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갈회> 중국 전시회 및 백두산 스케치, 문화답사를위한 사전답사를
2009. 6. 25 ~ 7. 1 까지 <대련, 심양, 단동>으로 6박7일간 다녀왔다.
2009. 6. 25 (목)
저녁 21:45 중국 남방항공(비행 1시간)으로 대련에 도착하여 <영화민박>에서 1박을 하였다.
참고 사이트 : http://cafe.daum.net/dalianyinghua - 영화민박 및 콘도 (사장 : 노영호)
정화백과 동행한 답사였다. 그동안 정화백은 심양과 단동을 중심으로 자주 중국을 왕래하여, 이 지역 문화와 사정에 밝고,
단동의 WS Gallery를 정화백이 소개하였다.
정화백은 이곳 WS Gallery에서 서양화가 金石과 함께 點描畵法에 대하여 연구한 바 있다.
나는 2005년 1년 동안 가족과 함께 북경에 머물면서 중국의 많은 지역을 문화답사 하였지만,
특별히 동북3성의 우리 조선족 사회에는 익숙하지 못하였다.
우리 늘갈회 회원들은 2005년에 이미 북경과 장가계 스케치를 다녀온 바 있다.
나는 평소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스케치와 집안현의 고구려의 벽화와 기상을 문화답사하면서,
동시에 <늘갈회> 전시회를 중국에서 진행하기에는 백두산이 북경과
졸업생이 근무하고 (천진한국국제학교에 정스런 선생님이 현재 근무 중) 있는 천진에서는 너무 멀기 때문에,
이곳 단동이 문화답사와 <늘갈회> 전시회의 최적지로 여겨왔던 터였다.
2009. 6. 26 (금)
대련 시내 답사 - 대련 역에서 시내를 둘러보고,
대련은 해안도시이기에 노호탄 (해변투어)을관광하고,
심양으로 5시간 버스로 이동하여 서탑의 <심양국제콘도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2009. 6. 27 (토)
심양은 중국에 머물던 2005년의 5월초 노동절 연휴에 충남대의 김 교수님 가족과 함께 8명이 백두산을 다녀오면서
며칠을 머물렀기 때문에,
한국인이 많이 머무는 서탑과, 중국의 명차시장, 노신미술학원, 화방, 화랑가를 답사하였다.
마침 노신미술학원에서 4학년 졸업전시가 3부에 걸쳐 진행되고 있었는데,
중국화 학생작품전은 끝나서 못 보았지만 기타의 작품들을 보았고, 학생들의 실기실도 둘러보았다.
기초에 바탕을 둔 매우 전통적인 학습을 철저하게 진행하며, 학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생들은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노신미술학원 대학 앞은 방학을 이용하여 실기지도를 하려는 화실들의 광고와 학생유치로 분주하여 역동적이었다.
심양에서는 2일을 머물 계획이었지만, 단동에서의 <늘갈회>전이 걱정되어 저녁에 심양으로 발길을 돌려, <단동한중민박>에서 묵었다.
<단동한중민박>은 한국에서 퇴임한 노신사가 운영하는 곳으로 또 다른 남은 인생을 새롭게 설계하며 의욕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즐거운 나날이었다.
참고 사이트 : http://cafe.daum.net/ddhz - 단동한중민박
2009. 6. 28 (일)
단동에서의 3일은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오전에는 압록강변을 거닐며 민족의 과거와 북한의 산천을 멀리서나마 보았고,
늘갈회 전시회를 계획한 WS Gallery를 방문하였다.
갑자기 퍼붓는 장대비 소나기를 피해가며 겨우 총경리를 만났지만
WS Gallery의 2층 대형 전시장은 공사 중에 있었고, 끝없는 걱정이 밀려왔다.
오후 1시에 약속을 하고 통역과 함께 다시 방문하였지만, 전시공간을 확보할 수 없었다.
다만 1층의 韦儒(韋儒)의 화랑만이 전시가 가능하였다.
총경리인 金石의 부인은 1층에서의 전시를 허락하는 분위기였지만, 서양화가인 韦儒(韋儒)는 적극 반대하였다.
그는 여름방학이 작품을 사려는 소장자와 소통되는 중요한 시기이고,
학생들도 지도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자기의 작품 판매가에 해당하는 대관료를 요구하였다. 너무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순간 앞이 캄캄하고 장마철의 낙뢰를 맞은 듯 정신을 잃었다.
전시회 자체가 무산되었다. 사전답사가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우리는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고....... 새로운 공간을 찾기로 했다.
단동 한국성의 한국(상)인회를 찾아갔다.
그동안 단동에는 재중국 단동한국인회만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금년 봄에 단동한국문화원이 결성되어 초대원장으로 김영현 원장이 재직하고 있었다.
김영현 원장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고, 우리는 매우 적극적으로 서로의 문화활동에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리하여 우리 <늘갈회>전은 김영현 단동문화원장과의 만남으로 전시회를 성사시키게 되었다.
2009. 6. 29 (월)
우리는 단동한인회의 많은 명사들을 만났고, <늘갈회> 전시회를 구체화 시켰다.
김영현 단동문화원장과 문화사업에 대하여 협의하며, 그 일환으로 <늘갈회>전을 초대전 형식으로 추진하겠다는 승낙을 받았고, 단동과 한국인 사회에 이번 전시회를 적극 홍보, 감상하는 방안도 연구하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에 보답하는 방안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김영현 원장과 함께 최범산 한국독립운동사 연구가이자 소설가와 최은숙 한국문화원 부원장을 초대하여
압록강변 식당에서 중식으로 양고기 샤브샤브를 먹으며 백두산 등정과 집안현 고구려 문화답사 계획을 점검하였고,
저녁에는 김종성 신성국제외국어학교 교장을 만나 교육에 관하여 환담하며,
단동의 로컬 발맛사지를 함께 받기도 하였다.
단동에서의 로컬 발맛사지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기구를 사용하기도 하는 새로운 방식의 발맛사지로,
시원함과 더불어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지울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단동의 문화계 인사들과 함께한 행복한 시간이었다.
2009. 6. 30 (화)
열방투어에서 문화답사 일정에 대하여 구체화시키고 조정하여 정리하였으며.
해외에서 귀국하는 성구대 재중국단동한인회장도 만날 수 있었다.
김영현 단동문화원장과 최범산 한국독립운동사 연구가와 중식을 함께하고,
단동시내의 우리 독립운동사의 흔적인 이륜양행 건물을 답사하였다.
이륜양행은 세월의 뒤안길에서 건물만이 쓸쓸하게 시간을 잠재우고 있었다.
우리도 중국에서의 시간을 뒤로한 채, 김 원장이 주선해준 택시로 압록강을 따라 북한 땅을 곁에 두고
동방명주의 페리호에 몸을 싣고 인천 제1국제항으로 향했다.
2009. 7. 1 (수)
단동의 동방명주 페리호는 인천- 천진간의 진천 페리호 보다 시설이 노후화되고 작아서
선상에서의 1박이라는 긴 시간을 이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배였고,
아직은 비수기라 관광객이 적어서 호젓하게 몸을 실을 수는 있었지만,
이번 답사를 통하여 우리 늘갈회가 시간도 절약할 겸 왕복 항공기편을 이용하기로 한 선택은 다행인 것 같다.
** 중국 단동한국문화원 전시장 사진 **
중국 단동의 한국성은 단동의 동편, 압록강에 인접해 있다.
중국 단동한국문화원의 모습이다. 우리 <늘갈회> 초대전은 이곳 오른편 공간, Gallery에서 진행된다.
중국 단동한국문화원에서 찍은 문화계 인사이다. 왼쪽부터 백인현 교수, 김종성 신성국제외국어학교 교장, 김영현 중국단동한국문화원장, 최범산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작가, 정영진 서양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