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태신앙으로, 수없이 출애굽기를 읽었음에도 이해하지 못했던 십보라의 고백.
그저 익숙한 틀로 바라보았던 모세와 아론의 관계.
이것이 새롭게 읽히고 다가와 재미있고 신기했어요.
출애굽기를 새롭게 만나고, 새로운 동지들도 풍성하게 만난 두 번째 공부.
다시 돌아보며 또한 새롭게 깨닫습니다.
히브리인이면서 이집트 공주의 아들이기에 겪어야 했을 갈등과 방황.
사도행전 7장에서 바울은 모세가 그 고민의 결론을 이렇게 맺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손을 빌어 내 동족을 구원하시려는 뜻이구나.”
모세가 40세 때 삶의 질곡을 지나며 스스로 깨달았던 이 부르심과
모세가 80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부르심은 같지만,
모세가 스스로 그 뜻을 이루려고 했을 때와 하나님 음성에 귀기울이며 따라갔을 때의 결과는 전혀 다르지요.
모세가 미디안 땅으로 도망쳤을 때, 그렇게 혈혈단신이 되었을 때 느꼈을 좌절감.
목자로 40년을 살았으면 그 좌절감도 희미해지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가 규정했던 자신에 대한 여러 가지 틀거리(외적 자아)들도 사라지지 않았을까.
그렇게 자신의 기호/호불호/취향 - 자기 중심성이 깨졌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어요.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은 위로도 아니였고, 일방적인 명령이였다는 이야기가
강의를 들을 때는 '그렇지, 그러셨지.' 하며 깊이 공감했는데
다시 성경을 읽으며 모세의 삶을 그려보니
도망쳐 광야에서 40년을 산 모세는 거짓나에서 벗어나며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기에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 없었던 것이고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는 부르심도
이미 모세가 깨닫고 마음에 품었던 것이기에 일방적인 말씀이 아니였구나 했습니다.
분명 뭔가 하나님 뜻이 있을거야 하는 생각과
하나님은 너무 일방적이시고, 위로도 해주지 않으신다는 생각.
어떤 일을 겪으며 이 두 가지 생각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괴로운 시간을 보냈어요.
그런데 이것이 저의 기호/호불호/취향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는 것.
인과를 설명하신 것처럼 제가 좋은 흙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
.
.
.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불이 아닌,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에 빠져있는 마음.
신발을 벗고 앉아, 하나님과 만나는 고요와 침묵을 지켜가는 것이
그 마음을 건져내는 길임을 다시 확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