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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도 고성중학교 총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갯바람
연재 <고성한벌>15회 / 갯바람(3회 조영남/둔전리)
임진왜란에 이은 여진족 침략 병자호란
1. 임진왜란에 이은 대륙의 신흥세력 여진족 후금
환국 - 배달국 -고조선 삼한 -삼국시대까지 인류사에서 가장 강성하고 광대한 대륙의 영토를 확보하고 다스렸던 한민족 배달겨레는 통일신라시대부터 반도에 몰리고 갇혀 축소된 국가의 겨레가 되고 말았다.
광활한 대륙의 도처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민족들이 바람처럼 일어서 중원의 지배권과 천하통일을 놓고 치열하게 싸워 나라를 세우고 다시 신흥세력에게 쫓기고 스러지는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가운데, 신흥세력들이 일어설 때마다 한반도 우리겨레는 그들 모두와 맞서 싸웠다.
중국대륙이 당 - 송 - 원(몽고) -명 - 청으로 교체될 때 우리겨레는 삼국 -통일신라 - 발해 - 후삼국 - 고려 -조선으로 이어졌다.
세기 |
대륙국가 |
한민족 국가 |
주요역사 |
7-10세기 |
당(618-907) |
삼국(고구려 BC37-668) |
나당군에 백제, 고구려 멸망 |
통일신라(668-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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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916-1125) 송(960-1279) | |||
10-13세기 |
발해(698- 926) |
거란족(요)에 발해멸망 | |
후삼국(901-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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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세기 |
고려(918-1392) |
몽고침입<몽고식민지> | |
원(1271-1368) | |||
14-17세기 |
명(1368-1644) |
조선(1392-1897) |
<임진왜란>(1592-98) 왜 |
<병자호란>(1636-37)여진 | |||
17-20세기 | |||
청(1616-1912) |
대한제국(1897 -1910 |
일제침략 | |
20세기 |
중화민국(1911-1949) |
일제통치 |
나라와 국권상실 식민통치 |
중공(1949-) 대만(1920- |
대한민국 / 북조선인공 |
해방 / 분단국가 |
처참한 임진왜란을 겪고도 국권을 장악한 조선 정치권력 사대부 귀족들은 여전한 당파당쟁이 사화로 더욱 크게 지속됨으로써 왜에 이어 대륙에서 일어나 벌어지고 있는 국제정세변화에 캄캄한 장님이었다. 우리겨레와 혈통적으로 가장 가깝고 삶터 또한 항상 가까운 한반도 동북부지역(함경도와 연해주)에 있는 여진족이 고려와 조선을 끊임없이 괴롭혀 왔다. 그로써 조선 건국초기 세종대왕이 남쪽 바다로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여 복속시키고 진도를 다시 국방요새로 크게 세우고, 북쪽 국경을 침입하는 여진족을 정벌 평정하고 6진을 세웠다.
그렇게 명나라와 조선의 힘에 밀리고 그 틈새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여진(후금, 청의 전신)이 임진왜란 때 왜군 앞에 처참하게 무너지는 조선의 허약함을 보았다. 명나라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그것을 본 여진은 비로소 누루하치가 요동 땅을 휩쓸고 동북삼성의 요충인 심양(봉천: 배달국, 고조선, 발해와 요의 수도)에 후금(後金)을 세우고 북경을 향해 명(明)을 치기 전에 이웃 조선부터 침공해 왔다.
그토록 여진족이 후금으로 일어설 당시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光海君)은 사실 지혜로운 군주였다. 처절한 임진왜란 속에서 부국강병과 국제정세변화 속에 자주적 실리외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로 1608년에 즉위하여 명나라와 신흥 후금 두 나라 사이에서 탁월한 양면 외교를 전개하여 자주적· 실리적 외교로써 명(明)· 청(淸) 교체기의 국제정세에 대처하였다. 그러나 조정권력 사대부들의 당리당파 명분싸움에서 대북파의 책동으로 임해군,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 영창대군, 능창대군 등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인목대비는 폐서인하여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 지나친 칼날을 휘두른 때문에 패륜아로 찍혀 결국 24년 인조반정으로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이배되어 41년에 죽었다.
2. 정묘호란(丁卯胡亂 : 1627년(인조 5년)
병자호란(丙子胡亂 : 1636년(인조 14년) 12월-1637년 1월)
광해군을 제거하고 인조반정으로 선 조선권력(서인)은 광해군의 뛰어난 외교를 버리고 배금친명(排金親明)으로 급선회하였다. 임진왜란 직후이므로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해준 것에 대한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는 게 그 대의명분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웃 국제정세변화에 민감하고 지혜롭게 대처하여 명에 대한 신의도 지키고 신흥 여진 후금도 배척하지 않는 실리적이고 주체적인 균형외교로써 후금과 명 어느 쪽에서도 문제가 없었다. 인조를 세운 조선이 그런 균형외교를 버리고 후금을 치는 명군에 적극 가세함으로써 곧장 후금의 파죽지세 공격을 받고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는 <정묘호란>이 인조5년에 발생했다. 당시 청 태종 홍타이치의 주목표는 명나라였기 때문에 조선이 명나라 편에 서서 후금을 공격하지 아니하고 형제로서 화친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으로 강화를 체결하고 군사를 물렸다. 그 자리에서 조선은 명과도 후금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조건을 허락 받았다. 후금은 뜻밖에 너그러웠으나 의주를 중심한 압록강 지역의 물류 무역권을 차지한 것으로 충분했다. 이 같이 임진왜란이 끝나고 피폐한 나라를 채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전인 불과 29년 만에 다시 북으로부터 신흥세력 여진 후금의 침공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조선 인조조정은 후금과 조선의 국경지역에서 명의 군사 활동을 다시 허락함으로써 후금을 다시 자극하였다. 그리고 정묘호란 9년 후인 인조 14년(1636년 12월) 홍타이치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재침하였으니 곧 <병자호란>이다. 한양성은 단숨에 넘어가고 인조와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갇혀버렸다. 후금군이 겹겹 에워싼 속에서도 조정중신들은 배금친명 대의명분 주전파와 친금화친 신리파로 갈려 치열한 대립을 벌였다. 명분론 주전파의 대표가 김상헌이요, 화친실리파의 대표가 최명길이었다. 국가최대위기 앞에서도 그토록 모두가 흑백 정반 양비론 대립투쟁뿐인 현실이 곧 조선 성리학 권력의 가장 큰 모순이었다.
남한산성을 겹겹 에워싼 후금군과 대치하고 있는 독안에 든 쥐처럼 임금으로부터 조정 전체가 주검의 무덤 터가 되고 말 절명위기 앞에서 인조는 최명길 대감에게 항복국서를 쓰라 명했다. 최명길이 붓을 들어 항복문을 쓰고 있을 때도 김상헌 대감이 대노하며 달려와 그 문서를 찢어버리며 저지시켰다. 그러자 최명길은 “대감께선 찢으시나 저는 그를 주워 다시 맞추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다시 썼다. 그리고 홍타이치의 요구대로 성문을 열고 인조는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홍타이치 앞에 항복단을 쌓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려 항복하며 후금의 영원한 신하국임을 선포했다. 그를 역사에 영원히 새기기 위해 오늘의 강남 석촌동 석촌 호숫가에 <삼전도비>까지 세웠다. 우리겨레 국가 개국 이래 최대의 굴욕과 치욕이었다.
그로써 홍타이치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면서 전쟁을 유발시킨 전비배상금을 물렸다. 더불어 소현세자를 비롯하여 배금 주전파 조정 신하들과 60만에 이르는 젊은 남녀 인질을 심양성으로 끌고 갔다. 배금주전파 김상헌과 3학사 홍익환 윤집 오달제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화친파를 대표하는 최명길까지 전범으로 끌려가 심양성 옥관에 갇히고 말았다.
나라와 백성을 그 꼴로 만들고 만 비통함 앞에서 서로 다른 옥관에 갇힌 김상헌과 최명길 대감은 비로소 붓을 들어 시로써 화답하며 화해했다. 두 대감들이 “대감의 길이나 저의 길이나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한 하나의 길이었을 뿐 사적 유감은 털끝만큼도 없었음”을 정중히 밝혔다. 그런 중에서도 최명길이 “대감께서 걸친 옷이나 제가 걸친 옷이나 다 같은 옷”이라고 시를 읊어 전하자 김상헌이 “옷은 같은 옷이로되 어찌 윗도리와 아랫도리를 바꾸어 입을 수가 있겠소.”하고 답시를 보내며 각자 자신들의 소신엔 변함이 없었다. 그 소식을 고국에서 전해들은 조선 선비들은 이쪽 저 쪽 할 것 없이 일제히 감동의 기쁨으로 두 대감께 흠모 존경하는 찬시를 써서 보내 위로 격려했다.
3.『삼한산두(三韓山斗)』碑 조선 삼학사 홍익환, 윤집, 오달제
홍익환, 윤집, 오달제 조선 삼학사는 전범으로 홍타이치(청태종)의 친국장에 끌려 나갔다. 홍타이치가 그동안 철저한 신의를 대의로 삼고 죽음의 칼날 앞에서도 물러서지 아니하는 친명배금 주전파 조선신하들에게 크게 감명을 받았다. 앞으로 명을 치고 겨레국가 대업을 완성하기까지 먼 길에 과연 자신에게 그런 신하 한 명이라도 있는가? 하고 자문하면서. 때문에 조선 삼학사에게 온갖 지위와 명리와 부귀영화로 회유했다. 그러자 홍익환이 먼저 대답하겠다고 지필묵을 요구하고 썼다. 홍타이치가 펼치자 “네 이놈, 조선의 신하로서 너를 처단하지 못하고 나라와 백성에게 이토록 가장 큰 죄를 지어 고개를 들 수 없는 앞에서 무슨 개턱을 놀리느냐. 그 칼로 어서 당장 내 목을 치라. 비로소 나는 죄를 씻고 그 피를 북에 발라 둥 둥 둥 춤추며 조국의 품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호통 쳤다. 혹 하고 윤집, 오달제에게도 지필묵을 주고 그들도 똑 같자 분노를 참지 못한 홍타이치가 즉시 삼학사의 목을 쳤다. 그리고 그 분노가 가라앉자 청조신하들이 영원히 잊지 말라고 삼학사를 처형한 형장에 그들을 우러러 칭송하는 기념비『삼한산두(三韓山斗)』를 세웠다. 태산보다 높고 북두성처럼 빛나는 조선의 삼학사라는 말이다. 비록 조선유학이 지나친 이분법 이기이원론 성리학에 집착하여 나라를 망치긴 했으나 대의를 향한 그 정신과 기개야말로 칼보다 강한 겨레 붓을 대표하는 자리들이었다.
4. 노신 최명길이 끝까지 바친 애국애족의 최후열정
60만 명이나 인질로 끌려간 백성의 비통한 현실! 그 앞에 화친파의 거두인 최명길 대감은 옷을 벗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몸값을 지불하지 못해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이 더욱 많고 낯 선 적국의 이국땅에서 노예로 끌려 다니고 팔려 다니는 비통한 삶의 연속이었다. 특히 60만 명의 대부분이 젊은 여성들이라 오랑캐 군인들에게 능욕을 당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많았고, 아무리 몸이 난도질당해 만신창이가 되어도 오직 고국 땅에 돌아가 죽어야만 하는 그 하나만을 붙잡고 버티고 있었다.
그래도 홍타이치가 가장 우호적으로 대하는 최명길 노신에게 인조는 국내외의 모든 중책을 맡기고, 그를 위해 최명길 노대감은 쓰러지도록 자신의 모든 열정을 바쳤다. 전비배상금을 최소화 하고 인질들의 몸값을 줄여 데려왔다. 그러고도 몸값이 없어 데려올 수 없는 사람들의 몸값을 국비로 지불하고 데려왔다.
이미 모두가 눈물조차 마르고 흘릴 기력도 없이 최명길 대감의 뜨거운 사랑의 손길을 모두 꼭 잡고 그토록 목매여 그리던 고국의 부모형제자매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영상으로부터 조정 사대부들이 돌아온 내당마님, 첩, 며느리, 딸들이 이미 오랑캐 놈들에게 더럽혀졌다고 문간에도 들어서지 못하게 내쫓아버렸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으나 다시 그 어느 곳에도 설 수 없던 여인들은 거리를 떠돌다가 그대로 쓰려져 죽고 강물에 몸을 던졌다. 한양뿐만 아니라 팔도 지방 전국의 거리와 강물f은 돌아온 <환향녀(還鄕女)>들의 시체로 넘쳤다. 최명길 대감은 그 참상을 인조에게 고하고 대책을 건의했다. 그로 최명길 대감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인 인조는 팔도의 강을 회절강(回節江)으로 정하고, 날을 정하여 그날에 돌아온 환향녀들이 모두 그 강물에 몸을 씻은 것으로 깨끗해졌음을 삼고 모두가 각자 집으로 고이 맞아들이라 했다. 만약 그때도 거두어들이지 않은 사람은 영상으로부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히 벌할 것이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로 한양의 한강을 비롯한 전국의 강들이 그녀들의 회절강이 되고 정한 날에 강물에 몸을 씻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말년의 노신 최명길 대감이야말로 끝까지 실천적 애국애민의 열정을 지니고 다한 명신이다. 그래서 후대의 조선 선비들이 김상헌과 최명길 두 대감을 다 함께 우러르고 받들어 칭송하며 “찢는 자도 옳고 다시 주워 맞추는 자도 옳다.” 하면서도 최명길 대감의 시대파악과 그에 대한 길로써 더 크다고 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교시절까지 겨레역사를 배우면서 김상헌은 가장 고귀하고 의로운 충신이요, 최명길은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쯤으로 배워 알고 있었다. 그 얼마나 부끄럽고 비통한 역사인식인가?
5. 진도 흥타령 <심양강>과 <화냥년>
나의 소년시절인 1950년대 곧 겨레피아골 폭풍해일이 휩쓸f고 지나간 처참한 폐허 능선 골짜기를 모두가 허기진 배 움켜쥐고 봄 보릿고개를 넘을 때 나의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모든 아낙들이 흥타령을 불렀다. 모든 가사들을 충분히 알아들 수 있는데 하나를 알 길이 없었다. 그게 <심양강>이었다. 그 전체의 가사는 기억나지 아니하고 오직 “심양강”이 나오는 대목만 생각난다. “심양강 건너가, 내 친구 니 친구.....”이다. 그리고 그 전후는 고진감래의 가장 넘치는 자리를 뜻한다.
1950년 여름 내가 6살 때 불현듯 울돌목을 건너온 폭풍해일이 화려한 바닷가왕국을 휩쓸어 대왕마마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 숙부 등 왕국의 남정들을 모두 데려가 버렸다. 할머니, 어머니, 숙모, 누이들 그 아녀자들 속에 사내 남정이라곤 오직 나만을 남겨놓고서. 아버지와 함께 달릴 꿈 앞엔 세찬 강물 같은 울돌목이 가로 놓여 있었다. 눈만 뜨면 바로 집 앞의 그 강물 앞에 할머니와 어머니의 흥타령 꿈자리에서 불현듯 “심양강”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강은 어머니의 가슴에 영원한 고향집 외가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강만 같았다. 또 차마 따라나서지 못한 아버지의 길 그 밤하늘에 견우와 직녀를 가로지른 은하강물만 같았다. 비록 어린 가슴에도 유월 유두 지나 칠월 칠석 밤을 홀로 조용히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런 우리네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영원하고 가장 큰 강물은 내가 배를 건너려 하는 울돌목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차게 파도치며 소용돌이치는 강물이었고 그게 곧 내게 ‘심양강’이었다.
그 심양강이 어디엔가 실재하는 강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왜 “심양강”이라 하고 그 말뜻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할머니에게 묻자 “눈물강”이라고만 하신다. 그러나 나는 청년기를 지나 성인이 될 때까지 “심양? 심양?” 하며 한자로써 여러 가지 말뜻을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心梁 / 深梁”일 거라 생각했다. 마음의 강이요 울돌목처럼 스스로 울음을 터뜨리며 세차게 흐르는 깊은 강물로.
그렇게 50년 반세기가 흘러 내 생애엔 불가능할 것만 같던 철의 장막에 이어 죽의 장막까지 걷혔다. 걷잡을 수 없는 가슴! 비로소 유년의 낚시터에서 아버지와 함께 울돌목 건너편을 바라보며 펼쳤던 꿈의 약속 그 압록 두만강을 건너 아버지가 나라를 찾기 위해 줄기차게 말달리셨던 광활한 요동만주벌에 발을 딛고 내려섰다. 아버지가 “봉천(奉天)”이라 하던 그곳이 바로 “심양(瀋陽)”이 아닌가.! 한양(漢陽)이 한강(漢江)의 양지(陽地)인 북쪽에 있기 때문에 한양이듯이 심양도 심하(瀋河) 북쪽 양지에 있어 심양이었다. 60만 명이나 심양성에 끌려갔던 조선 사람들과 아낙들로 다시 파도치는 강! 먼 남쪽 고국 하늘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건널 수 없는 그 강가에서 얼마나 목매이게 피토하며 많은 눈물을 쏟았으랴.
오직 그 그리움 하나로 만신창이가 되어도 참고 또 참아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으나 가족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던 <환향녀(還鄕女)>들! 그 슬픔의 역사가 어느 사이 겨레 가슴에 더러운 <화냥년>으로 새겨지고 말았다.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할머니 조선아낙들은 이래도 울고 저래도 울고,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그 “눈물강”을 한없이 건넜다. 누구와 무엇 때문에?
1950년 전후 진도아낙들의 흥타령 길 “심양강” 곡조 속에 내 귀에 익은 또 하나의 자리가 있다. “옥양목 석자가 없다고 야단이 났는데 새보선 신고 뭣 하러 내 집에 왔느냐.”는 구절이다. 대표적인 시집살이 설움의 한 토막, 이래도 덮어씌우고 저래도 덮어씌움만을 당하는 서러움이다.
남정들은 “삼한산두” 삼학사와 감당할 수 없는 북받힘 앞에 끝까지 최명길 대감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 겨레 아낙들은 스스로 자신의 가슴 섶에 은장도 푸른 날을 세운다. 진도 오룡국의 남정들과 아낙들이 함께 거룩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자리에 있다. 우리겨레 모두가 흥타령을 잊고 버렸을 때 진도아낙들만이 변함없고 여전히 그 노래 숨결로 오늘을 살고 있는 활기찬 아름다움도 그렇다.
<다음 16회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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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도 고성중학교 총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갯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