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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해야 할까요 > < 에베소서 4:28 > <2017.8.20> 개미는 여름동안 부지런히 일해서 겨울에 먹을 양식을 저장했습니다. 하지만 베짱이는 일 을 하지 않고 기타를 치며 노래만 부르며 겨울을 위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추운 겨울이 왔습니다. 베짱이가 배가 고파서 개미를 찾아갔습니다. 개미는 베짱이에게 양식을 나눠주며 기회가 있을 때에 일을 하지 않은 것을 반성하게 합니다. 그런데 한 경제전문가는 베짱이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준 것이 개미의 힘든 노동에 활력을 주었기 때문에 개 미는 베짱이에게 정당한 보상을 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용과 의미가 새롭게 각색된 현대판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한 개미는 허리 디스크 때문에 말년에 고생을 하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베짱이는 그가 낸 음반이 대박이 나서 돈방석에 앉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저는 원래의 이야기도 현대판 이야기도 모두 다 아쉽습니다. 왜냐하면 두 이야기 가 다 결국은 기복적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누가 더 잘되었는가에 사람들의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과를 가지고 말하자면 요즘은 ‘도둑질하지 말고 수고하여 일을 하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없습니다. 농사지을 때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것이 잘 사는 길이었겠 지만 요즘은 부지런하고 성실하다고 해서 부자가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사실 땀 흘려 수 고해서 부자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미든 베짱이든 노후에 편안하게 살게 되었 다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도둑질을 하지 말고 네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는 본문 말씀이 성실함이라는 도덕적 가치의 회복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성실함이나 부지런함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찬성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변화된 새 사람의 모습은 열심히 일하는 부지런한 모습 자체가 아닙니다. 만일 우리의 의식 이 여전히 세속적이라면 오히려 그 부지런함과 성실함에 함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도둑질하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 합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본문에서 도둑질하는 자들은 과거 도둑질을 했던 사람들이나 지금도 어쩌다 충동적으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도 상습 적, 의도적으로 도둑질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지만 교인들 중에 아직도 도둑질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 말씀을 하셨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 스도인이 되고 난 후에도 계속 도둑질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도둑질을 정당한 것 이거나 아니면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자녀 교육을 위해서는 부당한 방법이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세금을 다 내고는 노후를 위해 돈을 모을 수 없습니다. 사람 들이 다 그렇게 살아요. 그게 관행이고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웬만하 면 다 눈감아 주는 일들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에서 도둑질하는 자가 전문 절도범을 의미하 지 않는다면,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먹고 사는 것,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사는 것에 여전히 최고의 가치를 두어서 부정한 것조차 합리화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다만 도둑질을 하나의 예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도둑질 자체도 나쁜 일이지만 그런 도둑질을 합리화 하는 그 세계관을 경 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이고 이것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문제입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또 다른 한 이유는 더 이상은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목 적이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 손으 로 일을 해야 돈을 많이 벌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한 돈을 버는 목적이 다른 사람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당 시 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사역이 구제였고, 영원한 기업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이 그 가치관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구제였기 때문에 구제를 하나의 예 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변화된 가치관을 가지고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 떻게 살아야 되느냐고 묻는다면 구제를 하나의 예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정직해야 할 것은 맞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궁극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실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독 특한 가치는 왜 성실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실하고 정직해 부자가 되 면 존경 받으며 살수도 있습니다. 물론, 인격적으로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 것은 변화된 새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융통성이 없고, 정직 하기만 해서야 밥이나 먹고 살겠습니까?”라고 말할 때, “정직하고 원칙대로 해야 하나님께 서 복을 주십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대답하기보다 “세상에서의 형통함이나 부유함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 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우리의 삶을 통해 약하며, 어렵고 소외 된 사람들, 아무런 소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망과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는 복음 을 전해주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해야 한 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 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 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7-8)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왜 사느냐고 하고, 왜 돈을 버느냐고 하면, 자녀들 교육시키고 노후에 남들 신세지 지 않으려 한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소박하고 진솔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지만 우리 안에 있 는 감추어진 진짜 고백,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달라진 그 고백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형통함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 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 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것은(고후4:8-9)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땅에서 나를 세워주실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과 소망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누구인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속상하지요. 답답하지요. 바르게 사는 것, 그거 다 쓸데없는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저 는 여러분에게 감히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 니까요. 우리가 바라고 살아가는 삶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이니까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살 아가는 사람들이니까 비록 내가 이렇게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도 내 삶을 여전히 어려움과 아픔과 그리고 눈물 가운데 마감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나 님의 나라가 있으니까요. 이것이 달라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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