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10월18일(수) 회의론 비판과 업의 교설Ⅰ
Ⅱ-4.산자야의 회의론: 산자야 벨라티풋타(Sanjaya Belatthiputta): 보지 않았다면 단정적으로 주장하지 마라.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하여 어떠한 주장도 단정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 산자야의 논법은 경우마다 말하는 방식이 달라지므로 ‘미꾸라지처럼 붙잡기 어려운 논리’라고 불리었다.
①인도철학이 문을 닫고 회의론 등장한다. 단정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하더라도 가정적으로 주장하는 것까지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면서 나온 것이 니간타Nigantha의 상대주의이다.
②회의론은 형이상학적(Metaphysics:보이지 않는 세계)주제에 관한한 어떠한 주장도 단정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철학적 입장이다.
③회의론은 철학의 무덤이고 종교의 묘지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모른다.’고 선언하고 침묵하라고 하니까, 모든 철학과 종교가 할 말이 없어진다.
④문제점: 일체의 철학적 논의를 중단하고 침묵하면 되기는 되겠으나, 종교적 해결은 아니다. 종교는 단정이지 가정이 아니다. 예수가 ‘나는 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종교가는 단호하게 진리선언을 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우빠띳사와 꼴리따의 귀의
라자가하로 몰려드는 수행자의 물결을 유심히 바라보는 청년이 있었다. 일찍부터 세상의 고통을 벗어나는 길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 이름난 스승을 찾아 도를 묻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몇 년을 보냈다. 그는 날란다(Nalanda) 지역의 이름난 유지의 아들인 우빠띳사(Upatissa)와 그 친구 꼴리따(Kolita)는 한 마음으로 도를 구하고 있었다. “두려운 죽음을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영원한 삶은 없는 것일까? 죽음이 있듯 죽음에서 벗어나는 법도 있지 않을까? 친구여, 죽지 않는 법을 가르쳐줄 스승을 함께 찾아보자.” 과거 전생에 같이 도를 구하던 인연은 이생에 다시 만나 도반이 된다. 두 청년은 산자야라는 스승을 만난다. 그는 회의자의자로서 일종의 소피스트(Sophist)와 같은 철학자이었다. 스승의 견해에 만족할 수 없었던 두 청년은 그를 떠나 확신을 주는 스승을 찾아다녔다. “불사의 길을 발견하면 서로에게 알려주어 함께 도를 닦기로 약속하자.” 라는 다짐을 한다. 간절히 두드리는 자에겐 문은 열리는 법. 드디어 우빠띳사의 눈에 한 영상이 비친다. 우빠띳사의 눈에 한 사문의 모습이 들어온 것이다. 그 순간, 주변의 산만함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시간이 멈춰버린 듯하였다. 시선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린 사문의 얼굴은 평화의 빛에 감싸여있다. 손에 든 발우를 응시하며 한 발 한 발 옮기는 그의 걸음걸이는 너무나 평화스럽고 고요했다. 세상에 성자가 있다더니만 저 분이 바로 그 성자가 아닐까. 홀린 듯이 사문의 뒤를 따르던 우빠띳사는 사문이 한적한 곳에 다다라 앉으려고 하자 곧 좌구(坐具, 깔개)를 깔아드렸다. “사문이여, 여기에 앉으소서.”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병에 물을 따라드리고 예를 표하며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다. “사문이시여, 당신의 몸가짐은 참으로 침착하고 얼굴은 밝게 빛납니다. 당신의 스승은 누구이며, 무엇을 배웠습니까?”
“벗이여, 저는 사까족 출신의 위대한 사문을 제 스승으로 섬기며 그분을 따라 배우고 있습니다.”
“당신의 스승, 위대한 사문께서는 어떤 법을 가르치십니까?”
“벗이여, 저는 이제 막 출가한 사람이라, 스승의 가르침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스승의 넓고 큰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에 제대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세 치 혀를 놀리며 도를 얻었다 자랑하는 세상에서 저렇게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며 스승의 가르침을 드높이는 태도는 더 더욱 감동스럽다. 그분 앗사지(Assaji) 존자는 녹야원에서 세존께서 설하신 초전법륜과 무아상경 법문을 듣고 이미 아라한의 경지를 이룬 분인데도 불구하고 저렇듯 겸손하시다. 앗사지 존자를 한역경전에서는 '마승(馬勝)'비구라 하며, 위의제일이라 칭송된다. 마승비구의 위의가 두 청년을 제도한 것이니 승려의 몸가짐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 알 수 있다.
“저는 우빠띳사입니다. 많은 말씀 바라지 않으니, 저를 가엾이 여겨 요점만이라도 일러주십시오.”
존자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 구도심 가득한 청년을 바라보면서 게송을 읊는다.
앗사지 존자(Assaji)의 게송=연기법송(緣起法頌), Dependent Origination Dharani,
법신게(法身偈)라고도 한다.
Ye dhamma hetuppabhava 예 담마 헤뚭빠바와
Tesam hetum tathagato aha, 테삼 헤뚬 타따가토 아하
Tesam ca yo nirodho 테삼 짜 요 니로도
Evamvadi mahasamano. 에방와디 마하사나노.
All phenomena arise from causes;
Those causes have been taught by the Tathagata,
And their cessation too has been proclaimed by the Great Shramana.
諸法從緣生, 제법종연생 일체는 원인이 있어 생기는 것
如來說是因; 여래설시인 여래는 그 원인을 설하시네,
彼法因緣盡, 피법인연진 그리고 그 소멸까지도
是大沙門說. 시대사문설 위대한 사문은 이와 같이 가르치시네.
여기에 또 다른 한역이 있다.
諸法從緣生, 제법종연생 일체는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諸法從緣滅; 제법종연멸 일체는 조건에 의해 사라진다,
我師釋迦門, 아사석가문 나의 스승이신 석가모니께서는
常作如是說. 상작여시설 항상 이와 같이 설하신다.
우빠띳사는 그 게송을 듣자마자 번민의 열기가 가시고 눈이 시원해진다. 눈앞이 열렸다. 열반의 강물에 몸을 적신 그는 기쁨에 넘쳐 소리쳤다. “대덕이여,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들의 스승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죽림정사에 계십니다.”
법의 환희로 넘친 우빠띠사는 곧장 죽림정사로 달려가려 했지만 도반과의 약속을 잊지 않고 꼴리따에게 달려간다. “벗이여, 기뻐하게. 드디어 불사의 길을 찾았네.” 두 청년은 이 좋은 소식을 스승 산자야에게 알렸다. 그러나 자만심과 냉소주의에 물든 산자야는 뱀장어처럼 미끌미끌하게 손에 잡히지 않는 논리를 구사하면서 두 청년을 만류한다. 태양이 높이 떠올랐는데 아직도 잠꼬대를 하고 있으랴. 두 청년은 지체 없이 죽림정사로 달려갔다. 부처님은 설법을 멈추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길을 열어주어라. 저기 훌륭한 나의 두 제자가 오고 있다.”
두 청년은 부처님께 예배하며 간청한다.
“저희는 우빠띳사와 꼴리따입니다. 세존이시여, 당신께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소서.”
“오라, 비구들이여. 나의 가르침 안에서 청정한 범행을 닦아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하여라.”
‘오라, 비구여.’ 한 마디 말씀에 곧 바로 두 청년의 머리카락이 훌러덩 벗겨져 삭발이 되고, 몸에는 가사가 척 걸쳐지며 손에는 발우가 들려진다. 이것을 ‘선래비구(善來比丘)’라 한다. 두 청년이 바로 부처님의 두 상수제자인 사리뿟따(사리불)과 목갈라나(목련)존자이다.
Ⅱ-5. 진리는 없는가? -붓다의 출현
산자야의 회의론이 등장하니까 그것을 극단에 까지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도대체 ‘진리’라는 것은 없다는 주장이다.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는 일군의 사상가들이 나온다. 그들의 주장을 무진리론이라 한다. 그러면 과연 진리는 없는가? 진리가 없다면 일체의 철학적, 종교적 담론은 허망한 일이 되고 만다. 인류가 이제까지 진리를 천착해온 도정이 전혀 무익한 일이었을까? 허공에서 꽃을 따는 일처럼 쓸데없는 짓을 해온 것일까?
만약 무진리론이 진리라면 어떤가? ‘무진리라는 진리가 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진리는 있다. ‘무진리’가 진 리가 아니라면 ‘진리는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진리는 있다! 무진리를 긍정하든지 부정하든지 간에 ‘진리는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진리는 있다! 좋다! 그런데 회의론과 무진리론을 극복한 진리의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바로 이 대목이 인도종교사상발달사에서 최종적으로 맞닥뜨린 결정적 시기이다. 이때에 고타마 붓다께서 혜성처럼 나타나셔서 인도종교사상의 난맥상을 총정리하면서 가르침을 펴시니 그것이 붓다다르마Buddhadharma이다. 부처님의 출세이유는 이것이다! 인류의 종교적 방황을 종식시키고 가장 바른 길을 보여주시려고 세상에 나오셨다.
Ⅲ. 업의 교설
Ⅲ-1. 삼종외도설와 자유의지
인도의 종교사상이 어떻게 발전하여왔는지 전번 챕터에서 살펴보았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삼종외도설이다. 세 종류의 외도들은 인생과 세계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는지, 아닌지를 알아보고, 그에 비해서 불교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하는지 알아보자. 三種外道說삼종외도설는 곧 존우화작설, 숙작인설, 무인무연설이다.
①尊祐化作說존우화작설은 일체는 절대자(尊祐)가 지은 것이며, 만유의 원인은 창조신이라는 설이다. 인간에겐 자유와 선택의지가 없다. 창조주결정론이다.
②宿作因說숙작인설은 일체의 길흉화복은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라는 설이다. 숙업설, 숙명론, 과거결정론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개입할 여지가 없다.
③無因無緣說무인무연설은 모든 게 그냥 우연히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라는 우연론이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①존우화작설: 일체가 창조신이 정하는 대로 된다면, 인간의 죄악은 누가 책임져야하나? 라는 문제가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사람이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모두 신의 뜻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면 인간은 자기가 저지른 행위에 대한 책임이 없고, 창조신이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 아닌가?
→②숙작인설: 과거에 살생할만한 업을 지었기에 살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한다면 살인을 저지른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다. 숙명론은 악업을 당연시하고 합리화할뿐더러, 선업을 지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모든 것이 업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데 뭐 하러 노력할 것이냐? 인간의 자율적 의지가 필요 없다는 모순이 생긴다.
→③우연론: 선업을 짓든 악업을 짓든 모두 우연한 일이어서 책임질 사람이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자유의지의 문제>
일체가 무엇이냐? 부처님께서는 일체는 12處처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12처는 6외입처와 6내입처이다. 6외입처는 6경境이며, 6내입처는 6근根이다. 결국 인간이 경험하는 일체의 사건과 현상은 주관(인식하는 주관)과 객관(인식되는 대상)의 상호작용이란 말이다. 인간의 주체는 자유의지이다. 그리고 자유의지를 주체로 하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은 ‘의지가 없는 법’이다. 이게 가장 기본이 되는 불교의 세계관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느냐는 질문을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 자유의지는 분명하게 있다는 것이 불교의 출발이다. 나에게 자유의지가 있다. 나는 곧 자유의지이다. 따라서 내가 한 일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나에게 있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나의 자율적 노력에 달려있다. 이것이 業自性見正見업자성정견이다. 이것을 창조론이나 운명론과 비교하면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라 할 수 있다.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 깜마사까따-삼마디띠(kammassakata-sammādiṭṭhi)
“‘나는 업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을 모태로 삼는 자이고,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고,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내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업을 상속 받을 것이다.’라고 자주 성찰해야 한다.” <열 가지 원리의 경(Dasadhammasutta, A1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