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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주목한 '천재 장애인 조각가' 이원형
"늦은 나이에 다시 미술을 시작하려니 집중이 필요했어요. '내가 피카소나 마티스 같은 색(色) 감각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지만 미켈란젤로나 로댕보다는 더 잘 만들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선일보 문갑식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천재 조각가 이원형(李源亨·64)이 한 말이다.
조각가라면서 외경심을 가진 작가는 피카소나 마티스란다. 예술고를 나온 것도 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대학시절, 그것도 복학생 때부터 취미로 데생을 시작했다고 늦은 나이에 조각으로 돌아섰다는 그는 미켈란젤로나 로댕보다는 더 잘 만들 수 있다고 호언하는 자칭(?) 천재조각가다. 그러나 그의 말은 반어법에 가깝다.
"제가 조각에서 좋아하는 작가가 그 둘입니다. (다비드상에 대해 묻자) 그건 그리 생명력이 있는 조각은 아닙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은 오히려 시스틴 성당 벽화에서 찾아야 하고요. 로댕은 '생각하는 사람'이 유명하지만 진짜 걸작은 '칼레의 사람들'이라는 조각이지요."
이원형은 선천성 소아마비 환자였다. 남보다 가늘고 짧은 왼쪽 다리(소아마비)로 태어난 그는 세월의 무게에 짓눌리면서 엉덩이와 허리까지 뒤둥그러지고 뼈는 틀어졌으며, 오른쪽 날갯죽지 뼈는 낙타 육봉(肉峰)처럼 솟아올랐다. 짧고 앙상한 한쪽 다리, 굽은 등의 선천적 장애인에 '걸레처럼 변한 몸'이지만 그렇기에 그는 몸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좌익(左翼) 아버지는 1·4 후퇴 때 아내와 5남매를 두고 북쪽으로 내뺐다. 다섯 살 때 헤어진 그의 기억에는 없었지만, 해방 전 증권을 했고 함북 청진에서 정어리기름 빼는 공장을 운영했으며, 6·25 전에 신당동 우체국장을 지냈다는 전혀 좌익스럽지 않은 그의 아버지가 월북을 한 것 또한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 다섯 살 때, 가족을 버리고 월북한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로 인해 그는 '빨갱이 가족'으로 몰린 이골이 난 삶을 살아야 했다. '빨갱이 가족'에 이골이 난 어머니는 미군 건축가와 결혼했다.
신이 준 그런 몸에다 남사스런 가족사까지, 그런 게 다 그의 재능까지 옭아맸다. 서울중학 입시에서 필기에 붙고도 신체검사 때문에 낙방했고, 서울의대 입시에서 똑같은 꼴을 당했다. 신이 버리고 가족조차 잃어버린 사람은 세상도 놔두지를 못하나 보다. 그에겐 신(神)이 없었다. 그 때 그는 희망을 버렸다. 무엇보다도 그런 사람은 스스로도 명줄을 놓기 쉽다는데, 그를 다잡은 것은 꿈이었던 것 같다.
외대 영어과에 다니기까지 그는 사실 미술과는 무관해보였지만, 복학한 뒤 인생관이 바뀌었다. 친구의 권유로 함께 다니기 시작한 데생학원으로부터 미술과 인연을 맺었다는 그는 외대에 미술부 처음 미술부를 만들고 국전(國展)에 출품까지 했다. '인터코스(Intercourse)'라는 전위적인 작품이었는데, 제목을 잘못 달아 떨어졌다는 에피소드를 지금도 말하고 있다(인터코스라는 단어가 예전엔 '섹스'와 동의어로 쓰였다.)
그때 미술에 푹 빠진 그는 졸업후 페퍼다인대로 유학을 간다. 회화와 조작을 함께 배운 그는 회화를 하려 했는데 이상하게 그림은 한 점도 안 팔리는데 조작은 만드는 족족 팔려나가는 바람에 조작을 하게 됐다고 한다.
유학 중간에 1976년 잠시 서울에 들러 결혼을 했다. "1976년에 잠시 서울에 들어와 결혼을 했어요. 얼마 뒤 아내가 미국으로 따라왔는데 제가 살던 집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엉망이었어요. 밤에 문을 열러 나가면 발밑에서 버석버석하는 바퀴벌레 밟히는 소리가 들렸어요. 저녁만 되면 바퀴벌레들이 줄 지어 집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매일 봤을 정도니까요. 게다가 미술 한답시고 제가 보헤미안 같은 생활을 했어요. 10여명의 미국 친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집으로 쳐들어왔어요. 아내가 자다보면 옆에 남모르는 남자들이 술에 취해 누워있을 정도니 얼마나 견디기가 힘들었겠어요. 아무 때나 냉장고도 다 뒤지고, 대마초 피우고. 그런 일들이 겹쳐 캐나다로 떠날 생각을 한 겁니다."
다시 시작한 유학생활, 돈이 궁했던 그는 밴쿠버의 브리티시 컬럼비아대(UBC) 상과대학원에 입학했고 공인회계사가 되었다. UBC를 수석 졸업한 뒤 딜로이트라는 회계법인에서 3년간 인턴을 한 뒤 토론토로 가 회계법인을 만들었다. 낮에는 회계사무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주경야독인지 주경야경(투잡스)인지 모를 일이지만 가정생활은 엉망이 됐고, 그게 못 마땅한 아내는 교회생활에 열심이었는데 그게 못 마땅했다는 그는 아내와 헤어졌다고 한다.
2002년 57세의 나이로 존슨스테이트 칼리지 대학원에 입학했는데, 1년에 두달만 합숙하면서 작업하고 월 1회 세미나에만 참석하면 되는 조건이 돈 벌면서 공부하기엔 딱이었다고 한다. 그때 2주 동안 내가 왜 미술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정말 깊은 고민을 한 끝에 '하지 않으면 안되니까'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전 참선(參禪)을 합니다. 마음을 정돈하고 잡념을 버린 후엔 마음을 비우려는 그 생각 자체까지 버립니다. 보통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작업하는데 그 시간 동안 흐름을 깨트리지 않지요."(이원형이 말하는 '만남의 순간')"
한국에서 관심을 못 받던 조각가 이원형의 작품을 주목한 곳은 영국이다. 존슨스테이트 칼리지에 다닐 때부터 잘 팔리긴 했지만 그의 조각 작품이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건 2007년이었다. 뉴욕에서 열린 아트 엑스포에 출품한 적이 있는데 영국의 딜러와 미국 코네티컷주에 있는 딜러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낙네가 시골 뒷간에서 용변 보는 도발적 형상에 매료된 런던 조각공원 'The Pride of the Valley'에서 작품 두 점을 영구보존 조건으로 사간 뒤 그의 작품은 지금 미국, 캐나다, 영국, 싱가포르, 멕시코, 베트남의 조각공원과 대학에서 볼 수 있다. 다음달 30일에는 '대한민국 국민' 명의로 보내는 콩고 독립 50주년 기념 조각이 그의 손으로 완성돼 대통령궁 앞에 설치된다.
그의 작품 경향은 어떤가? 神이 그에게 준 몸은 남달랐고 세월 또한 그의 편은 아니었지만, 그 질곡이 다듬어 놓은 작품의 경향은 남달랐다. 이원형이 만들어낸 형상은 멈춰있으나 역동적이다. 거칠고 투박한 근육과 얼굴 표정에는 형상을 깨고 뻗어 나올 것 같은 욕망이 섬세하게 흐른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외모는 19세기 꼽추화가 로트렉이다. 그런데 이 일그러진 육신이 빚어낸 조각에선 로댕과 자코메티를 만날 수 있다." 소설가 최일옥의 평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우뚝우뚝 서있는 형상이 많다. 머리는 작고 대신 하반신은 우람하게 그려져 있다. "전 하체(下體)가 튼튼한 걸 좋아해요. 대신 두뇌는 그리 믿지 않습니다." 콜롬비아 상과대학원을 수석졸업까지 한 조각가치고는 과히 나쁘지 않은(?) 이원형이 말이 단순히 겸손함일까? 본인의 장애에 대한 한(恨) 같은 게 담겨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 뒷간의 아낙네(Girl at the Outhouse), 2007, 청동
그의 작품 중에는 또 시골 아낙네들을 형상화한 게 많다. "언젠가 시골에서 아이에게 젖먹이는 아낙네를 본 적이 있어요. 가슴을 드러내지만 전혀 부끄럼을 타지 않는 모습에서 강한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게 '파머스 시리즈(Farmer's series)입니다. 요즘은 '카수라' 연작(連作)을 하고 있고요."
"'카수라'는 라틴어로 '자르다'라는 의미인데 그건 제가 존슨스테이트 칼리지에서 '드루즈 미학(Deleuzean Aesthetics)'을 전공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드루즈 미학이 당시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포스트 모더니즘이 쇠퇴하면서 지금은 주류가 됐어요."
시간을 자른다는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오후 2시에 사무실에 있다 태양이 내리쬐는 밖으로 나오는 겁니다. 순간적이지만 시간 개념이 바뀌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드루즈 미학은 기존의 사상, 이론에서 탈피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 때 차이(差異)를 얘기하는데 그 차이는 '같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돈된 세상에서 벗어나면 '차이'가 '반복'되는 걸 느끼지요. 그게 핵심입니다. 작업실을 캐나다, 멕시코, 중국에 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환경이 바뀌면 새 영감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거든요."
한때는 지지리도 복이 없었던 이 사내의 손이 닿기만 하면 금속이 대합창(大合唱)을 하는 것이었다. "소품은 6500~7000달러 정도이고 1m가 조금 넘으면 1만5000달러쯤 합니다. 제일 비싼 건 1억쯤 되고. 전 다작(多作)을 해요. 1년에 50점 정도를 만드는데 청동(靑銅)은 에디션이 있잖아요. 에디션은 주물로 같은 작품을 여러 개 만들 수 있다는 뜻이지요. 보통 넘버가 10개 이하여야 예술작품으로 분류되는데 전 7개만 만듭니다. 그러니 1년에 작품 오십 개를 만들어도 실제론 350개가 나오는 셈이지요."
딜러와의 배분방식에 대해서도 그는 거침이 없다. "두 가지예요. 재료비, 운송비를 딜러가 다 부담하는 대신 50대50으로 나누거나 제가 재료비, 운송비를 내고 66대34로 나누거나. 비슷비슷합니다." 작가들을 지원하고 있는 화랑이나 갤러리가 참고할 만한 배분방식이다.
현재 그는 버몬트 아트 스튜디오 센터 이사, 캐나다 토론토 스쿨 오브 아트 이사, 네덜란드 국제조각협회 자문위원 등 다양한 직함을 가지고 있다. "버몬트 아트 스튜디오는 매월 전 세계에서 50명의 예술가들을 초청해 한 달간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면서 예술 활동을 하도록 돕는 곳인데 16명의 이사 가운데 유색(有色)인종은 저 하나입니다. 제가 조각뿐 아니라 미학 강의도 하고 다녀요. 전 세계로." 이원형은 현재 경기도 용인에 머무르면서 남과 북, 미국과 캐나다, 이제는 캐나다, 멕시코, 중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이원형의 작품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가 만들어낸 형태로부터 우리 안에서 꿈틀대는 영혼이라는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매우 서정적인 언어로 잃어버린 인간성 회복의 세계로 우릴 인도한다."(모건 프랫 인스티튜트 교수) 인적 드문 산중(山中)의 집에 놓여 있는 그의 한국 시골 아낙네들, 거기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그 비에 젖은 청동 조각들이 이원형의 원형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재료의 맥박이 시작됩니다/그의 되어감으로 꿈틀댑니다/모델과 욕망의 기계는 주위를 맴돕니다/무당의 가락에/욕구의 손은 찢고 매만집니다/작품은 터부의 벽을 잘라나갑니다." (이원형의 작가노트·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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