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문이란 벼슬을 한자가 죽은후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비문을 세겨 묘지에 묻어두는 비석으로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
선무랑공파 카페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제가 본 묘지문은 복경공입니다. 또 다른 복공공 묘지문도 있었다고 합니다.
<형부원외랑 復公(복공)公 묘소>
▷족보에는 福公(복공)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誌石(지석)에 復公(복공)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지석의 기록을 따른다
3세 刑部員外郞 復公(복공)公 묘소 역시 오래 동안 실전 상태였다.
순조 31년(1831) 겨울 황해도 장단 반룡산 아래 사는 尹(윤) 진사가 파주에 사는 26세 鎭聃(진담-守夢公의 6대 장손)公을 찾아와 담소 끝에 해평윤씨가 점거하고 있는 반룡산에서 지석함이 나왔는데 고려시대에는 반룡산이 鄭氏 (정씨)의 선산이었던 것 같다는 말이 나왔다.
이튿날 鎭聃(진담)公이 그곳에 가서 석함의 묘지문을 보니 3세 復公 (복공)公의 지석이 분명하므로 각처에 사는 종인에게 통지하여 이듬해 2월초 모이기로 하였다.
순조 32년(1832) 2월초 충주 종인 學盡(학진) 璜錫(황석) 兩公이 왔으므로 鎭聃(진담)公과 같이 3인이 모여 묘소를 개봉축하고 향사하였으며 위토를 마련하여 묘직이를 정하여 수호케 하니 공이 졸한 후 698년 만에 실전 되었던 묘소를 되찾게 된 것이다.
해평윤씨 문중들은 발설한 윤진사를 쫒아내고 인근 주민들에게 산역을 못하게 하는 방해공작으로 개성에서 인부를 구하여 오는 등 갖은 횡포를 막아가며 묘소를 완전히 회복한 세분의 노고가 지대하였다.현재는 휴전선 이북에 있으므로 성묘조차 불가능한 상태이다.
<復卿(복경)公 復儒(복유)公 묘소>
▷족보에는 福卿(복경)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묘지문에 復卿(복경)으로 기록되어 묘지문의 기록을 따랐으며 3형제중 두 분의 예에 따라 福儒 (복유)公도 復儒(복유)로 기록하였다.
貞簡公의 차자이며 대제학공파의 파조이신 復卿(복경)公의 묘소는 월라산 貞簡公 묘 아래 子坐(자좌)에 있다는 기록만이 있을 뿐 현재 어느 묘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월라산에는 최상단에 봉분이 있고 계속하여 3좌의 봉분이 있는데 모두 子坐(자좌) 묘이다.
따라서 어느 봉분이 貞簡公의 묘소인지 분명치 않아 별도로 墓壇碑 (묘단비)를 세워 향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復卿公의 묘소도 復儒公의 묘소도 그중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확증을 얻지 못하여 현재 享祀(향사)도 지내지 못하고 있다.
대종회에서는 이를 죄송히 여기는 종인들의 중론을 모아 1978년 추향시 3世 3位분의 永慕壇碑(영모단비)를 貞簡公 墓壇碑(묘단비) 아래에 세워 향사하기로 의결하고 각파에서 30만원씩 모금하여 총150만원의 예산으로 永慕壇碑(영모단비)를 수립하고 향사하게 되었다.
29世 用煥(용환) 찬(撰-글을 지음)
29世 載興(재흥) 서(書-글을 세김)
초계정씨대종회 수건(修建-비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