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월
증언자 : 최남식(남)
생년월일 : 1957. 9. 13(당시 나이 23세)
직 업 : 인쇄공(현재 인쇄업)
조사일시 : 1988. 12
개 요
인쇄공이었던 최남선씨의 목격담이나 시위차량에 탑승했던 일, 전남대병원에서 조카의 시체를 찾았던 이야기이다.
불우했던 어린시절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충효동에 있었는데, 생활정도를 잘은 모르겠으나 꽤 많은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버님은 농사에 신경쓰지 않고 놀러만 다니는 한량이었다. 그래서 농사는 선산에 벌초해 주고 수확한 쌀을 뭇갈림 형식으로 배분하자고 하여 아버지 친구에게 맡겼다. 그런데 당시 법(?)이 자기 땅에서 15년 이상 농사를 안 지으면 소작인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었는지 친구 분에게 땅 전부를 빼앗겨 버렸다. 어머니는 큰부인이 죽은 후 둘째 부인으로 들어가 3남 1녀를 두셨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나 6·25 때 좌경성향을 가졌던 배다른 큰형님 한 분이 6·25 이후 은둔생활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농사를 다 뺏겨버린 후 어머니는 명주실이나 고무 다라이를 만드는 일을 하셨는데, 집안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도 중2 때부터는 돈을 벌어야 했다. 처음엔 남동 인쇄골목에 있는 흑룡출판사에서 월급 1천 5백 원을 받고 일했다. 그 뒤로 3, 4년은 전남매일 출판국에 있다가 졸업 후 일문당, 신일인쇄소 등 여러 곳을 전전했다. 어떤 인쇄소 주인은 자가용이 2대나 되는 부자인데도 우리가 학교에 가려고 하면 못 가게 했다. 그 일로 화장실에서 어린 동료들과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식구는 충효동에서 지원동으로 이사를 했는데, 지원동 집이 학교 땅과 같이 묶여 있었다. 학교(남교)에서 학교 땅을 전부 다 사든지 집을 팔든지 하라고 했다. 우리는 돈이 없어 평당 2만 원씩에 집을 팔아야 했다. 지금은 그곳이 지원동 신흥맨션 상가가 되었다.
호기심으로 돌아다녀보니
5·18 때 나는 정확한 사정도 모르고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돌아다녔다. 18일 이전 도청 부근 시위 때는 퇴근 후에 구경나가서 횃불시위를 보기도 했다. 당시 자연대생들이 외치고 다닌 '신현확 곤충 채집'이란 구호를 비롯하여 대학생들은 자기 나름대로 기발한 구호를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때 학생들이 나눠준 유인물을 보고서야 나라 꼴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데모는 요즘보다 훨씬 온건, 평화적이었다. 분수대에는 늘 구경꾼이 가득했으며, 끝날 때에는 항상 다음날 몇 시에 모인다는 말을 했었다.
18일에는 누문동 인쇄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파출소 차석이 찾아왔다. 나더러 광주일고 앞에 가서 젊은 사람들이 이 골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공수대원에게 잡힌 학생들을 경찰서에다 입에 재갈을 물리고 밧줄로 묶어 발만 겨우 땅에 닿게 해 매달아둔다는 것이었다. 경찰도 그렇게까지는 다루지 않는데 공수들은 정말 잔인하다는 얘기였다. 내가 밖으로 나가려는데 주인이 말리며 대신 나갔다.
그날은 인쇄소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귀가하기 위해 인쇄소를 나섰다. 잉크가 그대로 묻은 헌 작업복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지원동 쪽 광주천변에서 공수가 검문을 했다. 내가 일하고 집에 간다고 했더니 그대로 보내주었다. 나는 아무래도 위험하다 싶어 그날 이후로 출근을 하지 않았다.
21일경 동네 앞에서 사람들이 리어커에 두 구의 시체를 싣고 다니는 것을 처음 보았다. 저녁에 지원동다리에서 총격전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밖에 나가면 죽는다고 해 집에서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다음날(22일) 나가보니 지원동다리 앞에 군용 지프차가 한 대 서 있었다. 퇴각하던 공수가 시민군의 총격을 받아 한 명이 죽었다는데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차 앞유리에 구멍이 뚫려 있고 피가 흥건했다. 또 지원동에서 배추장사를 하던 사람이 트럭에 치여 죽었다고 했다. 보람아파트 앞에 가보니 도로에 피가 낭자한 사고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사람은 계엄군이 아닌 시민군들이 이런 어려운 상황에도 돈을 벌려고 장사하는 것이 얄미워 일부러 치었다고 했다.
집 부근의 용화정사 앞에서 사람들이 메가폰으로 차를 타라고 외치고 다녔다. 나는 친구와 함께 아모레화장품 버스를 탔는데 사람들은 막대기로 차를 두들겨 팼다. 차 안에는 많은 사람이 타고 있어 빽빽했다. 학동에서 중앙분리대에 차가 부딪혀 있었고, 숭실고 앞에는 보도 위로 올라가버린 차도 있었다. 그날 나는 지원동 천주교회 앞 다리에서 총을 받았다. 친구와 함께 2인 1조가 되어 학동교회 옥상으로 가려는데 목사가 못 들어가게 했다. 목사는 계단의 핏자국을 보여주며 어떤 고등학생이 자신의 발에 오발하는 사고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두꺼비 사진관(구숭일실고 옆) 옥상으로 갔다. 그날 밤에는 총을 반납하고 집으로 갔다.
23일 도청으로 구경을 갔는데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마침 친구 동생 길식이가 상황실장 박남선, 박노정 등과 같이 정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어 나는 쉽게 안으로 들어갔다. 도청에서 나와 상무관으로 분향을 갔는데, 확인된 시체는 태극기에 덮여 있었고 미확인된 것은 열려 있었다. 그 이후로 뭘 했는지 잘 기억 나지 않고, 조카가 며칠째 집에 안 들어와 통합병원, 전남대병원 등으로 찾으러 다녔다. 그러다 전남대병원에서 조카의 시체를 발견했다. 조카의 시체는 피가 덕지덕지 묻은 채 응고되어 있어 도저히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다.
26일 저녁에는 집에 있는데 헬기소리가 계속해서 났다. 다음날 새벽 조선대 쪽에서 총소리와 함께 헬기에서 "시민 여러분, 안전을 위해 귀가하십시오"라는 방송을 해댔다. 공수대가 진압하러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5·18은 너무 비조직적이었고 시기상조였던 것 같다. 그런데 당시의 참여자들이 지금에 와서 너무 공치사만 하는 것 같다. (조사정리 주경화)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 보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