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윤영익이 아들 결혼식장 피로연에 마주 앉아 친구들과 점심할 때, 자네의 많이 늙은 모습을 보면서 친구들이 그래도 좋아한 술이라고 권했더니 손사래치며 거절하여 이유를 묻자 ‘이제 내 몸 생각해서 끊기로 했네’ 라고 말한 일이 엊그젠데 갑작스러운 자네의 부고 소식에 어안이 벙벙하다네.
고등학교 시절 자네와 내가 한 학급에 배정받아 담임 선생님이 개학 첫날 ‘반장 누가 할래?’ 엉뚱한 질문의 어리둥절한 상황일 때에 자네 영훈이가 번쩍 손들고 ‘제가 하겠습니다.’ 해서 학급 반장을 했던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네.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학창 시절에 온 캠퍼스를 누비며 자네의 고고한 철학과 언변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을 시간을 뒤로하고 서로의 삶의 길을 찾아 나와 자네는 상당기간 서로 헤어져 있었지.
그리고 그 뒤, 자네와의 재회가 당시 고려고에 근무했던 고석길을 통해서였는데 하필 해남경찰서 유치장이었음을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하네. 기억하기로 진도 지산중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근무 중, 밤길 음주운전 사건으로 그 더운 여름날 유치장에 놓인 처지의 시기, 위로차 찾아가는 석길이가 동행하자 권유하길래 따라 나선 자리였네.
그 뒤 여러 가지 법적 절차에 따라 교직을 그만두고, 광주시내 학원가에서 제자들을 길러내었고, 고령이 되어가면서 그마저도 시원찮아 여러 직업들을 전전한 것으로 알고 있네. 한 번은 교통사고 비슷한 경우로 머리를 다쳐 급히 신석이 병원에 연락하여 그곳에서 병원생활도 했더랬지.
살아가는 일과 짐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몰라도 항상 같이 붙어 다녔던 각시를 지금부터 7년 전에 먼저 저 세상에 보내더니 자네의 삶이 두 배 더 무거워졌던 것 같았어.
반가운 일도 있었던 것이 자네가 가끔 자랑했던 큰 딸 진아가 전남대 사범대에 들어가 졸업하고 바로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바로 해남에 직장 잡았다고 좋아한 일도 있었지.
최근에 광주 총무 홍영재가 전하길, 아버님께 물려받은 풍향동 주택에 아들이 이사 오기까지 줄곧 그곳에서 머물러 있었다고 얘기를 들었네. 늙은 노인네가 혼자 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데 각시도 없이 가끔 뿌리치지도 못하는 술의 유혹도 있었겠는데 아슬한 살얼음판 독거생활이 그렇게 빨리 가는 길이었음을 누가 알았겠는가?
친구여, 자네와의 이별이 우리에겐 더 큰 교훈으로 삼으려네. 누군가 함께 했던 우리의 찬란한 추억들도 이제 단풍처럼 시들어 가는데 늙은 노인네의 껄껄껄 타령(좀 더 사랑할걸, 좀 더 즐길걸, 좀 더 베풀걸)을 되뇔 시간도 부족하다는 것을 새삼 알아차리고, 앞으로 남은 시간 더욱 힘차게 살아갈 것을 다짐해보네.
영훈이, 자네에게 그토록 무거웠던 삶의 짐을 이제 편히 내려놓게나, 푹 쉬게, 잘 가시게!
- 2020년 6월 첫날, 친구 김영호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