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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대부의정부좌참찬겸지춘추관사 증시문효공,정경부인죽산박씨신도비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겸령 경연사감춘추관사홍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 신용개 찬
자헌대부의정부우참찬 신공제 서
가선대부전라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 이언호전액
선비가 세상에 입신양명하는 것은 근본을 세워 본체로 삼고, 이어서 용(用)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
니, 효도란 것은 실로 백행의 근본이어서 충성도 이로 말미암아 나오는 것이다. 능히 어버이에게
효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성의가 독실하면 하늘에서 복을 받고 후손에게 경사로운 일이 생기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지금 세상에서 보면 좌참찬(左參贊) 윤공(尹公)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 하겠다.
공의 휘(諱)는 효손(孝孫)이요, 자(字)는 유경(有慶)이니 남원의 현달(顯達)한 씨족으로 대대로 이
곳의 명문가였다. 대구현령(大邱縣令)을 지낸 휘 신을 (莘乙)의 현손(玄孫)이요, 보승낭장(保勝郎
將) 증(贈) 호조참의(戶曹參議) 휘 언재(彦材)의 증손이며, 조(祖)의 휘는 희(希)이니 장사감무(長
沙監務) 증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고, 고(考) 휘 처관(處寬)은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로
이조판서(吏曹判書) 에 증직되었다, 비(妣)는 광산정씨(光山鄭氏) 감찰(監察) 정존(정存)의 딸로
신해년(辛亥年 1431,세종13) 9월 계미일(癸未日)에 공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영특한 자질이 있어 소학(小學)을 읽으며 청소하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드리는 예절을 행하니 참판공은 말하기를 “이 아이가 어릴 때부터 능히 예를 알
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니 마땅히 효손으로 이름을 지을 것이다”하였다. 장성하자 힘써 학업을 닦아
지조가 단정하고 용모가 신뢰할만하니 문헌공(文憲公) 박 원형(朴元亨)은 그 성명을 듣고 친히 가
서 보고는 드디어 딸을 출가시켰다. 경오년(庚午年1450세종32)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계유
년(癸酉年1453단종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부정자(權知承文副正字)에 제수되었다.
을해년(乙亥年1455세조원년)에 집현전에 들어가 저작(著作)이 되었고 원종(原從)의 공로로 박사
(博士)로 승진하였다가 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로 옮겼다. 천순(天順) 정축년(丁丑年1457세조3
년)에 중시에 발탁되어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옮겼고 성균사예(成均館司藝), 한성소윤(漢城府少尹), 의정부(議政府)의 검상(檢詳)과 사인(舍人)
을 역임하였다.
부모를 간병하기 위해 사양하니 특별히 약물을 하사하고 고향 근방인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제수
하여 부모 봉양을 편리하게 하였다.
을유년(乙酉年1465세조10)에 부친상을 당하니 애통해 하는 것이 절도에 지나쳐 상례조차 치르지
못할 정도였고 반혼당(返魂堂)을 묘막(墓幕)에 설치하여 조석(朝夕)으로 배알하고 삼시로 전을 올
릴 때 몸소 식기를 다루기를 3년동안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묘에서 집까지 거리가 10리인데 매일 아
침 제사를 마치고 돌아가 모친을 뵈었으니 돌아가신 부친이나 살아계신 모친을 섬기는 효도가 한
결같이 순수한 정성에서 나왔다.
복을 벗자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에 임명되었다가 정으로 승진하였다. 경인년(庚寅年1470成宗원
년)에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로 승진하고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당시 경국대
전(經國大典)과 오례의주(五禮儀註)를 편찬할 때 공이 결정한 바가 많아서 일대의 법전이 이루어
지게 되었다. 계사년(癸巳年1473成宗4)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었고, 조금있다가 예조로 옮겼는데 노모봉양을 위해 사직하기를 청하니 특별히 전주부윤(全州
府尹)으로 제수하여 노모를 봉양하게 하였다.
공은 임소에 부임하자 관아에 작은 부엌을 마련해서 아내와 함께 음식을 지어 식사를 올리고 또한
경내의 노인들을 돌보았으며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여 치적(治績)이 남달리 뛰어나므
로 성종대왕(成宗大王)이 교서를 내려 장려하고 특별히 비단옷 한벌을 하사하여 남다른 업적을 표
창하였다.
병신년(丙申年1473.성종7)에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되고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임명
되었다가 형조 로 옮겼다. 외직으로 나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만기가 되자 한성
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고 대사헌(大司憲)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또
사직하고 모친을 봉양하기를 청하니 귀양을 허락하였다 그후 지성으로 모친을 봉양한 것이 무릇 7
년이었다.
병오년(丙午年1486.성종17)에 조정에서 공을 기용하여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삼으니 어머니를 관
아에서 모시고 봉양하기를 전주부윤(全州府尹)때와 같이 하였다. 얼마 안되어 어머니가 본가에서
돌아가시자 공이 통곡하여 숨이 거의 끊어질 지경이었고,슬픔으로 파리하고 야위어 뼈만 앙상하
였지만 묘막을 지키며 정성을 다하기를 앞서 부친의 상 때와 똑같이 하였다.3년동안 한번도 집에
내왕한 일이 없었으며 술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홍치(弘治) 기유년(己酉年1489.정종20)에 상기(喪期)를 마치자 거듭 동지중추부사로 제수되고 세
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직하게 하였다. 하정사 (賀正使)가 되어 표문을 지니고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선성(先聖)과 선사(先師)를 제향할 때 모두 진설하는 탁자를
설치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땅에 자리만 깔고 제전을 올리는 것이 실상 존경하는 뜻에 위배되니
중국의 제도에 의거해 준행 할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신해년(辛亥年1491성종22)에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진하여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 교서에 이
르기를 “효우(孝友)로 향리를 감화시킨 것이 하나 둘 로 헤아릴 수 없고, 성명(聲名)이 진신(搢神)
을 감동시킨 것이 40년이었다. 다만 부모를 사랑하는 정성으로 여러 번 군(郡)등의 외직을 기원하
고 주달을 올렸다. 행실이 안자(顔子)와 증자(曾子)처럼 독실하여 사람들은 그 부모 형제의 말에
이간하지 않았고 치적은 공수(龔遂)와 황패(黃覇)보다 월등하여 백성은 탄식과 시름과 원한의 괴
로움이 없었다”. 하였으니, 이는 실적이다.
돌아오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제수되고 계축년(癸丑年1493.成宗24)에 특별히 자헌대부(資
憲大夫)에 올라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자 국가의 제도에 따라 삼대(三代)를 추증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제수되고 동지성균관(同知成均館), 도총부도총관(都摠府都
摠管), 지의금부춘추관사(知義禁府春秋館事)를 겸직하였으며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수에도 참
여하였다.
무오년(戊午年1496.燕山4) 여름에 사초(史草)에 관한 일로 파직되었다가 겨을에 다시 동지중추부
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한성판윤에 제수되고 경신년(庚申年1500.연산4)에 연로함을 필계로 벼슬에서 물러나고
자 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형조판서로 옮기게 하였다. 원래 왕세자의 조복이 신하들과 같았
는데, 공이 세자의 의복이 등급이 없이 귀한 이가 귀한 이를 귀히 여기는 의를 잃었다고 건의해 마
침내 칠량원유관(七梁遠遊冠) 제도를 정하였다. 다시 우참찬을 제수하고 특별히 정헌대부(正憲大
夫)에 올랐다. 계해년(癸亥年1503.연산9)에 숭정대부(崇政大夫)를 가자하고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시키니, 공은 분수에 넘친다고 고사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해 오 월에 병을 얻어 24일 기축일(己丑日)에 병이 위독하자 부인과 여러 아들이 소리를 내지 못
하고 우니 공이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학문이 있으면서 어찌 아낙네나 어린아이들처
럼 어지러이 슬퍼하느냐?” 하고 드디어 일어나 앉아 관대(冠帶)를 가져오라 하여 손수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유연히 돌아가니, 향년(享年)73세였다. 부고(訃告)가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이틀동안
조회를 철폐하고 증부(贈賻)가 상례를 넘었으며,시호(諡號)를 문효라 내렸다. 10월 초 3일에 남원
산동리(山洞里 ) 임좌(壬坐) 병향(丙向)의 원(原)에 장사를 지내니 바로 선영(先塋)의 아래이다.
부인박씨(朴氏)는 공의 직위에[ 따라 정경부인(貞敬夫人) 에 봉해졌다. 그의 선대는 죽산인(竹山
人)이니 바로 신라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대대로 한양(漢陽)에서 살았다. 판한성부사(判漢城
府使)로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된 박영충(朴永忠)이 증조이고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의정부 좌의정
에 증직된 박고(朴翶)는 할아버지이다. 고(考) 문헌공(文憲公)은 여러조정을 섬기며 좌익익대공신
(佐翼翊戴公臣)의 훈호를 받았으며 벼슬은 의정부 영의정이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이다. 군기
시직장(軍器寺直長) 우승경(禹承卿)의 딸에게 장가들어 경술년(庚戌年1430.세종12) 12월 9일(乙
巳)에 부인을 낳았다.
부인은 천성이 곧고 진실하고 효성스럽고 순하니 문헌공이 보통 사람의 배우자가 아니라고 하여
상대를 골라 윤씨 가문으로 시집을 보냈다. 문헌공이 병이 위중하자 변을 맛보아 길흉을 징험하였
고, 시부모를 섬기어 아침 저녁으로 문안드리는 예를 날마다 폐하지 아니하였고, 맛있는 음식을 제
공하는 예도 반드시 손수 만들어 올렸다. 시어머니가 병환이 들자 손수 더러운 그릇을 만지고 하인
들에게 마끼지 않았고 공을 위하여 의복과 음식을 만들 때도 지극히 깨끗하고 아름답게 하니 공이
말하기를, 사군자(四君子)가 마땅히 검소함을 숭상해야 하는 법인데 왜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만을 일삼는가?“ 하며, 극력 말리자 부인이 말하기를 “나는 아내 된 직책을 다할 뿐이지 어찌 감
히 호사를 부리겠습니까?” 하였다. 친정에 두 여동생이 있었는데 가정이 빈곤하자 매번 자기 옷을
벗어 입혔다. 한 아우가 먼저 죽자 수의와 이불을 갖추어 자제를 보내어 염습하고 초빈하게 하였다.
그 선대를 제사지낼 때는 공이 자제들을 거느리고 밖에서 재계를 하면 부인은 여러 며느리를 거느
리고 안에서 삼일동안 재계하며 찬수와 제기를 반드시 손수 만들고 씻고 삶았다. 살아있는 분을 봉
양하고 돌아가신 조상을 섬기는 데 일체 공의 뜻에 순응하고 어김이 없었다. 공이 돌아갈 때에 부
인의 나이가 74세였는데 호곡하여 오랫동안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으며, 여러날 미음과 죽도
마시지 안고 상례를 준수하는데 예절이 지나쳐서 밤낮으로 슬피 울고 초상에서 담제에 이르기까
지 손수 제물을 올렸으며 평소의 제향에도 도한 공이 생시와 같이 하였으며 공의 기일을 만나면슬
퍼하고 사모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였다.
매양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속히 죽어 공을 따르는 것이 나의 소원이니, 녀희들을 위해
구차하게 내 삶을 연장하여 여기에 이른 것이다. 내가 죽으면 공의 묘에 합장하여 부모가 사생 동
거하는 소원을 이루도록 하여 달라?“ 하였다. 그리고 또 경계하기를,”우리집안이 효제(孝悌)에 돈
독하고 제사를 공경히 하는 것으로 대대로 전해 가법을 삼았음은 사람마다 다 아는바이다. 너희들
은 우리 집안의 가풍을 대대로 지켜 날마다 조심하고 무너뜨림이 없게 하라.“ 하였다.
정덕(正德) 신미년(辛未年1511.중종6)에 아들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윤 지형이(尹止衡)
이 노모 봉양하기를 빌며 사직하기를 청원하자 임금이 명하여 가까운 고을 수령을 가려서 산음현
감(山陰縣監)을 제수하니, 부인이 임소로 따라갔다. 공이 돌아가고 10년이 지난 임신년(壬申年
1512,중종7) 5월 초하루 갑진일(甲辰日)에 병을 얻어 관아에서 돌아가니, 향년83세였다. 아들들이
유훈을 받들어 예문(禮文)의 부부동혈(夫婦同穴) 합장하는 의(義)와 주자(朱子)의 “합장에는 동쪽
을 쓴다”.는 말을 따라 이해 9월 초이일(癸酉日)에 공과 함께 같은 혈에 합장하여 한 무덤이 되었다.
아! 살아서 분별이 있었고,죽어서는 합장하여 편안한 채백(體魄)이 같이 예찬을 받으리니 아름다운
일이다. 공은 천품이 단정하고 진중하여 말이 적고 효우의 정성이 젊었을 때부터 독실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부모를 모시는 여가에 몸소 산에서 사냥하고 물에서 낚시질하여 반찬을 만들어 조석으
로 올릴 때 반드시 부인과 함께 친히 올렸다. 반찬이 없을 때에는 자제를 보내 사냥하게 했는데 잡
지 못하면 문득 몸소 길을 나서 몇 마리 새를 잡아오기를 여러 차례 하니 사람들은 하늘이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매번 좋은 경치나 생일 명절을 만나면 반드시 친척을 많이 모이게 하고 축수하는 술잔을 드렸다.
일찍이 다음과 같은 노래 한 곡을 지었다. “북쪽에는 대둔산 높은 고개가 있고, 남쪽에는 지리산이
있도다. 원컨데 두 산의 수를 빌려다가 만년토록 어머님을 모시고 지고 ”[北有屯山領. 南有智異山.
願借兩山壽. 萬歲奉慈顔]“ 이날이면 머저 친히 노래하고 이어서 일어나 춤을 추며 무릇 어버이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비록 아이의 재롱이라고 하더라도 하지 않음이 없었다.
상사를 만나면 애통하고 정성을 다하여 제전을 예로써 하고 평상시에는 사당에 참배하고 나가고
돌아올 때 반드시 고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전(奠)을 올리며 기제에는 반드시 곡하고 새로
운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진상하였다. 아버지가 정해년(丁亥年1407년.태종7)에 태어나서 평생 돼
지고기를 먹지 아니하였으며 친족 대하기를 돈독히 하고 친구 대접하기를 후하게 하며 시골에 살
면서는 효도. 공경. 친족간의 화목. 인척간의 도타운 정분. 남을위해 힘씀. 궁휼 여섯 가지 일로 규
약을 만들어 시행함으로써 사람들이 모두 선에 감화 되었고, 이웃 마을까지도 본받아서 실행하게
하였다.
집안에서 보통 거처할 때에도 태만하고 게으른 기색이 없었고 집안을 단속하여 화목하면서도 엄
하게 했으며 충효로 자제를 가르치고 정성과 신뢰로 사람을 대하며 공손하고 삼가는 마음을 잠시
도 잊지 않앗고 나가고 그치고 주선함에 반드시 궤범을 따랐다. 그리고 관에서 일에 임할때 정성스
럽고 공경하는 것이 자기 몸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직위가 높아질수록 마음은 더욱 겸손하였다.
아! 공이 지닌 덕행은 다른 사람이 미치기 어려움이 이와 같았으며 또 부인의 성품이 곧고 효성스
러움을 얻어 안팎이 아주 아름다워 가정교육을 잘 이루고 선을 쌓는 나머지 자손이 번성하니 이것
이 어찌 충효가 독실하면 입신양명하고 하늘로부터 복을 받고 후손에게 경사가 돌아가는 것이 아
니겠는가?
슬하에 7남1녀를 두었다. 윤계형(尹繼衡)은 진사로 풍덕군수(豊德郡守)가 되었고, 윤승형(尹承衡)
은 생원으로 순천교수(順天敎授)이고. 윤복형(尹復衡)은 생원으로 의영고봉사(義盈庫奉仕)가 되었다.
윤세형(尹世衡)은 진사이고, 윤함형(尹涵衡)은 종사랑(從仕郞)이고, 윤지형(尹止衡)은 생원으로
정묘년(정묘년1507.중종2)에 문과에 합격하여 지금 이조정랑(吏曹正郞)
이고 윤완형(尹完衡)은 장사랑(將仕郞)이다. 딸은 후릉참봉(後陵參奉) 허형(許衡)에게 출가
하였다. 윤계형. 윤복형. 윤세형. 윤완형. 은 먼저 죽었는데 윤계형은 상장군 이징(李澄)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1녀를 낳았으니. 남은 항(沆), 옥(沃)이요, 여는 이 한광(李漢光)에게 출가했다.
승형(承衡)은 서령(署令) 정지율(鄭之律)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남은 부(溥) 니
봉사요 여는 홍영원(洪永源)에게 출가하였다. 복형(復衡)은 군수 유회(柳澮)의 딸에게 장가들어 2
남 3녀을 낳으니 온(溫), 제(濟)요 장녀는 이수춘(李壽春)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김경(金鏡)에게 출
가하고 나머지는 어리다. 세형(世衡)은 부사 권계형(權啓衡)의 따님에게 장가둘어 1남 1녀를 낳으
니 남은 순(洵)인데 생원이요 여는 정세량(丁世良)에게 출가하였다. 함형(涵衡)은 현감 신간(申澗)
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지형(止衡)은 판관 이연(李演)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2녀을 낳으니 남
은 충(沖)과 융(瀜)이요, 여는 신홍유(愼弘猷)에게 출가하고 나머지는 어리다. 완형(完衡)은 상장 이
종호(李鍾豪)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2녀를 두었고 남은 수(洙)요 나머지는 어리다. 허형(許衡)은
4남2녀를 낳았으니 남은 안국(安國)인데 생원으로 갑자년(甲子年1504.연산4)에 문과에 올라 지금
내자판관(內資判官)이 되고 다음은 안세(安世), 안방(安邦), 안민(安民)이요, 장녀는 겸사복(兼司僕)
유원(柳源)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생원 박항(朴恒)에게 출가하였다. 내외 자손이 모두 51명이다.
장사지낸 지 몇 해 만에 아들들이 신도(神道) 에 비를 새우고자 하여 나에게 와서 명을 청하였다.
아! 공같은 이는 몸가짐도 단정하고 이루어놓은 업적도 있으며 수복(壽福)도 있고 후손도 있다. 세
상에 이름을 떨친 분이니 어찌 후세에 알릴만한 글월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쓴다.
근본이 수립됨에 효도하는 생각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정성이 지극함에 하늘이 바로 좋음을 내려주도다.
가르침이 집안에서 이루어져 충성이 나라로 옮기었도다.
경공하고 독실하여 행동은 규칙이 있었고 풍속을 도탑게 하는 규약을 세우니
시골이 선행으로 교화되었도다.
행정은 의지할 데 없는 자에게 혜택주기를 우선하니
주민들은 곤궁함을 모면했도다.
재상으로 명성을 드날렸고 의정부에서 섭리를 도왔도다.
장수함으로 보답하였으니 이게 바로 하늘의 도움이라.
선(善)이란 전해지기 마련이니 돌에다 새김을 어찌 나중하랴.
내말이 속임이 나니니 영원히 없어지지 않으리라.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겸령경연사감춘추관사홍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 신용개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