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감동먹인 단석3리(거단)버스정류장
원주발 송치행 첫 버스 기다리느라 새벽의 1시간 반여를 떨었다.
겨울나그네가 감수해야 하는 문제점이다.
그래도 어제 걸었던 길을 차편으로 복기해 본 셈이다.
도계(江原과 京畿), 시군계(原州와 楊平), 면계(地正과 楊東), 리계
(安昌과 三山)가 되는 송치(小松峙) 고개마루에 도착했다.
소송치는 대송치를 전제로 한 이름이다.
어제 안창리 주민들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대송치가 따로 있었고
송치가 굉장히 높고 험한 고개로 인식되어 있는 듯 했다.
걸어서 오를 것이라는 내 뜻을 듣고는 고개를 저었으니까.
하긴, 많이 깎아내린 현재도 꽤 높게 느껴지는데 예전엔 더했겠지.
송치
지금은 없지만 옛날에는 소나무정자가 있어서 솔고개라 했단다.
한양길 나그네와 양동과 문막의 5일장을 겨냥한 상인들의 애환이
뿌려졌던 고개다.
양 장날이 같은 날(3,8일)이라 늘 어느 한 쪽은 포기해야 했겠다.
하지만, 걸음품 팔던 소로가 포장 차도로 업그레이드됐을 뿐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지정(능촌)과 양동을 넘나드는 고개다.
여유로운 곡선을 그리는 완만한 내리막 88번도로는 삼산리, 양동
레포츠공원을 지나 단석사거리 교차로에서 직진한다.
햇살이 두터워질 때까지 잠시 또 주유소(교차로옆 S.oil양동농협)
신세를 져야 했다.
기름파는 집의 사무실 난방사정만은 100% 믿을 만한 곳이니까.
태양이 88번도로에 난방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잠시 여주땅(北內面)을 밟게 되는 서화고개 직전의 단석3리(거단)
버스정류장이 늙은 길손에게 감동의 펀치를 날렸다.
8도의 길을 섭렵하는 동안 면역(포기상태)이 된 나를 감동먹게 한
정류장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길래?
지방자치제의 산물로 버스정류장도 각기 특색있게 만들기는 해도
관리는 하나같이 엉망진창이다.
의자에 앉느니 맨땅이 낫다.
비와 햇볕을 피하느니 차라리 맞고 쬐는 쪽이 나을 것이다.
쓰레기 하치장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혈세를 들여 만들면 뭣하나.
거단리와 송석리의 병합에 따른 합성 지명이라는 단석리(丹石)의
거단정류장은 특색은 커녕 평범하기 그지없는 벽돌 정류장이다.
그러나 벽에는 정.부관리책임자의 성명과 연락처(휴대폰)를 담은
작은 안내판과 청소일지, 버스시간표가 걸려 있을 뿐 깔끔하다.
어찌나 깨끗한지 지저분한 내 배낭을 올려놓기가 민망한 의자다.
금방 청소한 듯 오물 하나 없고 쓰레기통도 깨끗이 비어있다.
정류장을 밝히는 불은 소형 태양열 발전기로 해결한다.
여기는 서울 또는 수도권이 아니고 강원도 접경 경기도 산골이다.
그러니 감동먹을 수 밖에.
단석3리(거단)정류장
단석리의 으뜸마을이라는 거단리(巨丹) 거민들의 정결한 성정(性
情)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태양고추의 마을'이라는데 이 마을 고추야 말로 맘놓고
사도 되는 100% 태양초일 것이다.
앉아서 빵을 먹을 때 부스러기 떨어질까봐 조심할 정도로 깨끗한,
정남향 긴 간이의자를 떠나기가 싫을 만큼 맘에 들었다.
마냥 상쾌한 기분이 되어 고개 넘어 서원리로 내려갔다.
전적으로 거단마을 여러분 덕이다.
고산자가 빠뜨였는가
평해대로는 여주군 북내면(北內)을 잠시 거쳐가야 한다.
본래 지평현 상동지역(現양동면)이었으므로 양평땅이어야 하는데
1895년에 여주군으로 되었다는 것.
1914년에는 서화리와 원곡리를 병합, 서원리(西院里)라 했단다.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농촌인 서화리의 도로변에 근사한 2층집이
'녹색농촌체험마을'간판을 달고 서있다.
언제, 무엇을, 어떻게 체험하는지 궁금했으나 그림의 떡인가.
온통 물입(勿入) 표시(자물쇠)뿐 안내문, 안내인이 없으니 도대체
누구를 위해 지은 집이란 말인가.
서화리 녹색농촌체험장
서화를 지나면 원곡이다.
원골(院谷)에서 하얀 승용차를 세차하고 있는 노파와 마주쳤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우리는 이심전심했는가.
젊어서는 참 고왔을 법한 아담한 노파가 이 무슨 고생인가.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그녀는 저 멋쟁이 할아버지가 무슨
사연이 있기에 무거운 배낭을 멘 나그네가 되었을까 생각했다나.
서로 보는 순간 들었던 생각들을 꺼내고 보니 이러했다.
영감님 출타하려 하는데 차가 너무 지저분해서 그랬을 뿐이란다.
내 사연을 들은 노파도 동정심을 철회했을 것이다.
근데, 원골이 예사로운 이름이 아니잖은가.
고산자가 어쩌다 빠뜨렸는가.
원곡, 원촌, 원터 등 여럿으로 불리는데 사연이 있단다.
이 곳이 원주군 지내면 땅이던 시절, 원주의 원(員)이 한양에 갔다
돌아올 때 여기쯤에서 저물어 유(留)하곤 하여 붙여졌다니까.
초기에는 공무출장중인 길손들의 유숙처(관급)였으나 이조말에는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되었다는데.
원골
서원리와 주암리는 제법 넓은 평야가 확보된 농촌마을이다.
밤마다 선녀가 목욕하러 내려왔다 하여 옥녀봉이라 한다는 산아래
마을들이 이 옥녀봉 소에서 넘치게 흐르는 물로 농사를 지었다나.
주암리에서 지평면 일신리에 듦으로서 다시 양평군 땅이 됐다.
일신3, 2리를 지나 무왕2리에서 구둔, 석불 두 역 중간쯤의 철로를
가로질러 만만찮은 전양현(前楊峴)을 넘으면 망미리다.
옛길은 주암에서 88번을 떠나 345번으로 망미삼거리까지 간다.
이후로는 용문의 6번국도를 만날 때까지 341번지방도가 된다.
무왕2리(상)와 전양현(하)
평해대로 스케치8(지평)
석불역부터는 지평까지 중앙선철도와 거의 동행한다.
석불역 지근 도로변에 시선을 끄는'정경자미술전시관'이 있다.
이 평해대로에서 하슬라아트월드, 대관령박물관을 이미 거쳐왔다.
이즈음에는 개인의 문화 예술 공간들이 도시를 과감하게 탈출하는
경향이 있다.
협소하고 복잡한 도심보다는 친자연(親自然)의 넓은 공간 확보가
용이한데다 도로사정이 좋아서 그럴 것이다.
대중교통을 중심으로 한 접근성이 위치선정의 중요한 조건이었던
예전과 달리 자가용시대에 맞춘 변화일 것이다.
요식업소까지도 이같은 자동차문화 덕에 넓은 교외로 나간다.
월산지(池) 지평낚시터에 태공들이 만원이다.
원수같다(웬스wednesday)는 요일의 저 태공들 신분은?
언뜻 보기에도 나같은 늙은이보다는 거개가 젊은이들인데 모두가
혹사당한 심신에 잠시 휴식을 주는 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산에도 같은 현상이다.
다량의 일손을 수입해야 하는데도 평일의 알피니스트와 태공들이
늘어만 가는 이 기괴한 수수께끼는 과연 풀 길이 없는가.
지평 다운타운이 바로 코앞인데도, 어제 통화했을 때 오늘 지평역
으로 마중나오겠다던 J 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으니 어쩐다?
다소 여유로운 시간을 지평4리노인정 갑장 영감의 도움으로 지평
향교에 들르는데 보냈다.
지평(砥平)은 향교가 말해주듯 군(郡)이었다.
양근군(楊根)과 병합해 양평군(楊平)이 되기 이전에는.
이중환은"지평과 양평은..어지럽게 솟은 산과 깊은 골로 이루어져
모두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 (砥平楊根.. 亂山深峽皆不宜居)고
했는데(擇理志) 과연 그런가?
(내가 8도를 고루 섭렵중인 이유중 하나가 이 물음표 때문이다)
지평향교(상), 을미의병기념비(중), 6. 25유엔군충혼비(하)
향교 옆의 을미의병기념비와 6. 25 충혼비도 살폈다.
한데, 안창리가 효시라는 안창리 의병봉기기념탑과 양평(지평)이
최초발상지라는 기념비가 맞선다면 고증이 필요한 것 아닌가.
안창리와 지평 간은 그리 먼거리가 아니므로 봉기를 앞두고 상호
교신을 충분히 했을 법 한데.
지자체들 간에 유사한 주장들이 비일비재다.
지평역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뉘엿거렸다.
함백과 태백의 해넘이, 해맞이 일정을 마치고 귀하하던 연전에도
그는 여기 지평역에서 날 기다린 적이 있다.
전화를 해볼까?
굳이 '엎드려 절받기'를 해야 하나?
약속이 애당초 없었던 것으로 접으면 되는 것을 왜?.
우여곡절 끝에 연수리 용문산허브찜질방에 여장을 풀었다.
그에게서는 끝내 아무 연락이 없었다.
이 식언(食言)에 관해서는 그는 훗날에도 침묵모드로 일관했다.
저번에 용문산을 함께 오를 때도 유추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
까마득히 잊었던가 보다.
용문산 허브찜질방
여러 이색적인 체험을 맛보게 되는 찜질방이지만 평일인 탓인가.
밤중에 도착했기 때문에 다들 찜질을 마치고 돌아간 후라 그런가.
드넓은 방을 독점하는 것이 민망했는데 맛사지 전문가(?)는 낙남
정맥 종주때 마산의 택시기사와 같은 평가를 했다.
노인의 몸이라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유연하단다.
설영, 빈 말이라 해도 듣기 싫진 않았다.
아첨이 그래서 예로부터 위력을 발휘해 오는 것인가.
양동에서 느끼고 국수에서 확인하다
오늘은 양평에서 끊고 귀경해야 한다.
늙은 나를 정점으로 하는 4수(水) 모임이 부득이 연기된 날이므로
꼭 참석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오늘 치를 짧게 잡았는데도 늑장부릴 만큼 여유로웠다.
느긋이 어제 중지한 지평역으로 다시 갔다.
그루고개를 넘고 신내천(화전교) 건너 용문을 관통하여 나아갔다.
까닭은 모르지만 거무내(黑川)가 신내천으로 바뀌었나 보다.
바야흐로 옛 흑천점(店) 일대이려니 살피며 다문교를 건너가는데
한 음식점 간판이 호기로운 느낌을 풍겼다.
기대한 만큼만 맛있어도 충분한데 <생각보다맛있는집>이라고?
자신만만한 주 메뉴(main menu)가 사철탕인데 감미로운 클래식
(classic)이 안팎으로 흐르는 집이다.
늘 아침겸 점심인 내 평가는 애매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장이 반찬이라 잖은가.
먹은 것 없이 한나절을 걷고난 이 때쯤이면 맛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만큼 아무 것이나 다 맛있으니까.
그래서, 음식보다 친절이 생각보다 나은 집이라고 기억될 것이다.
생각보다맛있는집(1), 흑천점(2), 흑천(3), 백현(잣고개4), 황골(5)
내(川)의 바닥돌이 검은색이라 물빛이 검게 보인다 해서 거무내인
냇가 마을이 옛 흑천점이 있던 흑천마을이다.
개울의 양쪽에 '파라다이스 청소년수련원'과 '양평 파라다이스'가
대각선을 이루고 있다.
흑천점에서 5리 어간으로 잣나무가 많다 해서 일명 잣고개인 백현
(栢峴)을 넘어 황골(大谷:대흥1리)에서는 잠시 6번국도를 탔다.
장날이라 제법 붐비는 장터를 지나 관문삼거리와 양근리사거리를
한참 배회했다.
관아터라는 양일중.고등학교 일대와 객사터라는 양근대교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소득 없이 일정을 마감해야 했다.
양평장
중앙선 열차보다 운행 횟수가 많을 뿐더러 무료인 전철을 타려고
급히 국수역으로 갔으나 간발의 차로 실패했다.
막 출발하는 열차를 멍청히 바라보는데 한 중년이 동병상련인가.
나처럼 열차를 놓친 그가 자기 차로 함께 가쟀다.
왠지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는 이미 날 알아봤단다.
어제 아침에 길을 물었을 때 종이에 약도까지 그려가며 가르쳐 준
양동의 바로 그 부동산중개사다.
서울이 집인 그의 통근 방식은 양동~ 국수 승용차, 국수~ 서울은
전철인데 오늘만은 나처럼 특별한 모임이 있는 듯 했다.
무뚝뚝한 외모에 비해 퍽 자상한 성품이라는 양동의 느낌을 국수
에서 재확인하게 될 줄이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