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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어디까지 했었죠? 곧 한 달이 다 돼 가는데 아직 시작도 못했습니다. 마하반야 이제 바라밀다심경하는 부분까지 얼추 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이제 마하반야바라밀다까지 아마 한 것 같습니다. 심경 이러면 마음 심(心) 자에 마음이라는 의미.
그리고 핵심. 요약, 핵심, 이런 의미가 아울러 있습니다. 그래서 크나큰 지혜로 깨달음의 완성에 이르는, 깨달음의 완성에 이르는 핵심을 설해놓은 가르침. 혹은 마음의 경전. 마음의 가르침. 이렇게 아울러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핵심이라고 하면 반야심경이 방대한 양이 아니라, 짧은 양인데도 불구하고 그 안에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이제 담겨있다,라는 요약의 뜻이고. 마음이라고 하면 불교에서는 이 마음자리, 이 마음, 마음이라는 표현을 하지요. 본성. 깨달음.
본성을 열반, 해탈이라는 이 자리를 마음이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는 중생심과 진여심, 이렇게 있지만 그 가운데 이제 진여심, 부처의 마음, 그것을 마음이라고 하다 보니까. 팔만대장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마음을,
고구정녕(苦口丁寧)하게 설하고 있는 오로지 마음만을 밝히고 있는 우리의 본성, 자성을 마음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본성, 자성이라는 그 마음 하나만을 밝히고 있는 것이 불교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이라는 것이, 모든 경전이, 경전의 제목에 그 경전의 의미들이 많이 담겨있는데요. 크나큰 지혜로서 바라밀다 즉, 깨달음의 완성에 이르는 마음을 밝히는 경전.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구요. 핵심을 설해놓은 경전. 이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기다리던 본문을 들어가야 되는데요. 반야심경의 첫 구절이 이제 관자재보살부터 시작을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좀 눈치를 채셨겠지만, 그 반야심경이라는 짧은 경전을 4개월에 걸쳐서 한다.
이랬을 때는 여러분들이 이제 각오를 하셔야 될 것이 빨리 진도 나가기를 바란다면 괴로운 마음이 생길 거예요. 4개월 동안 해야 되기 때문에 진도에 대한 생각은 하지 마시고. 저도 이제 어떤 경전을 하는 것은 사실 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경전을 하느냐’ ‘나는 이 경전을 옛날에 공부했으니까’ 또 ‘저 경전은 공부를 안 했으니까’ ‘들어야지’ ‘듣지 말아야지’ 뭐 이런 생각은 전혀 하실 필요 없는 것이. 저 스스로도 ‘어떤 경전을 하느냐’ 경전의 뜻에는 그렇게 큰 관심이 없다 할까요.
아니면 모든 경전이 사실은 같은 것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경전을 얘기하느냐’ 이건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그냥 하나의 말을 풀어가기 위한 하나의 재료 정도로만 이렇게 경전을 생각하시면 되겠구요.
반야심경에 보면 첫 구절이 관자재보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첫 시간에, 이제 관자재보살. 모르겠어요. 보살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고. 이제 ‘관자재’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관세음보살님을 이제 관자재보살이라고도 해석을 합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이 바른 법,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방편으로 쓰이고 있다고 했잖아요. 보살님의 이름 하나조차. 그러니까 부처님의 이름, 불명. 부처님의 명호 하나조차 이 법을 드러내는 목적으로 사용이 됩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이 아마, 다들 법명이 있으시거나, 뭐 없는 분도 계실 텐데. “법명의 뜻을 좀 해석해주세요.” 이렇게 많이 묻잖아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아, 이 법명은 나에게 이게 부족하니까 이런 걸 좀 갖추라고 하는 거구나’ 이렇게 나름대로 해석을 하시는데.
사실은 모든 법명은 법을 드러내는, 진리를 드러내는, 그런 단어들로 이렇게 조합이 되어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삼천불명호경 이래서 천불천배 이래서 부처님 명호를, 경전인데 삼천불명호경. 명호밖에, 부처님 명호가 처음 부처 끝까지 부처님 명호밖에 없어요.
이름만 쓰여있는데 그 뒤에다가 경(經)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이름만 써놨는데 이미 경(經)인 것이지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름 자체가 법을 드러내고 있는 의미를 항상 담고 있기 때문에.
언뜻 제 기억에 작년에 천수경 강의를 할 때 참제업장십이존불(懺除業障十二尊佛) 인가요? 우리 중생들 참회를 받아주고 우리 업장을 참회할 수 있도록 해주는 원력을 세운 열두 분의 부처님 명호. ‘그 명호 공부하는데 아마 몇 번에 걸쳐서 아마,
강의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언뜻 들거든요. 그처럼 부처님 명호가 또 보살님의 명호가 법을 드러내고 있는 것들로 다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법명도 다 그런 것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지요. 이제 관자재보살, 관세음보살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 가장 익숙한 그런 보살님이신데.
관자재보살 하면 첫 자가 ‘관’자가 나옵니다. 볼 관(觀) 자. 불교에선 이 ‘관’자를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거든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을 이제 ‘관’한다 그럽니다. 볼 관(觀) 자. 보는데, 우리는 내식대로 보지요.
자기식대로 해석해서 보고. 자기의 어떤 알음알이를 가지고 분별해서 보는데. 그냥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된다. 이게 이제 불교 공부의 핵심이거든요. 아마, 첫 시간에 눈귀코혀몸뜻으로 색성향미촉법을 보자마자 우리는 해석하고
왜곡하고 자기식대로 생각, 판단, 분별해놓고서 그것을 ‘옳다’라고 여긴다,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자기식대로 생각한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옳다’ ‘맞다’ 절대적으로 이렇게 딱 쥐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100% 옳다고 할 수가 없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사실은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코로 냄새 맡거나 이런 게 전부다 사실 보는 겁니다. 내가 바깥 경계, 바깥 대상을 접촉하는 것. 그것을 사실은 ‘본다’ 그래요. 그래서 눈으로 볼 때는 이제 ‘본다’
그러고 귀로 볼 때는 ‘들어 본다’ 이렇게 하지요. 또 ‘코로 냄새 맡아 본다’ ‘맛본다’ ‘감촉을 느껴본다’ ‘생각해 본다’ 이렇게 표현을 쓰는 이유가 다 보는 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들어 보고, 들어 보고 나서 그걸 해석하고, 맛보고 나서 해석하고,
감촉을 느끼고 나서 그걸 ‘어떤 느낌이야’라고 생각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익숙해져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진짜로 본다는 것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진짜로 보는 건 그럼 뭐냐?
있는 그대로를 그냥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지금 이대로를 지금 이대로 보는 것. 그런데 지금 이대로 보는 것은 너무나도 쉽고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그런데 자기식대로 해석하고 왜곡하고 판단하고 분별해서 보는 것은 사실은 너무나 어려운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어려운 길을 쫓아온 거예요. 그냥 보면 되는데 그냥 보지 않고 자기식대로 해석해서 봐야 되고. ‘저기 담긴 의미는 뭘까’ ‘저 사람이 나한테 저런 말을 하는 의미가 뭘까’ ‘저의가 뭐지’
그걸 계속해서 생각하고 따지고 판단 분별하고. 그게 옳은지 그른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맞는다고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그렇게 판단 분별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보다 보니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것이지요.
관세음보살님은 세간의 음성을 관한다. 이러거든요. 세간의 음성을 관하는 보살님. 세간이 뭐가 세간이냐면? 중생심이 세간입니다. 번뇌 망상심, 분별심이 세간입니다. 분별하지 않는 것을 출세간이라고 하구요. 그래서 세간의 음성을 관한다. 즉,
세간이라는 것 자체가 분별, 망상. 그런데 분별망상, 번뇌 망상, 이 생각, 판단, 분별, 이것이 입으로 나타날 때 음성으로 소리로 나타나고요. 몸으로 나타날 때 또 행동으로 나타나고. 또 생각으로도 나타나고.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관세음보살이라는 말 자체가 세간의 음성을 관하는 보살님. 즉, 중생들의, 중생들의 모든 분별망상들을, 망상의 소리들, 오만가지 머릿속에 있는 소리들, 아니면 남들에게 말한 좋은 말, 나쁜 말 한 모든 것들을 전부다 ‘관’한다.
있는 그대로 본다. 보는 보살님이다. 보통 우리는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관세음보살님의 해석을 듣고는 ‘그렇지’ ‘역시 관세음보살님 정도 되면 그 정도의 신통력은 있어야지’ 하고 ‘역시 관세음보살님은 내가 생각하던,
그 부처님과 보살님의 모습은 저런 거야’ ‘보살님쯤 되려면 마음을, 중생들의 모든 마음을, 다 관해 볼 줄 알아야지’ 이렇게 생각을 해서 깨달은 사람은 관세음보살님처럼 우리 마음을 훤히 알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런 스승을 찾아 나섭니다.
이게 이제 관세음보살님을 잘못 해석한 거지요. 내식대로. 세간의 음성, 우리들의 중생들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 또 생각, 이것들을 다 관찰해서 보는 분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야, 관세음보살님은 정말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실력자구나’ ‘내가 내 마음도 다 보기가 힘든데. 내 마음을 훤히 다 보고 계시고. 내가 속삭이는 소리를 다 듣고 있고.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번뇌 망상을 다 보고 있다’
‘야, 정말 관세음보살님의 능력은 어마어마 하구나’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지요. 얼마 전에 어떤 거사님께서 저한테 이제 질문을 하십니다. 당연히 저는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왔다고 하면서 “이게 틀린 건가요?” 하고 물어보세요. ‘뭔가’ 여쭤봤더니.
당연히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신통력이 생길 것이고. 신통력이 생기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훤히 읽을 것이고. 이 사람이 미래에 어떻게 될지도 훤히 알 것이고. 이 사람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알 것이고.
좀 심지어는 자신이 언제쯤 성공할지. 어떻게 하면 성공할지. 이 사업을 해야지 성공할지 안 해야지 성공할지. 이것도 좀 환히 알지 않을까. “내 운명 정도는 당연히 알아야 도인 아닌가요?” “그게 불교고 그게 도인이고 그게 부처님 아닌가요?”
하고 묻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렇지 않다.”라고 얘길 했더니 거기 대해서 너무나 놀라시면서 또 충격을 받으시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도인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도인이 미래도 예견 못하고, 미래를 알지도 못하는데
그걸 어떻게 도인이라고 하고, 그걸 어떻게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렇게 하면서 되게 당황해하시더란 말이지요. 불자들이 그런 도인을 꿈꾸고 있다 보면 그런 도인을 찾아 나서게 되고.
그런 척하는 그렇게 아는 척하고 뭔가 미래와 운명을 점칠 것 같은 그런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제가 어지간히 불교계뿐 아니라 다양한 뭐 명상, 수행, 뭐 종교, 두루두루 여기저기 쳐다보지 않은 곳이 없는데요.
제가 지금까지 봐 왔던 경험에 의하면 그런 건 볼 줄 안다. 뭐 미래를 볼 줄 안다. 심지어 영가를 본다. 뭐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치고 사이비 아닌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문제 있는 사람 아닌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구 본인 스스로도 두려워하지요. 그냥 스스로가 두려워하거나 아니면 스스로가 자기가 도인이라는 착각에 빠져있거나. 그 환상에 완전히 젖어서 스스로도 스스로를 속이는 것을 모르는, 그 정도의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이처럼 세간의 음성을 관한다,라는 것은 우리 마음을 하나하나 다 꿰뚫어본다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냐? 뭐가 세간이겠어요. 내 안에서 올라오는 이 번뇌 망상, 분별망상 이게 세간입니다. 이게 내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이구요.
이거를 관한다는 것이지요. 조금 전에 한 말이 뭐 일부분 의미가 있으려 면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모든 번뇌 망상심을 다 발한다. 그것도 사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게 왜 틀린 말이 아니냐면 내 마음과 온 우주법계는 일체 모든 이들의 마음이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에.
다르지 않기 때문에. 다르지 않기 때문에 내 마음이 곧 우주법계의 마음이고. 관세음보살님의 마음이고. 모든 마음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번뇌 망상심 하나하나를 어떻게 다 보지’
‘번뇌 망상심 하나하나를 다 보는 것이 진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번뇌 망상의 뿌리가 무엇인지’ ‘번뇌 망상의 실상이 무엇인지’ ‘실재가 무엇인지’ 그것을 아는 것이지요. 육조단경에 보면 와륜 선사라고 나오는데.
와륜이는 육조 혜능 스님의 제자인데요. 와륜이는 솜씨가 좋아서, 와륜 스님은 솜씨가 좋아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쪽쪽 생각을 잘 깨뜨리는구나. 솜씨가 좋다는 거지요. 번뇌 망상이 일어나면 그걸 잘 깨뜨린다는 거지요.
그런데 나 혜능은 솜씨가 좋지 않아서 번뇌 망상이 죽 끓듯 올라온다. 이런 표현이 나오거든요. 그러면 누가 훌륭한 사람일까요? 와륜 스님은 번뇌 망상이 올라오면 그거를 솜씨 좋게 어떤 방법을 썼어든 번뇌 망상을 다 없애고,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상당수 성공을 한다. 없애기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육조 혜능 스님은 번뇌 망상, 분별심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계속해서 일어나는 게 도인입니다.
일어나는 걸 쪽쪽 깨뜨리는 게 도인이 아니고. 깨뜨리는 게 도인이라면 여러분은 도인이 되기 위해서 올라오는 생각을 전부 다 깨뜨려야 됩니다. 싸워 이겨야 되고. 그걸 다 내치고 없애버려야 돼요. 그런데 번뇌 망상,
분별망상이 분별심이 없는 것이 부처이냐. 만약에 분별심이 없는 게 부처라면 여러분들은 당장 법문 듣고 집에를 못 가실 겁니다. 집에 버스를, 몇 번 버스를 타고 가야 되는지를 전혀 분별하지 않으니까 분별심이 없으니까
이 번호를 타야 되는지 저걸 타야 되는지도 모르고. 버스와 기차의 분별도 없고. 네 집 내 집이란 분별도 없고. 내 남편 네 남편이라는 분별도 없고. 내 자식 네 자식이란 분별도 없다면 인생을 살 수가 없겠지요.
자식이 혹은 남편이 상의 좀 하려고 이래저래 물어보면 아무런 분별이 없으니까 뭔 말을 해줄 수도 없을 겁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이, 공부하는 목적이 그렇게 아무 분별력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무지렁이가 되라는 그런 공부는 아니지요.
당연히 혜능 스님뿐 아니라 부처님도 모든 깨달은 사람도 당연히 생각이 일어나죠. 분별심이 일어나죠. 다만, 그 분별심에 실재가 무엇인지. 실체가 무엇인지. 실상이 무엇인지. 그거를 분명히 아는 것이지요. 즉,
분별심이 진짜가 아니라 인연 따라 생겨난 허망한 것이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겁니다. 그래서 그 분별심에 끌려가지 않는 것이지. 분별심을 100% 믿거나 너무 100% 과도하게 신뢰하지 않고. 그래서 분별을 마음껏 내가 쓰긴 쓰지만 거기에 휘둘리지 않는 것.
거기 노예처럼 끄달려가지 않는 것. 그 속삭이는 소리, 소리 분별심, 세간의 음성에 끌려가지 않는 것. 속지 않는 것. 그게 부처이지. 그게 공부하는 사람이지. 그런 생각조차 아예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무수히 많은 분별 망상심. 그것을 어떻게 하면 되는 냐. 이 관세음보살님이라는 또 관자재보살님이라는 자유자재하게 관한다. 세간의 음성, 번뇌 망상심, 모든 것을 자유자재하게 관한다. 있는 그대로 본다.
이 관자재라는 보살님의 명호가 우리가 어떻게 마음공부 아닌 마음공부를 해야 하는지. 또 우리는 방법이 없다,라고 해도 그래도 뭔가 방법을 이렇게 찾잖아요? 그런 분들에게 어찌 보면 방법 아닌 방법, 길 아닌 길,
그것을 아주 잘 나침반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소 어떻게 살면 되느냐. ‘관자재’ ‘관세음’으로 살면 됩니다. 자유자재하게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드러나 있는 이 모든 것을 관해주면 된다는 것이지요. ‘관’은 팔정도에서 정견.
있는 그대로를 본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을 얘기한다, 그랬습니다. 즉, 세간의 음성이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면 됩니다. 시비 걸지 않고 좋다고 해석하면서 쫓아가거나 싫다고,
싫다고 해석하면서 밀쳐내려는 의도를 버리고 그냥 세간의 음성을 있는 그대로 관해주면 된다. 어떻게 관해주느냐. 무엇이 세간의 음성입니까? 여러분들을 괴롭게 하는 모든 것들. 괴로움이 올라오거나 불안함이 올라오거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올라오거나 몸이 아프면 ‘야, 이게 큰 병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올라올 수 있구요. 초조함, 답답함, 미움, 질투, 남들과의 비교, 더 성공하고 싶고, 자존감도 떨어져 있고, 이런 무수히 많은 나를 괴롭히는 것들,
돈도 더 벌고 싶은데 더 벌지 못하는 상황. 남편이 좀 더 성격이 좋았으면 좋겠는데 그러지 못한 남편에 대한 원망. 자식이 조금 더 내 말을 잘 들었으면 좋겠는데 잘 들어주지 않는대서 오는 답답함. 친구들과 뭔가 이렇게 말다툼도 하고 참 안 좋은 사람 만났을 때 오는 스트레스.
윗집 사람이 뛰는대서 오는 스트레스. 밑에 사람한테, 조금만 뛰어도 밑에서 올라오는 거에 대한 또 스트레스, 예를 들면. 오만가지 스트레스들. 우리를 부처가 되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우리를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
그게 세간의 음성입니다. 내가 그걸로 인해서 괴로운. 지금 여러분 인생에 드러나는 모든 것들 가운데 여러분이 ‘이건 문제야’ 그래서 ‘이건 없애야 돼’ ‘이것만 없애면 내 인생은 행복해질 거야’ ‘이것만 없으면 내 인생은 정말 편안해질 거야’
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그게 세간의 음성이구요. 그게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이지요. 그런데 우리 머릿속에는 우리는 이제 세간의 음성을 그대로 관하지 않고 내식대로 해석하고 판단하고는, 내식대로 해석하고 판단한 그 세간의,
세간적인 중생심을 믿고 있는 것이지요. 믿으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괴로우면 이 괴로움만 없어지면 내 인생은 행복할 거야’ ‘이 답답하고 초조함만 없어지면 내 인생은 정말 살만할 거 같은데’ ‘나를 괴롭히는 뭐 시어머니가 됐든,
뭐 남편이 됐든, 뭐 자식이 됐든, 누가 됐든, 이 사람만 없으면 이 사람 성격만 좀 바뀌면 내가 정말 인생 살 거 같은데’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우울하고 괴롭고 답답한가’라고 느끼는 그것. ‘그것만 없어지면 나는 부처가 될 수 있어’
그 마음 때문에 여기 오신 거 아닌가요, 아마? 그것만 없으면, 나를 괴롭히는 그것만 없으면, 나는 정말 행복할 거야. 그래서 그걸 배우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단 말이지요. 한편으로는 애석하게도,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저는 여러분에게 그것을 없애는,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없애는 방법을 가르쳐드리는 건데. 전혀 다른 방법을 가르쳐드리는 것이지요. 세간에서 가르쳐왔던 모든 방법과 전혀 다르게 가는 길.
세간에서는 그거를 이기는 다양한 방법들을 가르쳐줘요. 심리치유? 심리학? 이런 데서 다양한 심리치유 기법들을 저는 어깨너머로 두루두루 이렇게 봤었는데. 다양한 심리치유의 기법들이 역사를 이어오면서 많이 발전을 하면서 다양하게 다양한 방법을 가지고 이걸 치유해줍니다.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마음을, 특정한 이름을, 붙여서 무슨 장애, 뭐 강박장애, 뭐 무슨 장애, 무슨 장애, 무슨 장애, 이름 붙여놓고 뭔 설문지를 쓰라 그러한 다음에 이걸 딱 쓰고 나면 내가 강박장애 몇 프로, 무슨 장애 몇 프로, 착 나옵니다.
그거를 목사님, 신부님, 스님들 모아 놓고서 그거를 쭉 썼어요. 우리 교육받을 때. 그걸 착해서 풀었습니다. 목사님, 신부님, 스님들, 우리가 봤을 때 참 훌륭한 목사님, 훌륭한 신부님, 훌륭한 스님들, 참 신도님들에게 존경받는 그 훌륭한 목사, 신부, 스님들이 거의 대부분이 장애가 많습니다.(웃음)
다 장애예요. 그냥 정상 범주에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싶을 정도로. 야, 정말 너무 당황스럽더라구요. 아마, 병도 이런 비슷한 식으로 아마 우리를 옭아맬 겁니다. 고혈압, 뭐 150, 170, 180 넘어가면 고혈압이다. 약을 먹어야 한다.
전 의학적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혹시나 의사나 약사 계시면 그냥 그런 말로 들어주시고.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그 커트라인을 넘으면 나는 병자가 되고. 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인 게 되는 그런 마음이잖아요. 그런데 또 어떤 자료를 보니까
사실 우리나라에서 얘기하는 고혈압의 시술 또는 세계적으로 얘기하는 고혈압의 커트라인이 너무 낮아서 사람들을 다들 환자로 만들어버린다. 사실 어지간하면 고혈압 올라가도 아무 문제가 없다. 약 굳이 안 먹어도 된다.
이런 얘기들을 하는 분들도 많이 또 계시거든요.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어지간한 장애가 안 걸리는 게 없어요. 우리 어릴 때 길을 걸어가다 보면 보도블록 있으면 금 안 밟으려고 이렇게 다녀본 적 다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도 조금만 심해지면 그게 또 장애가 돼버립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장애를 딱 얘기한 다음에 그 장애를 없애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들을 써왔어요. 심리학에서. 그 방법들이 상당히 효과도 어느 정도 있습니다.
내 문제를 없애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 그게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를 해요. 그러다가 지금에 와서 그 심리학에서 불교를 만나고서, 서양이 불교를 접하고 이게 또 틱낫한 스님이나 달라이라마 스님들을 중심으로 해서 불교라는 걸 접한 이후에 완전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문제라고 장애라고 정해놓고 그 장애를 없애는 방법을 설명해오다가.
여기 있던 시계가 어디 갔지?(웃음) 네, 시계를 보면서 해야 제가 시간 맞춰서.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누구나 이제 장애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없애고, 없애고 없애는 노력을 해온 거예요. 심리학에서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렇게 해오다가 심리학이 완전 뒤바뀌었어요. 본질에서부터 완전 180도 바뀌어버렸습니다.
어떻게 바뀌었냐면 한 100년 가까이를 문제라고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 몰두했더니 치유되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완치가 잘 안될 뿐 아니라 치료하려고 애쓰고, 애쓰고 애쓰다가 오히려 그게 더 장애가 되어서 제대로 된 치유가 안 되더라는 것이지요.
지금 완전 바뀌었습니다. 불교적인 방법, 명상적인 방법, 뭐 MBSR(마음챙김에 근거한 스트레스 완화 프로그램)이라고 불리던, 마인드풀니스라고 불리던, 있는 그대로를 지켜보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즉, 이걸 문제라고 해석하는 걸 포기해버렸어요. 문제라고 해석하지 않는다.
그러고 예를 들어 요즘에, ‘있는 그대로 지켜보라는 것’ 나오면서 동시에 같이 이런 흐름으로 인해서 동시에 등장한, 뜨게 된 심리학의 흐름이 긍정 심리학입니다. 긍정 심리학도 뭐냐면 옛날에는 문제 있는 부분을 없애는 거에 주안점을 두었어요.
그런데 문제 있는 거를 없애려고 에너지를 쓰니까, 그 문제를 없애려는 에너지를 쓰니까, 문제가 더 커지는 거예요. ‘문제를 없애야 돼’ ‘없애야 돼’ ‘없애야 돼’ 하는 스트레스 때문에. ‘살을 빼야 돼’ ‘빼야 돼’ ‘빼야 돼’ ‘밤에 나는 잠을 잘 자야 돼’
‘잘 자야 돼’ ‘잘 자야 돼’ 하고 막 싸우면 더 안 자지거든요. 잠이 더 안 옵니다. 나중에 폭식을 하게 되기도 하고. 그런데 이런 흐름이 완전히 문제라고 낙인찍는 것을 버려버리는 패턴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문제라는 게 본래 없다. 이걸 그냥 인정을 해주는 거예요,
그대로. 문제는 문제로 그대로 그냥 내버려 두라. 허용해두라. 허락해주자. 지금까지 문제라는 걸 없애려고 했는데 ‘그게 아니다’라는 걸, 제가 불교에서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이제 이 세상이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걸 문제라고 해석하지 않고 그냥 허용해주는 겁니다. 그러구 나서 긍정 심리학에서는 어떻게 하느냐면 부정적인 건 이제 내버려 두라. 오히려 긍정적인데 더 집중해서 긍정적인 걸 더 극대화시켜라. 그랬더니 예를 들어,
뭐 에니어그램 4번인가? 에니어그램, 하도 오래돼서 다 까먹었는데. 4번 유형인가 하는 유형은요. ‘나는 특별하다’ ‘나는 독특하다’라는 자아 이미지, 자아 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남들과 똑같은 걸 되게 싫어하고.
남들과 차별화되는 거, 혼자 있는 거, 뭔가 남들과 다른 걸 좋아하거든요. 홀로 있고 이런 걸 또 좋아하고. 남들이 보기에는 좀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본인은 남들과 다른 독특한 어떤 이런 것들을 할 때 뭔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거지요.
군에서 보통 보면 획일화된 삶을 살아야 되는데 그런 친구들이, 그러니까 약간 그런 사람들이 예술가적 기질, 감성, 창의력, 창조성, 이런 영감, 이런 것들이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예를 들어 앙드레 김이니 뭐,
다양한 독특한 예술가. 무슨 미술가, 디자이너, 이런 사람들이 그런 쪽으로 성공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어릴 적에는 손가락질 당하기 쉽다는 것이지요. ‘쟤는 왜 저렇게 특이해’ ‘왜 저렇게 독특해’ ‘쟤는 왜 저렇게 유달라’
‘남들과 왜 이렇게 못 어울려’ 그렇게 손가락질 당하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부분에 중심을 두어서 ‘그놈은 문제 있다’ ‘문제 있다’라고 하니까 자기의 능력을 발휘를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내버려 두고 그냥 그 사람이 잘 하는 부분을 칭찬하고 긍정하고 “야, 너는 남들과 달라서 참 독특한 아이디어가 있구나.” 하고 그거를 이렇게 부각시켜 주고 놨더니 그 사람이 놀라운 정말 발명가가 되고.
뭔가 아주 놀라운 어떤 아이디어를 가지고 놀라운 어떤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위대한 어떤 사람이 되고 나니까 옛날에 단점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오히려 장점화가 되고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면서 그 단점을 보고 단점이라고 욕하는 것이 아니라 ‘야, 저 사람은 역시 저런 면이 있으니까 이렇게 참 저렇게 되는구나’ 하고 장점을 더 뛰어나게 보더라는 거지요. 단점을 가지고 욕하지 않더라는 거지요.
오히려 그 단점이 나중에 가면 장점화가 되더라는 것이지요. 당연히 그렇게 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단점을 없애려고 애를 쓰고 애를 쓴다고 해서 그 단점이 잘 안 없어지거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특정한 단점은 다른 부분에서 장점이 됩니다.
예를 들어 어릴 때 부모님에게 아주 막 혼나고 부모님 앞에서 찍소리도 못하면서 부모님의 권위에 눌려서 막 그냥 억압받고 이렇게 살던 사람들은 권위에, 아주 권위를 상당히 두려워하면서 크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세상에 나가서 직장에 취직을 했는데 권위에 대해서 상당히 좀 위축이 돼있는 거예요. 자신감은 좀 없어요. 그 대신 윗사람한테는 너무 잘합니다. 너무 정말 예의가 깍듯하고 윗사람한테 막대하지 않고 정말 예의범절 잘 지키고.
정말, 반듯한 사람의 이미지? 이렇게 해서 밑에 사람이 위에 사람에게 사랑받는 그런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어릴 때 부모님에게 막 정말 무한한 사랑을 받고 부모님과 친구처럼 지내고 막 그냥 이런 아이들 같은 경우?
약간 남들이 보기에는 언뜻 보면 요즘에 젊은 친구들 중에 그런 사람들 많거든요. ‘야, 도대체 저 친구들은 어떻게 자랐기에 저렇게 정말 발랄하고 자유분방할까’ 나이 많으신 분들, 어른에 대한 어떤 위축감 내지는 뭐 이런 게 없습니다.
완전히 자유롭고, 할 말 다 하고, 윗사람이 잘못한 것 있으면 딱 얘기 다하고. 할 것 다하고. 언뜻 보면 되게 좀 건방지게 보이는 것처럼. 옛날 사람들 같으면 그렇게 느낄 법한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그런 자유로운 부분이 또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또 그런 걸 좋아할 수도 있는데. 또 아주 권위적이고 이런 사람들은 그런 걸 되게 싫어할 수도 있거든요. 그러면 그런 사람에게 찍힐 수도 있어요.
그러다가 또 한 번 본인도 인생 공부를 하고 그러면서 또 이렇게 좀 원만해지기도 하겠지요. 이것이 어떤 특정한 성격이 무조건 좋거나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떤 하나의 단점은 다른 면에서 장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부모님이 억압하게 키웠다고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도 없고. 자유분방하게 키웠다고 무조건 좋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저마다 자신의 삶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다운 자기의 성격, 자기의 개성, 자기 능력이 있는 것이지.
이건 좋은 점이고 저건 나쁜 점이라서 막 이렇게 할 필요가 굳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긍정 심리학에서도 이렇게 장점에 집중을 하면서 장점을 더 칭찬하고 이렇게 했더니 이게 더 빨리 장점이 내 인생에 어떤 현실로 바뀌고.
그러니까 단점들이 오히려 장점화가 되더라,라는 것이지요. 그 또한 문제라고 문제 삼지 않기 시작한 겁니다. 세상에서. 이제 비로소 문제라고 여기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관점으로는 문제를 정말 해결할 수가 없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거예요.
문제를 문제라고 낙인찍고 그 문제를 없애야 되겠다,라는 생각. 그게 더 큰 문제를 야기합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 내 인생에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 있잖아요. ‘난 이것만 바뀌었으면 좋겠다’ ‘저것만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
그것을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관자재’ 이 마음공부, 반야바라밀로서 접근하는 것이냐. 문제가 사실은 답이거든요. 문제가 사실은 답이다. 번뇌가 곧 보리이구요. 번뇌 즉 보리입니다. 이건 그냥, 그냥 하나의 구호가 아닙니다.
지금 내 인생에서 나의 현실이 돼야 될 현실적이 실천이에요. 진심으로 문제가 답이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아픔, 괴로움, 답답한, 풀어야 할 과제들, 두려움, 내가 싫어하는 것, 내가 정말 싫어하는 상황, 싫은 사람, 싫은 조건,
내 몸에 싫은 외모나 특징, 그것들. 그게 바로 나를 공부하게 만들어주고 나를 깨닫게 해주는 가장 위대한 스승입니다. 가장 위대한 스승이기 때문에 그것이 내 인생 전면에 문제로 등장을 한 것이지요.
괴로움이 등장하는 모든 이유는 괴로움이 없는 사람은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되겠다’라는 발심을 못합니다. 괴로움이라는 삶의 문제가 있어야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되겠다’라는 마음을 내고 발심을 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되겠다’라는 발심을 통해서 결국에는 모든 괴로움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해탈할 수 있는, 그런 모티브를 제공해주는 것이지요. 삶이 이렇게 자비로운 방식으로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단점들,
그것을 통해서 내 인생에 딱 최적화된 스승. 자기 인생에 가장 걸맞은 스승. 그것이 내 인생에 딱 등장하는 겁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스트레스받는 요소가 있다. 그 사람이야말로 나를 가장 깨닫게 해주기 위한 가장 훌륭한 스승이고.
그것이 답인데. 지금까지는 그걸 답으로 여기지 못했습니다. 그걸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남편이 문제다’ ‘난 남편만 정말 바뀌면 내 인생 행복할 텐데’라고 느껴온 사람 있다면 그 남편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나를 가장 괴롭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남편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나를 깨닫게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써 내 인생에 등장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남편의 이 성격을 바꿔야 돼’ ‘바꿔야 돼’ ‘바꿔야 돼’ 계속해서 ‘바꿔야 된다’라는 생각을 하니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그 사람이 바뀌기 전에는 난 행복할 수 없어’ 그래서 바뀌기 위한 수많은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잘 안 바뀌어요. 안 바뀌니까 나는 계속해서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까지? 그 사람이 바뀔 때까지.
그런데 절에 와서 ‘괴롭다’라고 질문을 하면, 즉문즉설에 가서 법륜 스님한테 질문을 해보세요. 전부다 분명히 이건 100% 남편 잘못인데, 나보고 탓을 하면서 나보고 바뀌라고 하거든요. 이게 ‘내 바깥에 있는 누구의 탓이다’
라고 생각하는 게 중생심입니다. ‘내 바깥에 나를 괴롭히는 무언가가 있다’라고 실체화시키는 거예요. 그게 실제 저놈이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저놈이 나를 괴롭힌다’는 내 생각인 줄 모르고. ‘저 사람이 문제야’라는 그 내 생각이 나를 괴롭히는 줄 모르고.
그 바깥을 탓하는 것이거든요. 이 공부에는 바깥이 따로 없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외부 대상이 따로 없습니다. 내가, 내가 나를 스스로 괴롭히는 거예요. 단순합니다. ‘그 사람을 변화시켜야 되겠다’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오셨다면 이제 완전 바꿔서,
바꿔서 이 사람이야말로 내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나를 저 파라미타 하게 만들어줄, 저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만들어줄, 뗏목을 타고 가야 되잖아요. 고해 바다를 뗏목을 타고 건너가야 됩니다. 그래서 대승, 소승, 연각승, 성문승, 보살승, 이런단 말이에요. 남편승입니다.(웃음)
나를 깨달음으로 가도록 만들어주는 뗏목과 같은, 나를 태워주는, 나를 깨달음으로 태워주는 훌륭한 스승이 남편이고. 내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고. 내가 제일 싫어하는 상황, 싫어하는 조건,
그것이 바로 나를 바라밀다 하게 만들어주는 탈 승(乘) 자. 내가 괴로워하는 그 괴로움의 바다 그래서 ‘고해’ 괴로움의 바다. 그걸 건너가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괴로움이라는 것. 괴로움이라는 실질적인 바다가 있어서 바다를 건너가야 파라미타 하는 게 아니라.
괴로움을 없애고 나서 건너가는 게 아니고. 괴로움이 곧 해탈, 열반이었구나. 이 바다가 본래 바다가 아니었구나. 고해 바다가 아니었구나. ‘이미 이 자리가 바로 저 자리였구나’라는 사실을 체득하는 거거든요.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할 일이 없는데,
이걸 이제 너무나 어려워하는 것이지요. 그럼 그 남편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있는 그대로 ‘관자재’ ‘관세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내비둬야 됩니다. 그 사람을 바꾸려고 하는 모든 노력을 아무리 해도 내 바깥을 바꾸려는 모든 노력,
그것은 일정 부분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겠지요.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성공할 수 있으면 성공하려고 노력하는 건 괜찮아요. 그런데 거기 과도하게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으니까.
바깥에 있는 모든 조건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어요. 내가 행복을 원하는 모든 조건은 행복하게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많은 명상을 표방하는 단체들에서, 제 설법 중에도 옛날에 썼던 것 중에 그런 얘기들도 더러더러 했지만.
많은 단체에서는 마음, 중생심의 이 마음을 가지고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비법을 가르쳐줍니다. 뭐 끌어당김의 법칙, 시크릿, 이런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부자를 꿈꾸느냐? 부자 얻을 수 있다. 간절히 원하면 된다.
그 방법을 가르쳐줘서 그걸 이루게 만들어 준단 말이지요. 그거는 아주 낮은 수준에 중생들, 정말 낮은 수준의 중생들. 너무 헐떡거려서 힘들어 죽게는 사람들에게 일단은 당근을 하나 줘서 “야, 너 행복하게 해줄게.” “부자 되게 해줄게.”
“우리 절에 와.” “우리 명상 단체 와.” 그래서 조금 경제적으로 좀 나아지게 해준 다음에 이 본질로 데리고 오려고 하는 당근이었거나. 아니면 본인 스스로도 그 정도 공부밖에는 못한 거지요. 그것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스승이라는 사람들이 시크릿이나 이런 거를 쓰고 한 이런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옛날에 제가 많이 보면, 반드시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루지 않았으면 당신 탓이다. 당신이 뭐 정성이 부족해서 그렇거나 뭐가 부족해 그렇거나
뭐가 좀 부족했거나, 이렇다.라고 탁 이렇게 얘기합니다. 본인이 빠져나갈 구석을 착착착 만들어놔요. 정말 그럴까요? 부자가 되고 싶으면 반드시 될 수 있다? 되지 못하는 건 너의 문제다. 반드시 될 수 있다. ‘반드시 될 수 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중생의, 모든 사람들이 수조 원을 버는 부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여러분이 늙지 않을 수 있을까요? 반드시 병들지 않을 수 있을까요? 죽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반드시 해줘요.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다.”
하는 게 정직한 대답이지요. 여러분 얼마나 당황스럽습니까 이 불교라는, 제가 얘기하는 얘기가 얼마나 당황스러워요. 절에서 스님이 신도님들 데려다 놓고 이루게 해주겠습니다. 원하는 게 뭔지. 열심히 기도하면 이룰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해줘야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만이 진실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신심 떨어지는 얘기를, 얼마나 신심 떨어지는 얘기예요. 제가 이런 얘기를 왜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이제 그 정도의 근기는 올라왔다는 생각을 하고,
하니까 ‘아, 이런 얘기를 해도 여러분들이 거기에 신심 떨어지시겠나’ 그런데 진실입니다. 늙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병들지 않을 수가 없고. 되는 것도 있고 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바깥을 바꿈으로써 내가 행복하기로 한다면 기어이 실패합니다.
늙지 않기로 병들지 않기로 죽지 않는 마음을 내고, 그게 안 되는 것을 괴로움이라고 느낀다면 모두 다 괴로움을 결국엔 느낄 수밖에 없잖아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 내 바깥에는 문제가 없어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모든 문제는.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의 관점은 어리석은 사람은 항상 남들을 탓하고 ‘저것만 바뀌면 좋겠고’ ‘저 상황만 바뀌면 좋겠고’ ‘저놈만 바뀌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데. 마음공부하는 사람은 딱 돌이켜요.
어떻게 돌이키느냐? ‘이 모든 문제는 내 문제다’ 모든 문제는 내 문제라는 것으로 돌아와야, 내 마음의 문제라는 것으로 돌아와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 해결할 수 있는 힘이 나에게 있다’라는 걸 인정하는 게 됩니다.
바깥의 탓으로 돌리면 ‘저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나는 불행해’ 이렇게 되거든요. ‘이 모든 건 내 문제이기 때문에 나에게 힘이 있다’라고 굳게 믿고 있으면 딱 돌이켜서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면, 그러면 나에게 힘이 주어지게 됩니다.
상대방으로 혹은 세상으로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힘의 주인이 되기 시작합니다. 실제 그렇게 해야만 내가 정말 힘을 지니고 내 행복의 주도자로서, 주관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어떤 지혜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문제 있는 곳에 내가 그냥 같이 있어주는 거예요. 그 문제가 나에게 일어나는 것을 허락해주고 허용해주는 겁니다. 이것이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가장 위대한 진리, 진리거든요. 여러분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여러분의 지금,
문제 된다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정리할 수 있는, 돈오할 수 있는, 계속해서 ‘바깥을 변화시켜야 되겠다’라고 쫓아가는, 쫓아가는 걸 집착이라고 합니다. ‘이걸 바꿔야 돼’ ‘저걸 바꿔야 돼’ ‘이렇게 돼야 돼’ ‘저렇게 돼야 돼’
‘이걸 가져야 돼’ ‘저걸 가져야 돼’ 하는. 그렇게 바깥을 향해 쫓아가거나 바깥을 향해서 나쁜 상황은 버리려고 하거나. 이런 바깥과 자꾸 시름하고 있는 동안, 줬다 뺐었다 하는 이 놀이를 계속하고 있는 동안은.
취사간택하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과 자꾸 시름하는 동안은. 좋았다 나빴다 할 수밖에 없잖아요. 가지면 좋았다가 못 가지면 괴롭고. 싫은 게 오면 괴롭고. 싫은 게 떠나가면 또 행복하고. 이 게임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좋았다 나빴다 하는 게임에.
우리는 지금까지 평생 그렇게 하고 살아왔잖아요. 언제까지 그렇게 하고 살아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가지고는 영원한 행복은 오기가 어렵지요. 이렇게 왔다 갔다 하지 않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지금 일어나는 이대로 이 모든 것,
내 인생에 등장하는 이 모든 것, ‘제법실상’ 이대로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실상. 괴로움이 온다면 그 괴로움이야말로 나를 깨닫게 해주는, 나의 빈틈을 해결하게 해준, 나의 업장을 딱 적재적소에서 소멸하게 해주는, 내가 가장 매어있는 부분,
가장 묶여있는 부분을 풀려나게 해줄 수 있는, 여러분들은 어디에 걸려있는지 모르잖아요. 어디에 걸려있어서 내가 도대체 뭣 때문에 내가 터지지 않는지, 모르거든요. 그 부분이 어딘지를 명확히 알려주는, 그래서 삶이 바로 스승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바로 스승이고.
나를 찾아온 괴로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 그게 내 인생에 가장 온전한 답이 무엇인지, 내 인생에 나를 위한 최적화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뜻입니다. 그걸 누가 대신해줄 수 있겠어요. 어떤 분들은 그렇게 생각해요.
훌륭한 스승은 제자를, 이제 어떤 이런 분들 계세요. 멀리서 하도 힘들게 저를 막 찾아오고 싶다고 꼭 얘기를 하고 싶다고. 그래서 오시면은 아무 얘기도 안 하고 이제 약간 맞춰보라는 듯한 느낌으로.(웃음)
그것도 못 맞추면은 그게 어떻게 공부하는 스님이냐? 스님이면 내가 말 안 해도, 말해서 얘기해주는 거야 뭐, 아무나 다하지 않느냐. “말 안 해도 알아서 내가 고민이 뭔지를 다 알아맞히는 사람이 진짜 도인 아닙니까?” 뭐 이런 얘기를 한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도인을 찾아가야 된다. 그럴 때는. 나 같은 사람 찾아와가지고 그런 거를 맞추라 그러면 어떻게 맞출 수가 있겠습니까. 도인이 아닌 사람을 찾아와서 그런 얘기를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얘기를 한단 말이지요. 그거를,
그거를 맞출 수 있는, 가만히 있는데 와가지고 턱 맞출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부처님은 그거를 턱 맞춰줍니까? 아닙니다. 그런 걸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큰 스님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제자들이 큰 스님에게 질문을 하면 되게 피상적인 질문을 하면 “아니, 그렇게 대충 질문하면 내 답변도 대충 나올 수밖에 없지 않으냐?” “좀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라.” “그래야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주지.” 이렇게 얘기를 하지요. 당연히.
그러니 누군가를 찾아가서 내 문제를 해결하고 내 안에 뭐가 문젠지. 나한테 뭔가 뚫리지 않는 곳이 어딘지를 찾아가지고 알려주십시오. 이러기가 어지간히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누굴 찾아가면 돼요. 여러분 자신의 삶을 찾아가면 됩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이, 여러분의 인생이, 여러분 자신이, 나 자신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본래 부처라는 나 자신이 나에게 늘 답을 주어왔어요. 문제를 갖다준 게 아니라, 항상 답을 줘왔습니다. 그런데 내 중생의 분별심이 정말 어리석게도 전도몽상 되어서 뒤집힌 망상이잖아요.
전도몽상 되어서 부처님이 나에게 준 답을 답인 줄 모르고, 거꾸로 ‘이게 문제야’ ‘이게 제일 큰 문제야’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제일 큰 답인데. 가장 나에게 제일 큰 답을 준 건데. 제일 큰 문제를 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문제와 싸웁니다. 문제와 싸워 이겨요. 이기려고 애쓴단 말이에요. 그렇게 문제와 싸우려는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 동안은 이기든가 지든가 밖에 할 수 없어요. 그 문제에게 완전히 항복해버려야 됩니다. 그러니까
문제를 답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겠어요. 그 답 속으로 들어가야지요. 답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답을 허용해줘야 됩니다. 답으로서 살아야 됩니다. 문제라고 여기면, 그러니까 이게 초기불교에서는 ‘명지(明地)’라는 표현을 쓰는데. 밝은 그냥 지혜가 깨달음입니다.
뭔가 새로운 뭔가가 나타나는 게 아니고. 내가 지금까지 ‘이 문제를 해결해야 돼’라고 생각하던 의식에서 ‘아! 이게 문제가 아니라 답이었구나’라는 의식으로 바뀌면 어떤 전환이 일어날까요? ‘문제와 싸워 이겨야 돼’
라는 전투태세에 항상 돌입해있다가 이제는 싸울 필요가 없어져요. ‘이게 답이구나’라는 사실을 자각하니까 답 속으로 들어가는 거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남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수밖에 도리가 없어요.
있는 그대로 허용해주고 받아들여 주고. 다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자기식대로 뭐 좀 안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자기 마음대로 뭐 하고 싶은 일이나. 나는 내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나는 술 담배는 마음껏 먹고 싶으니까 그냥 그것을 받아들여서 먹고 싶으니까 받아들여서 술 담배 먹습니다.
또 어떤 분은 약간, 뭐 이런 말씀드리기는 뭐 하지만, 예전에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어떤 분이. 아, 스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제가 약간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 그런 가보다. 그래서 뭐 어떠 신데요? 그랬더니.
사실은 나를 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여태까지는 내가 그래도 참고 참아서 ‘이건 아니다’ 이렇게 밀쳐냈는데. ‘아, 이거 나에게 온 인연이구나’ 싶어서 받아들여야 되겠습니다.(웃음) 어떤 사람인데요. 이랬더니 유부남입니다.(웃음)
유부남인데 나를 좋아해서, 그런데 이게 나를 찾아온 인연이니까 그걸 받아들여야 안 되겠습니까? 그게 받아들이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를 괴롭게 한다면, 내가 그런 얘기를 했었지요. 이제 무엇을 해도 괜찮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누군가를 괴롭게 하거나 그렇게 해서는 인과응보를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대로 인과응보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갑자기 뭔가 화가 난다고 해서 누구 한 대 때리는 거 마음대로 해도 되느냐?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요. 때리면 나두 맞거나 내가 유치장 가거나 하겠지요. 그러니까 그렇게 인과응보를 거스르면서까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인지.
이게 자비에 의한 것인지. 이런 것들을 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을 착각해가지고 잡아댕기라는 걸로 착각하면 안 돼요. 잡아댕기라는 이거는 취하는 거거든요. 좋아하는걸, 애착하는걸,
내가 쥐려고 하고 취하려고 하는 것. 이건 붙잡아 댕기라는 게 아닙니다. 밀쳐내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비두라는 겁니다. 일어나는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겁니다. 그러구 그것에 대해서 내가 해석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것을 경험해준다는 거예요.
더 많이 경험하려고 애쓰는 게 아니고. 그냥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는 그대로. 왜 그럴까요? 왜 그렇게 해야 되는 걸까요? 일어나는 그대로가 지금 이렇게 일어나는 이대로가 진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진리가 아닌 게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에 등장하는 모든 것이 진리 아닌 것이 없습니다. 부처 아닌 것이 없다. 부처가 모든 것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숨도 쉬게 하고. 덩치도 크게 하고. 소화도 시키고. 나를 늙게도 만들고. 병들게도 만들고. 화가 나게도 만들고.
화나는 거는 중생이다? 화나는 것도 부처 자리에서 올라오는 거예요. 모든 파도는 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것들입니다. 바다와 둘이 아니에요. 손톱, 발톱, 저절로 자라거든요. 내가 애쓰거나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저절로 진리가 진리의 길을 늘 가고 있습니다.
그러데 우리는, 제가 그 말씀드렸지요. 최초의 분별. 이걸 나라는 착각. 나라고 분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꾸 ‘나다’ ‘너다’ 하는 이런 삿된 게임에 빠지니까, 자꾸 나한테 더 좋은 거 더 나쁜 거 이런 걸 찾기 시작하는 거예요.
사실은 일어나는 이대로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나라는 게 붙을 자리가 없어요. 모든 게 이렇게 일어나고 있을 뿐이에요. 꿈을 꾸면요. 꿈을 꾸면, 꿈속에 등장인물, ‘나’라는 등장인물이 있지요. ‘나’라는 등장인물이 있는데,
주변 배경도 있고 사람들도 있습니다. 꿈속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꿈속에 있을 때는 내가 있고 남이 있어요. 내가 남들과 싸우기도 하고. 내가 남들과 막 좋은 얘기를 하기도 하고.
무수히 많은 사람과 무수히 많은 사건을 일으킵니다. 꿈속에 있을 때만 ‘나다’ ‘너다’가 있지요. 실제 꿈 깬 사람 입장에서 보면 그 모든 게 하나의 꿈일 뿐이지요. 한 사람이 꾸는 꿈이에요. 꿈꾸는 자의, 하나가 꾸는 꿈일 뿐이잖아요.
실제는 너, 내가 따로 없지요. 그런데 꿈꾸는 그 안에 들어가서 꿈을 꾸는 동안은 ‘요건 나고’ ‘저건 남이다’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실제 진실은 너와 내가 아니었잖아요. 그냥 그 전체. 꿈이라는 바탕. 한바탕.
전체를 그냥 이렇게 보고 있을 뿐인 것이지요. 그 삶이 그냥 이렇게 일어나는데, 거기에 내가 꿈속에서 ‘요건 나고’ ‘요건 너야’ 이렇게 착각하니까. 꿈속에서 화도 일어나고 짜증도 일어나고 내가 진짜 꿈을 꾸는 것처럼, 진짜 삶을 사는 것처럼,
그런 일들이 벌어졌던 겁니다. 이게 내가 아니에요. 이 몸뚱이가 내가 아닙니다. 누가 나한테 욕을 해서 내가 감정적으로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상처받은 이 감정이 내가 아닙니다. 특정한 견해를 주장하는데 그 견해가 내가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제가 밴드에 올린 글을 보고서 되게 좀 충격을 받은 분들도 계세요. 나는 불교라는 진리를 믿고 따르고 불교라는 진리를 철석같이 믿고 따라야 되는데. 그렇게 믿고 따를 만한 뭔가 쥘만한 뭔가가 없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다.
모든 것. 딴 걸로부터는 자유인데. 불교가 여러분을 구속한다면 그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진리가 나를 구속한다면.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진리 그 자체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이 진짜, 그래서 실제 진리를 깨달은 자는 진리랄 것이 없는 거지요.
진리라고 내세울 뭔가 따로 없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옛날에 많이 했었던 거 같애요. 제거 어린 나이 때 출가를 해서 공부를 하면서 마음속에 누구나 이렇게 중생심이 올라오잖아요. 막 공부를 하면서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도인에 대한 환상?
‘부처가 돼야지’ ‘도인이 돼야지’ 도인이 되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도인 앞에 찾아와서 얼마나 많이 떠받들고. ‘야, 내가 정말 부처 같은 사람이 되면, 이 한국불교 이거 그냥 한방에 바꿀 수 있겠구나’ 뭐 이런 오만가지 생각.
그런 생각들이 있었어요. 뭐랄까. 참 그동안도 수많은 뭐랄까, 우리 역사 속에서도 수많은 도인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데 그들이, 저는 그 고민이 그 궁금함이 있었지요. 나는 이렇게 내가 도인이 되면 엄청난 일을 막 할 거라는,
세상을 뒤바꿀 거 같은 막 자신감이 있을 거 같은데. ‘왜 실제 깨달은 사람은 그런 짓을 안 하는 거지’ ‘왜 그걸 안 할까’ 이런 생각이 있었거든요. 왜 그럴까요? 이게 너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내세울 만한 게 뭔가가 따로 없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남들은 다 없는데 나한테만 가지고 있는 뭔가가 있으면 이게 이제 으쓱하고 어깨 힘도 주고 ‘너희들 이런 거 없지’ ‘난 이런 게 있다’
‘나한테 와서 잘 보이면 내가 이런 것 조금 조금씩 나눠줄게’ 이렇게 얘기할 수가 있는데. 다 있는 거니까. 누구에게나 다 있는 거니까. 그런 상을 낼 수가 없는 거예요. 낼 필요도 없는 것이고. 100%, 100% 가지고 있으니까, 누구나.
100%를 쓰고 있고. 매 순간 쓰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자랑할 거리가 없어지는 거지요. 상을 낼 거리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아무런 자랑할 만한 게 아닙니다. 누구나 다 쓰고 있는 것인데. 다만, 잠시 착각을 하는 것일 뿐인데.
그 착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낮추어 보이거나 이럴 수가 없습니다. 착각을 하는 거는 큰 문제가 아니거든요. 불교 공부를 오히려 많이 한 사람보다 공부 아예 안 한 사람, 많이 한 사람은 나름대로 으쓱함을 가지고 있잖아요. 안 한 사람보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 공부는 불교적 지식이 많은 것과 그렇게 큰 상관이 없을 수도 있어요. 다시 돌아와서요.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 그것을 그냥 허용해주고 그것을 그대로 그냥 살아주고 그것을 그냥 뭐랄까?
그것과 하나 되어 준달까요? ‘이 말의 의미가 뭔지를 명확하게 잘 모르겠다’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실 거예요. 이것, 100% 알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금 한 말의 의미를 온전히 100% 확 알게 되는 순간, 여러분들 그 순간 딱 자각하게 됩니다.
‘아! 내가 바로 부처였구나’를. 즉, 지금 괴로운 것과 괴로운 어떤 것과 막 싸우고 부딪치고 막 취하려 하거나 버리려 하거나 하던 취사간택의 게임을 계속하다가 ‘야, 이거 그냥 있는 그대로 허용해주는데, 이거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뭔지 모르지만 저게 진실 같으니까 저게 진실 같으니까 믿어보자’ ‘뭔지 모르지만 하여간 실천해보자’ 그런 마음을 가지고 모를 뿐입니다. 분명하게 선명하게 ‘알겠다’라고 생각해서 하게 되면, 알기 위해서 생각이 작동이 돼요.
생각으로 꿰맞춰요. ‘아, 이거 이렇게 하는 거겠다’ ‘저렇게 하는 거겠다’ 그런 생각하지 말고 ‘난 뭔지 모르겠다’ ‘그런데 저게 맞는 거 같으니까 난 지금부터 그냥 저렇게 한번 살아보겠다’ 그걸 발심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발심을 해서 문제와 계속해서 싸우다가 어느 순간 싸움을 멈추기 시작해요. 그래서 ‘이렇게 아파주겠다’ ‘상처받으면 상처받아 주겠다’ 그 상처받은 이 순간, 이것과 같이 있는 겁니다. 마음이 괴롭습니다. 마음을 가져와 봐라.
하면 ‘마음이 어딨지’하고 찾으면 찾을 길이 없거든요. 그 괴로운 마음을 그냥 있는 그대로 ‘관자재’ 자재하게 관해주는 거예요. 바라봐 주는 겁니다. 그것과 함께 있어주는 거예요. 문제를 없애려는, 없어진 상태를 추구하잖아요. 문제가 없어진 상태.
문제가 많은 상태거나 문제가 없는 상태거나. 문제가 있는 상태거나 없는 상태를 추구하고 살다가. 문득, 문제 있는 상태로 있거나 문제없는 상태로 있지요, 우리는. 우리는 이 상태에 집중했습니다. 문제 있는 상태를 문제없는 상태로 바꾸기 위해서 이 상태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상황, 나쁜 상황, 좋은 상황은 취하고, 나쁜 상황은 버리고, 상황을 조작해서 없애려고 하고, 이런 상황을 통제하려는 노력을 지금까지 계속 해왔는데. 문득, 좋은 상황에 있거나 나쁜 상황에 있거나 하는 위에 있는 상황을 내버려 두고.
상황에 좋은 상황이든 나쁜 상황이든 상황을 문제 삼지 않고. 좋은 상황으로 있잖아요. 나쁜 상황으로 있잖아요. 좋은 상황이든 나쁜 상황이든 언제나 변함없이 이렇게 있어요. 좋은 상황으로도 있을 수 있고.
나쁜 상황으로도. 여러분이 너무 괴로울 때도 괴로운 상황으로 있습니다. 서글플 때 서글픈 상황으로 있습니다. ‘그 있음’ 있음에 주목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존재하라는 거예요. 서글픈 상황이 오면 서글픈 상황으로 있어주는 겁니다.
존재해주는 거예요. 서글픈 상황을 서글프지 않는 상황으로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 서글픈 상황과 잠시 같이 있어주는 것이지요. 문제인 상황을 해결하려고 애쓰지 않고 그냥 문제인 상황으로 잠시 있어주는 겁니다.
그거는 어려운 것이 아니지요. 누구나 하는 것이고. 그럼 문제 있을 때도 할 수 있고 없을 때도 할 수 있지요. 언제나 해왔던 거니까. 해왔다고도 할 수가 없어요. 그거 아니면 우리가 존재할 수가 없으니까. 그게 우리의 존재니까. 존재 바탕이니까.
그렇게 있는 게 존재 밑바탕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 본래, 존재 밑바탕. 그 밑바탕에는 관심이 없고. 좋게 있을지 나쁘게 있을지, 좋고 나쁘고만 계속 관심을 가져놓으니까, 그 좋고 나쁜 건 왔다가 가잖아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잖아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 있는 거를 가지고 목매며 살면. 우리의 삶은 인생 상황에 통제되는, 조종되는, 조종 당하는 노예같이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이 일어나도 좋은 상황, 나쁜 상황, 모든 상황이 일어나든 우리는 그 상황으로 있어요,
언제나. 그 있는 그 배경. 그 바탕. 그 존재 밑바탕. 여러분들의 본래 성품. 그 자리로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을까요? 괴로운 상황이 왔을 때 괴로운 상황을 없애려고 애쓰다가 괴로운 상황을 훅 받아들여주기 시작하면 괴로운 상황과 잠시 같이 있어주기 시작하면.
괴로운 상황도 같이 있어주고 괴롭지 않은 상황도 같이 있어주고. 좋은 상황 나쁜 상황 할 것 없이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고. 있는 그대로 허용해주고. 허락해주고. 그대로 그 삶을 살아주기 시작하게 되면. 취사간택심이 사라져서
이 상황. 좋은 상황 나쁜 상황에 끄달려가는 삶이 끄달려가려는 생각이 놓이게 됩니다. 저절로. 그러면서 문득, 어느 순간 문득, 본래 있었던 ‘있음’ 본래 있었던 이 존재 그 자체. 상황을 쫓아다니던 마음이 딱 쉬어지니까,
그냥 이대로 턱 받아들여주니까. 삶을 통째로 받아들여주니까. 통째로 허용해주고 통째로 그냥 그것을 살아주기 위해 애쓸 게 없지요. 애쓰지 않기 시작하니까. 그렇게 하게 되면 그 10년, 20년, 30년, 나를 괴롭히던 그 과제가 나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가장 위대한 뗏목이 됩니다.
그러고 여러분들은 스님들한테 가서 수행법을 타거든요. 화두도 타고, 제가 염불이 좋을까요? 다라니가 좋을까요? ‘사람에 맞는 수행법이 있으니까, 그거를 스님들한테 가면 알려주겠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알 수가 없습니다.
그걸 타러 다닐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들은 이미 그 수행법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처한 상황, 그것으로써 이미 본인에게 어떤 수행이 가장 적절한지를, 이미 다 가지고 있어요. 나에게 최적화된 수행법. 누가 갖다 준거? 부처님이 가져다준,
법신 부처님께서 늘 삶으로 이렇게 가져다준 가장 최적화된 진리. 그 진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만, 내 머리로 분별해서 취사함으로써 그걸 보지 못했을 뿐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그냥 턱 내맡기고, 있는 그대로 그냥 삶을 그대로 바라보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있는, 그대로 허용해주고 있는, 그대로 살아주고. 아플 때 아파해주고 힘들 때 힘들어해주고 그것과 잠시 이렇게 있어주는 거예요. 무엇 또 문제가 있을 때, 우리 마음을, 몸과 마음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돼요. 이 문제를 없애기 위해서 TV 속으로 도망가거나, 스마트폰 속으로 도망가거나, 남들하고 건수를 만들어서 수다 떨거나 술 먹는 걸로 도망침으로써 그 사건과 마주하기 싫어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명상이 그래서 나온 거예요. 그 문제가 나왔을 때, 그 문제가 너무 힘드니까 잠 속으로 빠져들든지 스마트폰이나 뭐 친구들과 수다, 이런 속으로 빠져들지 말고. 잠깐 멈춰 서서 그것과 함께 있어줘보라는 거예요.
이거를 회피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들을 여러분들은 평생 연구해서 발전시켜 왔거든요. 그것들을 작동시키기 전에 ‘아! 이 괴로움이 올라왔구나’ 이거를 회피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 방법들? 그걸 동원시키기 전에 잠시 그것과 함께 있어주자.
어떤 분은 이러더라구요.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몰랐는데. ‘야, 정말 그대로 그냥 있어줘야지’ 하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자꾸 뭔가 이렇게 도망치려 든 그런 마음을 갖지 말아야지’ 하다가. 뭔가 그런 마음이 일어날 때
자기 자신을 보니까 자꾸 피하려고 하고 자꾸 도망치려고 하다가 그냥 잠시, 그냥 소파에 이렇게 앉아서 잠시 그것과 함께 있어주는 시간을 자꾸 가지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힘들 때마다 그 힘듦과 잠시 있어주는 시간.
힘들 때 어디 도망가기보다는 그것과 잠시 같이 있어주거나, 아니면 어디 산책을 하면서 막 생각하거나 노래 듣거나 이러지 않고 그냥 그것을 그대로 올라오도록 허용해주고. 그런데 신기하게도 오히려 올라오라고 허용해주려고 있으면
‘올라와라’ ‘올라와라’ 하는 것도 작업이에요. 노력하는. ‘그냥 허용해줘야지’ 하는데 갑자기 사라져버려요. ‘이거 허용해줘야지’ ‘관찰해줘야지’ ‘있는 그대로 그냥 관해줘야지’ ‘오케이!’ 하고 바라보기 시작하면 벌써 얘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버려요.
그래서 여러분에게는, 여러분 삶이라는, 여러분 자신이라는, 또 괴로움이라는, 놀라운 공부 주제 공부거리가 항상 구족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절에 와서만 수행한다? 그게 아닙니다.
삶에서 그대로 이렇게 실천하는 공부. 그것을 공부로 삼으시면 되겠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하겠습니다. 〜 박수
첫댓글 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뭐라도 드려야 할 텐데...
법우님~~
새가 참 이뽀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하이얀마음 청계산에서.. 곤줄박이...
곤줄박이는 참새목 박새과의 새인데 귀여운 우리의 텃새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의 접근이 빈번한 국립공원이나 절 등에 사는 개체는 손바닥에 땅콩이나 잣 등을 올려 놓고 가만히 있으면 날아와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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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