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비움이 있어서다. 반짝이는 여름 햇살 더께와 함께 활기차게 하늘로 치솟던 녹색 기운을 살포시 내려놓고 단풍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가벼이 한다. 그리하여 붉고, 노랗고, 갈색인 저마다의 잎은 조용히 땅으로 내려온다. 이번 주말 여기엔 단풍이 절정이겠다.
거창 수도산 자락 인현왕후길. 하루아침에 평민으로 신분이 강등된 인현왕후가 3년 동안 기거했던 김천 청암사를 품은 수도산 자락에 인현왕후길이 있다. 유독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왕후를 떠올리는 이 길은 단풍이 너무 고와 올가을 자신을 조용히 돌아보기에도 좋은 곳이다.
평민으로 강등된 비운의 왕후가
3년간 몸을 의탁했던 청암사
그 절을 품은 산에 단풍이 내렸다
민중의 사랑을 받아서였을까
길은 너무 편하고 아늑하여
나를 조용히 돌아보게 한다
■수도산에 단풍 들었네 인현왕후길을 찾을 때만 해도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걷기 열풍으로 지자체마다 '길'을 만들어 놓았다. 이 길도 그런 길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인현왕후길은 달랐다. 시기가 잘 맞았다. 눈이 시리게 울긋불긋한 단풍을 원 없이 보았다. 떨어지는 '낙엽비'를 맞으며 괜히 낭만에 빠지기도 했다. 걷는 길 대부분은 해발고도 600m 이상. 수도산 6푼 능선까지 단풍이 내려와 있었다.
인현왕후길 트레킹은 수도리 주차장에서 시작하고 마친다. 주차장에서 도로를 따라 해탈교를 지나 청암사 말사인 수도암으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임도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본격적인 인현왕후길이 시작된다. 시작부터 시야를 압도하는 가을 풍경에 머리 한 대 얻어맞고 숲길로 들어선다. 쉼터 3개를 지나 정자쉼터~계곡~무지개다리~수도계곡 길~용추폭포~출렁다리~용추소공원~수도리 주차장까지 8.3㎞를 3시간 40분 동안 걸었다.
임도가 시작되는 안내문에 '길을 걷다 보면 인현왕후의 참된 인품을 느낄 수 있다'고 해 놓았다. 이해되지 않았다. 일단 걸었다. 고로쇠나무도 반쯤 가을옷으로 갈아입었고, 생강나무는 꽃처럼 노란 단풍을 뽐내고 있다. 굴참나무, 갈참나무, 개옻나무, 당단풍나무도 질세라 치장을 벌써 끝냈다.
길은 살짝 내리막이다. 초반에 고도를 높였다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이다. 시작부터 해발고도가 800m에 육박한다. 웬만한 산 저리 가라는 높이다. 바람 한 줄기에 낙엽이 우수수 비처럼 떨어진다. 가다 서고, 조금 걷다 또 걸음을 멈춘다. 이 비경을 휙 지나가기엔 너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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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유학자 정구 선생이 무흘4곡으로 지명한 선바위. |
■단풍 터널에서 서성이다 인현왕후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더 쉽게 밀려났던가. 친정어머니가 김천과 연이 있어 이곳 청암사에 기거했다. 신분은 왕후에서 평민으로 달라졌다. 청암사에서는 몰락한 왕후를 위해 별도로 집을 하나 지었다. 지금의 극락전이다. 그러기를 3년. 왕후는 복권된다. 훗날 왕후는 수도산 일대 넓은 땅을 청암사에 하사하고, 중창 불사를 도왔다고 한다. 어려울 때 자기를 보살펴 준 청암사와 스님들이 얼마나 고마웠을까.
아이도 없이 궁에서 쫓겨난 왕후를 백성들은 측은히 여겼을 것이다. 자신들과 같은 처지가 된 것에 대해 동질감과 위안을 동시에 보냈으리라. 어쨌든 요즘 말로 치면 인기가 좋았던지 사료에도 '인현왕후는 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길이 너무 편안하고 아늑하여 상념에 들기에 좋았다. 이때 뒤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구에서 온 산악회 활동하는 여성 두 분이다. 가을 단풍에 푹 빠져 두 사람이 재잘대는 소리가 꾀꼬리 노래처럼 골짜기에 울린다.
작은 쉼터엔 통나무를 반으로 가른 형태의 의자가 있다. 이런 곳에선 쉬어가야 한다. 작은 계곡도 있고, 그늘이 많은 곳에는 이끼들의 세상이 펼쳐진다. 깊은 숲에서나 볼 수 있는 관중도 생생하게 푸른 잎을 뽐내고 있다. 임도이다 보니 야산으로 착각했다. 여기는 해발 780m다.
마지막 쉼터는 정자까지 있다. 인현왕후 복장으로 사진을 찍는 포토존이 있다. 생뚱맞지만 인정하기로 한다. 얼굴을 내밀어 왕후가 되어 본다. 정자 쉼터에서 청암사로 가는 임도는 이어지지만 인현왕후길은 여기서 산 아래로 내려가게 돼 있다. 요리조리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하산한다. 제법 물이 흐르는 작은 계곡을 지나 아름드리 왕버들을 만나니 이내 수도리 주차장으로 가는 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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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사이로 장쾌한 물줄기를 자랑하는 용추폭포. |
■청암사 할머니 비구니 도로를 건너 작은 무지개다리를 지나자 옥동천 상류 수도계곡 옆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무지개다리 옆에서 취재팀을 앞질렀던 대구 여성 산꾼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지원조로 따라온 분이 용추폭포까지만 산길이고 나머지는 도로이니 차로 태워주겠다며 친절을 베푼다. 걸어가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굳이 걸을 필요 없다며 이분들도 어차피 차를 타고 갈 거니 재차 태워주겠단다. 우리도 차가 있다고 했다. 마음을 써 주는 것이 고마웠다.
계곡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물소리를 들으며 단풍을 즐긴다. 약간 오름길이라 살짝 당황했다. 장쾌한 물소리가 들리더니 위풍당당한 용추폭포가 보인다. 지형도에는 용소폭포라고도 했지만 인근 모든 안내판에 용추폭포라고 되어 있다. 폭포를 지나자마자 출렁다리가 있다. 다리 건너엔 용추소공원이다. 주차장과 화장실, 쉼터가 있다.
용추폭포는 무흘구곡의 제9곡. 조선 중기 학자 한강 정구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명명한 좋은 경치다. 성주호 하류 회연서원이 있는 제1곡 봉비암부터 용추폭포까지 진귀한 풍경이 펼쳐진다. 장소마다 시가 있는데 옛사람들은 용추폭포를 '여기를 버려두고 어찌 별천지를 찾으리'라고 치켜세웠다.
용추폭포에서 출발지인 수도리 주차장까지는 도로이긴 하지만 시골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다. 길은 끝났지만 아무래도 수도암을 보고 와야 한다. 수도암 대적광전에서 본 가야산 정상 풍경은 일품이다. 봉화가 활활 타오르는 듯한 가야산이 참 아름답다. 수도암 본사인 청암사엔 빨간 감이 익어가고 있다. 마침 홍시가 툭 떨어졌다. 양지에 앉아 콩깍지를 벗기던 노스님에게 먹어도 되느냐고 물으니 귀가 어둡단다. 가까이 가서 감을 먹고 싶다고 했더니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신다. 홍시는 참 달았다. 노년의 비구니 스님을 뵈니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문의:황계복 산행대장 010-3887-4155. 라이프부 051-461-4094.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그래픽=노인호 기자 nog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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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 인현왕후길 고도표 (※ 사진을 클릭하면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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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 인현왕후길 구글어스 지도 (※ 사진을 클릭하면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