않거나 비효과적인 내용을 적용하는 일, 등을 금해야 한다.
청교도들은 빛나는 비단 같은 관용구와 매끄러운 실크 같은 정밀한 언어, 삼 겹 모직 같은 과장법, 맵시 있는 꾸밈, 학자 스러운 표현법 등은 성도들의 이해를 어둡게 한다고 확신 했다.
자일스 퍼민(Giles Firmin)목사는 “비단 같은 말은 베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으며, 학문의 과시에 대해 청교도들은 학문을 연구하는 것은 필요하나 강단에서 광고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사무엘 루터포드의 말에 동의했다. 이와 같이 청교도들은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쉽게 설득을 당해 구원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평이하고 설득력 있는 설교를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청교도 설교자들은 강단에서 언변술을 연마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해석과 적용을 연마했던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청중을 즐겁게 하고 재미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했던 것이다.
2) 설교의 구조
청교도 설교의 구조(structure)는 교리, 전제(증명), 적용으로 이루어 지는 분명한 3부분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페리 밀러(perry Miller)의 기록 중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청교도들의 설교는 본문을 인용하고 가능한 한 짧게 그 본문의 서론을 설명한다. 즉, 그 본문의 상황들과 배경을 설명하고 문법적 의미들을 설명하고 그 수사어구와 구문들을 분해하고 그 논리적 의미를 제시한다. 그 다음은 설교는 단조롭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문장에 담겨진 교리를 설명한다. 다음은 전제 또는 증명하고, 마지막으로 적용을 한다. 그리고 설교를 마친다.” (The New England Mind The Seventeenth Century(cambridridge mass, Harvard Univer-
sity Press,1954)p,332-333.
웨스터민스터 교훈집 편집자들은 이 방법에 따라서 설교를 작성하라고 다음과 같이 지시하고 있다.
“본문에서 교리를 이끌어 낼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첫째로 교리가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청중들에게 그 본문으로 교리를 어떻게 가르치는지 분별하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 설교자는 청중들의 덕성함양을 유도하며 그 목표를 가장 중요시 하는 교리들을 주로 역설해야 한다.”(Hall, reliquiae Liturgicae(Bath; Binns and Goodwin,1847) 3vol, p37.
복음적인 교육(덕성함양;Edification)은 신자들의 신앙 증진을 위함으로 청교도 설교자들의 첫째 되는 목표였다. 그러므로 복음적인 교육(가르침)은 성경에 확고하게 기초된 사실을 청중에게 설명 했다. 웨스터민스터 교훈집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논증(증명) 또는 전제들은 확고해야 하며 가능한 한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예화들은 어떤 것이든 빛이 충만해야 하며 듣는 사람의 심령에 빛이 신령한 빛으로 진리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의 처음 두 부분은(교리, 전제)은 전제(증명 혹은 논증)를 납득시키려고 노력하는 반면 세 번째 부분인 용도(적용)은 종말관적인 희망과 두려움과 현실적인 생활의 강화와 관련시킴으로 의지를 불러 일으켜 말씀을 수용하게 하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게 하는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이와 같은 청교도들의 3중 구조 설교는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rkins)의 설교 교과서 [예언의 기술](The Arte of Prophesying )이라는 책에서 잘 설명 되어 있다. 퍼킨스에 의하면 설교자의 임무는 첫째, 성경(정경) 본문을 정확하게 읽을 것, 둘째, 성경 본문의 의미와 이해를 제시할 것, 셋째, 자연스러운 직감에서 나온(본문 해석상 연계 된)소수의 유익한 교리들을 수집할 것, 넷째, 수집한 교리를 단순하고 평이한 말로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적용하는 것이다.
가장 설교에 중요한 부분은 적용 부분이다. 퍼킨스는 사람들의 신앙적 건강 상태에 따라 다음과 같이 7곱 가지로 분류 했다.(The Arte of Prophesying; Works of the Famous and Worthy Minister of christ in theUniversity ofCambridge(cambridge,England,1613, v
ol 3, p673).
1. 무지할 뿐만 아니라 가르치기 어려운 불신자들.
2. 가르칠 수 있지만 무지한 자들.
3. 지식은 있으나 겸손하지 못한 자들.
4. 겸손한 자들.
5. 신자들.
6. 타락한 자들.
7. 혼합적인 사람들도 있다.(청교도 예배 p102)
더 나아가 그는 두 가지 종류의 중요한 적용을 설명한다. 한 가지는 교리, 바른 가르침과 오류에 대한 논박을 포한한 적용이고, 다음은 실제적인 문제에 관련된 것으로 위로나 권면을 위한 교훈과 교정과 훈계(Edification)를 포함한다.
윌리암 에임스(William Aems)는 퍼킨스 보다 더 강력하게 적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진수; The Marrow of Sacred Divinity,1638)로 번역 된 그의 저서“Medulla Theological" (신학의 골수)에서 그는 적용들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진리를 증명하는 정보, 오류를 논박하는 반증, 생활에 실천해야 할 교훈들의 증거, 생활에서 피해야할 것들과 정죄와 징계, 개인적인 선행과 강화를 시작하게 하는 권면, 그리고 회개케 하는 훈계 이다] 이는 성경 디모데후서 3장 16-17에서 그 근거를 발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죤 콜린지스(John Collinges) 목사는 설교를 농담과 기발한 발상으로 하는 사람을 “가장 악랄한 영혼의 조각가”라고 통열하게 비난 했다.
3) 설교의 예화와 비유적 표현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는 다음과 같이 비유를 했다. “나는 아이를 이렇게 다루는 아버지를 본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길을 가는데 아이가 따라 오지 않고 멍하니 서서 하품을 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불러도 오지 않을 때 유일한 방법은 이렇습니다.
아버지가 수풀 뒤로 슬쩍 숨으면 아이는 달려오며 웁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다시 찾았을 때 장난을 집어 치우고 어느 때보다 더 빠르고 즐겁게 아버지와 함께 걸어갑니다. 마찬가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때로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행로로 즐겁게 이끌어 가시고자 하는데 우리가 쓸데없는 장난을 하며 주님의 부르심에 무심하고, 냉담하며, 세상적이 되어 기도에 태만하고, 심령 이 죽어 갈 때 우리를 자극시키시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숨기시어 죽어 갈 때 우리를 자극시키시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숨기시고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겨우 한 주에 한 번도 기도하지 못 하던 사람이 하루에 서 너 번씩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Three Sermos,1637-1656) by Thomas Hooker(Gainesville. Fl. Scholars Facsimiles and Reprints, 1956).
후커의 예화를 하나 더 든다면; “만일 작은 배에 큰 돛대와 넓은 돛이 있다면 그 배는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뒤집히고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배(분수)에 따라 돛의 균형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에 대한 느낌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행로 가운데로 나아가게 하는 돛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작은 긍휼과 은총을 얻을 때는 순조롭고 편안하게 나아가지만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보장)를 주신다면 우리의 가증스럽고 부패한 심령이 뒤집혀져서 우리를 각성시키는 대신 우리를 좌절하게 할 것입니다.”(상게서)
다시 말하기를 “주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에게 항상 감심제를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기를 잃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위해 강심제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후커는 예화와 비유를 사용함에 있어서 뛰어난 평이한 표현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당대의 유명한 설교가 였던 토마스 쉐퍼드(Thomas Shepard)는 평안할 때 믿음 생활을 게을리 하는 사람들을 교훈하면서 “선언들이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 있을 때는 준비를 가추고 긴장하여 밧줄을 잡아당길 것입니다. 그라나 바다가 잔잔하면 그들은 자기 선실로 내려가서 잠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꿀벌들은 여름철 좋은 날씨에 꿀을 저축하는 것처럼 평안하고 안전할 때 은혜와 믿음을 저축하십시오”라고 했다.
4) 성경에 충실한 설교를 했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하나님 말씀의 종이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였기 때문에 그들의 설교는 철저하게 성경을 중심한 설교 였다.
죤 카튼이 보스톤에서 지낸 19년에 대하여 기술하기를; “이곳에서 주석적인 방법으로 구약성경 전체를 일순하고 두 번째는 이사야서 30장까지 그리고 신약성경 전체를 일순하고, 두 번째는 희브리서 11장까지 검토했다. 주일과 강의 일에 나는 사도행전, 학개, 스가랴의 예언들, 에스라 느헤미야, 요한계시록, 전도서, 아가서, 요한2, 3서, 디도서, 디모데 전후서, 로마서를 철저하게 설교 했다. 그리고 부수적인 경우에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성경으로 설교 했다.”
쉐퍼드는 캠브리지의 자기 청중들에게 알미니안주의와 도덕률 폐기론자 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4년 동안 이나 설교 했으며, 카튼은 로마케도릭의 오류들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설교 했다. 그러나 주일날 설교는 요리문답적 이고 논리적인 강의 설교와는 대조적으로 격려적이고 도덕적이고 권고적인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뚜렷하게 구분되지는 않았다.
(1) 설교의 내용은 반드시 성경 본문에서 이탈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여야 한다. 설교하는 사람이 꼭 명심해야 할 일이 있는데 성경 내용과 표현과 방향은 성경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왜 기록하고 보존 하는가 하면 설교자들과 설교를 듣는 자들을 위하여 기록했고 보존하고 계신다. 성경을 통해서 선포되고 가르쳐진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과 성화에 이르게 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된다.
설교는 성경에서 택한 본문을 기초로 해서 설명하고 적용하는 것이 설교 이다. 본문에서 이탈 된 설교는 금장옥구 같은 설교라 할지라도 합격선에 미달이 된다. 초대 교회 사도들의 설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역사를 설명하고 예수 그리스도 선지자들의 예언에 따라서 구주로 오셔서 죄를 대신지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과 승천하심을 설교했다. 그 이상 어떤 말도 사용하지 않았다. 설교는 반드시 성경의 진리를 가장 명확하게 만드는 것 이여야 한다.(sermon must the truth of scripture crystal clear) ibid, p.23
설교가 성경을 혼잡하게 해서는 안 된다. 설교를 통해서 성경을 혼잡하게 하는 이유는 설교자의 욕망이 설교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욕망이 설교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듣는 중에서 설교를 해야 하고 자기가 하고 있는 설교를 하나님께 평가 받고 있음을 알고 철저히 준비하여 설교에 임해야 한다. 고후2:17에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 하노라”
(2) 감명을 주기 위한 설교를 하지 말고 말씀(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한 설교를 하라.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설교에 목적을 두지 말고 하나님의 목적에다 초점 맞춰 설교를 해야 한다. “인간의 목적에다 초점을 두는 설교자는 자기의 기술이나 웅변술을 과시하기 위해서 강단을 사용하는 무례한 도적이다. 세례 요한처럼 설교자는 쇄 하여야 하고 구세주는 흥해야 한다.(요3:30) 전해지는 말씀은 예수님이고 설교자는 그것을 전하는 목소리에 불과 하다.” 주) ,위어스비가 전하는 설교 원리, 1978, 나침판사 p.41
“저런 설교는 나도 할 수 있겠다” 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설교는 단순해야 한다. 설교의 기술은 설교의 본모습을 퇴색시키고 가리게 한다. 고후4:3에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워졌으면 망하는 자에게 가리운 것이라”고 했다. 조지 모리슨은 “위대한 설교를 하려고 애쓰지 말고 위대하신 구세주를 높이려고 애써야 한다” 고 했다
5) 성경 해석의 원리
청교도들은 그들의 선배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해석 방법인 성경의 문자적, 역사적, 비유적, 예표론적, 우화적, 신비적, 의미로 분류한 중세기의 표준 해석법을 거부했다. 그들은 문자적, 역사적, 예표론적 의미는 존속 시키고 우화적 의미, 종말론과 관련된 신비적 의미는 거부했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그들의 설교에 사용 된 바와 같이 성경의 문자적이며 역사적인 의미의 절대적인 우의에 대한 확신이 있었지만 성경 해석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3가지 과정, 즉 과거, 현재 ,미래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고 주장했다. 메이슨 로원스(Mason Lowance)는 말하기를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역사란 인간 경험 가운데 인도하는 손길을 감지하도록 일련의 관련된 신령한 영감을 받는 사건들이라고 믿어진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 역사적 사건들의 기록인 성경은 청교도들에게 당시 자신들에게 역사를 묘사하는 풍성한 출처가 되었다.
성경의 예언이 설교자들에게 나중의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수단이 되었다. 분명히 선지자, 사사, 왕, 제사장들에 의해 증거 되고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 부활, 교회를 조명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오순절 강림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설립에서 절정에 이르는 하나님의 과거역사 가운데 놀라우신 활동을 숙고해야 한다.
이 숙고는 항상 성경의 기본적인 의미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동일하신 3위 1체 하나님의 이 섭리적 활동들은 현재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기 위한 방법과 선례들을 주었다. 이 방법의 선례들로 그들은 자신들의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미소와 찡그림을 분별했다. 칼빈주의 특별 섭리에 대한 심오한 의식은 초기와 후기 설교자들에게 동기를 부여 했다.
그들은 성경을 미래 시제로 해석 했다. 그들은 사크반 베르코비치(Sacvan Bercovitch)가 “구약 성경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그리스도의 성육신 뿐 만 아니라 재림까지도 연결시킬 수 있게 한 발전적 예표론 이라고 칭한 바”를 개발했다. 이 해석은 천년왕국설,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 역사적 종말에 앞서 천년동안 자신의 성도들과 함께 땅을 다스릴 것이라는 신앙에 연결 되었다.
잉그리드 매더와 그의 아들 카튼 매더는 18세기 중엽에 조나단 에드워드가 했던 것처럼 천년완국주의를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쉐퍼드와 후커의 설교에서도 많이 발견 되었다.
예표론적 해석의 “예표”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대조(antitype)하는 방법에서 비롯된다. 예표는 역사의 확실성에 의존하기 때문에 비유적 용법(trope), 비유(figure), 풍유(allegory)와 구별 된다. 비유적 용법은 중세기 수사학의 문체, 또는 카도릭 미사의 한 부분에 수식으로 넣는 시구이며, 번연의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챤 같은 상상의 소산이며, 풍유, 직유(simile), 은유(metaphor)는 인간의 환상의 소산이며 그 발명자가 의도하는 무엇이나 의미할 수 있다. 그
러나 [예표]는 역사에 실존하며 사실에 입각한다. 그러므로 역사적 아브라함은 자신의 성자를 희생시키고자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예표 또는 예시(adumbration)이며 히브리인들이 홍해를 건넘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을 예시하는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창설된 성찬의 예시이다.
우의적, 풍유적 해석은 비역사적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이 받아드리지 않았으나 17세기 말에 다시 살아나 18세기 초에 유행이 되었다. 미국의 청교도들에게 주요하게 영향을 끼친 세명의 예표론적 해석자들이 있었는데 토마스 테일러(Thomas Taylor)와 사무엘 매더(Samuel Mather)와 벤자민 키치(Benjamin Keach) 였다.
예표론적 해석 방법을 사용하는 뉴잉글랜드 설교자들은 쉐퍼가 그러했듯이 모든 구약성경의 인물들과 사건들이 신약성경에서 대조적으로 성취되는 예표들 이라고는 가정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로마서 11장 6절에 하나님이 아담과 제정하신 행위언약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제정된 은혜언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약성경은 옛 언약(행위언약)을 파기한 것을 나타낼 수도 있다.
청교도들의 설교의 주제들은 죄의 자각, 회개, 소명, 은혜, 믿음, 칭의, 성화, 영화 등,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장을 총망라했다. 이러한 주제들은 주로 바울서신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나가는 말
청교도 설교의 특징은 문체에 있어서 명확하고, 교리와 복음(은혜)가 균형을 이룰 뿐만 아니라 매우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설교 했으며, 미래 지향적이며 장차 성도들이 가야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심령이 채워지도록 설교를 했다. 설교를 통해서 성도들이 이 세상을 동경하며 사모하는 마음을 바꿔서 하나님의 나라에 닻을 내리고 이 땅에 살면서 영원한 천국을 위해서 소망하고 기쁨과 감격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설교 했으며, 미래의 세계를 보여주는 예언자적인 설교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들어내는 일에 힘썼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살면서 말씀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주건을 들어내도록 설교 했다. 말씀의 지식을 받아서 실천하지 않으면 이중인격자들 만든다는 자책감을 가지고 늘 성도가 세상에서 살면서 말씀을 생활헤 적용하고 실천하면서 살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여기면서 오직 말씀으로만 설교할것을 강조하고 말씀으로만 설교했다.
딤후3;16절의 교훈을 염두에두고 가르치고 교훈하고 바르게 하고 책망하는 일을 게으르지 않게 하여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을 만들어 천국으로 인도하는일에 최선을 다하는 설교를 했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구원은 오직 말씀과 설교로만 구원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오직 성경으로만 설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