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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 생각들이 잊혀질 것 같아 몇가지 재미삼아 글을 남긴다. 네팔이라는 나라는 내게는 지구상에 히말라야라는 제일 높은 산군을 가진 나라로 전문 산악인들에 의해서만 회자되던 그런 나라로만 여겼었다. 어릴 때는 언감생심이었으나 중년에 이르러 산을 좋아하고 그래도 조금은 산에 다녔던 탓에 한번 히말라야에 올라가 봤으면 하는 바램 정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이게 단지 희망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가능하게 된 기회가 온 것이다. 이제부터 네팔에 가게 된 사연과 가면서 있었던 해프닝 그리고 후진국이면서도 매력적인 이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네팔 여행은 아내이자 청계 자유발도르프학교 교사인 강선생에 의해 촉발된 것이다. 강선생은 발도르프 8년 담임(이학교는 1학년부터 8학년까지 한담임이 맡는다)을 하면서 2학년 때부터인가 자기반 아이들에게 어려운 나라의 아이를 돕자는 제안을 하였고 적은 돈을 모금해 꾸준히 지원해왔다. 단체를 지원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확인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도록 하기위해 특정아이를 지정하여 지원해 왔던 것이다. 올해 담임과정 8학년을 맞아 아이들이 졸업반이 되는데 이번 여행은 그간 지원해왔던 아이의 근황을 살펴보고 그리고 졸업 이후에 네팔의 아이들과 이곳 아이들과 성장해가면서 어떤 관계 맺기가 가능할까 하는 탐사를 위한 여행이기도 했으며, 그리고 8학년 졸업반이 되며는 졸업 여행을 가게 되는데 졸업 여행지로서의 가능성 타진 및 사전 답사로서의 의미와 네팔의 발도르프학교를 방문하는 등 다중의 목적을 가지고 계획하게된 것이다. 그러니까 1타 5피정도 되는 수확이니 이건 포기할 수 없는 여행이 된 것이다. 내게는 꿈에 그리던 히말라야 등산이 우선이기는 하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런데 떠날 때부터 해프닝이 있게 되는데 이런 해프닝은 여행중에도 몇 번이나 있게된다. 우리집은 내 벌이가 변변치 않은데도 어찌어찌하여 여행 경비를 내가 마련하였다. 그런데 출국 전날 여행준비로 분주해 있는 상황에서 강선생이 그만 일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비행기는 이미 예약된 것이지만 현지에서 쓸 돈이 필요해 아내는 돈을 달러로 환전을 해왔다. 반 아이들이 저금통을 털고 추가 모금도하고 뜻있는 학부모님들이 보태고해서 형성된 돈 7백 몇십 달러에 거기에 우리가 몇십불을 보태서 800달러를 만들고 여행중 쓸 돈으로 합해서 2700여 달러를 환전한 것이다.
그런데 아뿔사 이 여인이 환전한 돈을 슈퍼에 들르고 왔다 갔다 하면서 그만 어디에 빠트리고 온 것이다. 우리살림에 300여만원은 매우 큰돈인데 아니 이 돈을 오다가다 흘리다니! 그것도 여행가기 직전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한소리 해주고 싶었는데, 돈을 잃어버린 자신은 나보다 얼마나 속이 쓰릴까 생각하여 한마디도 못하고 꾹 눌러 참고 있었다. 그런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우리 이번 여행 포기해야하지 않을까” 한다. 어처구니없기 따불이 되어 한소리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여러 사람들에게 약속을 해놓고 돈이 없어졌다고 포기해? ---
내일이면 출국이고 이제 저녁 시간인데 비상의 방법을 동원해야했다. 부랴부랴 남은 통장 다 털고 인터넷뱅킹으로 대출받고 해서 겨우 돈을 맞추었다. 여러해만의 여행인데 애써 어두운 생각은 떨쳐버리고 즐거운 내일을 맞기로했다.
이번 여행 일정은 1월 9일부터 14일간이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여행경비를 줄이려고 최대한 아끼고 아껴서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비행기는 두번을 갈아타는 동방항공(대한항공 직항의 절반도 안된다.)을 택했다. 비행기 삯이 무지 싼 대신 중간 기착지에서 내돈 내고 호텔 잠을 자야하는 그런 것이다. 대학생들은 물론 공항에서 버티지만 이 여정은 이보다 쌀 수 없어서 배낭여행 청춘들이 대부분 이용하는 노선이다. 상해에서 1박하고 쿤밍에서 잠깐 기착하여 카트만두로 들어간다.
비행기가 네팔 상공에 다다르자 비행기 오른편 창문에 앉아 있던 우리는 근 30여분간 끝없이 이어지는 히말라야의 산군에 감탄을 자아내며 파노라마를 감상하기에 바빳다. 구름 한 점 없는 산군들이 온통 눈으로 뒤집어쓰고 끝없이 이어지는 히말라야 산맥이 우리를 열렬히 환영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들으니 히말라야 산군이 이렇게 구름 한 점 없는 날은 매우 드물다고 하던데 맑게 갠 이날의 비행은 네팔이라는 나라로 향하는 출입문 같았다.
이같은 모습이 비행기 창 밖으로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이미 인터넷을 통해 네팔 공항과 그밖의 일상에 대해 익히 확인했지만 카트만두 국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현실이 여지없이 눈앞에 닥쳤다. 애초 예상했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 도착 직후부터 펼쳐진 것이다. 우리나라 시외버스터미널 같다던 공항이 한 술 더 떠서 짐 찾는 곳이 돗떼기 시장도 이런 돗떼기 시장이 없는 것이었다. 짐을 뱉어내는 컨베어벨트가 단 두 개뿐인데다가 짐찾는 장소가 매우 협소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우리가 도착한 그날 비행기가 짧은 시간에 여러대 착륙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날 인도에서 들어온 어떤 한국 여행객에 의하면 공항 트래픽 때문에 공항 상공에서 30여분이나 선회하였단다. 국제공항의 능력을 몇배나 초과해버린 것에서 온 난장판이었다. 비행기가 두시 도착예정이었으나 세시 거의 다되어서 착륙한데다가 짐 찾는데 만 한시간 이상 걸려서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을 더욱 초조하게 만든 것이다. 우리를 마중 나온 분은 현지에서 선교를 하는 중년의 여성분이었는데 이런 경우는 흔치는 않다고 하신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오른편으로 사원 같은 게 있고 왼편에는 아주 누추한 닥지닥지 붙은 상점 같은 것들이 보인다. 이게 뭐냐 물었더니 사원은 화장터고 상점 같은 곳은 화장터에 수속을 대행하는 곳이란다. 검은 연기도 솟아오르고 야릇한 냄새도 나는데 공항과 붙어있는 화장터라니!! 아무튼 이제 네팔이라는 곳에 도착했구나 하는게 실감이 났다.
여행자거리인 타멜의 한 호텔에 투숙했다. 하루 30불이란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는 7-8불인 것을 보면 물가수준을 알 수 있다. 물론 네팔은 여행자들 천국이기에 수영장이 달린 200불이 넘는 호텔도 있으니 우습게만 볼일 도 아니다. 이곳의 수준은 교사 초봉이 우리돈 10만원 정도라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물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도 불편한 것으로 따지자면 한두가지가 아니다. 네팔은 전기도 물도 우리나라처럼 생각하면 곤란하다. 전기는 제한송전을 해서 하루에 정전시간이 들어온 시간보다 더 길고, 물은 대부분 태양열로 덥히는데 늦게 샤워를 하면 따듯한 물은 잊어야한다. 이날 우리도 찬물만 나와서 샤워는 못했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이곳은 웬만한 곳에서는 큰일 보는 것도 처음 당하면 난처해질 수 있다. 시내 한복판에서도 대부분의 화장실이 화장지가 없고 그냥 물통 하나만 덜렁 있을 뿐이다. 뒷물은 왼손과 물바가지로 해결해야한다. 그리고 물이 마르지 않은 채로 빤스를 올려 입어야 할 때는 당황스럽다가도 이런게 생태적인 삶인거야 우리가 너무 소비에 물들어 있어 그래 라고 자위 하지만 그래도 익숙치 않은 탓에 마음은 편했지만 몸은 찝찝한 그런 일을 겪어야 한다.
우리가 방문하는 첫 번째 일정은 안나푸르나 트래킹의 출발점이자 여행자들의 도시인 포카라로 가는 일이다. 첫 방문지 바구룽에 있는 학교는 거기서 두시간을 더 가야한다. 이제 카트만두에서 포카라까지는 200Km 거리인데 비행기로 가면 30여분 걸리지만 버스는 7시간여가 걸린다. 버스는 700루피(1루피가 10원정도이니 7000원정도)이고 비행기는 왕복 200불정도이다. 경비 문제도 있었지만 강선생과 나는 여행의 원칙을 안전의 문제가 없다면 이동도 밥도 현지화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버스를 탔다. 그래야 현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므로.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가는 길은 그래도 제법 잘 닦여있다. 가기 전에는 이길이 비포장에 무슨 곡예운전 할 것처럼 상상했는데 사실은 이 길은 그들 스스로 하이웨이라 하고 인도와 이어지는 동맥 같은 길이다. 대부분 산길을 따라 계곡을 끼고 난 길이지만 포장도 잘 되어있고 산세도 수려하다. 가는 도중에 두 번인가 휴게소에서 쉬는데 네팔을 처음 가는 사람이라면 천천히 네팔을 느낄 수 있어 좋다.
네팔 공항 입국장에서 짐을 찾는데서 벌어졌던 일이 첫 번째 해프닝이라 하면 이번에는 두 번째 해프닝이 벌어졌다. 포카라 거의 다 도착해서 20여 킬로미터 남겨두고 길 한가운데 일군의 사람들이 돌무더기에 여러개의 깃발을 꽃아 놓고 피리와 북 같은 것으로 노는 것 같기도 하고 축제 같기도 한 집단행동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버스가 멈췄다. 더 이상 갈수가 없단다. 이유도 알려주지도 않은 채 버스 차장은 길 앞쪽에 길이 막혀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외국인 승객이 우리 말고 4명이 더 있었는데 저마다 나름대로 추측을 한다. “아마도 길이 망가져서 고치느라고 그래, 다리가 떠내려갔다”는 등등 이유도 알려지지 않은 채 우리는 그렇게 주저앉은 버스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3시간동안 갈 수 없다던 버스는 시간반을 기다리자 다시 움직인다.
번다 농성을하는 주민들, 멈춰버린 버스
나중에 바구룽에 가서 안 사실이지만 이것은 길이 망가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인 스트라이크였던 것이다. 네팔에서는 이것을 “번다”라고 하는데 번다가 심심찮게 있는 것 같았다. 이번의 번다는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제가 실시 된지 이제 10여년이 되었다는데 이제야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 중에 발생한 것이다. 마오이스트들이 왕정 이전에는 무장 게릴라전을 하였는데 공화제가 실시된 후 합법적으로 정치에 진출하면서 이들은 정권을 잡기까지 했단다. 지금은 보수정당이 정권을 잡고 있다는데 이번 헌법제정 과정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의 충돌과정에서 발생된 것이라 한다. 자세한 것은 일수 없었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스트라이크가 거의 모든 도시에서 벌어지고 상가 철시 또한 거의 모든 상점이 하는데 카트만두, 포카라, 바구룽등의 모든 도시에서 일어난 것을 보면 마오이스트들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오이스트들의 선거벽보
그러나 이 와중에도 여행자들에 대한 배려는 어느 정파를 막론하고 모두가 승인하고 있었다. TOURIST 라고 쓴 표지를 앞창에 단 버스나 택시는 모든 교통수단이 올 수돕 된 거리를 질주 할 수 있다. 이 나라는 관광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탓으로 정치권은 물론이고 모든 이들로부터 여행자들에 대한 배려가 철저히 지켜지는 것 같았다.
나도 이혜택을 보았다. 포카라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바구룽에 가는 계획이었는데 둘째날까지 번다가 이어진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어떻게 이렇게 자주 일어나는지 이날도 번다로 인해 모든 대중교통 수단이 끊어져버린 것이다. 어떤 여행사에서는 이날 바구룽에 가면 가는 도중에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며 가는 것을 극구 말리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가 전날 잤던 예티라는 호텔 쥔장은 여행자들만을 운송하는 택시가 있으니 걱정없단다. 택시비가 턱없이 올라버리기는 했지만 제한된 일정으로 인해 우리는 거의 두배에 이르는(4300루피-현지인의 거의 반달치 월급)를 주고 갈 수밖에 없었다.
바구룽에 도착하니 “국제 NGO 생명누리”의 바구룽지부의 오00 활동가가 마중을 나와 있다. 이분은 서울에서는 동대문근방에서도 시민운동도 했다는데 주로 해외의 오지에서 현지인들이 자립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나이는 묻지 않았는데 40대 전후로 보이는 오선생은 자유로운 영혼(독신)을 지닌채 그렇게 일하고 계셨다.
우리는 그간 약간의 경제적 지원을 하였던 학교에 방문을 하여 교장선생님을 만나서 그곳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그 학교는 정식 학교는 아니어서 정부로부터의 지원도 없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모아 독지가들의 지원으로 학교를 운영한다고 한다. 앞으로는 특정한 아이와 관계를 맺기 보다는 강선생이 올해 8학년되는 아이들의 담임이므로 그곳에서 8학년에 해당하는 아이들과 교류를 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기로했다. 세상일은 어떻게 굴러갈지 모르는 일이므로 아이들이 펜팔도하고 소식을 서로 주고받으면 나중에 어떤 관계로 발전할지 모르는 일이기에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두고 아이들과의 관계 맺기에 도움을 주기로 한 것이다.
현지의 학교는 건물사이에 껴있는 누추한 곳이다.
저녁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고군분투를 하는 오선생과 교장선생과 식사를 함께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감탄한 일이 있었다. 대안학교 아이들이 졸업을 하고서 그 진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그곳까지 가서 활동을 하는 아이들을 본 것이다. 그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나이도 어린데 멀기도 하고 음식이며 사람이며 언어까지도 다 생소할 텐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 정말로 너무도 대견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대안학교아이들의 졸업 이후의 진로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뿌듯함도 느껴졌다. 꽃피는학교와 샨티학교를 졸업한 둘다 여자아이들이었다. 이런 청춘들의 특히 여성들의 힘을 느끼게했다.
이를 보면서 시민사회에서 저개발국가에 대한 관심을 가질 필요성을 느꼈다. 종교적 목적을 지니지 않고 또한 KOICA에 의한 숨겨진 의도가 없는 그런 사업들이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펼쳐진다면 그곳의 시민영역들이 성장하면서 국제적 연대 또한 건강하면서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일, 이런 일에 대안학교 아이들이 참여한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튿날 아침 일찍 꿈에도 그리던 안나푸르나(ABC)트래킹을 위해 나야풀로 향했다. 전날 호텔 예티에서 가이드를 고용해서 나야풀에서 만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다. 네팔에서의 다른 일정들 때문에 우리의 트래킹은 5일로 정했다. 이 일정에 ABC까지 다녀올라면 차로 일정 높이까지 올라가야했다. 가장 빠른 길은 4륜구동 짚차를 타고 사우리 바자르까지 올라가서 그곳부터 산행을 시작하는 일이다. 트래킹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쓴 적이 있으므로 그저 감상만 몇자 적는다.
안나푸르나 겨울트래킹은 한국인의 트래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계절에 산에서 만나는 사람중 거의 80-90%이상이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히말라야의 다른 산은 안가봐서 모르겠지만 안나푸르나는 비교적 쉬운 코스인 것 같다. 등산로가 너무도 잘 닦여져 있어서 가을철에는 유럽인들이 엉덩이만 보고 올라갈 정도로 그렇게 많이들 온다는데 1월달 산행은 만나는 사람 거의다가 한국인이다. 그리고 또 하나 놀랄만한 것은 등산 오는 한국 사람들의 남녀 비율중 여성비율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았다. 단체로 온 사람들은 그래도 남자가 좀 있는데 여성들은 혼자온 사람도 있고 두셋이서도 온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이에 비해 남자들은 단체로온 사람들이 아니면 소수가 온 사람들은 좀체로 찾아보기 힘들었다. 등산이라면 힘이 들어 여성들이 많이 안올 것 같은데 의외로 피끓는 청춘 조차도 여성비율이 더 많아 보였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게스트하우스 네팔짱에서 만난 오른쪽의 이 처자는 혼자서 여행을 하는데 안나푸르나를 갔다오고서 다시 에베레스트를 간다고 한다. 이런 처자들이 쌧다.
2920m 높이에 있는 히말라야 호텔에서 음식을 잘못 먹어 설사를 하는 바람에 강선생은 3230m의 데우랄리 산장에서 머물렀지만 배가 꾸르륵거리기만 하고 설사까진 하지 않았던 나는 점심도 롯지에서 파는 캔에든 오랜지주스(300루피의 거액)로만 식사를 대신하고 고산증 없이 ABC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4000m넘는 고지임에도 그곳의 산속은 그렇게 춥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겨울산행을 하면 그 추위가 맹렬하여 얼굴 볼따구가 떨어져나가는 것 같고 손이 곱아 주체를 못할 정도인데 그곳은 4300m의 높이에서도 우리나라 평지에서 눈이 올때의 포근함을 느끼는 그런정도의 추위에 불과했다. 위도가 낮은 탓도 있겠지만 러시아에서의 바람을 네팔 북쪽에 위치한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서 그런것 같다. 눈은 3500m이상의 높이에서만 쌓여있다. 쌓인 눈의 깊이가 알고 싶어서 내가 가지고 다니던 대나무스틱으로 깊이를 재보니 1.5m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두 군데는 아주 작은 규모의 눈사태도 있었다. 눈이 많이 올때는 ABC나 MBC에서 몇일씩 갖히기도 한단다. 내려올 땐 눈발이 휘날리면서 풍광을 만끽하기도했다. 탈없이 내려온것이 다행이다. 이렇게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마치니 오랜 바램을 마친 숙제를 끝낸 기분이 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길 헉헉
마차푸차레 7000m가 좀 안되는 봉우리이지만 돌아오지않는 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한다. 이 산은 좀 깡패같이 생겼는데 등정에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단다. 네팔에서도 몇 번의 사고 끝에 등산허가를 내주지 않는다고한다.
MBC가는길
ABC 롯지에서 저기 저 탁자의 캔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이곳에서의 운송수단은 오로지 사람이다. 모든 무거운 짐들을 사람이 머리에 띠를 받쳐이고 올라간다. 이곳에서는 이런 광경이 일상이지만 우리나라 아이들이 이광경을 보면 느끼는게 많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농사를 짓는 촘롱까지는 산비탈을 개간하여 다랭이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짓는데 풍광은 수려하지만 농사짓는 이들의 수고를 생각하면 다랭이 논의 주름살이 그들의 주름진 신체와 닮아 있어 짠한 마음이 든다.
가는곳마다 이런 밭들이 즐비하다. 인간 생존의 승리랄까!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 식이겠지만 네팔에 대한 느낌은 내게는 매우 좋았다. 일단 사람들에 대한 인상이 그렇다. 한국인 다른 여행객들에게도 물어봤지만 다들 네팔인들이 순박한 것을 인정한다. 그들은 대부분 악착같지 않고 사람을 귀찮게 하질 않는다. 관광지에서조차 그러니 일상생활에서나 시골에서는 더 그럴 것이다. 바가지도 너무 심하게 하면 배신감이 들텐데 일정하게 예의를 지킨다는 점이 너무도 좋았다. 예를 들면 네팔에서 첫날밤을 자고 호텔 체크아웃 하는데 43달러를 달란다. 내가 알기로는 아침포함 30불로 알고 있었는데 43달러를 달라니 바가지(한국을 기준으로하면 그마져도 싼거지만) 였다. 그래서 당장 이의제기를 하자 바로 33달러로 내려간다. 포카라에서도 등산을 하고 내려온 뒤 피곤한 상태에서 호텔을 잡는데 35달러를 달란다. 좀 비싼 것 같길래 30달러 하니까 바로 깍아준다. 그들이 깍을 수 없다고 해도 그냥 그곳에서 잤을 것이다. 그때는 피곤한 상태였으므로.
이곳의 음식 또한 우리에게 겉돌지 않는다. 현지인들의 주식인 달밧도 먹을만하고 산중에서 먹는 거의 모든 식자재는 유기농이다. 바구룽의 오선생도 그랫지만 그 높은곳까지 비료와 농약으로 농사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광지에서의 식사는 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음식들을 맛볼 수 있다. 그런데 관광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현지인들의 음식 값은 번듯한 음식점에서 조차도 절반수준으로 떨어진다.
네팔의 달밧 먹을만하다.
그리고 그들의 관광객 상대의 매너가 너그러운 건 누가 교육을 시켜서 그런것 같지 않다. 그들의 천성인 것 같았다. 호객을 하는데도 한번 거절하면 다시 붙잡지 않는 것에서 조금은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매사에 악착같지도 않았고 이런저런 요구에 거절을 못하는 것 같았다. 사람뿐만 아니라 나는 그곳의 개들조차도 네팔인들을 닮은 것 같아 보였다. 산에서 보이는 거개의 개들이 양치기개로 유명한 보더콜리 잡종인것 같았는데 어디를 가나 개들조차도 어슬렁거리고 느그적거리는 것이 네팔인들을 닮은 것같이 순했다.
이곳이 관광객들한테는 천국인 것이 싼 물가도 물가이려니와 어디를 가도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이다. 이렇게 이 나라는 다른 기회가 있다면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런 나라다.
하늘도 날았다.
트래킹 다음날은 포카라에서 차로 10분거리에 있는 네팔의 발도르프 유치원을 방문하였다. 이 유치원은 발도르프 유치원으로는 네팔에 하나밖에 없는 유치원이다. 대문안에 들어서니 유치원 규모치고는 너무도 커서 놀랐다. 단순히 유치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이오 다이내믹(역동) 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농장이 유치원의 몇배 크기로 뒤에 붙어 있었다. 역동농법에 대하여 발도르프학교에서는 잘 알려진 서양인 선생이 오셔서 이를 전수받기도 한단다. 수천평도 넘어보이는 땅에 각종 농사를 짓고, 옆에 있는 큰 건물에는 젖소를 비롯한 대여섯마리의 소들로 낙농도 하고 있었다. 네팔에서 이런 규모로 유치원을 하다니 그것도 발도르프 유치원을!
유치원 모습
농장규모가 대단하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어떤 농부가 발도르프 교육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하고 그로인해 충격을 받고 감동을 해서 땅을 기증해서 시작할 수 있었단다. 향후에는 유치원 졸업생들이 올라가면서 학교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데, 현재는 4명의 교사와 일꾼들이 힘들게 힘들게 꾸려가고 있단다. 그곳은 단순히 발도르프 유치원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원래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발도르프 공동체로 발전할 것 같은 좋은 느낌을 받았다. 특히나 거기의 남자선생은 성격이 무던해보이고 진중한 것 같아 더디더라도 꾸준히 이어갈 것 처럼 보였다.
그들은 커다란 포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현실은 매우 힘이 든다고 한다. 교육도하고 농사도 짓는 것도 그렇지만 이들이 힘들어 하는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이곳에 아이들을 보내는 부모들이 발도르프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데다가 세상 모두가 미쳐돌아가고 있는 돈에 대한 세계관이 이들을 내몰고 있기 때문이란다. 네팔에서의 교육열도 들어보니 우리나라에 못지않은데 유치원에 오기 이전부터 어린아이에게 영어와 수학등을 가르치는게 사회 분위기라서 그렇단다. 그래서 그쪽 사회에서는 저기 유치원에 보내면 공부안하고 놀기만 한다고 손가락질 한다는데 이들을 설득시키는게 큰 난제라한다. 그럼에도 자기의 이름조차 밝히지 말라하며 그렇게 큰 땅을 내놓은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앞길을 잘 헤쳐가리라 여겨진다.
다음날은 카트만두로 비행기로 이동을 했다. 그리하여 카트만두에서 선교사업을 하는 0목사와 함께 네팔에서의 그의 활동을 엿볼 수 있었다. 사실은 이분의 활동은 소개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들의 많은 봉사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매우 불편한 점이 보였기 때문이다. 네팔은 힌두교를 국교로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기독교를 선교한다고 신학교도 운영하는데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땅끝까지 선교하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네팔사람들이 합장을 하면서 “나마스테” 라고 하는 인사를 “예수승리”로 바꾸어 인사를 하게하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너무 불편해졌다. 고아도 돌보고, 정말 누추하기 이를데 없는 조명도 없는 천막집 아이들을 불러모아 방과후 공부도 가르치는 것이 그렇게 순수하게만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은 여기저기 카트만두의 역사가 새겨진 관광지를 돌아봤다. 그들의 건축물들이 내 눈에는 대단히 생소해 보이는데 창문이나 창살등 디테일에 들어가면 대단한 공예작품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전부 나무로 조각한 것이다.
이 수공예 창문은 예술이다!
숴염부나트, 이곳은 타멜에서 멀지 않은 네팔 유적인데 언덕으로 좀 올라가다 야트막한 산 꼭대기에 종교시설물이 세워진 곳이다. 힌두교와 불교의 복합 양식인 사원이다. 이곳에서 한 명상가를 우연히 만났다. 외모로 보기에는 지적인 냄새가 풍기고 안정된 모습이 수련을 하는 사람 같아 보인다. 그가 말하기를 이곳은 땅의 기운이 무지하게 샘솟는 곳이란다. 가만히 명상을 하고 있으면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데 사람들은 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헤매는지 라며 명상가로서 한마디한다.
궁전건물
숴염부나트
큰아들이 7-8년전에 인도와 네팔 여행을 10개월여 한적이 있었다. 그녀석은 인도 오르빌 공동체와 명상센터 그리고 내가 알지못하는 여러곳을 다니다가 네팔로 와서 숴염부나트 근방에서 수개월동안 머문 모양이었다. 그때 그 아이가 갓 스무살이었는데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그때 들은 녀석의 말을 이 명상가라는 사람한테서 들을 수 있었다.
강선생이 이제 우리는 아이들이 다 커서 우리의 시간을 갖을 수 있어서 이렇게 여행을 다닌다는 말에 그 명상가가 하는 말 “시간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라고 한다. 시간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지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이라며 말이다. 큰아이가 네팔에서 막 돌아왔을 때 들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이 명상가라는 사람한데 들으면서 속으로 불끈한다. 말을 맥락에서 의미를 찾지 않고 절대적 기준으로 이야기하고 그것으로 가오를 잡으려는 것 같아서 마음이 뒤틀린 것이다.
선문답에는 선문답 비슷한 것으로 얼버무리는 것이 상책인데 아직도 철이 덜든 모양이다.
이제 마지막 일정이 남았다. 네팔에 오면서 카트만두의 발도르프학교와 포카라의 유치원 교사들이 인도의 지원아래 컨퍼런스를 지난주에 했다는데 청계 자유발도르프교사와 인연이 있는 인도의 교사로부터 이 학교에 대해 소개를 받았다. 그래서 그날은 이 학교를 방문하는 날이다.
이 학교는 담임과정 4학년까지만 운영한다는데 이곳의 사정에 비해서는 비교적 나아보였지만 절대적으로는 매우 취약한 환경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담임과정도 8년이 아니고 4학년까지만 운영하는 것이다. 물리적 공간이 부족해서 오는 것이다. 이날은 방학중이었는데 학교를 소개하는 이선생님은 고향이 부탄이라는데 아직도 오빠는 부탄에 살고있단다. 여행업을 한다는데 부탄에 여행할 일이 있으면 자기가 소개시켜주겠단다.
마지막 날은 이나라에 와서 네팔의 전통술을 맛보지 못했는데 일부러 찾아서 전통 술을 맛보기로 했다. 그 술은 “퉁바”와 “창”이다.
퉁바는 조인지 수수인지로 발효시킨 액체가 거의 없는 주정을 만들어 여기에 끓인 물을 넣어 우러나온 물을 먹는 술이다. 술잔은 우리나라 생맥주잔 같은 모양인데 재료는 대나무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술잔이 보온역할을 한다. 술맛은 따끈하게 덥힌 청주 또는 정종맛 아니면 일본식 사케맛의 술이다. 그것을 빨대로 빨아서 먹는다. 사케는 어떨 때는 너무 뜨거워서 나쁘고 너무 급히 식어서 식으면 또 별로인데 퉁바는 뜨거운 물을 부어서 이 물이 알콜을 우러나게 해서 먹으므로 먹을 때는 적당한 온도가 되고 나무로 된 잔이 보온통 구실을 하여 그 온기가 지속되며 물을 다 빨아먹으면 또다시 뜨거운 물을 부어 다시우려먹는다. 너무 강하지도 않고 취기도 적당하게 오르는 술이다. 이 술도 네팔을 닮아있는 것 같다. 창 또한 막걸리와 너무 흡사한데 도수는 약간 낮은 편이다. 네팔에 다시가면 퉁바를 즐겨야할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퉁바를 만들어 팔면 잘 팔릴 것 같은데 마지막은 술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한가지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여행 출발하기 전날 2700달러를 잃어버려서 속이 상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이야기가 아직 안 끝났다. 네팔을 다녀와서 한 일주일쯤 지났을 때이다. 가끔 제주에서 가져온 흙이 잔득 묻혀있는 당근을 날로 먹는데 이날도 당근을 씻어먹을 요량으로 당근이 들어있는 박스에서 하나 집어 들다가 눈에 익은 봉투가 보였다. 그런데 이건 하면서 들어올리는데 아니 이것은 그 봉투가 아닌가! 강여사가 어디서 떨구고 온 2700달러가든 은행 봉투! 설마 하고 봉투를 들여다보는 순간 이럴 수가! 당장 공짜 돈을 주은 것 같았다. 야호! 이럴 수가 그것은 정말 꽁돈 이었다. 강여사가 외투를 벗어 이 박스위에 올려 놓았는데 아마도 주머니에 있던 돈이 빠져서 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돈봉투가 주머니에서 보이지 않자 이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돈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그만 잊고 있었는데 그 돈이 다시 나타나다니! 세상에 세상일 생각하기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니! 여행도 다녀오고 달러도 줍고 이만한 여행 다시 없으리라!
첫댓글 재미 있어요.
와~ 재밌어서 긴 글을 금방 읽었네요. 강선생으로 시작해 강여사로 끝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