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참 좋은 세상이다.
지금 이 시대에 살면서
가속화되는 다양한 단계별 변화를 맛볼 수 있는
지금의 현실에 순간순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현대인들의 의식과 가치관도
과학과 문화의 발달로 과거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가속화되는 중이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산골이나 외딴 섬에서도
스마트폰이 가능하니 전 세계 어디든
크릭 한 번으로 상호 교감이 가능하다.
물론 각자의 볼 일에 따라
그 상황은 천차만별이다.
각자 할 따름이며,
각자 몫일 뿐이다.
유명 인사들이나 수많은 지식인들의 목소리와
그들이 공유하고자 하는
각 분야별 지식은 홍수를 이룬다.
그래서 참 재미있는 세상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의 세상 이야기들을
내 취향대로 여기저기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또 우연히 불교 강의를 유튜브를 통해 들어본다.
똑같은 말을 해도 이 사람이 하면 재미있고 귀에 솔깃하나
저 사람이 하면 흥미를 덜 가지기도 한다.
여기서 언급해보고자 하는 것은
불교 강의에서 재미있고 박식하고 유익한 말들은
당연히 공감이 가지만, 과거 시대에 맞는 행위나 예식 등
불편하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대물림되는 것들은
당연히 불필요함에도 불구,
21세기인 지금에도
그러한 것들을 끊임없이 합리화하고 정당화시키며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즉 부처님 가르침인지 아닌지 여부를 말한다.
(예: 천도재, 예수재, 불상의 크기, 영험한 기도처 등)
하지만 현대불교라는 틀 속에 있으니
불교를 위한 불교 공부가 되지 않으면
그 정체성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이해해 볼 수는 있다.
인간 삶, 즉 수행의 바른길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만 바라볼 수 있다면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자연에서 배운대로 아래와 같이
본인의 견해를 밝혀본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글을 읽는 사람의 몫이다.
수행의 바른길 시리즈 다섯 편을 통해 이미 반복된 설명을 했지만
한 번 더 간단히 이야기해 본다면
1. 부처님 자체가 이치이며, 법이고, 말씀이며,
진리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인간삶 공부의 기본 이치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사랑(파장, 기운)은 의식이 있으며 살아있는 것이며,
그 기운은 부처님(하느님, 자연)의 분신이다.
고로 마음은 인간의 분신이 되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참조: 아래 도표 바른수행 65p 발췌)
2. 불교 수행이나 그 어떤 수행도 나를 이끌어가는 실체를 모르면
올바른 수행은 불가능이다.
그래서 "체득"이 바른 수행을 해나가는 기본이 된다.
이게 안되면 대승불교를 결코 이해할 수없다.
그걸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는 크나
스스로 체험을 통해 거기까지 가보지 않으면 알 길이 없다.
대승, 소승 양자 공히 부처님 가르침이다.
3. 몸을 불성화(성령화)시키는 이치와 원리를 몸과 마음을 통해 이해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 기본이 "체득"이다.
즉 계(실천), 정(선정), 혜(지혜)로써 수행방법을 간단히 설명을 할 수는 있으나,
그것도 부처님을 인지하지 못하면 올바른 수행은 불가능이다.
(참조: 아래 도표 바른수행 45p 발췌)
4. 중도나 올바른 기도에서도 "불성화(성령화)의 이치"를
모르면 그것도 불가능이다.
5. 부처님(하느님)되기 위해 공부를 한다면
그건 구제불능이다.
6. "믿음"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주어진 사랑만큼이 나의 믿음 크기다.
부처님(하느님) 마음(사랑)을 내가 가진 만큼이 불심(믿음)이 된다.
믿어서 믿음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아서 내가 가진 만큼이 믿음이 된다.
즉 믿는다는 것이 깨달아가는 것이고,
부처님하느님과의 약속이며,
그게 사랑이 된다.
위 내용은 가장 근원이 되는 것을 말하고 있기에
어느 종교든 똑같이 적용된다.
단지 단어의 쓰임만 다를 뿐이며,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몸기계를 걸친 것이 인간이기에
그 법과 진리는 유사이래 똑같다.
그 동일성을 인지하지 못하면
여전히 부족한 것이 된다.
예 : 부처님=하느님=불성=성령=빛=이치=사랑 등
아니라면, 아직 불성(성령)이 뭔지
몸과 마음으로 체득이 되어있지 않다는 말이며
부처님하느님을 아직 인식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깨닫는다는 것은
(부처님하느님을 알아차린다는 것)
학문과는 별개가 되기에
말이나 글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본인은 불경이나 성경이나
어떠한 경전의 내용에 대한 선입견이 없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서 가장 근본이 되고,
뿌리가 되는 기본의 실체와 핵심을 알기에
옳고 그름에 있어서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며,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이란 자연의 가르침으로서
종교를 훨씬 초월한다는 것을 알도록 한다.
또한 그것은 보이지 않는 길이기에
믿음의 길이며, 지혜의 길이 되며,
그 길은 건강과 행복을 덤으로 가지게 한다.
아무리 유명하고 박식했던
성직자나 철학자라 할지라도 마지막 생을 보면
믿음(부처님하느님 사랑, 빛)을 가졌던 사람인지
여부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기도 하다.
아프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몸기계를 정상적으로 가동을 못했다는것이며,
마음이 오작동했다는 증거다.
아프다는 것은
샛길에 서 있는 것이기에
찍소리 말고 최우선적으로 바로 잡아야한다.
믿음이란,
양다리 걸치는 것이 아니기에,
빵점아니면 백점으로 표현해 볼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은
열린 마음의 우주의식으로 가도록 인도되는 것이기에
종교 속 의식이나 믿음만으로
그 가르침 전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다.
각자의 근기에 맞는
다양하게 반복되는 체험만이
그것을 알게 차리게 하는 것이며,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공부를 이끌고 있는 주체"를
점차적으로 인식하고
알아차리게 된다.
위파싸나나 화두선이나 어떤 수행도 가르치는 실체는
동일한 부처님이라는 말이다.
말이나 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따라 가면 된다는 말이다.
근데 부처님도 모르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을 하고,
공부해서 부처님 되라고 하면
아무리 박식해도 믿음이 빵점이다.
아프지 않으면 천만다행이다.
가장 기본적인 핵심과 실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글 모르고 무지한 중생들을
깨우치기 위한 말씀들이었기에,
밥 먹는 것은 어떻게 먹어야 되며
아프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며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말하고 행동할 때
매순간 상황을 잘 알아치리고
어떻게 마음을 잘 나타내는가이다.
왜냐면
그게 아프지 않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살도록 하기 때문이다.
재를 잘 올리고
기도를 잘 해서
복을 받고 소원성취하고
건강하고 행복하다는 것은
지극히 미신적이며 기복적인
후진의식의 형태다.
어느 종교나 다 마찬가지다.
선진의식을 가질수록
깨어있다는 말이기도 하며
현실성과 객관성이 떨어지는 것에는
관심을 가질 명분이 없어진다.
즉 종교가 현대인들의 의식과 가치관을
뛰어넘지 못하면 결국 사라진다는 말이다.
그게 현대 종교에서 젊은 성직자가 귀해지고,
믿는 사람들이 적어지는 근본 원인이다.
그런 상황은 선진국으로 갈수록 더 심화된다.
알면 땅 짚고 헤엄치는 것이 되나
모르면 하늘 땅만큼 차이다.
공부를 이끄는 실체를 알아차려야 한다.
그래야 위빠싸나나 화두선이 뭔지 알게 된다.
아무리 영민하고 박식해도
자기 머리로 하려니
보이지 않는 실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하고,
깨달음의 논쟁을 하고,
설명이 장황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 참조 : 부처님, 하느님의 제자라면 징표가 있다?
http://cafe.daum.net/enlightenment-k/dcM5/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