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여석(安如石)
1派18世-참판공파
병조참판(兵曹參判)
【성 명】 안여석(安如石)
【생몰년】 1630(인조 8)∼1695(숙종 21)
【본 관】 순흥(順興) 안(安)
【자·호】 주국(柱國)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문신
1630(인조 8)∼1695(숙종 21).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주국(柱國)이다.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호조정랑을 지낸 안연(安鋌)의 손자이며 안수성(安壽星)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현종 7년(1666)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해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674년 주서(注書)가 되고, 1675년(숙종 1) 장령(掌令), 1676년 정언(正言)·헌납(獻納)이 되었다.
이때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대상일(大祥日)에 술에취해 인사불성한 부사과(副司果)홍만용(洪萬容)을 파직시키라고 장계를 올렸다.
그해 장령(掌令)사간(司諫)을 거쳐, 1677년 10월에 변무사(辨誣使)의 서장관으로
정사 복평군(福平君)정(楨)과 같이 청에 갔다 오고,
그 이듬해에도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의 서장관으로 정사 이하진(李夏鎭)과 같이 청에 갔다 왔다.
1679년 좌부승지, 1680년 의주부윤으로 있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689년 충홍도관찰사를 거쳐 1693년까지 승지로 있다가 그 이듬해 병조참판이 되었다.
당쟁이 치열한 시기임에도 어느 당에도 편당되지 않았고 자기 본분에만 충실하였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定齋集
雪山齋遺稿 -남명학연구소
안여석(安如石)에 대하여
1630(인조 8)∼1695(숙종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주국(柱國).
안유(安裕안향)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안수성(安壽星), 동생은 안여악(安如岳)이다.
1666년(현종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0여년이 지난 뒤 주서를 비롯하여 대간에 들어가 장령·사간·집의 등을 거쳤고, 1677년(숙종 3)에는 변무사(辨誣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바 있으며, 이후에는 승지로서 오래도록 봉직하였다.
1689년에는 충홍도관찰사(忠洪道觀察使)를 역임하고, 1694년에는 병조참판을 지낸 뒤 이듬해 죽었다.
인품이 성실하여 당시 당쟁이 반복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편당(偏黨)에 치우치지 않고 본분에만 충실하였으므로
높은 관직에 오르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크게 화를 당하지도 않았다.
[부]안수성(安壽星)
[조부]안정(安鋥)初諱안정(安鋌)
[증조부]안사인(安士訒)
[처부]최성(崔晟), 본적 : 강화(江華)
[외조부] 성명 : 홍득일(洪得一), 본적 : 남양(南陽)
[제]안여악(安如岳)
1630(인조 8)∼1695(숙종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주국(柱國).
안유(安裕안향)의 후손이며, 증조는 사인(舍人)이고, 할아버지는 안정(安鋥)이며,
아버지는 안수성(安壽星), 동생은 안여악(安如岳)이다.
1666년(현종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0여 년이 지난 뒤 주서(注書)를 비롯하여 대간에 들어가 장령(掌令)·사간·집의(執義) 등을 거쳤고,
1677년(숙종 3)에는 변무사(辨誣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바 있으며, 이후에는 승지로서 오래도록 봉직하였다.
1689년에는 충홍도관찰사(忠洪道觀察使)를 역임하고, 1694년에는 병조참판을 지낸 뒤 이듬해 죽었다.
인품이 성실하여 당시 당쟁이 반복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편당(偏黨)에 치우치지 않고 본분에만 충실하였으므로
높은 관직에 오르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크게 화를 당하지도 않았다.
[중앙관] 조선중기 중앙관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1678 [무오(戊午) 11월 초7일] 집의(執義)
[중앙관] 조선중기 중앙관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1673 [계축(癸丑) 4월 초8일] 정(政) 승문정자(承文正字)
[중앙관] 조선중기 중앙관 호조참의(戶曹參議)
[지방관] 조선중기 지방관 강원도(江原道) 강릉부사(江陵府使) 1681[신유(辛酉)] 5월~1683 [계해(癸亥)] 체(遞: 교체)
[지방관] 조선중기 지방관 강원도(江原道)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1691[신미(辛未)]
송자대전(宋子大全) 부록(附錄) 제7권-연보(年譜) 6
7월 종묘에 고하고 절도(絶島)에 귀양 보내자는 논의가 나왔다가 곧 중지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집의 남천택(南天澤)ㆍ장령 이복(李馥)이 윤휴의 의사에 영합하여 또 선생을 절도(絶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고, 이어서 방례(邦禮)를 이정(釐正)한 것으로써 종묘에 고하고 중외(中外)에 반고(頒誥)하기를 청하였다. 지평 권해(權瑎)ㆍ안여석(安如石)이 말하기를,
“종묘에 고하고 교서(敎書)를 반포하는 것은 반드시 역적을 토죄(討罪)한 일로 인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모(某 송시열을 가리킨다)가 종통(宗統)을 어지럽힌 죄는 진실로 천토(天討)를 도피할 수 없으나, 성조(聖朝)가 관대하시어 이미 죽지 않게 처분하였으니, 갑자기 역적 토죄하는 법전으로 시행하는 것은 아마도 마땅하지 않을 듯합니다. 지금 전례(典禮)가 이미 발라져서 신인(神人)이 기뻐하고 사방(四方)이 흠앙하니, 어찌 반드시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한 뒤에야 국시(國是)가 밝아지겠습니까. 또 종묘의 예는 지극히 엄하므로 전장(典章)에 실리지 않은 것으로써 번독(煩讀)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인가에서 일이 있으면 고하는 것과 그 예가 같지 않은데, 어찌 그것을 끌어대어 증거로 삼아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인피(引避)하였다.
연려실기술 제32권- 숙종조 고사본말(肅宗朝故事本末)-갑인년과 을묘년 사이의 시사(時事)
○ 지평 권해(權瑎)ㆍ안여석(安如石)이 피혐하고 아뢰기를, “송시열이 종통을 어지럽게 한 죄는 처형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조정에서 관대하게 하여 죽이지 않기로 하셨으니, 지금 갑자기 역적을 토벌하는 법을 시행하게 되면 적당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또 종묘의 예가 지극히 엄하니, 전장(典章)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신령에게 번거롭게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본문(조선왕조실록)
현종 15년 갑인(1674, 강희 13)2월 13일(무신)
민암·이익태·안여석·유상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민암(閔黯)·이익태(李益泰)를 지평으로, 안여석(安如石)을 주서로, 유상운(柳尙運)·조근(趙根)을 교리로, 이하진(李夏鎭)을 수찬으로, 민종도(閔宗道)를 병조 참지로, 이무(李堥)를 헌납으로, 정면(鄭勔)을 장령으로 삼았다.
숙종 1년 을묘(1675, 강희 14)6월 1일(무오)
곽제화·오정창·이복·안여석·권계·민희·홍우원·남천택·이덕주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곽제화(郭齊華)를 사간(司諫)으로, 오정창(吳挺昌)을 부응교(副應敎)로, 이복(李馥)을 장령(掌令)으로, 안여석(安如石)·권계(權瑎)를 지평(持平)으로, 민희(閔熙)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홍우원(洪宇遠)을 겸 대사성(兼大司成)으로, 남천택(南天澤)을 집의(執義)로, 이덕주(李德周)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숙종 1년 을묘(1675, 강희 14)8월 19일(갑술)
정창도·이복·안여석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창도(丁昌燾)를 집의(執義)로, 이복(李馥)을 사간(司諫)으로, 안여석(安如石)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숙종 2년 병진(1676, 강희 15) 1월 24일(정미)
김해일·목창명·심단·강석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해일(金海一)을 장령(掌令)으로, 목창명(睦昌明)을 교리(校理)로, 심단(沈檀)을 지평(持平)으로, 강석빈(姜碩賓)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정창도(丁昌燾)·조사기(趙嗣基)·이하진(李夏鎭)을 승지(承旨)로, 안여석(安如石)을 정언(正言)으로, 이명익(李溟翼)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숙종 2년 병진(1676, 강희 15)3월 3일(을유)
이정영·목내선·정지호·유명현·안여석·강석빈·이후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정영(李正英)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목내선(睦來善)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정지호(鄭之虎)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유명현(柳命賢)을 부응교(副應敎)로, 안여석(安如石)을 헌납(獻納)으로, 강석빈(姜碩賓)을 수찬(修撰)으로, 이후(李煦)를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숙종 2년 병진(1676, 강희 15)10월 18일(정묘)
권유·안여석·유명견·강석구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권유(權愈)를 사인(舍人)으로, 안여석(安如石)을 사간(司諫)으로, 유명견(柳命堅)을 수찬(修撰)으로, 강석구(姜碩耉)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숙종 3년 정사(1677, 강희 16)11월 5일(무인)
정중휘·이원록·권대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중휘(鄭重徽)를 도승지(都承旨)로, 이원록(李元祿)을 우승지(右承旨)로, 권대재(權大載)를 대사헌(大司憲)으로, 박상형(朴相馨)·유성삼(柳星三)을 장령(掌令)으로, 이후정(李后定)을 지평(持平)으로, 이봉징(李鳳徵)을 수찬(修撰)으로, 이항(李沆)을 응교(應敎)로, 안여석(安如石)을 집의(執義)로, 강석구(姜碩耉)를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서장관(書狀官) 안여석(安如石)
숙종 5년 기미(1679, 강희 18)6월 5일(무진)
안여석·오정위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안여석(安如石)을 승지(承旨)로, 오정위(吳挺緯)를 좌참찬(左參贊)으로 삼았다.
좌부승지 안여석(安如石)
병방 승지(兵房承旨) 안여석(安如石)
만윤(灣尹) , 의주 부윤(義州府尹) 안여석(安如石)
충홍도 관찰사(忠洪道觀察使)
강춘 관찰사(江春觀察使)
숙종 20년 갑술(1694, 강희 33)1월 3일(신축)
이봉징(李鳳徵)을 부제학(副提學)으로, 목임중(睦林重)을 수찬(修撰)으로, 오상문(吳尙文)을 헌납(獻納)으로, 홍주진(洪柱震)을 장령(掌令)으로, 나만영(羅晩榮)을 지평(持平)으로, 배정휘(裵正徽)를 승지(承旨)로 삼고, 안여석(安如石)을 특별히 승진시켜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삼았다.
숙종 20년 갑술(1694, 강희 33)
동지의금부사 안여석(安如石)
兵曹參判安公行狀
公諱如石字柱國姓安氏。其先順興人。上世有文成公諱裕。仕高麗都僉議中贊。建國學敎學子。爲吾東百世儒宗。號晦軒。至諱瑗。在前朝刑曹典書。入我朝留守松京。遂不起。贈諡景質。生六子。子孫多貴顯。爲東方大族。自是世襲簪組。至諱審。成均生員贈司僕寺正。爲公高祖。曾祖諱士訒贈承政院左承旨。祖諱鋥。屢典州郡。政績著。止戶曹正郞。贈戶曹參判。考諱壽星。以文學稱。屢捷南省。不幸早世。以公貴贈戶曹參判。妣贈貞夫人南陽洪氏。觀察使諱得一之女。崇禎三年生公。夙有異質。外翁大奇之曰阿童有器度。當遠到。丙子虜變。擧家避兵。至廣州廉峙。虜兵已充斥。交刃劫一行。參判公父子競死。公蒼黃脫衣哀號乞身代。羣胡相顧感歎而釋之。公時甫七歲。未冠宅參判公憂。執禮毁幾滅。承重服亦如之。旣孤益專意居業。竆曛旭匪懈。顯宗七年選國子上舍。與季如岳聯名。翌月登明經試屬槐院。越四年庚戌遭內艱。服闋甲寅始除承政院注書。陞典籍兼中學敎授。除兵曹佐郞。肅宗元年拜司憲府持平。時邦禮始正。掌令南震萬發告廟疏。公以爲祀典討賊則告廟。不載典禮。不可擧。修撰金奐是公議。請罷震萬。上允之。尋出爲畿甸繡衣使。明黜陟釐隱瘼。復命陞掌令。二年拜獻納。俄除安岳。以善績聞。特賜表裏奬之。明年召爲執義。三年進香使入燕。公以書狀官行。還爲執義。尋陞承政院同副承旨。歷踐左右。出納惟允。六年春。備局薦授龍灣尹。公素剛忤時相。時廷議將擬公西界伯。及除書下。衆論譁如。時相諉之曰斯人度支器。先試諸北門爾。居無何黨人當國。臺臣啓言失時人不可置管轄。當路者以其失中遞臺職。仕滿移江陵,慶州。居外凡八年。兵使摭公在慶籍兵年未滿。編配利川。兵使嘗到府失朝體。公拏治其幕官。爲媿屈而卒嗛之。十四年秋。爲靈光守。未辭陛。素善一宰臣來諭曰姑徐徐。以觀時象。公不應。翌日促裝行。未幾宰臣果當路。復以書貽致慇懃意。爲言本道伯及苽。公不修答。十五年除湖西觀察使。承命到營。以病啓遞。入爲兵禮曹參議。補南陽府使。翌年移戶曹參議。爲楊州牧不赴。廷議薦公將帥才。陞資爲平安道節度使。大臣尼之不果赴。十七年爲江原道觀察使。大臣又欲沮。公議皆不可。大臣黽勉從之。時嶺東大飢。公殫心賑濟。大修荒政。屢上章抗廟堂議。使一方賴以全活。明年爲冬至副使。筵臣以老白上遞。二十年春。朝廷有收議事。公獻議。上嘉納。特超兵曹參判。未幾黨人復進用。廷臣或竄貶或擯斥。令不容於朝。公猶晏如也。轉移漢城左右尹。連擬都憲畿伯。二十一年爲刑曹參判。九月四日卒。享年六十有六。其十月十二日。葬于廣州梧里洞負子壠。公深重有度量。謹厚謙退。見識遠而制事中窽。性孝友。事王父大夫人忠養之。常以早孤失祿養爲恨。對方丈輒涕泫然下。祀事尤盡誠。至老孺慕不衰。季翰林公爲知己。相資益。旣夭撫遺孤如己子。自少述家典治詞學。兼肄博士業。博而肆。旣釋褐。恬靜自守。旣十年始調。曁登臺省。風裁持重。不顧其利害。莅方邑。務德惠尙儉約。不爲資庄計。去後輒有治迹碑。通仕籍三十年。枳於時。屢屈外。官不稱才。人多惜之。公嘗言不有命乎。希世苟合。非吾志也。挽近世黨議睽乖。士大夫立身。鮮能自制。苟非比于同。往往附以勢。一進一退。倚伏不旋踵。惟公不比不附。不以忮求置諸中。超然自在。素履無咎。當世謂厚德長者。後之人稱衰世完名。於古有之否。方諸范太史。其庶幾焉。貞夫人崔氏。籍江華。通德郞晟之女。戶曹判書琇之曾孫。吏曹判書東里鄭公世規之外孫。夫人早失恃。長于東里家。敎之惟義方。有女士風。旣歸媲德稱內相。後公二十一年卒。祔公墓。生一男四女。男澤萬。文行稱於士友。早歿。生四男二女。男就仁進士。就義出后。就日就賢。女婿鄭宜璉,尹命衡。女長適正字崔鎜。繼子德海。次丁善重。繼子錫儁。次進士韓德鳳。繼子光道。女洪衡輔。次進士金衡潤。女進士丁恒愼。曾玄二十餘人。曾孫進士有相。輯公行錄。其子進士景禕。請狀於德吉。乃其先志云。
하려선생문집(下廬先生文集)下廬先生文集卷之十七 行狀 황덕길(黃德吉)
안사인(安士訒認)ㅡㅡㅡ>안연(安鋌)안정(安鋌鋥)ㅡㅡㅡ>안수성(安壽星)ㅡㅡㅡ>안여석(安如石),안여악(安如岳)
안응회(安應會)ㅡㅡ>안승(安陞)ㅡㅡ>안수함(安壽咸),안수성(安壽成)ㅡㅡ>안집(安潗)(安鱆)ㅡㅡ>안성빈(安聖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