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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문
가고 돌아옴이 끝이 없으나 움직이고 고요함은 한 근원이라.
온갖 미묘함을 함유하고도 여유가 있고 말과 생각을 초월하여 멀리 벗어난 것은 오직 법계(法界)뿐이로다.
往復이 無際나 動靜은 一源이라
왕복 무제 동정 일원
含衆妙而有餘하고 超言思而逈出者는 其唯法界歟며
함중묘이유여 초언사이형출자 기유법계여
제1門,宗體를 들어서 표시하다[標擧宗體]
往復이 無際나/ 動靜은 一源이라/ 含衆妙而有餘하고/ 超言思而逈出者는/ 其唯法界歟며
가고 돌아옴이 끝이 없으나 [1, 法界의 用大]
움직이고 고요함은 한 근원이라.[2, 법계의 體大]
온갖 미묘함을 함유하고도 여유가 있고[3, 법계의 相大]
말과 생각을 초월하여 멀리 벗어난 것은 [4, 융합하고 떨어버림]
오직 法界뿐이로다.[5, 법의 소속을 결론함]
제1門, 標擧宗體
宗體를 들어서 표시하다
표거종체(標擧宗體): 종체를 드러내다. 마루 종(宗)자는 으뜸,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종교(宗敎)는 가장 으뜸되는 가르침이다. 종체(宗體) 으뜸되는 몸, 주체다. 결국 세상의 근본, 사람이 살아가는 일의 근본과 기본을 종체라고 한다.
왕복서에서는 처음부터 우주법계의 종체를 설명한다. 법계는 불교의 가장 근본되는 종지(宗旨)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세계와 그것을 그렇게 존재하게 하는 바가 법계다. 세계(우주)와 진여(법성)가 모두 융합되어 구분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사람도 우주도, 사람의 마음도 진리도 다 법계라고 표현한다. 법계를 사람이다, 나다, 너다, 마음이다 라고도 표현한다. 나와 사람과 마음이 그대로 법계이고 이것은 곧 진리의 세계다.
개개인의 사람들에게 이 법계가 다 갖추어져 있다.
불교는 ‘나무가 어떻게 크는가’ ‘고기가 어떻게 자라는가?’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기술이나 한쪽으로 치우친 철학을 가르침도 아니다.
부처님이 맨처음 우주법계를 통틀어서 그것이 존재하는 원리를 깨달았고, 그 깨달은 바를 그대로 설하고 가르친 것이 불교다.
그러므로 불교는 '우리 인생이 어떤 것인가, 사람은 무엇인가'를 가르친다.
아무리 방대한 경전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사람을 이야기한다.
또한 화엄경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대상에 상관없이 당신의 깨달음을 오롯이 전한 경전이기 때문에 우주법계를 논하는 경전이다. 이 화엄경에서 우주법계의 원리를 다 논하지 못한다면 다른 어떤 경전에서도 논할 수가 없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것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우주법계의 존재원리를 공부함으로써 그 원리에 맞게 우리의 삶을 잘 살아가려는 것이다.
화엄경을 꿰뚫어보신 청량스님은 왕복서의 첫 시작부터 화엄경이 설명하는 대상인 우주법계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1, 法界의 用大
往復이 無際나
가고 돌아옴이 끝이 없으나
*
법계(法界)의 용대(用大):법의 체(體)는 본체이고 용(用)은 작용이며 상(相)은 모습이다. 그것이 광대무변하므로 여기에 대(大)자를 붙여서 체대 상대 용대라고 해서 법계를 설명한다.
첫구절의 단 두 줄로써 법의 작용이 광대무변한 것을 보여준다.
*
왕복(往復)이 무제(無際)나 : 갈 왕(往)자 돌아올 복(復)자, 왕복한다고 할 때의 왕복이다. 모든 것은 왕복으로 되어 있다. 여러분은 오늘 문수선원으로 공부하러 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돈을 벌고 쓴다. 한 생각을 일으켰다가 그 생각이 사라진다.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돈을 버는 것은 왕(往)이고 돈을 쓰는 것은 복(復)이다. 공부하는 것은 왕(往)이고 자기가 공부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고 회향하는 것은 복(復)이다.
계절도 왕복하고 우리 일상도 왕복한다.그것이 일정기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제(無際)다. 즈음 제(際)자는 끝이라는 뜻인데 무제라고 하였으니 한계나 끝이 없다는 이야기다.
우주 법계의 작용이 가고 옴에 있어서 끝이 없다.
사람만이 아니라 꽃 한송이도 그렇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렇다. 만약 왕복무제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죽은 물건이다. 사실은 죽은 물건도 변화한다. 낙엽이 지고 썩으면 거름이 되고 다시 새로운 식물의 영양분이 되어 새로운 식물로서 살아간다. 이 또한 왕복무제다.
나보다 세상경험이 많은 여러분은 인생사에 있어서 왕복무제가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참 그렇구나’하고 수십 번 무릎을 칠 것이다.
법계가 왕복무제함을 알았다면 우리 육신의 죽음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죽는 것이 왕(往)이라면 다시 태어남은 복(復)이다. 그것 역시 끝없이 왕복한다.
벌써 이 한 구절만 가지고도 여기에 온 보람이 있다.
모든 것은 왕복무제로써 존재하므로 우리 생활에서도 이 원리를 대입시켜서 살아가야 한다. 주머니에 들어간 것도 좀 나와야 된다. 나가면 또 들어오게 되어 있다. 끝없이 왕복무제 하는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걱정하고 집착한다.
우주의 원리를 가르친 성인의 가르침을 수긍하고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인생이 가벼워지고 쉬워지고 넉넉해질 것이다. 지금 아무 것도 없어도 걱정을 덜하게 될 것이다.
감기가 들어도 며칠 쉬면 낫겠지 하고 생각할 줄 아는 것이 법계가 왕복무제임을 아는 일이다.모든 것이 왕복무제임을 알면 아무 것도 정할 필요 없이 아주 편안하고 넉넉하게 사는 이치가 열린다.
2, 법계의 體大
動靜은 一源이라
움직이고 고요함은 한 근원이라.
*
법계의 체대(體大): 법의 본체가 광대무변하므로 체대라고 하였다.
*
동정(動靜)은 일원(一源)이라: 움직이고 고요함은 한 근원이라. 움직일 동(動)자, 고요할 정(靜)자 한 일(一)자, 근원 원(源)자다. 움직이고 고요한 것이 그 근원자리는 하나다. 동과 정이 항상 함께 한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우주법계의 작용은 끝없이 오고간다. 우리 마음도 온갖 것이 오고가고 움직임과 고요함이 반복한다. 그런데 그 본체에 있어서는 한마음자리이며 한 근원이다.
마음은 보이지 않으므로 눈에 보이는 몸으로 이것을 설명해도 좋다. 예를 들어 오늘 아침 우리는 일어나서 이 순간까지 얼마나 많은 작용을 했는가. 이불을 개고 대소변을 보고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목욕을 하고 밥을 먹고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온갖 일을 다 했다.
밥을 한 번 먹는 동안에도 숟가락을 들었다 놨다 치아로 음식을 씹었다가 삼켰다가 그렇게 많은 작용을 하였다.
여기 공부하러 와서도 글씨를 쓰다가 멈추고 멈췄다가 다시 쓰고, 움직였다가 쉬고 쉬었다가 움직이는 것을 반복한다.
그렇게 온갖 몸짓을 했는데도 여러분의 몸은 어디에 있는가. 그대로 몸으로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나는 항상 나다.
몸짓을 갖가지로 해도 그대로 몸이라는 것을 이해했다면 마음으로 바꿔 생각해 봐도 똑같다. 마음은 온갖 기쁨과 슬픔과 분노와 사랑을 다 일으키고 별별 작용을 한다. 착한 마음, 공부하려는 마음, 남 미워하고, 시기질투하고, 욕하고, 화내는 마음을 한꺼번에 쓴다. 그렇게 마음을 쓰는 것은 동(動)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은 잠잠해져서 평상심으로 돌아온다. 움직이는 마음과 고요한 마음이 따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한 마음에서 그렇게 반복을 할 뿐이다.
바다에 물결이 치는 것도 그렇다. 바람에 나부끼는 물결은 수천 수만 가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물결을 일으키지만 항상 물이다. 근본은 늘 하나다.
우리도 삶에서 온갖 풍파를 다 겪지만 그 온갖 풍파는 나라고 하는 이 한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무리 가고 오고 숨을 들이 쉬고 내 쉬고 왼발 오른발이 왕복하지만 어디에 갔든 왔든 관계없이 항상 그 자리에 내가 있다. 마음이나 몸이나 똑같이 하나의 근원으로 존재한다.
깨어있는 눈으로 보면 세상사와 인생사와 몸과 마음이 모두 기 동정일원(動靜一源)이다.한 근원자리에서 이런 일도 일어나고 저런 일도 일어나고 온갖 일들이 일어난다.
왕복(往復)이 무제(無際)나 동정(動靜)은 일원(一源)이다.
왕복서의 이 첫 구절 하나만 하더라도 천둥과 같다. 가고 오는 것은 끝이 없으나 그 근원자리는 하나다. 하나에서 동과 정이 있고 가고 옴이 있다.
화엄경을 공부하면서 온 시방에 두루하지만 오고 감이 없고 오고 감이 없이 또 오고 간다. 이 여덟 자를 가지고 10년을 설명해도 모자랄 것이다.
우주 삼라만상 인생이 전부 이 속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다른 경을 공부하다 화엄경을 보니 이렇게 차원이 다르다.
3, 법계의 相大
含衆妙而有餘하고
온갖 미묘함을 함유하고도 여유가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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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의 상대(相大) :이 부분은 법계의 모습인 상(相)이 광대무변함을 밝히는 내용이다.
다음에 공부할 왕복서 3문에서는 부유만덕(富有萬德)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말은 우리 마음이 좋은 점만을 가득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좋은 점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묘라고 하는 것은 좋은 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늘 ‘사람이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 인불사상(人佛思想)을 이야기 한다. 사람의 미묘한 작용이라는 것은 선한 일만 한다고 해서 미묘한 작용이 아니다. 사기치고 나쁜 일하고 남 욕하고 모함하는 것도 미묘한 작용이다.
사람의 마음작용이 아니면 어찌 사기를 칠 수 있고, 남을 속일 수 있고, 모함할 수 있는가. 선행만이 능력이 아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다 대단한 능력이다. 그 미묘한 작용에 주안점을 둬야지 선이다 악이다 하는 것에 치우치면 답이 없다.
육조스님도 깨닫고 나서 첫 법문이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이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선악을 쫓아다니다 보면 답이 없기 때문이다. 선악이 다 묘(妙)다. 법계는 그 온갖 미묘한 것을 다 함유하고 있지만 얼마든지 남음이 있어서 여유가 있다. 이것이 우주법계의 모습인 법계의 상(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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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含) 중묘이유여(衆妙而有餘)하고: 온갖 아름다운 것, 미묘한 것을 다 포함하고 있지만 그래도 남음이 있다. 포함할 함(含)자, 중묘(衆妙)라는 것은 미묘한 마음 작용이다.
아름답고 선한 일만 묘가 아니다. 물론 아름다운 일, 나를 위하고 남을 위하는 일, 사랑하는 일도 포함하지만 악한 일,미워하는 일, 분노도 일으키고 시기질투도 일으키는 별별 작용이 다 미묘한 일이다.
오늘 우리가 ‘화엄경 공부하는데 가야지. 날씨가 추워도 공부하려는 내 의지를 추운 날씨가 어찌 꺾을 쏘냐’하고 오는 것도 미묘한 마음작용이다.
우리 하루 가운데도 얼마나 미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가. 중묘(衆妙)다. 그런데 이 온갖 미묘한 일은 유여(有餘)하다. 남을 여(餘)자다.
우리의 삶은 온갖 미묘한 도리를 다 포함하고 있어도 남음이 있다.
온갖 미묘한 작용을 다 포함하고 있어도 아직도 남은 공간이 얼마든지 있다.
하루종일 죽도록 사랑해도 내일 또 사랑할 마음이 그냥 그대로 있다. 오늘 하루종일 미워했는데도 내일 자고나면 또 미워할 수 있는 마음이 남아있다.
이 우주공간도 그렇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오고 가도 또 여유가 있고, 길에 차가 수만 대, 수십만 대 오고 가도 늘 도로는 비어서 지나갈 자리가 있다.
성지순례를 하러 인도에 가보면 그 넓은 도로에 코끼리, 말, 소, 개, 돼지, 마차, 자동차, 인력거, 자전거, 걸어다니는 사람, 장사꾼이 꽉 차 있다. 그렇게 엉킨 도로에 들어가면 그 길에서 몇 날 며칠을 걸려도 못 빠져나갈 것 같은 걱정이 든다. 그러나 한 30분만 지나면 언제 빠졌는지 슬슬 슬슬 다 빠져나가서 고 결국은 모두 제 갈 길을 간다.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아도 말은 말대로 소는 소대로 자동차는 자동차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전혀 충돌없이 사고안나고 슬슬 다 빠져서 자기 갈 길을 간다. 그런 것들이 모두 함중묘이유여(含衆妙而有餘)다. 온갖 미묘한 것을 다 포함하고 있으면서 결국은 또 남음이 있다 .
우리 인생사에 별별 현상들이 우리 앞에 펼쳐지지만 그래도 또 여유가 있다.
우리 마음이 그렇게나 많이 작용하여도 또 끝도 없이 작용할 수가 있다.
‘오늘은 화를 너무 많이 냈네. 더 이상 나는 못내겠다’ 천만에 그렇지 않다.
얼마든지 또 화를 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유여(有餘)이기 때문이다.
오늘 아주 기뻤다. 기쁘면 그것으로 우리 마음이 끝인가, 아니다. 기쁨 다음에는 금방 또 슬픔이 있을 수가 있고, 슬픔 다음에 또 기쁨도 있을 수가 있다.
이 마음자리가 넉넉하다. 너무 많은 공간이 있다.
함(含) 중묘이유여(衆妙而有餘)다. 온갖 것을 다 포함하고 있지만 남음이 있다.
글을 읽을 때 글자당 일초씩 걸린다면 함자는 이초내지 삼초쯤 시간을 잡아서 띄어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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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어 읽기에 관한 옛날 이야기가 있다. 어떤 선비가 아침에 나무를 하러 가는데 어느 집에선가 어린 학동이 ‘홍안지대자(鴻雁之大者) 미록지대자(麋鹿之大者)’라고 읽고 있었다. 맹자의 양혜왕편의 주석에 나오는 글이다.
그런데 저녁에 나무를 한 짐 해 가지고 돌아오다 들으니 그 때까지 학동이 글을 읽는데 ‘홍은 안지대자여, 미는 녹지대자라.’이렇게 자기도 모르게 토를 붙여서 읽더라는 것이다. 두 구절을 하루종일 읽으니까 문리가 터진 것이다. 홍(鴻)과 안(雁)은 모두 기러기인데 홍은 큰 기러기 이고 미(麋)와 녹(鹿) 역시 사슴인데 미는 큰 사슴이니까 ‘홍은 안지대자여 미는 녹지대자라’하고 ‘홍은 기러기의 큰 놈이고 미는 사슴의 큰놈이다’라는 뜻에서 띄어 읽을 데를 띄어 읽을 줄 알더라는 것이다.
자꾸 읽다 보면 문리가 터져서 이 구절도 ‘함/ 중묘이유여’ 하고 저절로 띄어읽기가 된다.
4, 융합하고 떨어버림
超言思而逈出者는
말과 생각을 초월하여 멀리 벗어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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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하고 떨어버림: 말과 생각을 초월해서 멀리 벗어난 것, 이것을 ‘융합하고 떨어버림’이라고 하였다. 언사를 초월했기 때문에 텅 빈 하나로 융합하면서도 멀리 벗어났으므로 떨쳐버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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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언사이형출자(超言思而逈出者)는 : 말과 생각을 초월해서 멀리 벗어났다.
형출(逈出)은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을 말한다. 말과 생각으로는 도대체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왕복무제 동정일원을 설명하고 함중묘이유여라고 설명을 해봤자, 그 자리는 언사를 초월해서 멀리 벗어나 있다.
사람은 참 미묘하다. 세상에 사람보다 더 미묘한 것이 없다. 온갖 미묘한 것을 다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또 얼마든지 미묘한 것이 계속해서 일어날 수가 있다.오늘 하루종일 미묘한 작용을 했는데 내일도 얼마든지 미묘한 작용이 또 남아 있다.유여(有餘)다. 그러면서도 그 미묘한 것을 뭐라고 드러낼래야 드러낼 수가 없다. 초언사(超言思)다. 말과 생각에서 초월해 있다.
5, 법의 소속을 결론함
其唯法界歟며
오직 法界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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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소속을 결론함 :법계 속에는 사람을 위시해서 산천초목, 수억 광년 밖의 별까지도 두두물물이 다 포함된다. 그렇기 때문에 법의 소속을 ‘그 오직 법계 뿐이다’라고 하였다. 세월 다 가고 갈사람 다 가고 올 사람 제자리에 다 와있고 그래서 결국은 조용한 그 자리, 텅 빈 그 자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생각으로 표현할 수 없으며 홀로 우뚝하게 나 혼자 존재한다. 그때의 나는 오직 진리세계로서의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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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법계여(其唯法界歟)며 : 아무리 말을 하고 아무리 많은 생각을 해도 그 말과 생각을 다 초월해 멀리 벗어나있다. 그것은 오직 법계(法界)다. 법 법(法)자, 세계 계(界)자. 진리의 세계, 마음자리, 사람이다. 법계는 우리들 자신이다. 진리의 세계다.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은 오직 진리의 세계 뿐이다.
불교는 세계를 그냥 세계라고 하지 않고 법계라고 한다.
우주법계라고 하면 이 드넓은 우주 공간을 다 포함해서 기어 다니는 작은 미물까지도 다 포함한다. 이 모든 존재는 전부 그 나름의 이치와 그 나름의 진리와 그 나름의 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전부 다 진리이고, 이치고, 길이다. 그것이 바로 법이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세계를 그냥 세계라 하지 않고 법계라고 한다.모든 것과 관계하다가 또 모든 것과 아무 상관없이 끝내는 오직 나로서 존재한다. 우리들 자신이 이 진리의 세계인 법계다. 그것이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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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문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일, 지구가 돌아가는 일, 춘하추동이 바뀌는 모든 상황들이 다 잘 표현되어 있다. 법계라고 하는 것은 가고 옴이 끝이 없다. 하지만 동정이 다 한 근원이다. 그 법계는 온갖 미묘한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여유가 있다. 그리고 말과 생각을 초월하여 멀리 벗어나 있다. 누구든지 '나'이고 누구든지 법의 세계지만 그야말로 이러한 내용을 알고 나 홀로 모든 것을 벗어나고 초월해서 존재한다. 그것이 오직 법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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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이 가는데 설명을 하려니 아무리 설명을 해도 사실은 내가 이해하는 것에 100분의 1도 설명이 안된다.여러분들이 잘 음미하셔서 느끼시기 바란다.
불교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삶은 한 순간, 한 순간이 그야말로 다이아몬드와 같고 보석과 같다. 진짜 다이야몬드를 구하게 된다면 얼마나 애지중지 하겠는가.삶은 그것 이상이다.한 순간, 한 순간을 애지중지하면서 목이 말랐다가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듯이 달고 맛있게 진지하게 느끼고 살아야 된다.
우리 삶의 외적조건에 대해서는 절대 생각할 것이 없다.
불교공부에서 좋은 점은 인간의 그 어떤 차별된 현상보다도 우리 내면의 사람사람이 본래로 다 갖추고 있는 위대한 불성, 부처라고 하는 진실에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설법을 듣다보면 ‘아 그렇구나’싶은 깨달음이 온다.
불법을 통해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을 공부하므로, 그것을 공부하는 우리 자신도 깨달았다치고 언제나 시원한 삶을 살아가자.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가, 바로 부처의 삶이다 라고 하는 수준까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이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첫댓글 _()()()_
혜명화 님,
약간, 진짜로 쬐끔, 촘말로 파리 떵 만치 미오.
왜냐?
펌 방지 땜에... (자물쇠를 몇 개나 채웠는지 펌 방지 해제 프로그램도 소용이 음네...
돋배기 안쓰고도 볼수 있게 글자를 더 크게해서 프린트 하고 자븐디요.)
아쉬운 이 마음 알랑가몰라.
그대는 미니 젠틀맨.
이 글 읽고 얼른 복사 풀었는데,다시 읽다보니 틀린게 많아서 다시 잠금^^ 쪼꼼만 기둘려 주셔요~~ㅎ
대원성님 열쇠 풀었어요^^~~~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아 ..... _()()()_
혜명화 님 억수로 고마버라예 이 기분 알랑가 몰라예. 왕복서를 다시 공부한다고 한 구절씩 쓰고 있거든예 혜명화 님
^^처음은 얼떨떨하게 그렇게 넘어 갔던거 같아요. 왕복서가 공부하고 싶어 다시 시작하는 차에 올려 주시니 그렇게 환희로울 수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_()()()_
제대로 공부합니다.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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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부처님. 고맙습니다...
_()()()_
_()()()_
환희로움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지....고맙습니다.._()()()_
근무시간에도 수시로~
지금 집에도 안가고 여기서~
이 맴을 다들 알랑가몰라~~? ? ?
이리 다시 글로 정리를 해주시다니 ...감동스럽습니다..언제라도 다시 볼수 있겠습니다.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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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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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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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 네번은 봐야조금 정리가되네요
감사함니다.
고맙 습니다._()_
-()()()-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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