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많은 설명회장이었다.
지루한 사업설명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
한 남성이 마이크를 넘겨받아 질문을 한다.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
'오, 목소리 좋은데?'
이틀 후에 있을 행사 준비로 마음이 바빴던 나는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뒤돌아보니, 뒷좌석의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재빨리 그 남자를 스캔한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있다!
깔끔한 정장 차림에 짧은 머리를 무스로 올려세운 그 남자.
왜 날 쳐다보지? 하는 당혹스러운 모습.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이틀 후, 내 앞에 나타난 그 남자.
한벗재단에서 마련한 일본 근육장애인 초청 간담회였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등장하는 그를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어? 나 당신 알아요! 엊그제 봤어요!"
당황하는 그 남자.
'명함이라도 받아올 걸 그랬나...'
그날 후회했던지라 다짜고짜 명함을 내놓으라고 했다.
대뜸 나이도 물었다.
젠장, 4살이나 어렸다.
행사가 진행되는 내내 모든 신경은 온통 그에게 쏠렸다.
단체사진 촬영 때, 슬쩍 그의 뒤에 가서 섰다.
그날 밤, 왠지 모를 설렘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다음날 행사 사진을 메일로 받고 싶다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재단 홈페이지에 행사 후기도 올려주는 센스까지!
그의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둘러보고, 채팅을 하며 나만의 탐색전이 시작됐다.
그러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의 관심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닐까?'
'나보다 훨씬 예쁘고 어린 여직원들도 많은데... '
'나를 통해 여직원 중 누군가와 연결되길 바라는 것일지 몰라'
'아, 실수할 뻔했네! 그래! 더 이상 오버하지 말자!'
일주일 후,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친구와 서울에 올 일이 있다며 휠체어로 진입 가능한 숙소를 아는지 묻는다.
그러면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냐고 묻는다.
미모의 여직원 이름을 대며 혹시 같이 나올 수 있냐고도 묻는다.
'그럼 그렇지...'
그런데 막상 저녁식사를 하는 내내 대화 상대는 나!
술 한잔 기울이며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알아채버렸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이 시작됐다.
좋은 것만 주시던 하나님은, 가장 좋은, 소중한 어머니를 앗아가셨다.
남편은 3개월을 미친놈처럼 살았다(고 한다).
매일 가던 교회는 발길을 끊었고
술과 담배로 몸을 괴롭히며 지냈다.
인제 수해 소식이 매스컴에 연일 보도되면서 전국에서 도움의 손길이 계속되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많은 사람의 격려에 감사한 마음으로 버틸 수 있었다.
작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편의시설을 갖춘 집도 새로 짓고
수재의연금과 후원금으로 휠체어를 실을 수 있는 개인 차량도 마련했다.
집도, 차도 생겼지만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삭발했던 머리카락이 돋아나던 어느 날,
'계속 이대로 살면 안 되겠다, 뭐라도 하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서울에서 열리는 한국장애인재단 지원사업 설명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설명회에서 얘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근육장애인협회 임원들이었고
간담회 행사를 알려주어 이틀 후 다시 오게 된 것이었다.
그날.
전동 휠체어에 앉은 그가 왜 그렇게 근사해 보였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