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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글을 올리는 것 같다. 그동안 얼마나 게을렀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
2번째 글에서 '연구배경 및 연구목적'을 소개하였는데, 이제는 본격적으로 주인장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고구려 보루를 통해 고구려 군사전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여담을 좀 하자면 현재 고구려 '군사전략'이라고 하는 부분에 대한 연구는 그렇게 많지 않다. 물론 많은 군사서적들이 있지만, 고고학적으로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고는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고고학은 실물자료를 보고 해야 하는데 전략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록에 남아있지 않으면 추상적인 부분이니깐). 그런데 주인장이 왜 이런 주제를 갖고 공부를 하려고 하냐면, 그동안 문헌을 통해 이러한 부분들이 연구되어 왔지만 뚜렷한 해답이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한강유역의 고구려 보루야말로 고구려의 독특한 군사전략을 증명해줄 자료라고 판단하였고, 따로 '남부전선'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던 것이다. 암튼 이번 글에서는 1번째 글에서 언급했던 내용들 중 몇가지를 언급해 보고자 한다.
얼마전 학교 후배 2명(편입생이어서 필자는 누군지 모르는)이 주인장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학부 수업시간에 '고고학적으로 고구려 군사전략을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을 리포트 주제로 정했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했더니 주인장을 찾아가라고 했단다. 그래서 하는 말이, 관련된 자료가 없다(당연히 없지...)면서 인터넷에 누가 이에 대한 글을 올렸는데(주인장이 이전에 썼던 글 1~2번) 그걸 기다리다가는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찾아왔단다. 속으로 피식 웃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해줬는데, 고구려 보루에 대해 전혀 감이 없던 친구들인지라 몇가지 방향성을 제시해주고 주인장이 논문 작성시 봤던 참고문헌만 소개해주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이런 상황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고구려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척된 것 같으면서도 아직까지 미진한 부분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 사실이다.
참고로 아래 내용들은 주인장의 학위논문 중에서 ‘연구사’에 해당하는 부분임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글의 초반부는 주인장의 기존 논고를 그대로 차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해서 그대로 올릴 예정이며, 이후 본론으로 들어가면 따로 글을 정리해서 분량이나 구성을 조정할 생각이다. 암튼 이제는 사족을 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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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보루에 대한 연구사
발굴조사된 관방유적을 토대로 그간 고구려의 관방체계나 군사편제, 군사전략을 비롯한 보루의 초축시기와 존속기간 등을 고찰한 연구 성과들은 다음과 같다.
보루는 현재 생활공간(군사시설 및 등산로, 체육시설 등)과 위치상 중복되거나 일찍이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주목받지 못 했기 때문에 여타 관방시설 중에서 연구가 가장 늦게 이뤄졌다. 심지어 구의동보루는 1977년에 발굴조사가 이뤄졌지만(華陽地區發掘調査團 1977a; 1977b), 1988년 몽촌토성 발굴 이전까지는 고구려 유적으로 제대로 인식되지 못 했을 정도였다(金元龍 외1988; 1989).
이후 고구려 보루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못 하다가 20년이 지난 1997~1998년에 아차산 4보루가 발굴조사(임효재외 2000a)됨에 따라 관련 연구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일단 기 조사된 구의동보루의 종합보고서가 출간되면서(구의동보고서 간행위원회 1997) 구의동보루에서 출토된 고구려 철기 및 토기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이뤄졌고(崔種澤 1991; 1993), 이후 한강유역 고구려 토기에 대한 일련의 연구 성과들이 나왔다(崔種澤 1995a; 1995b; 1995c). 그뿐만 아니라 구의동보루와 아차산 4보루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이뤄져 당시 고구려군의 편제나 병력 배치 등과 관련된 자료가 축적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하였다(崔種澤 1997; 1998a; 1998b).
이와 더불어 양주군 일대(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외 1998)와 임진강 일대 보루군에 대해서도 조사가 진행되었다(陸軍士官學校 陸軍博物館 1994; 1995; 1997; 1998). 이상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崔種澤은 한강 · 임진강유역 및 북한지역과 중국 집안일대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에 대한 전반적인 편년작업을 실시해 남한의 고구려 고고학사에 한 획을 그었으며(1999a), 이를 통해 한강 이북에 분포하고 있는 고구려 관방유적의 기본적인 성격과 방어체계에 대한 분석도 이루어졌다(崔種澤1999b; 沈光注 2001).
1999~2000년에는 시루봉보루가 추가로 발굴 조사되면서, 한강유역 고구려 보루군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편년과 성격이 밝혀지게 되었다(임효재 외 2002). 이 시기에는 한강유역 고구려 보루에 대한 연구가 다각도로 진행되기 시작하였는데 주 연구 주제는 ‘보루의 축조 시기와 고구려의 한강유역 경영 여부’였다. 당시 발굴조사단은 시루봉보루 출토 토기의 중심연대를 6세기 중엽으로 추정하였으며(서울대학교발굴조사단 1999: 14), 崔種澤은 5세기 중엽 축조된 보루는 고구려군이 한강 이남의 몽촌토성에 주둔하면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 하다가 6세기 중반 한강 이북으로 후퇴하면서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해석하였다(1998b: 158). 이러한 일련의 연구 성과들은 한강유역 고구려 보루의 존속 연대를 약 100년(5세기 중엽~6세기 중엽)이라는 긴 시간으로 설정했지만 당시 남한 내 고구려 토기에 대한 연구가 제한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부득이한 상황이었음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1).
1) 崔種澤은 박순발과의 토론에서 고구려 보루의 연대관을 100년으로 넓게 잡은 이유는 토기 분석이 정밀하게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토기 분석에서의 시각이 제한되는 상황을 우려해서였음을 밝힌 바 있다(2001b: 986). 그러면서 그는 심광주와의 토론에서 몽촌토성 출토 토기는 5세기 중엽 또는 후반에 가깝고, 구의동보루와 아차산 4보루의 토기는 6세기 중엽에 가깝다는 사견을 내놓기도 하였다(沈光注 2001: 497).
이에 대해 金榮官은 475년 이후에도 백제가 한강유역을 경영했다는 기록이 등장하며, 553년 이후에도 한강 하류에서 신라가 아닌 고구려와 백제가 활동한 기록이 등장하기 때문에 5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까지 한강유역을 뚜렷한 점유자가 없는 쟁탈지역으로 이해하였다. 즉, 한강 이북 고구려 유적 및 유물의 상한연대는 아무리 빨라도 영락 6년(396)보다 앞설 수 없으며 그 하한은 475년과 비슷한 시기이겠지만, 그보다 늦은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초반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던 것이다(1998 : 119-126)2). 그의 견해는 한강유역의 역사적 환경을 종합적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卓見이라 할 수 있지만 보루의 초축시기에 대해 너무 큰 연대 폭을 부여했다는 점과 폐기시점을 언급하지 않은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2) 475년 이후에도 백제가 한강유역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는 千寬宇가 지적한(1976b: 115) 이후 梁起錫(1980: 21-23)과 成周鐸 등(1981: 80)에 의해 언급되었으며, 李道學(1984: 22-25), 朴燦圭(1991) 등에 의해 연구가 심화되었다. 金榮官의 견해는 이러한 선행연구를 보다 발전시킨 셈이다.
한편, 당시 북한학계에서는 475년 이후 한성이 함락당한 이후에도 백제가 계속 한강유역을 점유했지만, 529년 고구려가 오곡에서 백제와 싸워 승리함으로써3) 한강유역을 차지한 다음, 단 며칠 사이에 아산만~금강계선까지 남진하였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하였다(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1: 158-160)4). 이러한 북한학계의 견해는 千寬宇 이후 金榮官에 이르는 남한학계의 선행연구 결과와 연결되는 것으로서 고구려의 한강유역 점유기간이 22년에 불과했다는 결론을 도출하는데 한몫 담당하고 있었다.
3)『三國史記』卷19「高句麗本紀」第7 <安藏王>, 十一年(529), 冬十月, 王與百濟戰於五谷, 克之, 殺獲二千餘級.
4) 북한학계에서는 당초 고구려가 475년 한강하류지방을 장악한 다음 551년까지 충남 아산~경북 영덕을 잇는 남방계선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삼국 강토 중 5/6을 차지했다고 해석하였으나(과학 · 백과출판사 1979: 190-192), 이후 1991년판에서는 오곡벌전투에 주목하여 견해를 수정하였다.
이후 朴淳發은 5세기 중엽 고구려군이 아차산 일대에 보루를 축조하여 백제 도성을 관망하던 상황에서 개로왕이 첩자 도림에게 농락당하는 일은 일어나기 힘들었다고 보고 한강 북안의 보루들은 한성 공함 이후에 축조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즉, 한강유역 고구려 보루의 초축시기는 5세기 중엽이 아닌 475년 이후이며 그 하한은 6세기 중엽이 아닌 신라가 백제의 한강 하류유역을 공략한 진흥왕 14년(553)으로 봐야한다면서 보다 구체적인 편년안을 제시한 것이다(1999: 15). 이 같은 주장은 보루 축조 시점에 대해 기존과 다른 시각에서 접근했다는 점, 대략 100년의 보루 존속연대를 79년 혹은 그 이하로 구체화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하겠다5). 그러나 6세기 중엽의 토기가 주로 출토되었다 하여 그보다 이른 시기로 편년 가능한 토기의 출토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점은 재고해야 할 것이다.
5) 崔種澤은 고구려의 한강유역 점유기간을 475~551년까지 76년간으로 이해하면서도 고구려 보루의 존속연대는 100여년으로 추정했다. 양자 간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보루가 행정치소가 아닌 군사유적이라는 점, 보루 축조 이후 고구려와 백제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장기간 대치국면을 맞이하였다가 고구려가 한강 이남의 몽촌토성을 함락하면서 비로소 고구려의 한강유역 점유가 이뤄졌다는 점 때문인데(1998b: 158) 필자 역시 이에 동의하는 바이다.
뒤이어 金榮官은 북한학계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고구려가 한성 공함(475) 이후 54년만인 안장왕 11년(529), 오곡에서 백제군을 격파한 다음에 비로소 한강유역을 점유하기 시작했다고 하면서 그의 이전 견해를 보완하기에 이르렀다(2000). 한편 沈光注는 전체적으로 金榮官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보루의 규모가 작고 보급품을 조달하기 어려우며 장기간 주둔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유로 고구려의 한강유역 점유기간은 짧았을 것으로 보았다(2001: 489). 즉, 고구려의 한강유역 점유기간에 대한 여러 견해 중에서 기간이 길다는 것보다는 기간이 매우 짧았다고 보는 견해가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6). 하지만 주로 고구려의 한강유역 경영에 대해서만 다뤘을 뿐 한강유역 고구려 보루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다7).
6) 서영일은 ‘심광주가 고구려의 한강유역 점유기간이 529년 이후부터라는 채희국의 견해를 수용하여 그 기간을 529~551년까지 약 22년간으로 추정했다’고 하였다(2002: 70). 그러나 심광주는 그런 세부 편년안이 오히려 ‘김영관의 주장’이라고 하였으며, ‘북한에서 발행한『조선전사』 3’에도 같은 내용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다른 견해보다 그러한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고 했을 뿐, 구체적인 연대관은 제시하지 않았다(2001: 489). 또한 심광주가 수용했다는 채희국의 견해는 오히려 ‘475~551년으로 편년’하고 있어(1982: 134-151) 이 부분은 서영일이 잘못 이해한 것으로 판단된다.
7) 沈光注는 고구려의 한강유역 경영시점에 대해 김영관의 1998년 · 2000년 논문을 인용하면서 고구려의 한강유역 장악은 안장왕 11년(529)에 비로소 이뤄졌으며 551년에 다시 상실하였다고 하고 있다(2001: 489). 하지만 金榮官은 처음에는 이처럼 구체적인 편년을 하지 않고, 고구려의 한강유역 경영을 보루와 연결시켜 보루의 존속기간을 4세기 말~7세기 초반까지 폭넓게 보았다(1998: 123-126). 이후 2000년 논문에서야 비로소 고구려의 보루 축조와 한강유역 점유는 별개의 문제로서 한강유역 보루는 장수왕의 한성 공함에 한정한 고구려의 일시적인 진출을 보여주는 자료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즉, 심광주는 김영관이 쓴 각각의 논문 내용에 차이가 있음에도 이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한 것인데, 이는 김영관 본인부터 양자의 논문을 같은 내용으로 이해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2000: 83-84). 하지만 22년이라는 세밀한 연대추정에 대한 내용은 1998년 논문에서는 나중에 해결할 부분으로 남겨두고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양자는 비슷한 맥락이지만 다른 내용으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최장열은 앞선 견해들에 모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먼저 구의동보루와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농기구에 주목하여 보루 주둔부대가 장기간 안정적인 경작활동을 했으며, 토기의 내구성을 감안했을 때 출토된 토기의 대부분이 보루 존속기간의 말기에 해당하는 것이 당연한 현상임을 지적하였다. 그는 한강북안 고구려 보루의 초축시기를 문자명왕 4년(495)의 南巡 기사 및 토기의 편년을 통하여 5세기 후반까지 소급할 수 있으며 폐기시점은 551년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고구려 보루의 존속연대는 475년 이후 551년까지의 대략 80여년으로 보았다. 한편 중랑천 일대가 고구려의 군사적 거점도시인 남평양이었을 가능성을 언급하며, 백제와 신라의 침입에 대비하면서 남평양을 보호하기 위해 보루를 설치했을 것이라는 새로운 견해를 내놓기도 하였다(2001: 20-21; 2002: 34-49). 하지만 선행연구를 비판하면서도 기존 견해와 큰 차이가 없다는 점, 남평양에 대한 뚜렷한 고고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무리한 해석을 했다는 점 등은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이후 서영일은 5세기 중엽 경에 임진강부터 한강 북안까지 순차적으로 고구려 보루가 축조되었으며 아차산 보루군은 6세기 중엽경, 양주분지 일대 보루군은 6세기 중엽~7세기 초, 임진강 일대 城堡는 475년 이후 멸망기까지 사용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2002: 68-73). 그는 5~7세기까지의 문헌사료를 포괄적으로 검토하여 당시 역사적 정황과 고고자료를 연결시키고 있는데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1세기 가량 보루의 활용과 폐쇄가 반복되었다는 그의 견해는 앞선 金榮官의 견해와 더불어 한강유역 고구려 보루의 존속연대를 고려하는데 있어 중요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한강유역 고구려 보루의 존속연대에 대해 100년설, 80년설, 22년설 등 다양한 견해가 나오는 와중에 최종택은 고구려군이 475년 몽촌토성을 함락한 이후 6세기 이전까지 20여년의 짧은 기간 동안 그 곳에 주둔했었다는 견해를 내놓으면서 기존 견해를 보완한 연구 성과를 내놓았다(2002: 35). 즉, 고구려군이 475년 한성 공함 이후 몽촌토성을 중간 거점성으로 활용하면서 충북 일원까지 남하를 계속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임범식은 남평양을 황해도 중부 이북지역, 한성을 재령으로 비정하면서 고구려가 백제의 한성을 일시적으로 함락하기는 했지만 그 지역에 주둔하지는 않았다고 보았다(2002: 9-15)8). 이는 고고자료를 토대로 고구려군의 몽촌토성 점유를 확증한 최종택의 견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문헌기록에만 의지한 해석으로서 한강유역에서 확인되는 고구려 보루군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논지이다.
8) 그는 고구려가 한성 공함 이후 한반도 중부지역까지 진출했다는 역사적 관점이 일제 식민사학자의 영향을 받은 이병도 이후의 한국학계의 견해라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문헌 비판을 통한 그의 방법론이 몽촌토성에서 확인된 고고자료를 해석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남한학계에서 어느 정도 고구려 보루에 대한 견해들이 정리되는 동안 북한학계에서는 조희승이 기존 학계와 다른 견해를 내놓기도 하였다. 그는 고구려가 한성 공함 이후에 일부 무력을 아차성 일대에 그대로 주둔시킨 채 평양으로 개선하였으며(2002: 169), 이후 고구려와 신라 간에는 한성을 중심으로 서로 방어거점을 수축 보강하면서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고 보았다(2002: 195). 이는 동시기 남한학계의 연구 성과와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서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유동적으로 국경선이 변화하였으며, 한강유역이 뚜렷한 점유자가 없는 완충지대로 남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梁時恩은 한강유역 고구려 토기의 제작기법을 분석하여 몽촌토성 내 고구려 유적의 존속연대는 475년 이후 507년 이전의 어느 시점까지로 파악하였으며,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의 중심시기를 6세기 중엽으로 설정하였다(2003: 59-60). 이는 기본적으로 기존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와 크게 다른 점은 없지만 고구려 토기의 형식학적 분류 이외에 제작기법에 주목하여 보다 구체적인 편년이 이뤄졌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하겠다.
한편, 김병남 역시 최장열의 견해에 동조하여 고구려 보루 축조시기는 한성 공함 직후가 아닌 5세기 말로 파악하였으며, 고구려군이 몽촌토성에 주둔하지 않고 한강 이북에서 백제와 대치하였다고 이해하였다(2004: 113-116). 즉, 고구려의 한강유역 점유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았는데 이 역시 고고자료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다는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다. 더불어 金樂起는 경기 남부 지역은 방어상 불리하여 고구려군이 주둔하지 않았을 것이며, 한강유역의 보루군은 교통로 확보와 백제 등의 세력에 대한 동향 감시를 목적으로 축조되었을 것이라고 파악하였지만(2005: 113-114) 구체적인 보루 축조시기나 존속기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아울러 2004년에 홍련봉 1보루(고려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 2004a; 2004b; 崔種澤 외 2007a)가, 2005년에는 홍련봉 2보루(高麗大學校考古環境硏究所 2005a; 崔種澤 외 2007b)와 아차산 3보루(高麗大學校考古環境硏究所 2005b; 崔種澤 외 2007c)가 발굴조사되었으며, 2005~2006년에는 용마산 2보루(서울대학교박물관 2006a; 2006b; 양시은외 2009), 2007년에 아차산 4보루 성벽 발굴조사(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연구실 2007), 2009년에 시루봉보루 성벽 발굴조사(서울대학교박물관 외 2009)가 추가로 진행되는 등 최근 몇 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한강유역 고구려 보루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특히 홍련봉 1보루가 발굴조사되면서 한강유역의 고구려 보루 연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홍련봉 1보루의 존속연대에 대해 발굴조사단이 500년 전후한 시점에 축조하여 551년까지 사용되었다고 파악했던 것이다(고려대학교매장문화재연구소 2004a; 2004b). 이에 대해 기존의 80년설과 함께 새로 등장한 50년설 또한 설득력이 없다는 지적9)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에 대해 최종택은 몽촌토성이 거점성으로의 기능을 다한 직후, 5세기 말이나 6세기 전반 경에 한강유역 보루들이 축조되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2004a: 478-479). 이는 고고자료의 분석을 통해 고구려군이 475년 이후 20여 년간 몽촌토성에 주둔했다는 전제 하에 나온 의견으로서 기존에 문제가 되었던 부분들을 보완했다는 데에 의미가 크다.
9) 김태식은 2004년 8월 26일자「‘50년설’로 후퇴한 한강유역 ‘고구려’ 보루」라는 기사에서 발굴단이 주장하는 50년설이 전혀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실제 약보고서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0743822).
이후 崔種澤은 기존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여 고구려의 한강유역 경영에 대한 견해를 정리하였다. 기존에 실시했던 유물 편년작업에 기초하여 홍련봉 1 · 2보루 및 아차산 3보루에서 실시한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와 ‘庚子’명 토기의 연대비정(520년)을 추가하여 몽촌토성 내 고구려 유적은 475~500년, 아차산 일원의 보루는 500~551년으로 편년한 것이다. 또한 500년을 기점으로 한강유역 경영의 중심지가 강남의 몽촌토성(한성)에서 강북의 남평양(중랑천 일대)으로 이동했다는 새로운 견해를 내놓아 주목된다(2007). 이 부분은 필자 본인도 언급하였듯이 해결해야 할 모순이 많은 추론이지만 새롭게 증가하는 고고자료를 토대로 문헌기록이 설명해줄 수 없는 사실들을 추론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김병남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었지만 고구려군의 몽촌토성 점유 기간이 20년에 불과하다는 주장 자체가 일시적인 점유에 대한 반증이기 때문에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유했다는 주장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2008: 40-41). 하지만 20년이라는 기간은 단순히 일시적이라고 단정 지을 만큼의 짧은 기간이 결코 아닌데다가 앞서 고고자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고구려군의 몽촌토성 점유를 방증했던 최종택이 기존 견해를 고수하였기 때문에(2008a: 160-163) 이에 대한 새로운 고고자료가 추가되기 전까지 소모적인 논쟁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이상의 연구사를 살펴보면 고구려 보루에 대한 지속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짐에 따라, 심도 있는 연구가 이뤄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몇몇 보루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졌기 때문에 이러한 자료를 통해서 보루의 초축시기, 점유세력, 성격과 기능 등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들이 나오고 있으며 이후 추가 발굴조사가 이뤄지면 무기체계와 군사편제, 전투방식과 군사전략, 교통로와 지방지배체제 등에 대해 보다 정밀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문헌
문헌사료
『三國史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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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보루는 추후 몇기가 더 조사된다고 하더라도 현재 논의되고 있는 수준 이상의 것은 나오기 힘들 것 같다. 다만, 보루 내에서 명문자료나 정말 획기적인 유물이 나온다면 또 얘기가 달리지겠지만 말이다. 최근 고구려 보루에 대한 연구가 잠시 주춤한 사이, 남한 지역에서 고구려(계) 고분이 여럿 확인되고 있어 고구려 연구자들에게 희망적인 소식을 안겨주고 있다. 현재 이들 고분자료를 통해, 고구려가 남한 지역을 영역 지배했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 같은데 주인장은 아직 그렇게 볼만한 확증적인 자료는 없다고 생각한다. 즉, 남한 지역에 고구려(계) 고분이 있는 것은 직접 지배든, 간접 지배든 양쪽 가능성을 모두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서는 내년 초쯤 논고를 작성할 예정이므로 여기서는 넘어가도록 하겠다.
고구려 보루의 경우,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 시절을 지나 축조되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요즘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기존의 연구사를 참고하거나 유적 내의 상황 및 당시 역사적 정황들을 살펴봐도 이건 적극적인 영역지배의 증거물로 간주하기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다. 기본적으로 城을 중심으로 행정단위를 재편하고 주변의 小城 및 고을들을 지배하는 당시의 지배방식을 되돌아 봤을때 한강유역의 고구려 보루는 다른 지역에서 확인되는 성과는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주인장의 생각이다. 암튼, 3번째 글에서는 고구려 보루에 대한 연구사를 한번 정리해봤고, 이어지는 4번째 글에서는 보루의 개념 및 현학계의 문제점과 한계점 등에 대해서 한번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또 언제 쓸지는 모르겠지만...-.-;).
※ 이 내용은 필자의 석사학위논문 및 학술논문과 관련된 내용으로 연구 및 공부에 참고할 목적 이외의 무단 도용은 왠만하면 자제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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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아~오랜만에 오셨네요. ^^
재미있게 잘 읽었네요...무녕왕의 황해도 진출과 고구려 한강유역의 보루와의 연관성..광개토태왕의 남하..장수왕의 한성함락 ..역사적인 사건과 보루와의 연관관계에 대한 의문이 생기네요..개인적으로 전 한강유역의 보루는 광개토태왕의 남하때 생겼고..장수왕의 한성함락때 개로왕과 왕족들을 아차산 보루에서 처형했다고 생각했는데...ㅜ.ㅜ
저 긴 글이 재밌으셨다니. 대단하시네요. -.-; 암튼 저 역시 예전에는 그러한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개토태왕의 남하라고 한다면 4세기 후반인데, 그때로 편년되는 유물들이 많지가 않습니다(아~물론 있긴 합니다). 또한 북쪽에서부터 순차적으로 남쪽까지 보루가 축조되었다고 가정하고, 그에 걸맞는 고고자료가 나와야 하는데 아직 그렇지도 않은 상황이고요. 또한, 당시 역사적 정황을 살펴봤을때 그렇게 장기간 한강유역까지 점진적인 남하를 했다면 백제측에서 몰랐을리도 없었을텐데, 그 부분에 대한 문제도 해결해야 할 듯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가능성에 대해 저 역시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