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1. 주일설교
시편 127편 1~2절
성실(誠實)하라! 그러나 경건(敬虔)하라!
■ 우리는 지금 매우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이름 붙여진 질병과 사투(死鬪)를 벌이는 중입니다. 최근 들어 너무도 확산 속도가 빨라 국가와 정부, 그리고 의료진들이 너무나 고생이 많습니다. 참으로 이들의 수고에 감사와 격려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를 이겨내기 위해 힘을 합치고 있는 국민들도 고맙습니다.
이렇게 모두가 애쓰고 있을 때 교회와 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이 수고에 힘을 보태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집단 감염이 높은 질병이기에 집회를 자제하는 일입니다. 이에 교단 총회는 전국 교회에 집회 자제를 권고하였습니다. 특히 ‘3월 1일 주일예배’와 ‘3월 8일 주일예배’를 가정예배 혹은 인터넷예배로 드릴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비전교회는 총회의 권고에 따라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 자, 그렇다면 이 초유의 국가적 사태를 만난 우리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중국 심판론, 신천지 심판론, 대형교회 심판론, 한국교회 심판론, 자연의 역습론 등의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이 의견들은 다 나름의 논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 어느 의견에도 ‘아니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결론을 내릴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겸손해야 할 때입니다. 시편 127편 1~2절을 이해해야 할 때입니다. 읽었지만 다시 한 번 읽어 볼까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수고의 한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힘을 들이고 애를 써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수고가 불필요하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는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수고를 다해야 멋진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잠을 물리쳐가며 수고해야 파수(把守)를 할 수 있습니다. 적당한 쉼과 운동을 통한 건강관리의 수고를 해야 건강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수고 없이 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혹시 수고 없이도 누릴 수 있는 것을 노린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수고의 태도를 ‘성실’(誠實)이라고 부릅니다. 인생에 있어 성실은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그가 성실한 사람이냐를 먼저 봐야합니다. 물론 실력을 우선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력이라는 것은 가변적(可變的)이고 상황적(狀況的)입니다. 언제든지 불필요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성실은 불변적(不變的)입니다. 성실은 휴머니즘이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인생이 주는 아름다운 선물이 늘 있습니다.
■ 그런데 아무리 애쓰고, 아무리 성실히 살아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일까요? ‘한계’입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튼튼한 집도 무너질 수 있고, 삼엄한 경비도 뚫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건강관리를 잘하고, 열심히 일해도 아플 수 있고, 배고플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히 어느 누구도 무너지라고 집을 짓지는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뚫릴 경비를 서지는 않습니다. 아프라고 건강관리하고, 배고프려고 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너지고, 뚫립니다. 아프고 배고픕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 한계는 인간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와 구조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완전을 위해 수고합니다.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완전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 바가 바로 이 한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실해도 성실만 갖고는 안 되는 것이 인생임을 깨닫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한계를 인정하는 것으로 끝일까요? 아닙니다. 무한하신 전능의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집을 세우는 자의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밤새 파수하는 자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으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건강관리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으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노동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으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경건’(敬虔)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고백할 때 우리의 삶에 희망이 피고 열매가 맺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2절)
■ ‘코로나19’로 인한 염려와 불안이 확산되는 가운데 국가적·국민적 불안감을 덜어내는데 협력하기 위해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 총회가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드리기로 결정한 것은 매우 잘한 일입니다. 이것은 ‘성실’입니다.
이제 여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경건’입니다. 인생이 결코 성실로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완성은 성실이 아니라 경건입니다.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국가의 수고에 최대한 협조해야 합니다. 교단 총회의 결정을 최대한 응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성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성실에 더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경건입니다. 경건은 우리의 수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소서!”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성실과 경건이 조화를 이루는 믿음의 삶을 살아내는 비전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국가적·지구적 재난인 ‘코로나19’를 잘 넘길 수 있는 성실과 경건의 비전교인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