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긍휼(자비)의 직분인 집사
이천우 목사
사도행전 6장 1-7절 / 1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1강‘그리스도의 몸을 세움에 있는 은사의 직분’과 2강‘말씀을 감독하는 자인 장로’에 이어서 3강으로‘긍휼의 직분인 집사’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주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해 교회에 주시는 은사인 직분은 목사와 장로와 함께 집사가 있습니다. 이 중 어느 직분도 있으면 좋고 없어도 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 세 직분은 보우만(H. Bowmn)d이 말한 바와 같이“그리스도께서는 불완전한 사람들을 통해서라도‘선지자직으로는(목사직을 통하여) 가르치시고,’왕직‘으로는(치리장로를 통하여) 다스리시고,’대제사장직‘으로는(집사직을 통하여) 긍휼의 왕국을 보여줍니다.”집사직은 그리스도의 선지자직 실현에 수종드는 목사나, 그의 왕직 실현에 수종드는 치리장로와 같은 비중으로 대제사장직 실현에 수종드는 자로 장립(將立)되었다는 것입니다.
집사는 감독들(교훈장로와 치리장로)과 별도로 세움이 된 또 하나의 항존직입니다. 이것은 목사, 장로에게 종속되지 않은 구별된 성직으로서 그 맡은 일의 분야가 독특하니, 빈핍한 자를 구제하는 일입니다. 이 직분은 사역분야의 독립성을 지녔습니다. 이는 이 직분이 원칙적으로는 회중이 택하는 것이요, 사도의 권위로써 임명되지 않았으니 또한 목사의 권위로써도 임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세기 초부터 치리회는 장로직과 동일체인 감독직(교훈장로)을 치리자인 장로직과 달리 해석하여 높였으며, 이에 따라 감독 중심 체제 아래서 장로직과 집사직의 독립성은 상실되어 옴으로써 감독의 독재정치가 생기고 집사직은 종속적인 위치로 저하됨으로써 집사직의 성격이 변하여 와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러한 폐단성을 알면서도 동일한 폐단의 길을 걷고 있음에 따라 마치 장로는 목사에게 종속된 직분이요, 집사는 목사, 장로에게 종속된 직분으로 잘못 알고 중세교회가 가져온 성직계급의 인식 속에서 집사를 다루는 경향에 있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언급한 바와 같이 집사직은 목사, 장로와 함께 교회가 존재하는 한에는 교회에 항시 존재하는 직분으로서 목사의 직을 통해 교회에 유익을 끼치고 장로의 직을 통해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것처럼 집사의 직을 통해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교회에 필요한 직분입니다. 집사의 직을 수행하는 자는 이 은사를 주님으로부터 받아 맡은 것인만큼 목사와 장로와 함께 동일한 하나님의 종이요 교회의 사역자(수종자/봉사자)인 것이지 목사 또는 장로에게 종속된 목사의 종이요 장로의 종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해를 기본적으로 갖고서 집사의 직에 대하여 알아야겠습니다. 장로로 세움에 받는 자에게 주신 권면에서 보는 것처럼 집사로 세움을 받는 자에게 주신 권면에서 보는 바와 같이 (1) 집사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2) 집사가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집사에 대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은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집사직 : 집사직은 목사와 장로직과 구별되는 직분이니 무흠한 남교인으로 그 지교회 교인들의 택함을 받고 목사에게 안수 임직을 받는 교회 항존직이다.
집사의 자격 : 집사는 선한 명예와 진실한 믿음과 지혜와 분별력이 있어 존중을 받고 행위가 복음에 합당하며 그 생활이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될 만한 자 중에서 선택한다. 봉사적 의무는 일반 신자의 마땅히 행할 본분인즉 집사된 자는 더욱 그러하다.
집사의 직무 : 집사의 직무는 목사, 장로와 합력하여 빈핍 곤궁한 자를 권고하며, 환자와 갇힌 자와 과부와 고아와 모든 환난 당한 자를 위문하되 당회 감독 아래서 행하며 , 교회에서 수금한 구제비와 일반 재정을 수납 지출한다.
집사의 직무를 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 원본에는 오직 한 가지만 말합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분배하는 데 특별히 봉사한다”하였을 뿐 그들의 다른 직무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고 있는데,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에서는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거론하였습니다. 이는 집사의 직무가 사도행전 6장 1-6절에서 언급해 주시고 있는 집사가 등장하는 배경에 두고 있는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권능으로 예루살렘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있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므로 믿는 자들의 수가 더욱 많아지는데, 그러한 중에 교회 안에서 신자 간에 불평과 그에 따른 분열의 조짐이 있었습니다. 헬라 말을 쓰는 유대인들이 히브리 말을 쓰는 유대인들에게 불평을 털어놓은 것이다. 그들은 날마다 식량 배급을 받을 때 자기네 과부들이 히브리 말을 쓰는 과부들만큼 많이 받지 못한다고 불평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네 상황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이지만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 시대와 6.25 동란을 겪은 후의 경제적 상황은 빈핍하여 곤궁한 삶을 사는 가난한 이가 태반이었던 때였던지라 외국의 경제 원조를 의지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활동에 의해 많은 경제적 도움을 받았으며 그 중심에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세워지는 예루살렘의 상황은 이와는 다르지만, 가난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있었고 이들은 팔레스틴에서 태어나 살면서 유대의 풍습을 따르고 아람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루살렘에는 팔레스틴 외의 이방지역에서 태어나 살면서 당시의 통용어인 헬라어를 사용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왔다가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예루살렘에 정착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그리스도의 교회에 함께 하고 있었는데 생활은 매우 빈핍하여 곤궁한 삶을 살았습니다. 교회는 이런 가난한 자들을 살펴 돌보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가난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가진 믿음에 소홀히 하며 약하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그들을 도움으로 흔들림이 없이 주께 믿음을 견고히 가져나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소용된 것이 가난한 자들을 돕는‘구제 헌금’입니다. 믿는 자들 중에서 생활이 여유가 있어 넉넉한 자들은 상대적으로 가난에 처한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에서 구제 헌금을 하였는데 특히 하루하루 생계유지가 힘든 힘 없는 자들인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아 보살폈습니다. 사도들은 이 구제 헌금을 모아 도왔는데, 하루하루가 고단한 삶에 있는 자들을 도와야 하는지라 매일 매일 행해졌습니다.
사도들이 이처럼 가난한 자들을 돕는 구제를 교회의 사역으로 행하여 나간 것은 이 일이 구약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으며 조상들이 행하여 오던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비의 법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름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15장 11절을 보면,“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 했습니다. 특히 의지할 데 없는 연약한 사람인 과부와 고아를 돌볼 것이 명령되었습니다.“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출 22:22),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신 10:18). 하지만 이들만이 구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나그네를 사랑하며 도울 것도 명령되었습니다(출 22:21; 신 10:18). 한편, 구제함에 있어서는 그것을 빌미로 가난한 형제에게서 이윤(이자)을 취하거나 종으로 삼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셨으며, 구원하셨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니 종으로 팔려서는 안 될 것이어서 종으로 엄하게 부려 먹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형제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거류민이나 동거인 또는 거류민의 가족의 후손에게 팔리면 그에게는 속량 받을 권리가 있어 그의 형제가 그를 속량하거나 그의 삼촌이나 삼촌의 아들이 그를 속량하거나 그의 가족 중 그의 살붙이가 그를 속량하게 함으로써 보호와 살핌을 받게 하였으며, 그가 속량되지 못하면 희년에는 그와 그의 자녀가 자유하게 하였습니다(레 25:25-55). 그에 따라서 사도들은 교회 안에 있는 곤란과 궁핍 가운데 있는 형제를 도울 것을 명하였으며, 신자들은 사도들을 따라 하나님의 자비에 가난한 자들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평안에 있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요한 자비에 있는 성도들이 형제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것에서 자신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관대함을 보이는 기회를 갖게 해 주시는 것이며, 믿음의 형제에 있는 성도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은 자들은 자신들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감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됩니다. 이에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첫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온 성도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부요한 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이 없이 유무상통하는 아름다운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 안에서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 간에 갈라지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구제에서 히브리파 과부들이 도움을 입는 것에 반해 헬라파 과부들 중에서 점차 일부가 이 구제에서 빠지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이는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는 자들이 많아짐에 따라 히브리파 유대인들 중에서 그리고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서 고아와 과부들의 수도 함께 많아지므로 이들을 관리하는 것에 착오 또는 실수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에 이를 바로 잡아 도움을 받아야 할 분들 모두를 보살필 수 있도록 의견이 모아지며 수고가 행해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틈을 간악한 그리고 교활한 마귀는 이용하여 교회를 분열케 하도록 헬라파 유대인들을 미혹하였습니다. 신자들의 불만을 고조시키며 원망하여 불평을 일으키게 하여서 믿는 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가진 믿음에서 떠나게 하며 교회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악용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들은 가난한 이들 중에서 구제에서 베제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충분한 인력의 봉사자가 필요함을 느끼고는 믿는 자들 중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일곱 사람을 택하여 그들로 구제하는 일을 전담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 말에‘구제’로 번역된 원문의 의미는‘섬김’,‘직무’,‘봉사’입니다. 본래‘구제’를 가리키는 말은 따로 있습니다만, 누가는 의도적으로‘섬김’,‘직무’,‘봉사’의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디아코니아’(diakoniva) 를 사용하여서‘구제’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구제하는 일이 사도들이‘말씀을 전하는 것’에 있는 봉사와 같은 성격을 띤 개념이기 때문입니다.‘말씀을 전하는 것’에서의‘전한다’에 사용된 단어가 같은‘섬김’,‘직무’,‘봉사’의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인‘디아코니아’(diakoniva)입니다. 선출한 일곱 사람으로 하여금 구제(봉사)에 있음으로써 사도들이 행하여 오던 봉사의 일에 있게 함으로써 믿음의 형제를 섬김에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사도들 자신들은 본연의 직무인“오직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전하는 것”에 전념할 수 있고자 하였습니다.
교회 헌법에서 집사의 직무를 이 구제하는 것에 두면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으로“목사, 장로와 합력하여 빈핍 곤궁한 자를 권고하며, 환자와 갇힌 자와 과부와 고아와 모든 환난 당한 자를 위문하되 당회 감독 아래서 행하며, 교회에서 수금한 구제비와 일반 재정을 수납 지출한다.”라고 기술한 것은 이 시대에서 가난한 자를 고아와 과부 또는 나그네에 한정하지 않고 좀 더 구체적인 기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집사의 직무가 갖는 본질은 믿음의 형제들이 겪는 어려운 처지를 수수방관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어 살펴 돕는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모두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주님의 교회인 것에서입니다. 이러한 섬김에 있는 봉사의 성격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구제에 한정되지 않고 그 범주가 교회가 주님의 일을 받들어 가는 것에서 있게 되는 다양성을 띠며 범주 또한 넓어지기도 합니다만 구약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자비의 법과 신약에서 사도들이 행한 봉사의 목적과 그 정신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므로 여기에 부합하여야 합니다. 교회가 이러함에 있는 전형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가“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서“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3, 24)에 있습니다. 아담, 그 사람의 한 몸이 하와이며, 하와는 자신과 한 몸인 아담을‘돕는 자’인 것에서 아담의 배필로 창조되었습니다.
목사, 장로와 함께 집사의 직무인 하나님의 자비로 돕는‘봉사’(섬김)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룸에 있는 교회는‘그리스도의 신부’로 정결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맞이하여 그들을 위해 준비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합니다. 집사의 직무가 이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여 격려합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 3:13)
다른 한글 번역 성경을 보면 좀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조자로서의 직무를 잘 수행한 사람은 훌륭한 지위에 오르게 되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에 더욱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공동번역)
집사의 직무를 잘 수행한 사람들은 좋은 지위를 얻게 되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에 큰 확신을 얻게 됩니다.(새번역성경)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은 물론 그 스스로도 주께 대한 확신과 신뢰가 더욱 강해져서 이중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현대어성경)
집사의 직분을 잘 수행한 자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좋은 지위를 얻게 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안에서 큰 확신을 얻게 된다.(바른성경)
이러하기에 집사의 직을 맡는 자들은 자신이 맡은 바의 직분을 가볍게 여기며 소홀히 하지 말고 주님과 성도들을 봉사하여 섬김에 신실하며 충성되어야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인 까닭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