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평구전집> 본지의 목표
나는 소년 시절 부친의 심한 도덕적 교훈과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길에서 신문지 한 장을 주워도 부친은 이를 파출소에 전하게 했다. 따라서 차츰 자의식이 들면서 나의 생활은 얇은 살얼음판 위를 밟는 식의 도덕적인 노력에 집중, 심한 양심의 고민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교회생활로써, 소위 예배 참석과 선행과 봉사, 사업 등으로 어느 정도 이를 극복, 또한 이를 기독교 신앙으로 알고 감사했다.
그러나 김교신 선생의 <성서조선>지를 접하고 나의 양심 문제가 교회 출석과 선행, 봉사 등으로 해결된 것같이 생각한 것은 결국 일시적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심한 고민에 빠진 나는 성서에 의한 이의 철저한 해결을 위해 1936년 일본 도쿄 행을 결행, 쓰카모토(塚本虎二) 선생의 일요 성서연구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그 해 7월 신슈(信州高原) 선생의 하계 성서연구회 고린도후서 강의에서 비로소 나의 어깨에서 죄의 짐이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떨어져 나가는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했다.
이로써 사탄과 세상과 죄와 죽음의 지배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과 생명의 지배 아래 옮겨져,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고 나의 영육과 우주 만물의 완성을 믿는 산 기독교신앙, 천국신앙에 들어갔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죄의 문제의 해결이야말로 기독교의 중심이며 이를 위해 소위 교회 생활, 의식, 사업 등은 다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이는 오늘날 진정한 복음적 구원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게 되었다. 이 점 교리니 기독교 신학, 치병(治病), 금욕, 수도생활 등도 하나님의 구원인 예수의 복음 자체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것이다. 복음은 성서 속에 계시되어 있으며, 누구나 성령의 지도에 의해 성서 한 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는 바이다. 나는 이것아 루터의 개혁신앙, 신앙만의 신앙의 궁극적 귀결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위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리스도를 심중에 모시고, 아래로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도덕적 생활이면 그만이다. 성실, 정직한 하나의 인간으로 재질과 품성, 천직과 사명, 직업과 일상생활을 통해, 훌륭한 시민으로 살면 그만이다.
직업에 귀천이 있을 수 없고, 부귀의 노예 되지 말며, 지위와 사(私)보다는 직책과 공(公)과 낮은 자리에 충실할 것이며, 신앙의 정절과 기쁨으로 주색(酒色)과 불건전한 오락은 피해야 한다. 열광보다는 상식, 굴종이 아닌 자유, 협동과 봉사보다는 독립과 독행(獨行), 사업보다는 인격과 사상, 사교보다는 고독과 근면으로 신앙생활이 전체 깨끗한 가정을 중심으로 영위되어야 한다.
이것이 나의 신앙체험이고 기독교 이해이며 무교회신앙이다. 또한 신앙생활이고 애국이기도 하다. 나아가 본지의 신앙 목표이기도 하다. <성서연구> 지령 100호에 즈음하여 다시 한번 이를 분명히 하는 바이다.
<성서연구> 제100호 (1962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