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간씩 예화집을 찾는 사람은 창녀인 것이다/ 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진리와 상관없는 형식에 대한 강조는 순전히 매춘이었다. 설교꾼들을 움직이는 근본적 동기가 오락을 통해 군중의 마음을 사고 싶어하는 욕망에 있으며, 이런 욕망은 진리보다는 형식에 대한 치중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로이드 존스는 대중적 전문가들의 손에서 이 설교라는 예술이 창녀의 술책이 되어 버렸다고 믿었다.
창녀의 목적은 단 하나, 유혹하는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설교꾼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듣고 매혹되기 원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설교꾼들은 대화에 놓는 덫을 아주 중요하게 강조했다. 즉, 전하는 방식이나 이야기, 예화, 일화, 또 다른 여러 대화의 기술이 자신이 하는 선언을 빛나게 해주는 장식품과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이런 기술들이 설교자의 설교 준비에 있어 중심이 될 때, 설교자는 설교 강단을 파는 매춘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고방식에 대해 로이드 존스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게 이런 것은 전문 직업의식의 최악의 형태일 뿐 아니라, 내 표현으로 하면 매춘 기술인데 이런 설교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데 너무 많이 집중하고 신경 쓰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는 웨스트민스터 신학생들에게 진정한 예술과 매춘 기술의 차이는 자신이 전에 읽었던 논문에서 저자가 강조했던 “예술적 수완으로서 고안한 기술”과 “예술의 불가항력”의 차이를 보면 잘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설교에 있어서 받아들일 만하고 권장할 만한 진정한 기술과 문학적 형태, 그리고 수사학적 기술은 그 안에 불가항력적 특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어떤 이가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고 고전적인 일화나 인용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면, 이 내용들을 설교에 사용하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반대로 설교에 맞는 완벽한 이야기를 위해 몇 시간씩 예화집을 찾는 사람은 창녀인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런 ‘기술’을 인위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것은 교묘한 술책이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술책을 동원하는 창녀의 변함없는 특징이다. 우리는 이런 일을 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설교에 이런 ‘불가항력적’ 특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이 점이 바로 설교에서의 유머나 예화, 그리고 웅변술 사용에 대한 로이드 존스의 확신을 정리해 준 지배적 원칙이었다. 불가항력적 특성만 있다면 이 모든 기술은 그 자체로서 받아들일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설교단 위에서 웃기려고, 혹은 설득력 있게 말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혐오감의 대상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당시 인기 있는 설교에 대한 책들을 보면 이런 사고방식이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로이드 존스 생각에, 설교 지침서들은(설교 지침서 자체만으로도 사실 혐오스럽다) 목회자들에게 매춘의 기술을 가르치는 책으로 전락했다.
“나는 이런 것들을 혐오한다. ‘기술’이라는 말은 전혀 여기에 적합하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매춘”이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설교의 기본 방법’이나 ‘쉽게 설교하는 법’과 앞의 책들은 모두 가능한 한 빨리 불 속에 집어던져 버려야 된다.”
이 책들은 땔감으로만 적합한 책들이었는데, 왜냐하면 이 책들은 대중적 전문가들이 걸린 불치병 때문에 생겨난 증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들이 누렸던 인기는 진리 선포보다는 대중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선호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사고방식이 만연되어 있음에 대한 반증이었다.
점점 줄어드는 교인을 소생시키기 위하여 대중적 전문가들이 사용한 매춘 기술은 재미를 원하는 회중들의 세속적 욕망과 결합하여 치명적인 독을 만들어 냈는데, 이 독을 섭취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황폐화되었다. 로이드 존스가 ‘스포츠 목사’라고 부른 자들이 증가했는데 이들이 바로 이 방법론을 사용한 자들이다.
“교회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카드놀이, 잔치, 연극, 바자회 같은 것들을 조직합니다. 우리는 거의 마귀만큼 교활해지고 있으나 성공적이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시도는 희망 없는 실패로 끝나고 세상은 우리를 비웃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핍박할 때 교회는 자신의 진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교회를 비웃는다면, 그것은 교회가 자신의 혼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교회를 비웃고 있습니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친절해지려고 하고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어하는 교회의 노력을 비웃습니다. 친구 여러분,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자신의 개인적 구주로 믿지 않는데, 어떤 교회에서 편안함을 느끼신다면, 그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오락의 장소거나 사교 클럽인 것입니다.”
앤드루 아더스톤 외, 「로이드 존스를 말하다」 , pp 262-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