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성덕왕과 어머니 성정왕후의 장자로 태었다. 어린시절부터 당나라로 유학을 다녀왔으며, 청년기에 화랑으로 활동하였다.
김교각스님께서 신라를 떠나신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성덕왕이 장자이 김교각을 대신하여 후궁의 아들인 둘째아들을 왕으로 옹립되자, 이에 실망하여 떠났다는 설과 어머니 성정왕후가 궁밖으로 쫓겨나고, 이에 실망하여 불가에 귀의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03| 당나라에 도착하다
04|오씨일가에게 쌀을 받다
당나라에 도착하여 여러 사찰을 돌며 수행을 계속한다. 구화산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정착한다.
이때 신라에서 데려온 흰개가 있었으며, 구화산 화성사에 이를 기려 흰개의 동상이 형성되어 있다.
구화산에서 수행중 오씨일가로부터 쌀을 받고,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수미시라는 시를 지어주셨다고 하며, 이를 기념하여 오씨일가촌에는 아직도 그에 대한 기념비가 전해지고 있다.
05|민공이 땅을 시주하다.
06| 동굴에서 수행에 매진하다
구화산의 주인 민공에게 가사 한벌을 얻어 가사자락으로 덮이는 만큼의 땅을 시주할 것을 약속받고 가사를 펴니 가사자락이 구화산을 모두 덮었다. 민공은 법력에 감탄하고 그의 아들을 출가시켰다.
김교각스님은 땅은 얻었지만 사원이 없었고 주벼이 황폐하여 마실물도, 풍부한 식량도 없었다. 그래도 눈을 감고 한 동굴에서 수양하니 산신이 감동하여 샘을 만들어 바쳤다. 이를 용녀헌천이라 한다.
07|백성들이 책을 베껴 바치다.
08| 동굴에서 수행에 매진하다
무량수경, 관우량수경, 아미타경, 고음성다라니경 등 4부의 불경을 매우 아꼈다. 그러나 초본이 없어 도움을 청하니 마을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여 손수 베껴 바치니 스님께서 매우 기뻐하셨다.
수행하실 때에도 손수 제자들과 함께 물도 길고 밭도 개간하였다. 백토를 섞은 밥을 먹고, 4계절내내 삼베옷 1벌만을 입으며 궁핍하게 살았으나, 백성들의 교화에도 힘을 썼다.
09| 화성사건립
10| 수행정진과 감화
청양현에 제갈절 등의 사람들이 등산을 하다가 스님의 고행에 감동을 받아 단공의 옛땅에 절을 지을 것을 청하여 본당을 올리고 사원을 세웠다. 태수가 스님의 고상한 성품에 감동받아 많은 재물을 받쳤고, 또한 화성사라는 편액을 황제로부터 받아 왔다.
스님께서는 쉼없이 경을 공부하였고, 그 언행에서 모범을 보이고 백성을 교화하였다. 모든이들이 스님의 말씀에 감화되었다.
11| 외삼촌 두분께서 신라에서 오시다
12| 신라에서 어머님께서 오시다
신라에서 외삼촌두분이 오셔서, 신라의 왕이 되어줄 것을 설득하였지만 오히려 두분을 감화시켜 승려가 되도록 하였다.
신라에서 어머니께서 구화산으로 오셨으나 그의 모습에 슬퍼하며 울음을 그치지 않아 앞을 못보게 되었다. 이에 스님은 화성사 앞 우물에서 물을 길러 어머니의 눈을 씻으니 눈이 다시 뜨였다. 이 우물에 보탑을 세워 명안천이라 불렀다.
13| 99세에 입적하시다
14| 지장왕보살이 되시다
794년 99세의 나이로 원적하셨다. 산이 울고 돌이 떨어졌으며, 종을 아무리쳐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죽기전에 자신이 죽으면 돌함에 넣고 3년이 지난후에 열어 보았을 때, 썩지 않았다면 금칠을 하고 탑을 세우라고 하였다 한다.
3년후인 797년에 돌함을 열어보니 썩지 않고 살아 있는 듯 생생하였으며, 옮기려고 하자 뼈에서 쇠소리가 났다고 한다. 쇠소리는 보살에게서 나는 소리며, 그가 죽기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계도하여 지옥에 사람이 없어 질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말이 사실임을 알고, 그를 지장왕보살로 봉하였다. 이후 구화산과 김지장이 모셔진 사원은 중국의 4대 불교 성지가 되었다.
첫댓글 부처님의 가피인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