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 연관들 속에서 인간
의식의 발생
―노동, 언어, 사회, 자기의식
인간은 주관적 관념론자들이 강변하는 것처럼 육체적, 사회적 관계로부터 독립된 인식론적으로 설정된 주체가 아니다. 태초에는 인식이 아니라 활동이 있었다. 인간은 인식하고 사고하는 존재이기 전에 먹고 사는, 물질적 관계 속에서 활동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물질적 관계에서 벗어나 완전히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그 어떤 의식도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은 인간의 현실적인 삶을 구성하는 한 요소이며, 의식 활동은 자신을 매개하는 물질적인 것에 의해서 작동한다. 한 예로 의식의 내용을 구성하는 언어체계는 목의 떨림, 종이에 스며든 흑연가루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반면 물질적 과정, 관계들은 의식이 없어도, 절대적인 자기완결적 운동을 한다.
인식활동은 노동과정의 한 부분인 목적의식적 활동, 즉 대상의 이상적 형태를 주관적으로 구성한다.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대상을 개조하는 과정에서 대상을 주관 속에 반영하고 주관 속에서 그 대상을 먼저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언어는 외적 대상으로부터 촉발되는 자극을 언어적 형태(주관적 형태)로 번역하여 감각의 직접성, 즉 외적 대상에 의한 직접적 행동산출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해준다. 대상에 대한 언어적 반영을 통해서 인간은 대상을 주관 속에서 먼저 개조해보는 것이 원활하게 되었다.
의식은 그 발생기원 자체가 인간의 노동과정을 매개하는 언어의 발생과 깊이 연관된다. 언어는 욕구하는 대상(의미)을 지칭하기 위한 특정한 행위(부호), 양자의 통일이다. 이는 집단적 노동 과정의 필연적 형식이다. 그것은 어떤 행위가 바로 결과를 산출하는 단순한 형태의 노동에서 어떤 행위가 여러 매개를 거쳐야만 욕구한 결과를 산출하는 복잡한 형태의 노동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노동의 형태가 발전에 따른 사람들 간의 협력은 언어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인간은 대상에 의해 촉발된 욕구에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여러 욕구를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또한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언어를 가지게 됨으로써 자신 속에 사회적 의식을 각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의 기초에는 생산력의 발전이 있다. 자연의 제 과정에 대한 활용 수준이 현저히 낮은 조건에서는 매우 저차원적인 욕구만이 가능하다. 직접적으로 욕구를 충족하지 않고 여러 매개과정, 공정과정을 거친 후에 욕구를 충족시키는 노동과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생존할 수 있는 생활수단이 구비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언어를 매개로한 사회적 의식을 통해 인간은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 물질화된 의식인 언어체계는 개개인들에게 전승되어 그들의 의식의 내용을 선험적으로 구성하게 되었다. 개개인들에게 의식의 언어를 통한 의식의 내용과 형식은 전대에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써 자신들에게 있어서 선험적이다. 이로부터 관념론의 인식론적 가능성이 성립한다.
[보론]: 자기의식은 여러 단계의 노동과정을 의식적으로 수행함에 있어서 의식을 목적수행에까지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노동과정에서의 여러 공정의 분화는 타인과 피드백을 주고 받으며 타인으로부터 나를 구별 정립하게 한다. 이렇게 노동과정에서 다른 사람과 구별된 나의 역할이 필수적인 부분이 됨은 직접적인 욕구와 인상들로 나의 의식이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것을 통일시켜 어떤 목적을 수행하게 한다.
관념론 비판
―관념론의 발생기원: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계급적 분업
관념론은 계급사회와 함께 출현한 철학적 경향이다. 관념론은 두 가지 뿌리를 가진다. 하나는 인식론적 뿌리이고, 또 하나는 계급적 뿌리이다. 인류의 노력의 결과를 반영하는 사회적 의식이 언어를 통해서 개개인에게 전승될 때, 그 내용은 개인에게 선험적이라는 점에서 그 발생의 인식론적 가능성이 성립한다. 인류사적 노동과정의 결과인 수학적 개념, 논리적 범주(인과성, 필연과 우연 등)는 개개인들에게 노동과정에서 직접적으로 획득되는 자신의 직접적 경험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무수한 경험 속에서 알아낸 보편적 범주들이다.
생산력의 발전으로 원시공동체의 자연에 대한 집단적 소유관계가 붕괴하고 사적소유와 생산수단에 대한 특정집단의 독점이 성립되면서 계급사회가 출현한다. 이때 원시공동체 사회의 노동과정에서는 통일되어 있던 두 계기인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계급사회에서는 적대적 분리로 화한다. 지배계급은 생산수단을 독점함으로써 피지배계급의 육체노동을 관리·감독하는 정신노동을 담당한다. 관념론은 지배계급이 자연의 운동과정과 직접적으로 매개되어 있는 육체노동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점에서 그 계급적 발생조건을 가진다.
지배계급은 정신노동 담당하게 됨에 따라 정신과정을 절대화하게 된다. 타인에 대한 지배의 근거로서 육체에 대한 정신의 비할데 없는 우월성의 주장은 이렇게 지배계급의 존재조건으로부터 각인되어 나오는 것이다. <정신은 육체에 비해 우월하다. 그러므로 정신의 체현자인 우리는 너희를 지배한다>. 사실 계급사회에서 육체노동도 상대적으로는 정신노동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육체노동자는 노동 목적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그들의 노동은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기생적 욕구를 실현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관념론은 육체에 대한 정신의 우월성에서 물질에 대한 정신의 본원성으로, 즉 관념론적 세계관으로 뻗어 나간다. 관념론의 특징은 주관적인 것에 객관적인 것을 맞추고 재단하며, 심지어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데는, 보편적 개념이 개인에 대해 선험적이라는 인식론적 측면도 작용한다.
[보론]:원시공동체 사회에서도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일정한 분업은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계급은 여기에서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당대 생산력의 조건하에서는 모든 사람의 육체노동이 요구된기 때문에, 사적 이익 자체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노동경험을 더 많이 오래한 자의 경험과 그 전승이 중요한 노동생산력의 일부를 이룰 뿐이다. 즉 원시공동체 사회에서 지식을 더 많이 소유한 자는 그것을 통해서 타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잘 전승하여 공동체의 생산력에 기여하는 데에 그 사회적 역할이 있는 것이다.
―관념론의 문제들
이러한 발생기원을 가지는 관념론은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진다. 그 중 핵심적인 것은 관념론은 주관적인 형식에 따라 객관적 내용을 제한하고 심지어는 그 연관을 끊어버린다는 점이다. 객관적 관념론자인 헤겔에게 자연은 객관적 정신의 자기운동이 여러 단계를 거쳐 창조된다. 이때 논리적 범주, 즉 이론이 현실에 우선한다. 주관적 관념론자인 칸트에게 인간의 경험은 보편성과 필연적 참을 담지하는 선험적 개념의 능동적 활동을 통해 가능하다. 감각은 단지 인식활동을 촉발하는 역할을 하는데, 내용적 측면에 있어서는 인식에 전혀 기여할 수 없다.
객관과 주관의 관계를 역전시키거나 주관과 객관의 연관을 끊어버림으로서 주관을 절대화하는 것. 이러한 사고는 지배와 억압을 반대하는 민주주의적 사고와는 대립할 수 밖에 없다. 개인이 가공하는 주관의 내용은 언어화된 사회적 의식에 의해 그 내용적 재료가 주어진다. 사회적 의식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사회적 생산과정의 반영이다.
관념론은 현실로부터 나온 주관적 범주들을 절대화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현실 정당화의 논리이다. 현실은 변화하더라도 주관적 범주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관념론은 현실의 한 측면을 주관적으로 고정하고 그것에 의해 현실이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서 이론의 편협성을 드러낸다. 관념론자도 현실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다. 그의 이론은 진공에서 건설된 것이 아니라 역사과정 속에서 생활의 요구를 직·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에게 선험적으로 주입되는 사회적 의식은 지배계급의 상식을 반영하기 매우 쉽다.
지배계급은 대중의 의식을 장악한 수 있는 물질적 수단(교육, 학문, 문화 등등)들을 모두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생산과정에서 노동하는 다수 대중이 소수의 착취계급에 의해 착취당한다는 사회의 본질적 관계는 가려지고, 지배계급의 지배 합리화 의식이 사회적 의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때 주관적 원리로 현실을 재구성하거나, 주관과 객관의 연관을 끊어버리는 것은 결국 계급사회의 현실이 우리에게 경험적으로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이미 계급적 각인이 묻어있는 내용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개별적 계기와 유적 계기
계급사회에서는 구성원들 간의 적대적 구분 속에서도 통일을 강제하는 사회원리가 작동한다. 그것은 바로 폭력의 질서이다. 계급적 지배의 발생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적대적 대립을 발생시키는데, 이를 지배계급은 폭력을 독점한 국가질서 속에 계급사회의 질서를 고정시킴으로서 봉합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적 질서 속에 들어오는 개인은 법률적 주체이다. 법률적 주체는 법 앞에서 모두 평등한데, 이는 형식적으로만 대등한 입장을 가지는 상품소유자로서 시장에 들어오는 개인의 모습과 같다. 모든 개인은 누구의 강제에 의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소유한 상품을 팔 자유를 가진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 노동자와 자본가는 평등하지 않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구매자를 선택할 수 없지만, 선택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의 의식주를 해결할 모든 생산물은 자본가가 소유하고 있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으로 사회의 모든 것을 창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예속된 존재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별적 계기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상품소유자로서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체계를 속에서 살아남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무쓸모하거나 심지어 위험인물로 지목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전면적으로 발전시켜 개인과 사회를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능력은 자본의 이윤생산에서 경쟁력을 높여주는 데에 쓰여야 생산적인 활동이 된다. 상품소유자로서 발전은 다른 상품소유자를 경쟁에서 탈락시킴으로서 실현된다.
개별적 계기와 유적 계기의 조화로운 통일은 상품소유자로서 개인이 사라지고 노동으로부터 자신을 표현하는 인간적 계기가 복원될 수 있는 사회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누가 누구를 종속시키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철폐하고, 생산수단에 대해 누구나가 권리를 가지는 사회. 따라서 생산이 이윤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활동하는 존재인 인간을 위해 복무할 때 가능하다.
이때 인간의 노동은 자본가의 사적 생산의 목적에 따른 편협한 분업이 아니다. 노동자는 개인의 능력을 전면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노동하면서, 전체사회의 발전을 촉진한다. 이것이 가능한 조건은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획기적인 노동시간 단축인데, 이는 지금 생산력의 발전 조건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