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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버스 한국사
 
 
 
카페 게시글
---高麗 하북성 宣化 下八里 거란묘 발굴유물
文古里 추천 2 조회 178 20.12.30 09:55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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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1.02.11 12:04

    첫댓글
    좋은 史料이겠읍니다.
    契丹族 上流層의 무덤이 宣化지역에서 나왔음은
    그들이 10-11世紀에 高句麗 平壤(今世의 北京市)지역을 두고 동쪽(今世의 唐山市)지역에 있었던 시절이 있었음을 증거하는 장묘유적일 수 있겠읍니다.
    말갈이 먼저 하북과 산서로 들어오고 글안이 4세기말 쯤에 석가장 서부지역(즉 요동부근) 산서에 자리를 잡았다는 남당유고 기록들에 나타나고, 고구려가 신라와 당에게 절명한 이후에 거란이 말갈과 함께 당의 부용으로 하북 땅을 탐한 삼국사기의 戰史가 이런 무덤발굴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 21.11.03 13:55

    永樂大帝(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紀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談德의 京都(都邑들 중에 임금이 거처하던 都邑)는 西都(鵝卵之原)이었고, 疆域의 서쪽은 後燕이고 북쪽(卑離國故地)엔 契丹이 있다고 기록되었읍니다. 이 契丹의 선발대 일부는 이미 遼東 井陘지경까지 들어왔었고, 그 契丹의 본류는 河北省張家口市 북방의 張北평원 지경에 들어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張北평원과 大同평원 烏蘭察布평원 呼和浩特평원을 거치며 宇文段部 慕容鮮卑部 拓拔慕容部 契丹部 등이 南遷한 것으로 읽힙니다. CE4C初의 契丹은 張北평원 일대에서 散居하다가 앞서 南遷한 諸族과 北方宗主인 高勾麗가 滅亡한 이후로 末曷 契丹 등이 연달아 高勾麗後身을 自稱하며 大震(渤海) 大遼 高麗 大金 大元 大淸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작금의 北京평원 大同평원 唐山평원 등은 遊牧에 지친 北方諸族들의 理想鄕이었을 겁니다. 高勾麗의 中都 平壤 등을 끝내 지키지 못한 高麗와 我之根本 저버리고 歷史地名의 音價마저 바꿔놓은 李朝를 뒤이어서 우리들이 歷史하고 있는 것이지요.

  • 21.11.03 14:11

    永樂大帝紀五年乙未條曰[三月...上以卑離漸違王化,親征叵山冨山負山至鹽水.破其部落七百余㪽,獲牛馬羊豕万數.二后亦騎馬而從上.上以吐后有身止之,而不聽,歸生女,名以三山.]의 叵山・冨山・負山・鹽水는 農耕과 牧畜(豕는 遊牧不可)에 適合하였던 北夫余天帝의 畿地域을 封받았던 卑離(卑离)國故地 일대이었으니, 這間의 鹽水山西省西南部說과 鹽水西域說은 버려야 할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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