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화 '벌새'를 보았다. 영화는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있었던 1994년도 중학교 2학년 은희의 성장을 섬세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은희의 학교 선생님은 날라리를 색출한다며 날라리 두 명의 이름을 써서 내라고 한다. 날라리란 공부 안 하고 노래방 가는 애, 공부 안 하고 연애하는 애라고 선생님은 규정한다.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를 학생들에게 복창시킨다. 지금 시각에서 보면 말도 안 되지만 그 시절의 학교에서는 있을 법한 일이다. 너희는 지금 중 2 고, 곧 중3이 되니 대입이 멀지 않았다며 미래만 보며 공부하라고 설교한다. 그건 지금도 여전한, 오히려 더 심해졌을지도 모르는, 이제는 어른이 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니 나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던 그날 아침도 생각났다. 한 친구가 웃었는데 그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렸던 선생님은 그 친구를 무지막지하게 때렸다. 선생님의 기분을 살피지 않고 함부로 웃으면 안 된다는 걸 그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배웠다. 학교는 분노조절 장애가 있는 교사가 무서운 선생님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그 뒤로도 교사에 의한 학생 폭행은 더 있었다. 내가 한 번도 맞아 본 적이 없는걸 다행으로 여겼던 건 확실하다. 그게 나의 자부심이 되기도 했다. 소위 매를 버는 친구들에 대한 멸시도 있지 않았을까. 없다고 장담 못 한다. 학교는 그렇게 강자의 편에서 약자에 대한 혐오를 경험하는 공간이었다.
모의고사 성적 상위권의 이름이 적힌 게시판을 지나던 순간도 기억난다. 내 이름이 없는 그 게시판을 지날 때마다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곳에 이름이 올려진 아이들 사이에서도 누가 이번에는 전교 1등인지 10등인지를 두고 엄청난 스트레스가 있었을거다. 모의고사 성적이 게시되면 자기일도 아닌데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가 누가 1등인지 확인했다. 마지막 졸업식날까지 명문대에 합격해 학교의 명예를 높인 친구에게 박수를 쳤다. 그 순간 나는 분명히 씁쓸했다.
그렇다고 학교생활이 불행하기만은 한건 아니었다. 친구들과 쫄볶기를 사 먹기도 했고, 끊임없는 수다로 웃기도 많이 했다. 나는 최상위권에 속하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꾸준히 공부하는 걸 좋아했다. 영어 단어를 외우는 0교시를 좋아했고, 과학에서 배우는 원리들은 참으로 신기했다. 학교에서 하는 여러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 과정도 즐거웠다. 백일장에 나가서 상을 받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아무도 나에게 글을 쓰라고 말을 안 해줬는지. 그게 아쉽다. 학과 성적 외에 보이는 소질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거 같다. 백일장에 나가서 글을 쓸 시간에 수학 문제를 하나 더 푸는 게 학생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누리는 것들. 여기까지 오기까지 만난 사람들. 직장에서의 대우. 나의 출신 대학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공부를 그럭저럭은 했다는 게 긍정적으로 작용한 부분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서 멀어지기도 했다. 그릇된 우월감과 열등감 속에서 떠밀리듯 여기까지 왔다. 박수를 받기에는 내 능력이 모자라서 위축되었지만, 좀 더 노력하면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을 거라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도 했다.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그 어중간함이 편하기도 불편하기도 한 어정쩡함이 나의 정체성이었다.
이제는 이것저것 쑤셔 넣은 가방을 탈탈 털어서 정리할 때가 되었다. 그때는 학교에서 중요하다고 한 것이 나에게도 중요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그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걸 내가 가지고 있지 않으면 부끄러웠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평가에 길들여져서 전전긍긍했던 나를 버리고 평가에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시험과 교사가 묻는 질문에 정답을 맞히려고 애썼다면 이제는 내가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싶다.
부당한 것들에 견디고 억울해도 참는 법을 배우는 게 학교에서 말하는 사회성인가요? 학교에서 누구나 성취감을 맞보며 배울 수 있나요? 배움과 성장이 일어나는 학교는 어떻게 해야 만들 수 있는 건가요? 언제쯤 출신학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나요? 이 질문은 나의 과거를. 그때 내가 놓친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지만 아직도 그곳에서 겪은 경험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너무 피곤했는데, 그냥 견뎌야 되는 줄 알았다. 버티기만 했던 그 시절이 아깝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내가 뭘 좋아하지는 알아보고 싶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시기를 보냈으면 좋겠다. 더 열심히 공부할 걸, 그런 생각 말고 말이다. -새힘-
첫댓글 지금이라도 글을 좀 더 자주 쓰셔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면 좋겠어요. 글을 읽으면서 세밀한 울림이 느껴졌습니다. 그 울림이 좋아서 읽고 나서 한 번 더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