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14장22-23절)
말씅이신 호 로고스는 태초 곧 아르케를 설명합니다. 우리를 그리로 초청하고 인도하십니다. 무형적인 실체이지요. 그러나 실용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그 말씀을 통해 현실의 가치를 만드는 신앙으로 변질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물질축복의 기복주의다 또는 표적을 좇는 신비주의다 하는 비방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조그마한 현실의 변화만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다 복이다 하고 말하는 유치함은 그런 연유에서 나옵니다. 사실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 안에 보이지 않는 무형적이지만 실제의 힘과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되어가는 영성을 사모해야 함에도 진리의 성령이 계시지 않는 사람들의 말로 기독교는 세상화 되어 갑니다. 아니 거의 그렇게 되고 말았을 겁니다.
또한 세상은 자신의 몸과 집만 있으면 됩니다. 몸의 아름다움 건강과 장수를 위한 프로그램이 홍수입니다. 그리고 집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특별히 요즘은 스타들의 집들을 경쟁하듯 텔레비전에 공개를 하다 보니 집에 대한 관심이 더 합니다. 그래서 노아 때나 마지막 때에 인간들의 모든 활동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서 사고팔아 돈 벌어 집짓는 게 최고입니다. 그게 바로 세상의 평안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몸도 필요하고 집도 필요하겠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집이 되어 가야 합니다. 이것이 안 되면 마지막 때의 교회 유형인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몸과 집은 화려하지만 영혼은 벌거벗게 되겠지요(계3:14-22) 참 평안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의 세마포는커녕 현실주의인 음녀와 바벨론의 길로 큰 무리를 이루어 하나 둘 구령을 붙여 가며 보모도 당당하게 걸어가겠지요. 유다의 질문은 할 수만 있으면 믿음으로 세상에 무엇인가 짠하고 보여주고 싶은 인간의 심리를 대변합니다. 그런 신자들 많잖아요. 신앙의 결과로 세상에 자랑이 되어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는 부류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는 진리의 성령이 임하시면 그의 말씀을 지키므로 아버지와 주께서 임하셔서 하나님의 집이 되어 주시겠답니다. 그렇지만 신앙이 어렸을 때엔 참을 수 없도록 무가치한 말씀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성령이 안 계시면 회(悔)는 되어도 개(改)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 내가 잘 못되었구나 하고 깨달을 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따를 수도 따를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물세례만 있을 뿐 성령세례 곧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세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분의 말씀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통해 거듭나서 진리의 성령을 따라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된 사람은 하나님의 집짓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코치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집짓기에 따라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른 차원의 평안을 주께서 주십니다(요14:27) 몸만들기 집 꾸미기, 현실의 것들을 위한 신앙 다 세상의 일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오늘도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십니다(요14:31)
첫댓글 그야말로 내가 세상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라고 입으로 나불 대지만 유다처럼 거의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삽니다. 매 순간 깨닫게 하신 성령님, 감사합니다. 이제 창조의 목적인 하니님의 집으로 지어져 가기를 소망합니다. 항상 틀리겠지만 다시 또 다시 일어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