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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道廳臨時公務員
나는 고등학교를 도청 근처에서 다니고 졸업했어도 공무원시험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에 공무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문계열의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선생님들마저 장래의 직업에 대해서는 한마디 권고도 없이 그저 대학 진학문제에 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했다. 나는 공무원이란 누군가의 천거, 즉 속된 말로 빽에 의하여 입사하고, 임시직으로 다니다가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후에는 자동적으로 정규직이 되는 것으로 희미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청에 임시직으로 입사하면서도 세월이 가면 정규직이 되는 거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입사한지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공직사회에 특별채용이라는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공무원은 채용시험을 거쳐서 정규직 공무원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회 물정에 대해서 너무나도 순진했던 나였다.
도청 도로과에 들어가 보니 내가 가장 어린 나이였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미스 최가 나보다 두 살 아래였으나 남자 직원 중에서는 내가 가장 어렸다. 모두가 형님뻘이나 아버지뻘의 어른들이니 그 앞에서의 나의 언행은 정말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더구나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햇병아리 직원이니 그들이 어려웠고, 시키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담당한 자리의 명칭이 제도사이지 맡겨진 업무는 잡무처리였다. 차트 쓸 일은 거의 없고, 과의 서무를 담당한 강 주사의 업무보조로 이것저것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자리였다. 어차피 임시직이란 그런 자리인 듯싶었다. 과내의 4개계에 근무하는 직원은 모두 26명이었고, 서울에 소재한 중기사업소도 도로과 소속이라고 하였다. 그곳엔 60여명의 직원이 있다는데 대부분 중기조종사라고 했다. 중기사업소는 후에 도로관리사업소로 바뀌고, 다시 건설본부로 변경됐다.
나는 수원천변 큰형이 살던 시계방 점포에서 기거하며 출근을 했다. 큰형이 별세한 후 시계방은 동생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맡아서 운영했다. 남수동에서 2km 정도를 걸어서 출퇴근했다. 아침 9시까지 출근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8시가 되기 전에 출근해서 과장실을 비롯한 사무실 바닥을 매일 청소했다. 책상 위는 여직원이 닦았고, 나는 다른 임시직 선배와 함께 대걸레로 바닥을 청소했다. 그 후로 나는 정규직 공무원이 되어서도 평생을 8시 이전에 출근했다. 전 공직생활을 통하여 8시 이후에 출근한 날은 아마 수십 일도 안 될 것이다. 나의 근면성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공무원이 되면서부터 더욱 부지런하게 습관화되어버렸다. 아무 일도 안 하고 멀거니 앉아 있거나 낮잠을 자거나 하는 일에 나는 익숙하지가 않아서 항상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과장실을 비롯하여 사무실 바닥을 깨끗하게 닦아 놓으니 과장님은 물론 모든 직원이 좋아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청소하니 출근해서 만나는 사람들 마다 나를 칭찬했다. 나도 칭찬해주는 사람들이 싫지 않았다. 업무시간이 되면 별로 할 일은 없었다. 과장님과 계장님의 바인더를 정리하고, 계 소속의 직원들이 시키는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었다. 글씨도 쓰고, 서류 편철도 하고, 계산기도 돌리고, 심부름도 하였다. 내가 가장 어리고 고분고분하니 모두들 나에게 일을 맡겼으나 책임을 져야 하거나 어려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도청 근무가 조금 익숙해지니 재미도 붙고, 모두 귀여워 해주니 출근이 즐거웠다.
지방공무원의 봉급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월 20일이다. 봉급날이 되면 같은 계의 이 주사가 누런 종이로 된 봉급봉투에 현금을 담아서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각자의 것을 각자에게 직접 주므로 타인의 봉급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봉급이 가장 적을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아무튼 첫 봉급을 탔으니 부모님께 갖다드리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했지만 내 뒷바라지를 해주시는 큰형수에게 드릴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감히 부끄러워서 사무실에서 봉급봉투를 열어볼 수는 없었고, 집에 도착해서 열어보니 8,200원. 쌀 1가마니 값이 6,500원이었으니 쌀 한가마니를 사고 나면 조금 남는 돈이었다.
봉급날이 지나고 25일이 되니 옆의 중기계 차석인 신 주사가 나를 불렀다. 다가가니 신 주사 책상 위에는 50여개가 넘어 보이는 봉급봉투가 가지런히 포개져 있었다. 신 주사가 그중 하나를 집어 나에게 내미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얼떨결에 받아서 주머니에 넣고 “고맙습니다.”하였다. “고맙긴?” 봉투를 받아 주머니에 넣고 내 자리로 돌아왔으나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 나에게 봉급봉투를 또 주는 걸까? 잘못 준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렇게 양쪽에서 나누어 주는 것일까.’알 수 없어서 답답했지만 두어 시간을 고민하다가 봉투를 주머니에 넣은 채로 퇴근했다. 집에 와서 세어보니 똑같은 8,200원. 다행이라 생각하고, 간직하고 있다가 고향집에 들어갈 때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사고, 나머지는 용돈으로 썼다. 내 봉급은 매월 두 번씩 나왔다. 한 번의 봉급을 전액 형수에게 갖다드려도 용돈을 충분히 쓸 수 있었다.
해가 바뀌고 2월이 되니 옆의 중기계에 나보다도 한 살 어린 직원이 새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는 정규직이었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격증을 취득해서 기계직 특별채용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의 직명은 ‘조건부 지방기계기원보’였다. 나도 공무원채용시험이 그 해 8월쯤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시험에 응시하려고 몇 권의 책을 사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자격증을 취득해서 면접시험만 거쳐 특별 채용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그를 만나고서야 처음 알았다. 역시 집안에 공무원이 있어야 공무원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는 법. 그는 형이 군청에 다니는 공무원이었으므로 따라서 공무원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조 주사, 그는 원 기사라고 불렸다. 성이 원 씨이고 기술직이므로 원 기사라고 불렀다. 나는 행정직 공무원들이 근무하는 계에 있으니 조 주사라고 불렸다. 나와 원 기사는 가장 나이가 어렸으므로 금방 친해졌다. 우리들은 윗사람들 앞에서 감히 담배를 피울 수가 없었다. 화장실에 가도 어른들이 출입했고, 복도에서 피울 수도 없었다. 용케 찾아낸 끽연장소가 건물 옥상에 있는 배 모양의 옥탑이었다. 태극기와 경기도기가 휘날리는 돛대 밑에서 담배를 피우면 아무도 우리들을 볼 수 없었다. 정말 아늑한 장소였다. 우리 들은 담배가 피우고 싶으면 항상 옥상의 배 안으로 들어갔다.
담배를 피우면서 원 기사가 물었다. “조 형은 봉급이 얼마나 돼?” “나는 임시직이라서 얼마 안 돼. 원 기사는 얼마나 타는데?” “총액이 9,800원인데 기여금과 세금 내고나면 9,000원이 조금 안 돼.” 나는 깜짝 놀랐다. 정규직인데도 임시직인 나보다 별로 많지 않으니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 봉급봉투를 보여주는데 정말이었다. 1970년대 초에는 공무원 봉급에 보너스도 전혀 없었고 아주 야박했다. 그리고 하위직 봉급은 정규직이나 임시직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추측해 보니 나는 봉급을 두 번씩 받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할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내 봉급에선 공제하는 것이 없고, 8,600원 정도야.” “그럼 정규직과 별 차이 없네.” 그러나 차이가 많이 났다. 정규직보다도 내가 훨씬 많이 타는 것이었다. 내가 바른대로 밝히지 못할 뿐이지. 퇴근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니 큰 문제였다. 매월 봉급을 두 번씩 받은 것이 분명한데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그동안 더 타먹은 봉급을 물어내야 할 것이니 발설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내가 사기 친 것은 아니니까 내 스스로 말할 순 없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다음 달에도 봉급을 두 번 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미 타먹은 봉급 때문에 정말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 내가 입사할 때에 도로행정계의 예산이 부족하여 중기계에서 내 봉급을 주기로 약조한 모양인데 양 계간에 사무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군대에 입대할 때까지 6개월 동안 봉급을 두 번씩 받고 다녔다. 중기계 소속하에는 서울지역에 중기사업소라는 기관이 있었는데 60여명의 근무인원 중 40여명이 중기조종사이고 나머지가 정규직과 임시직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아마도 내가 그 중기사업소와 도로과 등 양쪽으로 소속되어 있지 않았었나 생각된다.
내가 공무원시험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어느 날 고향에 들어가니 군대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나와 있었다. 군대에 입대할 나이였으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사무실에서 봉급을 계속 두 번씩 받는 것도 미안하고, 내가 스스로 그 사실을 밝힐 수도 없어서 영장이 나온 것을 나는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아버지는 상심이 크셨다. 들어가기 어려운 도청에 가서 근무하고 있는 아들이 대견했었는데 6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다니 큰 손실이었다. 아버지는 자식이 군대 가지 않는 방법을 이리저리 알아보려 다니셨다. 입대할 날짜까지는 30여일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나는 군대에 입대할 것을 이미 각오한 입장이니 아버지가 동분서주하시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남자라면 누구나 군대에 다녀와야 사람노릇을 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얘, 내가 알아보니 20만원만 쓰면 방위병으로 빠질 수 있다더라. 현역으로 안 가도록 자세히 알아봐라.” “아버지, 그만두세요. 20만원이면 황소가 한 마린데요. 무엇하러 그렇게 합니까?”
“이렇게 답답한 녀석이 있나. 황소 한 마리야 정식 공무원만 된다면 잠깐 벌 수 있지. 군대 가서 고생하고 허송세월하는 것에 비하겠니?” “그래도 저는 군대에 가겠습니다. 남들도 다 가는 군대를 안 가면 평생 손가락질 받지요.” “에이 답답한 놈 같으니라고. 나도 모르겠다.” 아버지도 결국 물러서셨다. 하기야 먹고살기 힘든 농촌에서 황소 한 마리가 얼마나 큰 재산인데. 나중에야 알았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 않은 나는 군대에 가서 비무장지대 수색대로 끌려가 3년 동안 엄청난 고생을 하고, 사회로의 출발이 늦어져 평생을 남보다 뒤쳐지는 삶으로 괴로워야 했다. 우리나라의 국방의무는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자의 몫이요, 감히 신성하다는 국방의 의무를 완수한 자는 국가의 보답은커녕 평생 동안 괴로움과 불리함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 역시도 아버지의 분부대로 현역병 입대를 기피하여 시험을 보고, 일찌감치 정규직 공무원이 되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무장공비 김 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까부수기 위하여 침투한 사건으로 인하여 향토예비군이 설치되었고, 현역병으로의 입대 외에 방위병 근무제도가 새로 생겨났다. 내가 입대하기 전전해에 방위병 근무제도가 생겨서 친구들 중의 일부는 봉담면 경찰지서(파출소)에서 이미 방위병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규 경찰의 심부름이나 사무보조, 병기수입, 야간보초 등의 업무를 수행했으나 1년 6개월 동안 거의 놀다시피 하다가 방위소집 해제(제대)를 받는 것이었다. 공무원 신분으로 근무했던 방위병들은 낮에는 봉급을 받으며 면사무소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초소에서 보초근무를 하였으나 거의 형식적이었다. 내가 최전방 수색대 근무를 하면서 휴가차 나와 보면 경찰지서의 방위병들은 탁구를 치며 놀고 있었다. 정말 무엇 빠지게 고생하는 현역병은 거의 3년 동안 매타작하며 썩다가 제대하는데 자기 집에서 편안히 잠을 자는 방위병들은 현역병 복무기간의 절반 정도만 근무하면 제대했다. 결국 현역병 제대자는 방위병 보다 사회생활에서도 1년 6개월을 뒤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완전히 특권층의 자식들을 위한 국방제도였다. 그러니 방위병으로 빠지기 위해서 무슨 술수라도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황소 한 마리 값이면 현역병 입영을 회피할 수 있었다는 말인데 그 황소 한 마리 값이 도대체 대한민국 정부의 살림살이에 한 푼이라도 보탬이 되었는지 묻고 싶다.
내가 현역병으로 입영한다니까 과장님, 계장님은 물론 직원들까지도 방위병 제도가 생겼는데 왜 현역병으로 가려 하느냐고 물었다. 심지어 과장님은 자신이 주선해서 나를 방위병으로 빼주겠다고 까지 설득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입영영장을 받은 몸이었고, 뇌물을 쓰거나 여러 사람에게 까지 폐를 끼치며 방위병이 되기는 정말 싫었다. 그래서 과감히 현역병으로 입대하겠다고 내뻗었다. 1971년 5월 6일에 입대하는데 4월 30일 까지 도청에 근무했다. 입대하기 전에 대부분의 친구들이 한 달 이상을 여기저기로 놀러 다녔지만 나는 고작 5일간의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입영을 했다. 사무실에 마지막으로 출근하던 날, 퇴근 무렵에 과장님 여비서가 불러서 과장실로 들어가니 과장님이 흰 봉투를 하나 주면서 격려해 주었다. “몸 건강히 잘 다녀오고, 제대하면 꼭 도청에 들르게.” “예, 과장님. 그동안 너무 고마웠습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과장실에서 나오니 직속상사인 계장님이 불러 또 하나의 흰 봉투를 주면서 과장님과 똑 같은 말로 격려를 해 주었다. 봉투의 겉봉에는‘석별, 도로행정계 직원 일동’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퇴근했다. 귀가해서 과장님과 계장님이 주신 봉투를 열어보니 과장님이 준 봉투 속에는 2만원, 계장님이 준 것에는 1만원이 들어 있었다. 아마도 과장님이 준 돈은 각 계가 부담한 것이고, 계장님이 준 돈은 도로행정계의 공통경비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아무튼 너무나 고맙고 매우 정겨운 분들이었다.
*현재 **도청에 고위공무원이 된 실화(자서전)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