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1. 주일예배 설교(대림절 첫 번째 주일)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족보의 은총
■ ‘함경남도 홍원군 용포면 신덕리 대대골’ 혹시 이곳이 어딘지 아시나요? 네, 이북, 북한 주소입니다. 하나 더 물어보겠습니다. ‘전주 이씨 왕풍대군 파’ 이것은 무슨 뜻인가요? 네, 이씨 성 중에 전주 이씨고, 그중에서 왕풍대군의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혹시 이 주소와 자손에 해당되는 사람이 이곳에 있을까요? 있다면 누굴까요? 초성만 알려드릴까요? ㅇ·ㄷ·ㅊ
여러분은 지금 한 사람의 족보를 들으셨습니다. 좀 달라 보이십니까?☺ 이번에는 다른 한 사람의 족보를 보시겠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누구의 족보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1절) 당장 우리의 의문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왜 족보가 필요하시지?’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족보라는 것이 필요 없을뿐더러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존재하시고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족보를 만들어 주신 분이십니다. 족보에 속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예수님이 왜 우리와 같은 족보 속에 계실까?’를 이해해야 합니다. 족보를 가지셔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실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사람이 되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의 문제는 아무리 애써도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속 제물을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짐승을 통한 대속 제물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일회적이고 일시적이라는 한계였습니다. 매번 죄를 속죄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영원하고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결책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것만이, 그리고 스스로 대속 제물로 죽으시는 것만이 해결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소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되는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 방법과 과정을 통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더욱이 그래야 진짜 사람이 되어 우리의 모든 희로애락을 느끼고 이해하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써 진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본문을 보고 계시다시피 “낳고 낳고 낳고...”의 과정을 통해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6절)입니다.
■ 여기서 우리의 질문은 ‘그렇다면 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의 계보/족보를 타셨는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40여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중에서 유독 두 사람만을 콕 집어서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아브라함과 다윗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언약을 받은 당사자들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 언약은 죄의 저주 가운데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아브라함의 자손 중 한 사람을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다윗에게는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히 하리라’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 언약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는 한 왕을 통하여 평화와 공의와 자비로 다스려지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의 오랜 소망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온 인류의 소망이었습니다.
본문이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 소개한 까닭은 바로 예수님이 이 언약의 성취자이심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 역사의 드라마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을 거쳐 마침내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 절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하늘에서 떨어지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바로 그 아브라함의 씨이자 다윗의 자손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에서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내용과 형식을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5명의 여자 이름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매우 파격적인 일입니다. 우리나라 족보를 봐도 여자는 명단에 넣지를 않습니다. 당시 동양 문화권에서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의 명단이 있는 것도 파격인데, 여기 명단에 올린 이 5명자체가 매우 파격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파격의 파격인 셈입니다. 무슨 파격일까요?
우선 5명의 명단을 찾아볼까요? 3절에 ‘다말’, 5절에 ‘라합’과 ‘룻’, 7절에 ‘우리야의 아내’(밧세바), 그리고 16절의 ‘마리아’입니다. 혹시 ‘다말’이 어떤 여인인지 아십니까? 창녀로 위장하고 시아버지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은 부정한 사건의 주인공입니다. ‘라합’은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가나안 족속의 이방 여인이었을 뿐 아니라 직업은 기생이었습니다. ‘룻’은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했지만 모압 출신의 가난한 이방인이었습니다. 일단 이 세 여인들은 모두 신분이 비천하거나 도덕적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족보의 관습으로 보아도 메시아의 족보에 어울리지 않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자, 이번에는 ‘우리야의 아내’를 볼까요? 우리는 이미 ‘우리야의 아내’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밧세바’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왜 굳이 밧세바가 아닌 우리야의 아내라고 표현했을까요? 이것은 남의 아내에게서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을 부각시켜서 다윗의 죄를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었다고 해도, 이 치명적인 죄 때문에 족보에 낄 자격이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마리아에 대해서는 평가 불가죠? 어떤 잘못도 흠도 없기 때문입니다. 족보에 충분히 올려질만한 여인입니다.
살펴보았다시피, 혹시 열국의 어미 사라, 이삭의 아내이자 야곱의 어머니인 리브가가 족보에 있었다면 수긍할 만하겠는데, 마리아를 뺀 다른 여인들은 족보에 오른 것이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우리의 판단일 뿐입니다. 이들의 이름이 메시아의 족보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바는 우리의 판단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은혜의 역사요, 믿음의 역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이들 여인들만 이런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그렇다시피, 족보에 등장한 모든 인물들은 자기가 잘 나서 거기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따지고 보면, 참 못난 사람들입니다. 지위가 높든 낮든, 명예가 있든 없든, 참 못난 구석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이 거룩한 족보에 들어간 것은 전적으로 은혜인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은혜의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언약’(Covenant)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베리트’(בְּרִית)라고 합니다. 언약은 일반적으로 상호간의 계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와 맺는 계약인 언약은 일반적인 의미와는 매우 상이한 면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계약은 한쪽이 계약을 파기하면 쌍방의 계약은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계약인 언약은 다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계약을 파기하시지 않지만, 우리가 그 계약을 파기해도 결코 무효화시키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막대한 손해와 손실이 있어도, 심지어 목숨을 내놓아야 해도 계약을 파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한분만 섬기겠다고 해 놓고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많은 배신을 했습니까? 충성보다는 배신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끝까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우리는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약속에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6절)
끝까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이시고, 저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대림절,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의 은총의 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