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우리나라의 외교 안보 정책과 현안을 보면 뒤숭숭하기 짝이 없다. 임기 중 “과거사 문제를 재론하지 않겠다”던 노무현 정부를 향해 일본은 독도와 역사 교과서 문제로 뒤통수를 치고 있고, 미국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은 한국을 향해 “도움을 받으려면 누가 당신들의 주적인지 분명히 밝히라”고 몰아세운다. 그런가 하면 중국은 정부의 ‘동북아 중심축 구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중심축’으로 부상하려는 우리의 소망 자체를 이미 묵살했고, 아직까지도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우긴다.
참여 정부에 들어와 고위 외교 안보 담당자들이 “주변 강대국(특히 미국)에 대해 자주적으로 할말은 한다”고 천명하면서 마치도 한국의 대외적 위상을 높일 듯 의기양양한 기세였지만, 실제 상황은 더욱 옹색해 지는 것이 당면한 국제정치 현실이다. 주변 강국의 발언과 행동 수위는 우리의 심리적 당혹감과 비분강개만 자극할 뿐, 실질적으로 대안도 마땅치 않거니와 대한민국의 대외적 입지도 위축되는 형국이다. 그렇다고 남북관계가 개선되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남북간 신뢰가 구축되고 북한의 군사 위협이 줄어들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미 공식적인 북의 핵 보유 주장으로 우리의 안보 입지는 추락하고 있다. “남조선의 대통령도 북조선의 핵 보유가 자위권 차원임을 인정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며 북이 핵무기 보유의 정당성을 강변한다는 말도 나온다. 나아가 북한 핵 문제의 중재 역할 운운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의 주도적 입지는 실종되고 있다.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만을, 그리고 미국은 중국의 결정적
역할에만 집착하고 있어, 한국이 비집고 들어갈 틈도 별로 없다. 그렇다면 대체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처해 있는 지정학적 현실이다. 인위적으로 노력한다 해서 미국, 중국, 일본 및 러시아의 이해가 상충하는 한반도의 지리적 굴레가 극복되지는 않는다. 한반도가 그들의 1차적 관심사는 아니지만, 그들의 힘 관계가 결국은 한반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우리가 처한 딜레마다. 상징적 화해와 경협에도 불구하고 남북 분단과 군사적 긴장은 우리를 조이는 요인이며, 세계 11위를 다투는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지만 동북아의 안보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아직도 상대적 약소국의 입지를 강요한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다른 데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외교 정책의 기본 잣대는 생존과 발전이라는 국가 이익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빈번히 이상주의로 무장된 이념의 잣대를 외교에 들이댄다. 감상적 민족주의, 실체 없는 평화, 속 빈 자주론이 그것이다. 때로는 국제정치 현실을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으로써 ‘개혁’할 수 있다는 착각도 투영시킨다. 오만한 패권국에 대해 할 말은 하고 나아가 우리 식대로 한 수 가르쳐 주면 그들이 다소곳하게 우리의 입장에 귀 기울일 것이라는 희망적 관측이 그것이다. 한반도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오해에 빠져 오류를 범하는 일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국제정치의 유일한 화두는 ‘힘’이다. 인류 역사 이래 그 公理가 도전받은 예는 전무하다. 파워가 아닌 이데올로기로써 세상을 바꾸겠다던 맑시즘도 이미 종언을 고한지 오래다. 조선시대 말기에, ‘자주’를 외치며 스러져가는 국운을 되살리고자 안간힘을 쓴 선조들의 민족주의가 제 빛을 발하지도 못하고 일제의 악랄한 식민 통치로 귀결된 이유도 바로 국제정치의 힘 논리를 미처 간파하지 못해 현실적 대처 능력을 결여한 우리에게 있었다. 이러한 상황 인식의 부재는 반드시 이념 갈등과 궤를 같이 한다. 권력을 장악한 엘리트와 그 권력에 도전하는 카운터 엘리트들은, 국민의 생존과 국가 번영이라는 실질적 문제는 뒷전인 채 편협한 국내정치적 권력 투쟁에 몰두한다. 그리고 상대를 제압하는 수단으로써 이념적 잣대와 주관적 정의론을 동원하는데, 멀리는 조선시대의 사색당파에서 가까이는 보혁 갈등에 이르기까지 그 배후에 권력투쟁의 이전투구가 가세하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목도하듯, 외교 안보 정책도 예외는 아니다. 국익을 위해 여론을 설득하기 보다는 여론을 의식해 또는 정략적 이해 때문에 국익에 타협하는 단견적 외교 정책도 나타나며, 민초들의 부화뇌동과 냄비근성은 갈등을 심화시키는 촉매가 된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내부 분열이 국가 에너지의 비생산적 소모로 귀결되는 되는 것이다. 역사의 場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비극의 단초들이기도 했다.
동맹이나 주적은 그 국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단적으로, 국제정치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북한과는, 같은 민족으로서 화해 협력을 추진하되 어떠한 도발도 불허하고, 미국과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소멸되지 않는 한 동맹과 공조를 계속하며 미국의 방위공약을 비용효과적 안보의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 또, 일본과는 미래지향적 접근을 취하되 역사의 상처와 왜곡에 대해서는 단호하고도 분명한 원칙과 입장을 견지하고, 중국과는 긴밀히 협력하되 잠재적 도전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 대외정책의 기본 방향이어야 한다. 지정학의 굴레를 기회로 승화시키는 주역도 우리이며, 굴레의 노예가 되는 것에 대한 책임도 우리가 져야 한다. 힘으로 상대가 안 되면, 우선 우리의 이해에 맞게 관리할 능력을 발휘하는 일도 우리 몫이다. 강대국과의 관계에 있어 관계가 단절될 때의 피해자가 우리라면, 국가의 자존은 지키되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상대와의 관계 유지에 진력해야 할 주체도 우리다. 그들에 비견할 명실상부한 國力의 소유자가 될 때까지, 불가피하게 거쳐야 할 고단한 관문일 수도 있다. 주변 강국과 북한이 우리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에 맞설 지렛대도 사전에 열심히 준비했어야 했다. 지렛대가 부재한 상황에서, 공허한 외교적 修辭나 주장, 희망적 관측 및 자의적 해석이 얼마나 무의미하며 심각한 부메랑이 될 수 있는지는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다. 전례 없는 또는 상궤를 벗어나는 외교적 태도 변화가 우리 내면의 피해의식과 민족주의적 이상을 잠시 다독여 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 이익의 합리성과 대치될 때 그 궁극적인 피해자는 민초들임을 자각할 때다. 한마디로 우리는 지금 向路가 불분명한 외교 노선과 修辭로 인해 극심한 혼선을 겪고 있다. 이것이 한계 상황의 조짐이라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 질 가능성마저 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도자의 비전과 통찰력, 그리고 전문성과 경험으로 무장한 안보 담당자들의 소신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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