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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질문과 조실스님 답변 정리
⊙ 질문 ⇒ 바다 밑 진흙소가 달을 머금고 달아나니(海底泥牛含月走)
바위 앞에 돌호랑이가 아이를 안고 졸고 있다(巖前石虎抱兒眠)
철뱀이 금강신장의 눈에 끼어드니(鐵蛇鑽入金剛眼)
곤륜산이 코끼리를 타고 백로가 이끈다(崑崙騎象白驚牽)
이것은 고봉원묘스님의 게송입니다. 이것이 근본자체 그대로 바로 드러내 보인 것이라 보시는지 그렇지 않다면 어떤 도리를 드러낸 것인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묻는 이유인즉슨 진여도 연기하는가 하기 때문입니다. 그 연기가 이 같은 상을 보인다면 금강경의 ‘형상으로나 소리로 나를 구하는 이는 여래를 보지 못한다’고 한 구절과 대치되기 때문이지요.
저의 수행과도 관계 깊으니 성찰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것이 아마도 돈점문제를 깨끗이 해결하는 열쇠라고 확신합니다.
눈 밝은 이가 나타나시기를 기다립니다.
▶고봉원묘선사의 게송에 대하여
깊고 깊은 선(禪)의 심오한 법문은 뿌리와 가지를 분리해서 설명을 드리는 것은 진리에 어긋나는 법이며, 이 대도를 수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힘이 되지 못합니다. 선지식스님의 법문을 듣고 스스로 최고봉의 진리를 해결할 때 고인(古人)의 법문이 명백하게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줄 아시고 정진에 몰두하시기를 바랍니다.
⊙ 질문 ⇒ 우리나라 불교계는 화두선을 가장 중요시 합니다. 그러나 저는 깨달으셨다는 큰스님들이 당신의 제자들이나 재가 수행자들에게 왜 화두선만을 가르치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분들 말씀으로는 화두선법이 최상법이라 하지만 사람마다 다른 근기랄까 취향이랄까 하는 것이 있을 것인데 선방에 가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각자의 화두만을 가지고 앉아 있는 모습만을 봅니다. 혹시나 내 근기에 맞는 방편을 가르침 받을까 기대도 해보았지만 매번 헛발만 짚었습니다. 감히, 용맹정진하는 불자들과 스님께 누가 될까 이런 질문도 못하겠습니다. 민간의 다른 곳을 찾으면 그만일 수도 있겠지만 선방에서 느껴지는 뭔지 모를 에너지를 생각하면, 쉽게 발을 돌릴 수 없습니다.
▶화두참선은 부처님의 최고의 관문을 투과해서 한 번 뛰어넘어 여래지(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는 가장 빠른 깨달음의 길입니다. 다른 종류의 수행법, 예를 들면 관법이니 염불선이니 묵조선이니 하는 것들로도 물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수많은 생(生)을 수행해도 깨닫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 화두참선법은 개개인의 근기에 상관없이 바른 법문을 듣고 바르게 화두 참구를 할 것 같으면 누구든지 대오견성할 수 있는 활구 참선법입니다.
⊙ 질문 ⇒ 안녕하세요. 참선에 관심이 많은 부산 사나이입니다. 나이는 25세 이구요. 학생입니다.
음...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자연스럽게 마음공부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구요. 비록 실천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 여건이 조성되면 필히 열심히 해볼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궁금한 게 두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마음공부를 하는데 있어 저는 화두를 잡고 하는 화두참선은 제 체질에 안 맞고, 또 사회생활을 해야 하므로 계속적으로 화두를 잡고 있는 건 힘들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런 화두참선 말고 그냥 편하게 할 수 있는, 마음을 관하는 관법이나 기타 요가에서 하는 심호흡법등 다른 참선법도 이 절에서 배울 수 있는지요?
그리고, 둘째로 절에서 참선할 때 가입비나 회원비 같은 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상입니다.^^
그럼 자세하고 전문적인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고 하니 과거 선근의 인연인줄 압니다. 그러니 부처님의 바른 수행법은 일상생활 속에서 마음에 우러나는 화두참선 이상 좋은 수행법이 없으니 일상생활 속에서 꾸준히 연마를 하면 호흡법이나 관법에 지나가는(더 나은) 희열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 질문 ⇒ 난 순간순간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과연 출가를 하면 그 어려운 수행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절에만 갔다 오면 거의 한 달 동안 고민을 합니다.
출가를 해야 하나, 아니면 속세에 만족을 하며 살아야하나.
난 속세에 살면서도 항상 뭔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명상 또는 참선을 해서 그냥 나의 혼란스러운 아상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출가는 몸과 마음이 일치되어야 하지 몸은 산에 있고 마음은 세속에 있으면 진정한 출가가 아니니, 그러니 이 불교는 바른 큰스님으로부터 바른 법문을 듣고 생활 속에 마음을 잘 닦아 나갈 것 같으면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부처님의 경지를 증득하게 되니 승속(僧俗)은 논하지 않습니다.
⊙ 질문 ⇒ 안녕하세요 첨 뵙겠네요.
우선 홈피가 너무 깔끔해서 좋으네요.
궁금한데요,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는 것인가요? 물론 깨닫지 못한 중생이 깨달음을 논하고 궁금해 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지만...
명상 공부를 잠시 해본 적이 있었는데 그런 단계에 대해 말씀하시더라구요. 참선 공부하시는 스님께서는 그런건 없다라고 말씀하시던데... 번뇌 많은 중생이 분별이 나는군요...
꼭 답변 해주세요.
▶작은 깨달은에는 점차(漸次)가 있으나 대오견성에는 점차(漸次)가 없습니다.
깨달음에는 법신의 경계, 여래선의 경계 및 조사선의 경계가 있습니다. 수행자가 화두를 지어감에 있어서 진정한 의심이 발동이 걸려 먹고, 자고, 보고, 듣는 것을 잊어버린 사심(死心)의 상태에서 며칠이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흐르다가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보는 순간 또는 듣는 순간 화두가 타파되어 확철대오하게 되면 모든 1700 공안을 일시에 다 알게 됩니다. 만약 다 알지 못할 경우에는 다시 화두를 들고 의심을 지어 확철대오하도록 다시 참구하여야 합니다. 모든 공안에 의심이 없을 시에는 부처님의 정법정안을 이으신 참 선지식을 찾아가 바르게 깨달았는지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얼마나 대신심과 대용맹심으로 정진하느냐에 따라 한 번에 대오견성에도 이를 수 있습니다.
⊙ 질문 ⇒ 합장. 삼보에 귀의합니다.
안녕하세요, 스님.
불교에 관심을 둔지 반년정도 되어가는 학생입니다.
출가를 하고픈 마음도 있으나 상황들이 변변치 못하여 머리는 깎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불교에 마음갖게 된 원인은 일종의 회의심 같은 것이었습니다. 돈 많이 버는 직장 얻고 먹을 궁리하고 돈벌 궁리하며 사는 것, 좋아하는 사람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남들한테 잘 보이려 애쓰고 똑똑해지려하고... 그렇게 안되면 가슴아파하고...
이런 것들이 별 의미 없게 느껴지는 속에서 문득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점점 더 깊어갑니다. 그런 제자신이 많이 불쌍하게 여겨지기도 하구요.
그렇게 바쁘게 살다가 끝나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순간순간이 내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일도 손에 잘 안 잡힐 때도 자주 있네요.
혼자서 절에도 가보고 책도 찾아 읽어보고 스님법문도 들어보고 그러면서 불교를 더 알게 되었는데 정말 책은 보면 안되나 봅니다. 뭔 얘기들이 그리도 다양하고 많은지.
제가 안목이 없어서 그렇겠지만요. 그래서 선을 하려 마음먹었습니다.
한가지 여쭙겠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차분한 호흡 속에 들어가면 그것이 옳게 선하는 방법인지 알고 싶습니다. 내가 무엇인지 머리를 쥐어짜서라도 따져야 하는지, 줄곧 홀로 묻기만 하면 되는 건지 궁금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궁금해 하는 느낌만 가지면 되는 건가요?
아니면 어떤 다른 특별한 화두를 들어야 하는 걸까요? 너무 말들이 많아서 초심자인 저로서는 길이 확연하지 않아 이렇게 여쭙니다.
발이나 제대로 들여놓은 후에 가까운 절 스님을 찾아뵈는 게 낫겠지요?
감사합니다. 합장.
▶나라는 존재를 알기 위해서 모든 부처님과 도인 스님들이 출가를 하여 나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알기 위한 과정은 혼자서 책을 보고 수행을 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자체가 광대무변한고로 지도자를 만나지 못하면 바른 수행을 할 수가 없고 진리의 바른 눈도 열릴 수 없으므로 허송세월만 보내게 됩니다. 눈 밝은 진리의 지도자를 방문해서 참나를 밝히고 선 수행의 지도를 받는 것이 현명합니다.
⊙ 질문 ⇒ 선의 방법인 조신과 조식 그리고 조심에 대해서 자세히 정의를 좀 내려 주세요!!!
▶바른 선을 참구하는데 있어서는 조신(調身), 조식(調息), 조심(調心)하는 것은 없고, 설사 방편으로 있다고 하더라도 의리로 쫒아서 나온 것이니 이는 고려할 가치도 없습니다. 오직 화두를 들고 바른 참구를 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선의 원류가 뭔지 궁금합니다. 답변 부탁합니다.
▶선의 원류는 각자의 심성을 깨닫는게 근본입니다. 모든 진리는 심성을 쫒아 구족해 있습니다.
⊙ 질문 ⇒ 삼보에 귀의하옵고, 우문에 현답을 기대합니다.
'나'라고 할 것이 없고, '나'라는 실체가 없는데(--- 我相 卽是非相 人相衆生相壽者相 卽是非相...), 어찌 業은 그 실체가 있어서 윤회를 하는 것인지요? 행위의 주체가 사라졌는데, 어찌 그 주체도 없는 행위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요???
▶참나를 깨달은 자는 인아상(人我相)이 없지만 참나를 알지 못하는 자는 인아상이 중중무진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무한한 윤회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 질문 ⇒ 삼보 귀의합니다.
어느 날 스님의 상당법문 중에 깨달은 자도 업보를 받느냐는 질문을 받고 어떤 스님이 그렇지 않다고 하여 몇 생을 여우로 살았다는 법문을 들었습니다.
이런 질문이 저의 구업으로 이어질까 두렵습니다.
깨달은 분은 업을 짓습니까? 업보의 중생은 누가 구제합니까?
스스로 행하지 못하는 이 미련한 중생은 어느 시절에 업연을 물리칠 수 있을는지요?
부디 현생의 업연을 끊고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구제중생의 대열에 합류하고 싶습니다.
▶깨달으면 업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바른 법을 의지해서 바른 법문을 듣고 바른 수행을 함으로써 진리의 바른 눈이 열리니 진리의 바른 눈이 열림으로 인해서 억겁의 중생의 업이 소멸이 됩니다. 정법(正法)에 수승한 인연을 맺도록 노력하십시오
⊙ 질문 ⇒ 삼보에 귀의합니다.
여자로 태어나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것은 이제 구체적 현실로 드러나 있습니다.
사회가 모두 남자 중심이요, 행동의 주체는 남자이고, 여자는 오직 들러리이며, 그나마 직장에서건 어디에서건 항상 남자로부터 공격(강한 힘- 곧 권력, 직위, 그냥 힘-이 약한 힘<性>을 누르려 함)당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해야 합니다. 여자로 태어나서 행복하다고 여기는 건 아무래도 1~2십대의 여성, 아니면 우둔한 여자들일 것입니다. (미인으로 태어난 여자들은 여자로 태어나길 잘했다고 말한다고요?... 푸흐흐..쯧쯧..)
아마 승려생활에서도 계율 등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질문 1> 여자로 태어난 것은 대체 무슨 업보인지요?
질문 2> 원치 않는 이성들에게 관심을 받는 것 또한 인과의 과보입니까?
상대방 이성들에게 관심이 없는데 직, 간접으로 괴롭힘(상대방들은 괴롭힌다고 생각 안하겠죠. 아마.)을 당하는 것이 과보의 일종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잘생긴 多聞第一 아난존자도 수행 중에 여자들에게 원치 않는 시달림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도 전생의 업-과보인지요?
극락에는 '여자'-불리한 종족-가 없다고 하는데... 도대체 전생에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여자'라는 이 껍데기를 벗지 않고서는 바닷가 한번, 등산 한 번 혼자서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여자'라는 이 몸뚱이를 함부로 놓지 못해 자리를 분별해야 하는 그 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유롭다'고 여기는 중생은 다 어리석지만, 여자인 중생은 더더욱 자유스럽지 못한 존재입니다. 여자가 혼자서 산 속 토굴에서 참선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깨달음에는 남녀노소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알음알이에 잠시 멈춰 서 있습니다.
전생의 과보가 현생에 똑같이 남녀의 입장만 바뀐 동일시(동일한 상황)는 되지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因(원인)은 있으나 然(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인연이 될 수 없으므로, 똑같은 결과는 초래되지 않는 것이 아닌지요???
▶현생에 여자로 태어남은 많은 과거 생에 여자의 습성을 익혀온 것으로 현생에 연약한 여자의 몸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악조건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바른 수행을 꾸준히 해 나간다면 다생의 습기가 점점 소멸이 되어서 다음 생에는 자유자재한(마음먹은 대로) 몸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이성들이 괴롭히는 것은, 중생은 견물생심이라, 좋은 것을 보면 좋은 분별을 내고 나쁜 것을 보면 나쁜 분별을 내니 무수한 생을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악의 분별심에 초연하고자 할진대 일상생활에 용맹정진하여 이 견성법을 성취할지니, 이렇게 되면 모든 취사(取捨)와 원한과 집착이 다 소멸이 되고 부처님의 열반의 낙을 누리게 됩니다.
⊙ 질문 ⇒ 안녕하세요.
항상 해운정사 홈페이지를 관리하느라 수고 많으십니다. 더우기 귀중한 시간을 따로 내어 운영하신다는 말에 너무 감사드립니다.... :)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마치 밥은 먹고 싶지만 내가 손을 쓰기가 귀찮으니 대신 먹여달라는 것과 같은 정말로 답답한 질문입니다.
"왜 수행을 해야 합니까?"
다른 사람의 지식이나 문구가 아닌 진정한 진제스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합장.
▶나고 날 적마다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면 이 수행을 함으로 인해서 중생의 가지가지 업보와 고뇌가 소멸이 되고 부처님과 같은 지혜가 현존함으로 인해서 나고 날 적마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는 복락(福樂)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질문 ⇒ 저는 위빠사나 수행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위빠사나 수행법은 부처님이 직접 수행하셨던 수행법이고 이 수행법으로 부처님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이 수행법에 대해서 큰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이 홈페이지 운영자님께서는 어떤 질문에 답변하시길 참선(화두선)이 제일이고 관법(위빠사나 수행법)이나 묵조선 또는 염불선 등의 방법으로는 몇 생을 수행하여도 깨달음을 얻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운영자님께서는 진제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는 분이실테고 그렇다면 큰스님의 견해도 비슷하실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만 큰스님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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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묵조선, 염불선, 이러한 등등의 수행법도 진리에 이르는 길이나 무한한 시간이 걸린 후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활구참선법은 바른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일상생활 중에 바르게 지어나갈 것 같으면 일념이 지속되어 대오견성하게 되니 이 활구참선법이야말로 앉아서 바로 부처님의 지혜에 이르는 가장 빠른 첩경입니다.
⊙ 질문 ⇒ 엎드려 삼배 드리옵고, 아래의 두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1. 아래의 경계가 오매일여인지요, 아닌지요? 제대로 한 경계인지요?
74년 재수생일 때에 도선사 일요선원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2시간씩 좌선을 할 때에 3월부터 시작해서 10월경에는 이런 경계가 왔습니다.
-결가부좌를 하고 심호흡을 3번 하면서 '이 뭐꼬오오-?'를 하면 그대로 밖의 소리도 안 들리고 이 몸이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50분씩 2번) 그리고 방선 죽비소리에 일어난 후에 일상생활을 할 때에 재수생으로서 깊이 몰두해서 수학공부를 할 때에도, 잠을 자도, 걸어 다녀도, 화두의심은 산위에서 돌이 무서운 속도로 저절로 굴러 내려오면서 가속도가 붙듯이 계속 의심이 더 커졌습니다. 말하자면 화두의심 위에서 학과공부도 하고 필요한 생각도 하고 걷고 하였다는 생각을 합니다.
-화두의심이 나름대로 자리가 잡히면서 잠은 점점 줄어들었고 잠을 잘 때는 꿈도, 화두도 없이 깊이 숙면을 취했고 잠에서 깬 후에 '아차, 어서 화두 들자.이 뭐꼬?'가 아니고 새삼 화두를 거각할 필요가 없이 이미 무서운 기세로 화두 의심덩어리는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의심의 힘이 더욱 세어지고 있었음을 느꼈습니다.
2. 두 번째 질문입니다.
90년 2월에 직접 해운정사에서 큰스님을 뵙고 위의 경계를 말씀드리고 제대로 한, 맞는 경계인지 아니면 잘못된 경계인지를 질문 드렸더니 '본인이 알아서 판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차 '큰 스님께서 판단을 해주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렸더니 다시 '본인이 알아서 판단하라'고만 하시고 나가셨습니다.
왜 옳다, 그르다, 아니면 호통을 치시던가 확답을 않으셨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대가 열거하는 그 과정은 오매일여가 아님이니, 오매일여는 항시 밤낮으로 흐르는 물과 같이 간절히 일념이 지속되는 과정에 모든 사물, 분별을 다 잊고 간절한 화두가 현전(現前)하는 과정이 오매일여의 경지입니다.
90년 2월 해운정사를 방문했을 때 무책임하게 본인이 알아서 판단하라고는 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그 때 일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 질문 ⇒ 정진을 하여 무색계까지 간 사람도 다시 육도윤회에 떨어질 수 있습니까?
▶설사 삼계를 뛰어넘었다 하더라도 견성대오를 하지 못하면 윤회고를 받게 됩니다.
⊙ 질문 ⇒ 의단독로와 타성일편이란 말이 있는데 이들은 같은 의미입니까 다릅니까? 다르다면 그 차이는 어떠한 것입니까?
▶의단이 독로하면 자연히 타성이 일편이 됨이니 이러한 문구에 집착하지 말고 오로지 화두에 전념하여 참의심이 발로되도록 정진에 몰두하시기 바랍니다.
<화두에 관한 설왕설래?>
1. 화두의 1700 공안이 죽은 문자다?
2. 화두의 병폐?
위의 두가지 說에 대하여 앞서 화두를 거론하신 분들은 좀 구체적으로 언급해 주시죠...!!!
남의 얘기를 자기가 몸소 체득한 것처럼 착각하시는 건 아닌지?
공안의 한자를 영문으로 바꾸면 시대에 맞는 산 문자가 되는지???
진리란 시대를 뛰어넘는 것... 시간은 원래 없는 것...
1700공안이 과거시대에는 살았다가, 지금은 죽은 문자가 될 수 있는 건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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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은 제가 참선하는 곳의 모 홈페이지에 들렀다가 그 곳 토론장에서 '화두'를 폄하하는 대화를 보고, 잘 아는 바가 없지만 잠시 시비를 걸었던 내용입니다. 그 곳은 아마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곳은 아닌 듯 합니다. 그들의 모토는 실상관법이 석가의 수행법과 일치하므로 실상관법을 수행방편으로 삼고, 화두를 <중국에 건너온 불교가 온갖 사상이 뒤섞인 제자백가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의 흔적이며, 시대적 사생아>에 비유합니다.
'화두는 필요한가?' '혜를 닦기 위해선 화두가 필요하다.' '화두보다 코앞에 닥친 독화살이 더 급하다' 등의 얘기들이 이어졌으며, 화두의 병폐로 <화두에 집착이란 것이 있다..차라리 아니 든만 못한 병이다.
화두를 머리에 놓으면 상기 병이 일어나고, 배속에다 놓으면 배탈이 일어나지.>라고 하며, '화두 들고 깨친 자가 한명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모든 화두에 관한 說에 대해 조실스님께서 바로잡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 <질문하기>란의 초두에 화두에 관한 말씀이 있는데, 그 반론에 대해 한 번 더 답변말씀을 청하자니, 참 송구합니다.
▶화두의 1700공안은 모든 부처님과 모든 도인의 진리를 깨달은 살림살이니 여기에 대하여 죽은 문자 운운함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야호 무리들이 하는 소리입니다. 야호 무리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고 오직 활구참선 화두에 전념을 하십시요.
위대한 법을 갖추신 부처님도 관법을 수행하셨으나 그 당시 오직 가섭이란 한 사람의 지음자(知音者)만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 활구 참선이 전래된 중국에 있어서는 무수한 도인이 배출이 되었습니다. 이것만 봐도 관법과 활구참선은 진리의 문에 이르는데 있어서 비교할 수 없는 수행법입니다.
⊙ 질문 ⇒ 멀리서도 이렇게 큰스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다니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큰스님께서는 법체 평안하신지요. 언젠가 한 번은 큰스님을 찾아뵙고 답답한 심정을 말씀을 드리고 가르침을 받고자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터넷상에서 질문을 드리게 되니 송구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저는 조주스님의 無자 화두를 들고 있습니다. 화두의 생명은 바로 의심이며 또한 조주스님의 뜻을 간파하는데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처음에 화두를 들 때 하도 의심이 일어나지 않아 불성에 대해 알면 의심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불성이 뭔지 거기에 막혀 한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공부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지금 가장 문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앉아서 화두에 의심을 지으려고 애를 쓰면 의심이 좀 일어나는듯하고, ‘모든 중생들이 다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라고 화두를 들기보다는 ‘도대체 조주스님은 무슨 뜻으로 불성이 없다고 말씀하셨을까?’ 라고 조주스님의 심중을 알고자하는 식으로 화두를 들면 의심이 좀더 일어남을 개인적으로 느낍니다. 큰스님 제가 말씀드린 2번째 ‘조주스님은 무슨 뜻으로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라는 화두를 들면서 조주스님의 심중을 알고자 하는 식으로 화두를 드는 것이 올바르게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앉아서도 의심을 일으키려고 노력은 하지만 도대체 지금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잘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납니다. 저는 앉아있으면 거의 망상은 없습니다. 혹 망상이 일어난다고 해도 화두의 문구는 들립니다. 그러나 의심은 어느새 사라지고,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또 화두의 의심을 지어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좌복에서 일어나서 움직일 때가 문제입니다. 여전히 화두의 문구는 계속 들리고 있으나 의심은 없어져 버리고 그냥 ‘어째서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라는 문구만 계속 잡고 있습니다. 일을 하다가 가끔 이러면 안되는데 하고 또 의심을 지어가면 잠시 의심이 일어났다가 조금 지나면 또 문구만 들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일어서서 활동하면서도 의심이 일어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제 스스로 돌이켜 보건데 첫째 生死가 큰 문제라고들 하지만 제가 아직 젊기 때문인지 나고 죽는 것이 큰 문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가 않으며 둘째 지금은 불성이 무엇인지 캐내려고는 하지 않지만 그러나 제가 몸소 누구나 불성이 있다는 것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심이 미약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찌해야 좋을지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큰스님의 법문 테잎을 들으니 항상 부처님 전에 발원을 하면서 공부해가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조사스님들도 다 그러하셨다고...
그런데 저는 성불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일어나지 않으며 더군다나 발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을 돌려 발원을 해야지 하고 발원을 하면 그것이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냥 건성으로 하는 것이 되어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그리고 절에 가서 부처님을 뵈어도 절을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화두의 문구만이라도 계속 이어가니 머리가 더욱 맑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화두의 생명은 의심이라는 것을 알기에 지금 올바르게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화두의 문구라도 계속 들고 있으면 어느 날 참 의심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일하는 가운데서도 의심이 일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그럼 큰스님 늘 법체 평안하시고 미혹한 중생을 위해 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조주 무자를 참구한다고 하니 "부처님께서 정(情)이 있는 것은 다 불성이 있다고 하셨는데(부처될 성품이 있다), 조주스님에게 묻기를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하니 없다고 하셨는데 개는 어째서 불성이 없다고 하였는고" 이렇게 화두의 제목과 의정이 한 뭉탱이가 되어서 24시간 365일 쭉 일념이 지속되게끔 전 생애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견성법을 추구하는 이는 부처님과 조사의 일언반구를 금쪽같이 소중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자세가 확립되지 않은 사람은 견성법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 견성법이라는 것은 생사윤회를 초월해서 부처님의 열반의 낙을 억만년이 다하도록 수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고귀한 견성법을 추구하는 자세가 십분 갖추어져야 되나니 이 화두상에 관법이니 화두법이니 시시비비를 논하는 자세가 견성할 큰 그릇이 못되나니 진정한 발심자는 옛 도인의 일언반구를 바로 받아들여서 바르게 화두를 지어가야 합니다.
⊙ 질문 ⇒ 오매일여란 경계일여의 점검수단이라고 생각됩니다.
깨우침을 얻었을 때 스스로 잠을 자보다 잠 속에서 깜깜히 중생과 같으면 거짓 깨우침이며 깊은잠 속에서도 항상 주인공이 어디서 안심입명하는 줄 알아야 비로소 바른 깨우침이라 생각됩니다.
진제스님께 묻건데,
바로 잠이 깊이 들었을 때 꿈도 없고 생각도 없으며 보는 것도 없고 들음도 없거니, 필경 스님의 주인공은 어느 곳에서 안심입명 합니까?
▶선의 깊은 진리를 물을 때는 직접 방문하여 묻도록 하시고 이렇게 횡설수설 묻는 것은 예의에 벗어날 뿐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 질문 ⇒ 삼가 삼배 올립니다.
참선 공부를 하고는 있지만 아상이 깨어지질 않습니다. 여기 이렇게 타이핑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이 생기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찌 해야 할까요
큰 스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아상은 팔만사천 번뇌의 근본 업(業)이니, 이것은 말과 생각으로 없애야 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선수행을 꾸준히 하는 가운데 아상은 점점 봄날에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며, 바른 정안이 열릴 때 모든 상(相)과 업(業)이 소멸하게 됩니다.
⊙ 질문 ⇒ 저는 오래전에 화두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중에서 摘楊花 摘楊花 란 화두에 의심이 걸렸습니다. 출근하면서 직장에서 일하면서 그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 순간에 그 화두만 남고 제 몸뚱아리가 없어지더군요. 그러더니 머리가 밝아지면서 그 뜻이 새겨졌는데 우리의 육근동작 일체가 도 아님이 없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화두를 보면 알음알이로 해석해버리는 거에요. 화두에 근본적으로 의심이 안 걸린다는 뜻이죠.
어떻게 해야하는지요? 화두하나 주실 수 없는지요.
▶적양화(摘楊花) 화두를 들다가 그 뜻이 밝아졌는데 일체가 도(道) 아님이 없다고 하니 그것은 적양화 화두를 잘못 안 것입니다. 그러하니 다른 화두를 타서 들려하지 말고 적양화 화두를 들되 "이러한 즉은 가지 않겠다 하였는데 어째서 버들잎을 따고 버들잎을 딴다고 하였는고?"
이렇게 화두를 실답게 참구해서 일념이 지속이 되도록 정진에 몰두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내용삭제
▶1) 출가의 본 뜻은 인생무상을 느껴야하고 세상의 부귀공명을 콧구멍의 때와 같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고 날 적마다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면 자기의 참사람을 발견함으로 인해서 모든 고통에 초연하고 모든 부처님의 낙을 수용하느니 이러한 큰 뜻이 있어야 후회 없이 출가를 하여 대장부의 활개를 펼 수 있을 것입니다.
2) 부모의 은혜는 바다보다 넓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효행도 중요하지만 부처님 말씀에 한 자식이 출가를 하면 아홉 친척이 천상에 나는 그런 공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3)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는 참나의 바탕을 깨달음이니 참나 가운데 우주 만법의 진리가 있음이니 이 참나를 깨달은 살림살이가 부처님의 살림살이입니다.
우리 모두가 참선 수행을 하여서 참나를 깨닫는데 뜻이 있습니다.
참나는 남(生)도 없고, 죽음도 없는 자리를 항시 수용하고 있습니다.
⊙ 질문 ⇒ 질문이 격에 맞지 않다고 제가 생각하여 다음과 같이 적어 조실스님께 올렸습니다. 이점은 양해 해 주십시오.
왜 부귀공명을 헌신짝 보듯 보아야 하는지요?
▶세상만사 무상함이 짝이 없음이로다.
생야시고(生也是苦)여 사야시고(死也是苦)라.
그러니 이 무상을 바로 보고 이 부처님의 해탈법을 성취하여 수용하게끔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게시판에 올려져 있는 질문 ‘선지식께 화두를 받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를 보고 궁금한 점이 있어 질문을 드립니다.
옛 조사스님들께서는 그 사람의 근기를 보고 거기에 맞는 화두를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한 예로 경허선사께서 수월스님에게 '신묘장구'를 할 것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것은 경허선사께서 수월스님이 전생부터 '신묘장구'를 해 온 것을 보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생부터 해 오던 화두를 금생에 다시 참구한다면 더 빨리 진척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큰스님께서는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혹은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라는 화두를 주로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외람되나 제가 궁금한 점을 여쭙고자 합니다.
이렇게 두 가지 화두를 주로 주심은 사람들의 근기가 낮아서입니까? 무슨 뜻으로 주로 두 가지 화두만 주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만약 큰스님께 화두를 받았는데 여기에 전혀 의심이 일어나지 않고 다른 화두에 의심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계속 큰스님께 받은 화두를 들어야 합니까? 아님 다시 큰스님을 찾아뵙고 ‘화두에 의심이 일어나지 않으니, 다른 화두로 바꾸어 들고 싶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린 후 다른 화두로 바꾸어야 옳은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참선을 하는데 있어서 대부분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바로 화두에 대한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책에서 보니 처음에는 화두에 의심이 없더라도 계속 화두문구라도 들고 있으면 점점 시간이 가면 익어져서 의심이 생긴다고 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 의심이 일어나지 않을 때 화두의 문구만이라도 놓치지 않고 노력해 간다면 어느 날 화두에 대한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까?
답변을 부탁드리며 큰스님 늘 건강하십시오.
▶화두가 인연이 있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자체에, 진리의 하나의 자체를 놓고 백 천 가지의 공안이 벌어졌느니, 그러하므로 어느 화두를 들든가 선지식 스님을 쫓아 바른 지도를 받아 바르게 참구하면 대오견성을 할 수 있습니다.
화두상에 의심이 더하고 덜하는 것은 분별심에서 나는 것이니 그러한 생각을 다 놓아 버리고 견성대오를 목표로 하여가지고 정진에 몰두 할 것 같으면 자연히 참의심이 발로되어 깨닫게 됩니다.
화두의심이 없다고 하여 계속 화두문구를 염송하면 그러한 참선은 삼생을 하여도 견성하기 어렵습니다.
⊙ 질문 ⇒ 안녕하세요, 관리자님.
부처님께서는 그 옛날 태어나시기 전 이미 도업을 이루시고 다시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다시 오신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싯달타께서 젊은 시절 생로병사에 괴로워하시고 진리를 갈구하신 것이 일부러 보여주시려고 하신 행동인가요? 아니면 실제로 중생과 같은 상태였나요?
영겁불망이 되어 다시 오신 것일 터인데 왜 깜깜한 것이었나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말씀하시고 실제로 다시 어두워 지신건가요?
영겁불망이 되면 나면서부터 전생일을 다 알고 영겁토록 매 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지?
이 문제에 대해서 큰스님의 안목으로 알고 싶습니다.
▶대도를 깨달으면 영겁불매라, 부처님도 또한 그러함이니 중생을 교화하시기 위하여 방편으로 중생놀음을 시현한 것입니다.
원오극근선사도 육조스님을 찬하시기를 "조계육조 옛 고불(古佛)에게 머리를 조아려 절 하노니 80생의 선지식이로다"
조주선사는 동진으로 출가하여 생이지지(生而知之)로써 대도를 수용한 분입니다.
이런 것만 보더라도 이 대도는 분명히 깨달아 놓으면 미래제가 다 하도록 밝아 있습니다.
⊙ 질문 ⇒ 관리자님 죄송합니다.
아래 제가 드린 질문을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스님 역시 78대조사스님으로서 경허-만공-혜암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은 그 글을 보고 그 스님이 진제스님에게 수없이 많은 방망이를 놓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과연 조실스님께 이 문제를 확실히 드러내보여야 상황처리가 될 것 같습니다.
조실스님께서도 묻는 허물보다 묻지 않는 허물이 크다고 하였습니다.
오해를 풀고 바른 법을 열어주기 위해서 저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부탁드리건대 여기서 부산까지 갈 여건이 도저히 못 되는 사람으로서 관리자님께 대단히 죄송하지만
조실스님께 여쭈어주시고 조실스님의 말씀과 그 상황에 대해서 상세히 일러주시면 크나큰 법보시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관리자입니다.
님이 하신 질문은 조실스님께 여쭈어 보지 않아도 어떤 말씀을 하실지 제가 잘 알기에 제가 조실스님께 질문하신 내용을 보여 드리지 않은 점 다시 한 번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조실스님께서는 평소에 근세 한국선의 역사를 볼 때, 부처님의 최고의 진리인 향상구를 제창하신 분은 성철스님과 향곡스님 두 분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굳이 여쭙지 않아도 답은 벌써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님이 궁금해 하시는 것은 당연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속가에 있을 때 어느 스님의 전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그 스님께서 그 당시 유명한 선지식 중의 한 분을 인정하지 않은 부분을 읽고 저 혼자 많이 혼동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선지식 중 기봉이 가장 높다고 세상에서는 평하고 있는 스님을 왜 모스님은 인정을 하시지 않는 것일까"
아마 님께서 궁금해 하시는 부분이 제가 속인 때 궁금해 한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해운정사에서 계를 받은 후 얼마 안 있다가 선맥에 대해 조실스님께 자세히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만약 제가 그 말씀을 드린다면 모든 것이 명확해질 것이지만, 이것은 자칫 다른 문중과의 논란의 소지가 많음으로 여기서는 밝힐 수 없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는 것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와의 논란, 어떤 선지식은 또 다른 유명한 선지식에 대해 인정을 하지 않는 부분 등... 그러나 이러한 등은 아주 민감한 부분이라 드러내놓기가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하니 저의 입장을 좀 생각해서라도 이해를 부탁을 드립니다.
진제조실스님께서는 "근세 한국의 선종사에서 향상구를 제창하신 분은 성철선사와, 향곡선사 두 분이다"라고 말씀하심을 상기하신다면 궁금해 하시는 부분이 다소 해결이 되리라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이 점에 대해 미흡하게 답해드린데 대해 죄송하게 생각을 합니다.
관리자 올림
⊙ 질문 ⇒ 요즘 젊은이(속인)을 보면 너무나 철없고 도 닦는 것과 무관하게 사는 모습을 쉽게 느낍니다. 또 요즘사회에서 젊은이들이 무척 물질주의와 성 개방에 찌든 걸 봅니다
큰스님께서도 젊은 사람을 보시기도 할 텐데 속가의 젊은이 중에 법기(法器)도 보신 적이 있는지 궁금해요
▶젊은 사람들이 요즘 서양풍물이 들어옴으로 인해서 너무나 외형에 떨어져 세월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항시 젊음이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황금기에 방랑과 허송세월을 자제하고 진정한 자기의 바른 목표를 향해 전력투구해야 할 것입니다.
불법에 신심으로 귀의해서 생활 속에서 바른 진리의 법을 참구하는 그러한 거사들도 그 중에 한 두 명 보았습니다.
생사해탈법의 이 공부는 바른 선지식을 만나 바르게 지도를 받아 일상생활 중에 꾸준히 정진에 몰두하면 개개인이 다 득력을 할 수 있습니다.
⊙ 질문 ⇒ 감사합니다. 멀리서도 큰스님의 귀한 말씀 소중하게 한자 한자 듣고 있습니다.
부족한 살림살이를 펼쳐 보여 관리자 스님께서 답을 주셨으니 질문을 간단하게 줄여서 다시 올립니다.
"화두 자체를 의심하는 것은 틀렸다"는 말씀과 "화두를 크게 의심하라"는 것을 여쭈었습니다.
제가 앞의 말씀을 다시 생각하여보니 "화두를 글자 자체로서만 의심하는 것은 틀렸다"는 말씀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화두를 들어 화두를 깨닫는 열쇠는 의심에 있나니 의심이 없는 참선은 껍데기 참선입니다.
그러니 옛날 도인 스님네도 의심이 크면 깨달음도 크다고 하셨는데 부처님께서 일체의 모든 중생이 다 불성(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이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없느니라"하였으니 부처님과 상이한 답이로다. 그러면 조주산사는 어째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하였는고?
없다고 한 뜻을 항시 생각하며 ‘개에게는 어째서 불성이 없다고 하였는고?’
의심과 제목이 한덩어리가 되어 24시간 365일 쭉 지속이 되어야 합니다. 의심 없는 참선은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법사스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화두를 들지 마십시오.
⊙ 질문 ⇒ 답변 감사합니다.
저는 조주선사께서 어째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하셨는지 그 ‘無’ 자리도 찾았습니다. 그래서 선지식 아래 법을 받으신 법사님의 지도를 받고 있습니다.
화두에 의심이 없다면 화두를 드는 의미가 없겠죠. 제가 말씀드린 뜻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화두의 글- "어째서 '無'라 하였는가" 라는 말 자체를 사량분별로써 이것인가 저것인가 답을 궁리하며 의심함이 아니라 항상 깊은 의심 자리를 지켜야하는 것과 스님께서 위에서 말씀하신 "의심과 제목이 한덩어리가 된다"는 것이 한 뜻인지 큰스님께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佛子 합장 삼배
▶의심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화두의 제목과 의심이 간절히 흐르는 물과 같이 도도히 흘러가야 됩니다.
⊙ 질문 ⇒ 안녕하세요. 진리를 찾아 선인의 마음으로 살고 싶어 하는 재가수행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꼭 선지식께서 내린 화두를 들어야 하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남이 내린 화두보단 자연적으로 생겨난 우주의 근원에 대한 호기심이나 아니면 스스로 의문을 가지는 점을 화두로 잡아야 더욱 더 크게 깨달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저의 강한 의문은 ‘어떻게 하면 세상의 모든 걱정 근심거리를 벗어나 뭘 하든 간에 맘 편하고 여여하게 할 수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크게 깨달은 선지식에게도 과보가 닥치는지. 그리고 깨닫는 경지에 차이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답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자는 첫째 선지식에 대한 바른 믿음이 있어야 되나니, 이 믿음이 없으면 착각으로 일생을 허송세월하게 됩니다.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간택 받아 바른 지도를 받아서 참구하여야지 자기 혼자의 사견으로 정진수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2) 부처님께서도 정업(定業: 과거의 지은 업)은 없앨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수도견성인은 과보를 받더라도 과보가 아님이요, 과보를 초월한 경지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3) 깨달은 경지에도 차이가 있으니,
법신변사가 있고 여래선의 경지가 있고 향상의 경지가 있음이니, 향상의 경지를 투과하여야 모든 부처님과 모든 도인과 더불어 살림살이를 같이 수용할 수 있습니다.
⊙ 질문 ⇒ 삼보에 귀의하옵니다.
참선을 하고 싶은데요, 화두를 하나 얻을 수 없을까하고요? 절에서 행자생활을 하고 있는데요. 여러 가지 수련을 많이 해보았지만 큰스님 법문과 책을 통해 느낀바 있어 염치 불구하고, 화두를 청하게 되었습니다.
조만간에 송광사에서 정식 행자생활을 하는데 큰스님께서 화두 하나 주시면 소중하게 간직하여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리고 참선공부 하고 싶어, 절에 오게 되었는데, 사미계 받고 강원을 다녀와야 하는지 큰스님 뜻을 알고 싶습니다.(주위에선 강원을 갔다 와야 한다고 합니다만 선공부만 한다면 강원을 굳이 갔다 와야 하는지요?)
남은 생을 진리를 얻고자 하고 죽는 한이 있어도 절을 떠나지 않기로 했습니다.
큰스님 건강 하시어 많은 사람 복되게 하여 주옵시고, 여러 스님들도 건강하시길 기원하옵니다.
▶화두를 간택받고자 할진대 선지식을 친견하고 3배를 한 후 모든 분별심, 기멸심을 놓고 청정한 마음자세로 간택을 받으시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송광사에서 출가를 하실 것이면 송광사에 덕 높으신 스님들이 계시니 직접 찾아뵙고 여쭈어 보는 것이 그때 근기에 적합한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행자생활 하실 때는 행자생활 그 자체에 최선을 다하시면 좋습니다.
-총무스님 답변-
⊙ 질문 ⇒ 질문이 있어서 이렇게 메일을 보냅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정말로 아무 걱정이나 근심이 없어지는 걸까요?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일이나 공부를 하다가 걱정거리나 힘든 일이 생기면 하던 일은 다 팽개치고 견성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견성만 하면 어떤 걱정거리나 힘든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 합니다.
물론 견성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는 일상생활에서 열심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생활 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견성이라는 것만을 찾는 모습은 제눈엔 쫌...
견성이라는 것도 결국 마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에서 열심히 살면서 마음을 닦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견성이라는 것에 얽매여 일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하여간 이렇습니다.
스님에 답변 부탁 드립니다.
성불하십시요.
▶가지가지의 번뇌망상으로 인해 그것이 업이 되어 또한 금생에 가지가지의 고통을 받게 되니, 이러한 업을 단박에 녹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선수행을 꾸준히 해 나가는데 그 업이 점점 녹아내리게 됩니다.
이 공부가 점점 익어지면 마음의 온갖 갈등은 없어지고 마음이 아주 편안한 상태가 됩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느 보배로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부는 꼭 앉아서만 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일상생활하는 가운데 화두공부를 지어가면 아무리 번잡한 곳에서도 마음이 편안할 것입니다.
참선공부의 근본은 견성성불에 있지만 설사 금생에 성불을 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꾸준히 공부를 해 나간다면 다음생에는 금생에 발원한대로 수승한 인연을 만나게 되고 또한 금생에 못다 한 공부를 마치게 됩니다.
그러하니 나고 날 적마다 모든 사람에 앞서는 복락을 누리고 한다면 이 참선공부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 질문 ⇒ 안녕하세요.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몰라 여기에 글 올립니다.
조계종에 지장도량, 혹 해운대, 기장 근처에 이런 절이 있나요?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이라도 좀 가르쳐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꼭 부탁 드립니다...
▶바른 수행법은 본 마음을 맑히는데 있나니,
일심(一心)가운데 만가지 진리의 법이 구족해 있으니 이러한 줄 아시고 마음을 밝히는 바른 수행을 하면 정법(正法)을 바로 따라 행하는 분이 될 것입니다.
무슨 도량, 무슨 도량 하는 것은 중생의 분별심에서 하는 말이라, 처처(處處)가 부처요 만물이 다 진리의 체(體)이니 이렇게 아시길 바랍니다
⊙ 질문 ⇒ 진제 스님께 질문이 있습니다. 요즈음 스님 중에 귀신을 쫒고 각종 천도재나 氣를 통해 사람들의 병을 고치거나 각종 장애나 어려움을 물리쳐주는 스님들을 보았는데 정말 이러한 행위가 불법의 한 방편인지 아니면 삿된 행위인지 궁금합니다. 일반인이나 氣수련하는 곳에서도 이러한 일들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데 정말로 氣를 이용해서 각종 불치병이 낫는 것을 많이 보았고 저 개인적으로도 몸이 많이 달라진 것을 느낍니다. 소위 유명한 스님이 천도재를 지내도 그냥 염불만 장황하게 하고 음식만 많이 차린다고 영가가 천도되지 않는 것을 많이 보았으며, 법력 있는 스님은 그런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스님능력으로 천도 시키는 것을 많이 보와 왔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진제 스님께서는 좋은 氣가 많이 나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1.도대체 氣란 무엇이고, 불교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2.스님들이 氣수련하여 능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3.스님들이 귀신을 쫒고 병을 낳게 하는 것도 불교의 수행이라고 할 수 있는지?
4.좋은 氣가 많이 흐르는 스님이 정말로 법력 있는 스님입니까?
5.불교적인 수행을 많이 하면 결국 좋은 氣를 많이 받는 것이 아닐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우주 삼라만상이 氣로 운행이 되며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세계가 氣로 이루어졌으며(영혼의 세계도) 우리가 불법을 행하는 것도 부처님의 좋은 기운을 받아서 더 좋은 상태로 나아가기위한 수행이 아닐까요? 좋은 氣는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을 했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고, 악한행동은 나쁜 氣를 받아서 계속되는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기가 힘든 것처럼 불법과 氣는 상당한 연관성이 있으며,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氣나 불법이나 모두 우주의 법칙이며, 이제는 서로 연관성을 찾아볼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전통적인 고루한 입장에서 벗어나 진정한 불법이 무엇이고 대우주의 법칙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때인 것 같습니다. 참고로 저는 기수련가도 아니고 이상한 종교인도 아닌 정법을 믿고 수행하는 불자입니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큰스님의 견해를 직접 듣고 싶습니다.
▶1)기(氣)란 것은 요즈음에 와서 수련하는 세인들이 기(氣)에 대해 많이 운운하고 있지만 불법 중에 그러한 예가 없나니 단지 법력으로써 천도하고 바른 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기(氣)와 법력은 다릅니다. 수행을 해서 철저한 바른 안목을 갖추어서 진리의 법에 의지해서 법문을 하는 고로 이로써 천도하는 법이 있습니다.
2)와 3) 바른 수행법과는 거리가 멉니다.
4)그렇지 않습니다. 법력과 기(氣)는 다릅니다.
5)바른 수행을 하시면 바른 정안을 갖추게 되며 기(氣)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 질문 ⇒ 큰스님께서 봉암사의 조실로 추대 되셨다는 말씀에 실로 다행스럽게 생각했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소임을 놓아버렸다고 들었습니다.
어찌하여 석 달 만에 놓아버리셨는지 다만 아쉽고도 아쉬울 따름입니다. 또한 종사께서 그리하셔야 되겠습니까? 맡지 않으시면 맡지 않으시지 허락을 하시고 석 달 만에 그만 두시다니요.
혹 건강에 큰 문제라도 있으신지 그리고 동화사와 기초선원의 소임은 계속 맡고 계신지...
사유를 알고 싶습니다.
조실스님께서 계시기에 크나큰 기쁨입이다. 건강하세요
▶해운정사, 동화사선원, 기초선원 이 세 군데를 종전에 보고 있었는데 봉암사까지 간청을 하여 부득이 허락을 하였습니다.
봉암사를 허락한 뜻은 봉암사 선방에 3군데를 운영하고 있어서 한군데라도 전국 발심한 수좌를 모아서 9개월 결제를 하여 득력자를 배출하려고 하였으나 대중의 호응이 없어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 질문 ⇒ 관리자님의 성의 있는 답변을 보고 저도 도움을 청하고 싶어서 글을 올립니다.
1.
수식관을 해오다가 책과 법문을 통해 듣고 화두를 참구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부터 하고 있는 화두 참구는 ‘앉고, 서고, 가고, 일하고 이렇게 하는 나는 누구인가?’라고 처음 머리로 생각을 하면 잡힐 듯 말 듯한 조그마한 의심이 생깁니다. 이 의심을 지켜보다 순간 다른 생각에 쓸려 가면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고 의심을 이어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호흡은 수식관을 할 때처럼 아랫배 깊숙이 쉽니다. 수식관을 할 때는 1시간도 지겹지 않게 지나가는데 익숙치 않아서 그런지 20분도 안되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요?
2.
선지식을 친견하게 되면 큰 용기가 되고 힘이 될 것 같은데 진제스님을 친견할 수 있는지요?
(서울에 살고 있지만 주말이라도 내려가서 꼭 친견하고 싶습니다)
3.
스승이 없이 공부하면 외도에 빠진다고 들었는데, 이런 인터넷을 통한 방법이 전통적인 방법으로 해오던 스승이 제자의 공부를 점검해주고, 탁마해주는 방법을 대신할 수 있는지요?
▶1)화두를 하여 자리가 잡히면 자연히 앉거나 서나 화두가 간절히 흘러가게 됩니다. 그러니 그렇게 되기까지 무한한 노력을 하셔야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의심을 지어감도 틀린 것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선지식을 찾아 화두를 간택 받아 바르게 화두참구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입니다.
2)친견은 가능하나 전날 떠나시기 전에 반드시 조실스님께서 해운정사에 계시는지 확인하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혹 다른 일로 출타하실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리자 답변-----
3)대도의 진리는 광대무변하여 눈 밝은 선지식을 친견하여 면밀히 점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 질문 ⇒ 삼보에 귀의하옵니다.
큰스님을 직접 찾아뵙고 간곡히 여쭈어야 함이 도리인줄 알면서도 이렇게 인터넷이라는 것을 통하여 여쭐 수밖에 없는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하면서 간단히 몇 가지 여쭙고자 하옵니다.
여러 수좌들의 참문에 바쁘신 줄 알지만 눈먼 중생의 간절한 맘이라고 헤아려주시어 좀 소상하게 답변해 주시면 명심하여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보이고 들리고 하는 이 일이 무엇인가...’
제가 불교를 알 수 없고, 접하지도 못했었던 유년 시절부터 항상 저를 따라다니던 의문이었습니다. 성장하면서는 내가 좀 엉뚱한 호기심이나 착각에 사로잡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러한 의문을 애써 외면하려 했었으나 갈수록 더해만 가는 의문을 피해갈 수가 없어서 이러저리 방황하다가 지금은 결국 불가에 인연이 닿아 귀의하여 출가인이 되어 있습니다.
스님,
위에서와 같이 제가 우연히 갖게 된 의문인 ‘보이고 들리고, 느끼고 하는 이 감각작용이 도대체 무슨 조화인가, 이일이 무슨 일인가’ 하는 자연발생적인 의정도 선지식에게서 받은 활구와 같은 화두가 될 수가 있는 것일까요? 나중에 불가에 귀의해 화두에 대한 법문도 많이 듣고 조사집도 보고 했지만 제가 불가에 귀의하기 전부터 본래 갖고 있던 의문만큼 의정이 일어나지가 않아서 그냥 계속 그 문제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문도 화두가 될 수 있다면, 어떻게 의정을 품어야 좀더 실답게 매진할 수가 있을지 스님의 조언을 듣고자 이렇게 두서없이 글을 올립니다.
큰스님의 자상하신 말씀 기다리겠습니다.
큰스님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능안 삼배.
▶선지식에게서 받은 활구와는 천지간입니다.
이것은 종전에 보고 들리고 하는 것은 식(識)의 분별심에서 나옴이라 그러므로 식의 분별에서 나온 이것을 가지고 참구한다는 것은 맞지 아니하니 눈 밝은 선지식을 찾아 화두를 간택하여 바른 참구를 하시길 바랍니다.
⊙ 질문 ⇒ 삼보 귀의하옵고,
수행을 시작하려 하는 재가자입니다. 위빠사나도 좋고, 참선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입니다.
그런데 [법문보기]의 조실 스님과 수선회 현담 거사님 문답을 보니, 수행법을 정한다는 것이, 단지 선택의 문제에 불과한 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질문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문답에 의하면, 조실스님께서는 소승법에는 견성이 없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소승법에서 지향하는 궁극적인 경지가 견성은 아니라는 말씀인데요.
이와 관련하여 제가 궁금하게 여기는 바는 세 가지입니다.
1. 소승과 대승이 지향하는 궁극적 경지는 정말 다른 것입니까?
2. 다르다면, 소승의 궁극적 지향점은 무엇이라고 이해해야 합니까?
3. 그렇다면 위빠사나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와 간화선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경지 또한 다르다고 보아야 합니까?
깨달음을 위하여 훌륭한 선지식을 만나기 위한 노력도 마다않는 많은 분들을 보았습니다. 수행법 선택은 그보다도 더 큰 중요성을 가질 것 같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이라 나무라지 마시고, 상세히 답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초심자 합장.
▶
1) 다릅니다.
소승은 소승과에 만족하고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나니,
부처님 당시에도 대승법을 설하시니 500 소승과를 증득한 이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경우가 있습니다.
2) 대승과 소승은 차이가 있습니다.
소승은 소승과에 만족하고 멸의정에 안주하고 있음이요, 대승은 견성성불에 구경이 있습니다.
3) 시간 관계가 차별이 있을지언정 구경목표는 달성할 수가 있습니다.
⊙ 질문 ⇒ 에~~ 전 서울에 사는 10대입니다. 어리벙한 질문이지만 저에게는 도무지 헷갈리는 것이기에... 이걸 알아야 하겠기에... 허나 마땅히 물을 곳도 없고 해서 이곳에 질문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질문이란 다름이 아니오라, 여래선과 조사선에 관한 것인데요. 숭산스님께서 쓰신 책에 보면 '눈 밝은 선지식은 두 가지를 감별한다'라고 되어있던데 진제스님 문답 중에는 여래선과 조사선이 다르지 않다고 씌어 있더군요. 근데 다시 살펴보니 숭산스님 책에도'여래선과 조사선은 실은 하나다'라고 씌어 있더라구요.. 다른 구절에....
둘이 다른 것이 아니면 왜 두 가지 이름이 있는 것이며, 숭산스님은 왜 나누어서 감별한다고 하신 것입니까?? 법문 중에 '여래선과 조사선'이 있긴 한데 전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 질문이 매우 장황하고 느닷없더라도 제발 상세히 좀 답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로썬 질문할 곳이 이곳 밖에 없습니다.
▶조사의 법 쓰는 가풍을 일일이 설파로써 알려고 하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이러한 공안을 논하는데 있어서는 알음알이 소견으로써 그 뜻을 세밀하게 설명을 하여 달라고 하는 것은 철없는 소리입니다.
화두를 타파하여 바른 눈이 열리면 스스로 여래선, 조사선을 알게 되리니 철부지 물음은 그만두기 바랍니다.
⊙ 질문 ⇒ 큰스님께 여쭈고자 합니다.
제가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루 말할 수 없이 너무나 고요했고 몸의 감각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땐 화두가 아닌 호흡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편안하고 고요하여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성성적적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큰스님께 여쭙고 싶은 것은 열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행복입니까? 이번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 적적하고 망상이 안 이는 것은 감각 없는 행복이라는 것을 느꼈고 부처님께서 모든 감수 작용은 고통이다라고 한 말이 이해가 갔습니다.
큰스님. 열반낙이라고 하는데 열반낙은 분명히 영원한 것입니까? 속세에서 이성과 깊은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사랑을 한 번 해봤는데 완전히 오매일여가 되었습니다
깨어있을 때는 물론 동정에 꿈속에서도 잠에서 딱 깨어나면서도 한시도 그 뜨겁고 아련한 가슴을 잊은적이 없습니다. 1년 동안요. 그것은 행복함이었습니다.
진실로 간곡하게 여쭙니다. 만약 그러한 속세의 최고의 행복이 만약에 영원하다면 비록 그러하더라도 열반낙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까?
삼배.
▶열반의 낙은 불생불멸해서 불생불멸한 적적한 경지를 수용함이니 그대가 사랑의 낙으로써 오매일여가 되어 1년 동안 사랑에 빠졌다고 하니 이것은 열반의 낙과는 견줄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니 망령된 생각은 쉬는 것이 좋습니다.
⊙ 질문 ⇒ 세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요? 효도 결혼 경제적인 문제 등.
▶세속에서의 바른 삶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경제는 노력해서 생활을 꾸려가되 보람 있는 여생을 보내고자 한다면 '참나'를 밝히는 선수행을 함으로 인해서 아집이 다 없어지고 동체의 대비심을 발하여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이러한 생을 누리는 것이 값진 인생의 생활입니다.
⊙ 질문 ⇒ 안녕하세요. 전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인데요. 참선의 목적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어서 이렇게 글을 적습니다. 제가 알기로 발심하여 생사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참선을 하여 참나를 깨닫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럼 그렇게 해서 깨달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생사를 자재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리해서 무엇이 더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리해도 태어나면 죽어야하고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뭐지요? 천상도 6계이니 가지 않을 거고. 그럼 참나라는 존재가 사라지지도 않는다면 그건 뭐지요? 아무것도 아닌 구경꾼(?)(죄송..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러려면 왜 깨닫나요? 생사윤회를 해결해도 구경꾼이 되거나 다시 태어나 죽을 거라면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설사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면서 깨달음을 얻지 않은 이상은 다시 수행해서 깨달아야 하지 않나요? 제가 불교에 대해서 무지해서인지? 아님 목적와 이익을 따지는 속인이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럼 좋은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제가 질문하는 것은 시비가 아니라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고 전 불교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서 물어 보는 것입니다)
▶생사 해탈법은 생사에 초연함이니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사가는 것 같이 몸을 자재하게 바꿈이로다.
그리고 구경각에 이르러서 적적삼매를 수용하면 사바세계 3000년이 찰라지간에 지나갑니다.
이러한 법은 바로 믿고 바른 진리의 눈이 열려야사 이 말을 십분 믿게 됩니다.
⊙ 질문 ⇒ 안녕하십니까? 저는 수원에 사는 40대의 교사입니다. 직접 찾아뵙고 여쭈어 보아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을 이렇게 컴퓨터로 올리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래 시는 제 현재의 상황입니다.
벌떡
一切가 들어 나 聖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體와 用이 분리가 되었습니다
理가 확연하고 事를 저절로 압니다
世界는 하나의 꽃이라는 것도 압니다
眞理에 복종하라는 것도 나왔습니다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것도 나왔습니다
바람소리 물소리을 알아듣습니다
內面의 스승이 있습니다
죽은 나무에서 꽃이 핍니다
그러나
이것이 完成은 아닙니다
절대로 끝까지 달려온 것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겨우 한쪽 눈만 뜬 애꾸눈이지요
이것이 나입니다
그런데
주위사람들은
이 정도도 모릅니다
너무나 답답하고
답답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살아갈 수 있는지요?
그러나
그들은 많고
눈뜬 者는 小數입니다
그들이 세상을
이끌어나갑니다
그들은 너무나 깜깜해서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惡魔 阿修羅 餓鬼 짐승
水準까지같이 삽니다
그들은 狀況 論理를
强要하기도 하고
그들의 길로 만
오라고 합니다
나는 압니다
그 길은 死亡으로
이르는 길이지요
解體의 길입니다
반쯤 눈뜬 者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물같이 바람같이 사나요?
눈 딱 감고 살까요?
애꾸 눈 이라도
뜨지 않았으면
차라리 용감하게
저들과
살수 있었을 텐데
빛과 암흑의 境界에서
고개만
두리번거리고 있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홀로 우뚝 서지 못하고
겨우 무릎 만 세우고 있습니다
주저앉을까요?
벌떡 일어날까요? 晟
그다음이 있습니까?
▶그대의 소견을 열거함을 들어보니 진리의 소견이 있는 것 같이 말함이나 대장부의 뜻을 갖추었을진댄 선지식을 참방해서 낱낱이 바른 점검을 받아 가지고 구경의 깨달음을 성취하게끔 바랍니다.
⊙ 질문 ⇒ 1) 화두를 들어 보았는데, 요즘은 의심이 안 생깁니다. 이럴 땐 그래도 계속 들고 있어야 합니까? 지도를 바랍니다. 어떤 스님은 절 수행을 추천하기도 하시던데,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가야할 길인 줄 알면서도 가지 않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참 답답합니다.
3) 잠들기 전에 좌선을 하면 잠을 못 이루는데, 제가 무엇을 잘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20분만 해도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도 들고 그러고 나면 새벽까지 잠이 안 옵니다. 몇 번 시도했지만 고쳐지지 않습니다. 지도를 바랍니다.
▶1) 화두가 의심이 나지 않을 때는 선지식 스님을 방문하여 바른 지도를 받기를 바랍니다.
2) 전생의 업에 얽매인 고(故)로 바른 용단을 내리지 못함이로다.
3) 잠을 꼭 자야 되는 것이 아님이니 건강에 지장이 없다면 밤낮으로 정진을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입니다.
⊙ 질문 ⇒ 진제 조실스님께서 오도하시고 경허-혜월-운봉의 법맥을 이은 향곡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으신 것처럼 조실스님이 인가하시고 전법게를 내리신 전법제자가 현재 있으신지, 아니면 전법제자가 아직 없으신지 궁금합니다.
▶전법제자는 현재까지는 마음에 드는 이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 질문 ⇒ 안녕하세요, 저는 모든 일이 잘 되지 않아 2년 전부터 불교관련 서적을(큰스님들께서 쓰신 책, 경전등) 구입하여 몇 번이고 읽고 있으며 또 매일 하루에 30분정도 관세음보살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관하고 있읍니다.(지금까지 1년 넘게) 그런데 전생의 업보가 두터운지 모든 일이 잘 되지가 않습니다. 지나친 욕심일까요?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세상사 뜻대로 되는 게 아님이니 전생에 지혜를 많이 닦고 복과 덕을 많이 행한 이는 금생에 여러가지 좋은 조건하에 살지만 이러한 조건을 전생에 닦아 행하지 못한 이는 사사건건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문을 듣고 생활 속에 선수행을 꾸준히 닦아 행하며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 질문 ⇒ 스님 안녕하십니까? 인터넷을 통해 일일이 귀한 답을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한국불교는 향곡스님과 성철스님에 이르러 비로소 최고의 진리인 향상구가 제창되었다는 스님의 법문을 읽었습니다. 향곡스님과의 인연은 여러 법문을 통해 잘 알고 있지만 성철스님과는 어떤 인연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일화가 있으면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무
▶생전에 네 번 가량 상면하여 법을 논한바 있고 향곡 선사로부터 성철선사의 살림살이를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이 두 분은 한국의 대표적인 선의 안목을 갖추신 분입니다.
⊙ 질문 ⇒ 화두는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도 존재 했습니까? 그러하다면 경전 어디에 비추어 의심을 걷어야 하나요? 사이버 선원 여러 곳에 화두가 천 년 전 개뼉다구라 하는 말이 있던데 그 이야기는 무언가요? 참으로 궁금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화두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꽃을 들어 보였고 때로는 자리를 나누어 앉으시고 ‘여인출정화’ 법문 이러한 등등이 일등(一等) 화두입니다.
개뼉다구 법문은 스스로 안목이 열려가지고 고인의 뜻을 바로 봐야하는 것입니다.
⊙ 질문 ⇒ 의단 가운데 육경을 따라야 할지 말아야 할지 궁금합니다.
의정이 뚜렷하면 의단이 육경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가 따로 없다"고 하는 법문과는 상치되지는 않는 것인지요. 따르지 않고 어찌 보고 듣는다 하겠습니까?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다는 것은 한 면만 보았지 다른 면은 보지 못한 소리입니다. 이러한 언구에 떨어지지 말고 화두를 또록또록 챙기는 가운데 의심이 쭉 흐르는 물과 같이 끊어지지 않게끔 정진하여 참 의심이 돈발할 것 같으면 모든 내경계 외경계 분별이 다 없어지고 일념 삼매가 지속되나니 이렇게 참구해야 됩니다.
⊙ 질문 ⇒ 안녕하십니까, 스님.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또 생각을 돌이키면 그 나가 사라지고 다른 나가 생겨 거기서 다시 의식분별하는 것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므로 이것들이 다 거짓된 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을 얻지 못해서이겠지만 이것을 어떻게 다스려야 참나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의식을 갖고 화두에 돌려 그곳에 집중되도록 하는 것과 나라는 의식을 끊어 목석과 같은 상태에서 화두만 또렷하도록 하는 것이 어느 방법이 옳은, 혹은 좋은 방법인지요.
화두는 스님 법문테이프에 나오는 목전(目前)에 참나를 찾는 것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화두를 내가 스님 법문 중에서 주시는 화두를 정해서 해도 별 상관없겠는지요.
저의 어리석은 물음을 이해해주시고 좋은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나무불.
▶의식을 갖고 화두를 챙긴다고 하는 것이나 목석과 같은 상태에서 화두만 또렷하도록 하는 것이나 다 분별심이니 오직 화두 한 생각에 일념이 지속되게끔 노력하고 노력해야 됩니다.
화두는 직접 선지식을 참방해서 바른 지도를 받아 참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 질문 ⇒ 삼보에 엎드려 삼보를 올립니다.
공부에 대하여 여쭙고 싶습니다. 직접 찾아뵙고 친견하는 것이 제 바램이지만, 가족을 부양하느라 무례하게 게시판에 여쭙게 되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서하의 강물을 한입에 마신다"는 화두를 참구하던 중 발부리에 채인 돌이 구르는 소리에 문득 마음밖에 한물건도 없다는 성현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어떤 이는 ‘위음왕불 이전에 마셨다!’라고 하는 말씀도 하시지만 이는 바른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1,2,3구가 차례대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떤 경계를 일컬어 1,2,3구라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저 혼자 생각하기로는, 1구는 마음(법)의 실체를 묻는 것 같고, 2구는 한 법도 취하지 않는 경계를, 3구는 법을 들고 놓는 것에 아무런 걸림이 없는 자유인의 경계를 묻는 것이 아닐까 상상해보았지만, 아무래도 어떤 것을 1,2,3구라 하는지 알려주십시오.
여전히 제 스스로의 공부에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장스님이 서하의 강물을 한입에 마시라고 한 그 의중은 무엇인가?로 계속해서 참구해보고 있지만, 그 의중이 "차고 더움은 스스로 아는 것"에 있다는 외에 다른 견처를 찾지 못해 더 이상 의심이 발현되지 않습니다. 정전백수자와 판치생모와 같은 화두에는 많은 견처가 있음도 느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제 공부에 무엇인가가 빠져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도 없습니다.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가 올바로 공부를 해나가고 있는 것인지 부디 견책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고인이 일구 이구 삼구에 대하여 분명히 선을 그어놓은 것이 있습니다.
일구(一句)를 투득할 것 같으면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 됨이요
이구(二句)를 투과할 것 같으면 인천의 스승이 된다고 하였으며
삼구(三句)를 알 것 같으면 자기도 구원하지 못한다고 하였읍니다.
참선 공부를 하다가 소견이 나면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가 점검을 받고 옳다 하면은 만족을 하고 옳지 못하다 하면 즉시 놓아버림으로 인해서 허송세월이 없나니 여가가 있으시면 꼭 선지식을 찾아가 바른 점검을 받기를 부탁합니다
⊙ 질문 ⇒ 제가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 들어가 마음을 가다듬고자 합니다. 어떻게 하면 불계에 몸 담을 수 있는지요?
▶참으로 세상 무상을 느끼고 대도를 깨달아 생사대사를 해결하고 제불의 정안을 갖추어서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고자 할진댄, 곧바로 주저하지 말고 출가를 하십시오.
⊙ 질문 ⇒ 칠, 팔 년 전에 큰스님께서 만법귀일 화두를 간택해 주셨습니다.
지금 지견이 나서 막히니 부디 지견을 깨주시던지 다른 화두를 주십시오.
하나, 하나 하지만 여기 글 쓰는 이 물건 외에는 한물건도 없어라.
하나님도 만법도
내가 꾸는 꿈이라서
원래 없는 물건이라.
무도 하나도 삼신도
내 속의 작은 일이라.
하나가 어디로 돌아가는고?
가을 오려 하니 선선하고
밤잠이 없는 이라, 야참이 그립구나.
진제스님, 부디 깨주십시오, 망상의 그늘이 너무 괴롭습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에 소견이 났다고 운운하니 즉시 선지식을 찾아서 점검을 바로 받고 허송세월을 하지 마십시오.
⊙ 질문 ⇒ 저는 수능시험을 얼마 앞에 둔 수험생입니다. 고3이라고는 하나, 암기위주의 쓸데 없는 공부를 하기 보다는 진리 추구에 더 힘 쏟고 있는 편입니다.
또래보다는 많은 생각을 통해, 미약하게나마 눈을 떠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집착을 버리고, 감각기관의 좋고 싫음을 벗어나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세속을 완전히 저버리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수행의 길을 위해선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심지어 부모나 자식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 지고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던데, 저는 아직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겠습니다.
또한, 수행히 부족한 탓인지 게으름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나 고3이라는 특수한 상황 탓에 마음이 여러 군데로 갈라져 한 곳으로 잘 모이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는지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고3이란 여러 갈래 마음이 복잡한 시기입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아침저녁으로 30분씩 화두를 들고 몰두할 것 같으면 마음의 갈등이 없어지는 동시에 맑은 정신이 돌아옴으로, 학업에 열중하여 공부가 성취되게끔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안녕하세요? 큰스님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저는 전생에 업이 많은지 화두수련을 해도 좀처럼 늘지 않고 망상만 가득합니다. 죽어도 화두수련은 어려워 못 하겠고 그래서 절수련을 하고 있는데, 몸은 힘들어도 정신은 또렷해지는게 저한테 맞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쭙는데 절수련으로도 견성성불 할 수 있는지요? 저에게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스님께서 확신을 주신다면 믿고 밀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절을 하는 가운데 큰 지혜를 증득하게끔 발원을 하면서 절 기도를 하십시오.
서원을 세운 연후에 도를 닦겠다는 마음의 자세가 확립이 되거든 선지식을 찾아가서 화두를 타서 생활 속에 부지런히 참선을 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큰스님 안녕하십니까...
지난 6월에 해운정사에서 큰스님께 수계법회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감명 깊은 법문도 함께 들었었습니다.
부끄러운 질문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아주 게으르게 화두를 들고 있습니다. 참선을 알고 뜨문뜨문 하기 시작한 것은 3년 정도 됐습니다. 야근이 많은 직업이라 마음처럼 참선을 잘 못하고 지냅니다. 돌이켜보니 한 달에 몇 번 정도 참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수시로 숨이 갑갑해져옵니다. 마치 공기가 부족한 느낌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심호흡 한 번씩 하는데... 번거롭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합니다.
참선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 이러는 걸까요???
답답한 마음에 부끄러운 질문 올렸습니다.
합장
▶마음속으로 허덕이는 생각이 지나치니 숨이 답답한데, 이러한 가지가지 생각을 다 쉬는데 있어서는 생활 속에 화두를 챙기고 화두 한 생각이 흘러가게끔 노력하면 가슴 속에 답답함이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 질문 ⇒ 큰스님께 삼배 후 여쭙니다.
다음은 향곡스님의 법거량입니다.
"석간수의 찬 샘물"
어느날 스님께서 대중에게 물었다.
석간수 찬 샘물이 졸졸 흐를 때는 어떠한가?」한 승려가 나와 대답했다.
三三은 九입니다.」스님께서 다시 물었다.
마시는 자는 어떠한고?」
그 승려가 대답했다.
三三은 九입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옳거니, 과연 우리 대중은 안목이 저울대 같구나」
큰스님께 여쭙니다.
전三과후三의 소식의 차이는 있는지요? 또九의경계에서는 누가 거니는지요?
부천에서 합장합니다.
▶이러한 고준한 법문은 시간을 내서 직접 찾아와서 묻고 점검해서 마음 가운데 변통이 있으면 즉시 받아들이고 점검을 잘 받아서 허송세월이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간곡히 말함이라.
⊙ 질문 ⇒ 삼보에 귀의 하옵고, 진제 큰스님께 삼배드리옵고,
큰스님께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이미 깨달음을 증득하신 바가 있는데 큰스님께서 오도하신 그 자리가 부처님이나 역대 도인들이 깨달은 그 자리와 동일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 그 경지에 차차 다달아 가는 수행의 단계에 계신지 궁금합니다. 만약 큰스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셨다면 부처나 다름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깨달음 후에도 열반하는 그 순간까지 계속 선수행을 해야 하는지 큰스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깨달아서 인증 받는 경지는 천불만조사가 동일합니다.
⊙ 질문 ⇒ 선사님의 법문집을 보거나 지면으로 문답을 보기도 하고 불교방송에서 법문을 보기도 하여왔습니다.
서쪽 닭이 우는 소리를 동쪽 소의 눈이 듣는 까닭은?
어허! 서울의 전철이 사람들을 나르느라 바쁘게 움직인다.
누가 사람이 있어 길을 물으면 진제라 하리라.
하늘 땅 갈라진 곳에 무쇠의 뿔이 솟아난다.
▶지면으로 이러한 문답을 전개하는 것은 옳지 못함이니 진가를 알고자 할진데 시간을 내어 방문하여 참방하기를 바랍니다.
⊙ 질문 ⇒ 이렇게 알음알이로 쓰시는 글에 속는 이가 많으니, 알음알이 아닌 것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방하착(放下着)하라
⊙ 질문 ⇒ 날씨가 무더워 콜라 생각이 나서 가게에서 사서 마셨습니다.
이때는 방하착을 어떻게 하나요?
▶답변입니다.
지면으로 이러한 문답을 전개하는 것은 옳지 못함이니 진가를 알고자 할진데 시간을 내어 방문하여 참방하기를 바랍니다.
⊙ 질문 ⇒ 참선 때 사지(四枝)의 자세에 대하여!!!
참선수행의 본바탕에서 선사님의 법맥을 바라보며 정진하고 계시는 불자님들을 이끄시기에 여념이 없으시는 큰스님께 감히 한 말씀을 여쭈어 보고자 이 글월을 올립니다. 지난해에 큰스님을 먼발치에서 뵙고 합장을 올렸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또 부처님의 법이 좋아 불교를 남달리 알고자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는 지체장애 4급으로 한쪽편의 다리를 완전히 굽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왼쪽다리는 가부좌자세로 하지만, 오른쪽다리는 굽힐 수가 없어서 3분의 2정도 펴서 참선방에서 다른 불자들과 같이 수행자세를 취할려고 하면 옆에 있는 불자들이 다리를 펴서 벋지 말라며 저의 장애를 모르고는 꼭 지적을 하여옵니다.
"다리가 굽어지지 않는 사람은 참선에 참여할 수가 없는 지요?"
"다리를 한쪽은 접고 한쪽은 반 이상 펴서도 참선의 자세라고 할 수가 있는지요?"
정말 남들한테 질문하기 어려웠습니다. 큰스님의 하답을 받고 싶습니다.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저한테도 비추기를 기원하면서...
▶1)몸이 불편함은 참선과는 관계가 없나니,
단지 대중 가운데 참여하여 참선을 하고자 할진댄, 대중에게 불편함을 끼쳐서는 안 되니 한쪽 가에 앉아서 불가불 바른 자세가 안 되니 그렇게 참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2)상관이 없습니다. 참선은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일용(日用) 행주좌와에 일념으로 지어 가는 것이니 열심히 정진하도록 하십시오.
⊙ 질문 ⇒ 스님은 절에 입문 한 동기는 어디에 두고 있나여?
그리고 통찰하고 수행법을 익혀 수행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그리고 수행하라고 다그치시는 것보단 아무것도 하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 곧 수행이고 명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인간의 본 모습은 깨달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다만, 생각에 잠겨 꿈속에서 살기 때문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즉, 있는그대로가 깨달은 사람이다라는 말이죠.
다음에 또 궁금한 점 질문 드리겠습니다..
행복 하십시오.
▶출가의 동기는 견성성불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본래의 참 나를 알기 위해서 꾸준히 정진하여 참나를 볼 때 부처님 용심(用心), 부처님 행(行)을 할 수 있거니와 참 나를 모르면 그러한 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 질문 ⇒ 궁금한 게 많은데 정리를 해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꼭 스님께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째, 많은 스님들께서 해탈을 하려는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둘째, 스님을 화장시키면 사리가 나오는데 그 사리는 뭔가요? 보통사람들에게는 나오지 않는데요.
답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생노병사는 고통가운데 항시 있게 되나니 모든 중생의 고통을 뛰어 넘는 것이 해탈법입니다.
이 해탈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가 고행 수도를 하는 것입니다.
2)사리는 청정한 수행의 결정체인데 사리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나니 탐사리가 있고 음사리가 있고 치사리가 있나니 이 3가지는 참사리가 이닙니다. 참사리는 청정하게 수행하면 청정한 수행의 결정체가 모여서 참사리가 됩니다.
⊙ 질문 ⇒ 업이 다 소멸되면 어떻게 되나요?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행복 하게 살게 되나요?
▶업이 다 소멸되면 모든 고통에서 초연하게 됩니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고, 모든 고(苦)를 초월하게 됩니다.
⊙ 질문 ⇒ 조실스님 이 글을 읽고 답변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U.G.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한 글인데요.
첫째, 그대의 문제에 대한 단 하나의 해결책은 죽음뿐이다. 그대가 꿈꾸는 자유는 오직 죽음의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모든 인간은 결국 해탈을 얻게 되어 있다.
해탈은 항상 죽음의 전조인데, 모든 인간이 죽기 때문이다.
둘째, 자살해도 소용없다! 자살 후에 몸이 해체되는 것은 다른 형태를 갖고, 이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서이다. 결국 끝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삶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시체는 배고픈 개미들을 먹여 살리고 좋은 거름이 된다. 다른 생명체를 위한 영양분이 되는 것이다. 그대는 삶을 끝낼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몸은 영원불멸하므로 "과연 불멸성이라는 것이 있습니까?"하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특정한 형태의 몸이 종말을 고하는 것은 다만 다른 형태를 갖고 지속하기 위함이다. 몸은 이것을 안다. 내생에 관한 의문은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다. 그대에게 영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자들, 소위 영적인 지도자하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정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내생에 대한 그대의 기대와 두려움은 곧 그들의 생계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 지금까지 소위 성자라는 사람들, 심리학자들, 정치가들이 무수한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진정으로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만일 타당한 해답이 있었다면 문제도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 자들이 하는 일이란 더 열심히 수행하고 명상하라거나, 물구나무서기를 하라는 등 그대를 다그치는 것뿐이다. 이것이 전부이다. 소위 정신적 스승이나 지도자라는 자들은 모두 가짜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해결책도 가짜다. 그런 자들은 정직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 다만 겉만 번지르한 가짜 상품을 파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만일 그대의 희망과 두려움을 잠시 접어두고 이 자들을 사업가로 본다면 그대는 지금까지 그대가 원했던 상품 중에서 아무 것도 배달해 준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이 전문가들이 파는 가짜 상품들을 계속 사들이고 있다.
▶U.G.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한 것은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니 일고의 가치도 없는 그런 말들입니다. 유가의 대성인 공자도 말씀하시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옳다"고 하였거니, 진리를 모르고 일생을 살아야 값어치 없는 생활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 질문 ⇒ 인간이 죽으면 모두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요? 해탈은 무엇인가요?
제가 알기론 불이 그냥 꺼진다라고 알고 있는데요. 스님은 그런 것들을 어떻게 알았나요?
공부를 해서 깨닫게 된 건가요? 죽음이 그냥 두렵고 무서운데 어떻게 해야 이 두려움이 사라질까요?
▶인간이 죽으면 모두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해탈법은 참선을 하여 자기의 참모습을 찾아야 되는 것이며 자기의 참모습을 찾을 때 모든 생노병사의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 질문 ⇒ 삼보에 귀의 하옵고, 진제 큰스님께 삼배하옵고,
한국의 선맥에 대한 궁금점이 있습니다. 근래에 와서 보면 경허 대선사부터 면면히 그 맥이 내려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다음부터는 누가 진정한 전법의 상수제자인지 혼란스럽습니다. 경허-혜월-운봉-향곡-진제, 혹은 경허-만공-성철, 경허-만공-고봉-숭산행원 이외에도 다른 전법계가 얼마든지 자기들 주장대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현재 우리나라에도 세간인들이 알만한 유명한 선사들이 있는데 그 분들도 나름대로 다 깨친 분들인데 어째서 그분들은 전법계에 오르지 않거나 자기식으로 전법계를 만들어서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조사로 인정하는 것일까요? 진제큰스님이 생각하시기에 현존하는 진정한 대선사가 대충 몇 분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아직 그러한 분들을 만나지 못하셨는지요? 개인적으로 숭산행원대선사에 대해서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계십니까?
▶정법의 견성법은 무사자오(無師自悟)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선을 이어 내려오는 당당한 법맥을 계승한 선사들은 다 살림살이가 있습니다.
⊙ 질문 ⇒ 큰스님 안녕하신지요,
저는 항상 부처님 정법에 의지하여 살려고 노력하는 재가불자입니다. 그런데 재가불자로서 살면서 정말로 부처님 정법대로 살아가기가 정말 힘듭니다. 물론 제 불심이 아직 돈독하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럴 때면 차라리 출가하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 그런 생활을 참고 이겨낼 근기가 안된 것 같고 그럴만한 주변여건이 안됩니다. 큰 스님께서는 오로지 화두를 참구하고 살아가라고 하시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화두 참구를 해서 견성하기가 정말로 어렵고 어려운데, 스님네들도 오로지 화두 참구만하고 있어도 깨치기가 어려운데 범부가 세상살이 하랴 화두참구 하랴, 물론 큰스님께서는 생활하면서도 화두 참구를 하라고 말씀하시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또 우리 하근 중생들에게는 화두 참구도 물론 중요하지만 기복적인 요소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 관세음보살님께, 지장보살님께, 모든 제불보살님께 공양하고 염불하고 경전 읽고 절하고... 물론 대오견성과는 거리가 조금은 멀지만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생의 습기나 업이 많이 작용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천도재를 지내고 각종재일에 참석하고 발원하는 것도 우선은 견성보다는 아무 탈 없이 잘 살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장 생계를 돌봐야하고 몸에 병이 있거나 주변여건이 힘들고 앞날이 막막 할 때 이런 하근중생들이 공양하고 염불하고 참회기도하고 독송하고 절하는 것에 대한 큰스님의 견해는 어떠하신지요?
▶참선이 안 될 때는 독경, 염불, 기도를 하시다가 더 한 단계 높은 신심과 용기를 내어 일대사를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어 참선법을 하심이 옳을 것입니다.
⊙ 질문 ⇒ 진제 큰스님께서는 일반 불자들이 육식을 하는 것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까? 육식을 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까, 부분적으로 상황에 따라 가능한 것입니까?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어떻습니까? 어떤 큰스님께서는 육식에 대해서 허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안되면 진정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절집에서는 오신채를 금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확실한 답변을 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육식은 남의 고기를 먹는 것이니 알게 먹건 모르게 먹건 빚이 되나니 그러나 세속 생활을 하면서 않 먹는다는 것은 힘드니 환경에 따라서 빚이 되는 것임을 알고 수용할지니, 부처님께서도 병든 비구와 노비구에게는 개방함이로다.
오신채는 항시 냄새가 나고 악취가 나며 대중생활에 깨끗하지 못하며 또 한편으로는 음심(淫心)을 조장하는 까닭에 금기시합니다.
⊙ 질문 ⇒ 삼보에 귀의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살면서 병에 걸리고 치료해서 낫기도 하고 결국 병으로 죽는데, 병도 그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불교에서는 업이나 영가의 장애로 보기도하고 사대(지,수,화,풍)의 부조화, 육신을 마구 함부로 다루기 때문 등등으로 보기도 합니다. 현대의학에서는 바이러스나 각종세균, 장기의 구조적 이상 등등으로 보고, 전통의학과 대체의학계에서는 氣의 부조화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듯 병의 원인에 대해서도 견해의 차가 있으며 치유하는 방법에도 서로 다릅니다. 그 중에도 불교에서는 현대의학이 해결하지 못한 병들을 고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병을 100% 다 고친다고는 장담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많은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모두다 부처님의 원력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겠지요.
100일기도, 주력, 독송, 절수행을 통해 원이 성취되고 병이 쾌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화두참선으로도 병마를 이길 수 있습니까? 비록 견성은 못했다고 수행하는 도중에 완쾌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모든 병을 부처님께 의지하고 수행하는 것으로 이겨낼 수 있는지 아니면 병원에 가서 고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인지 알고 싶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큰스님께서도 몸이 편찮으시다고 하는데 혹시 병원에 가시고 약도 드시는지요? 그리고 몸을 건강히 유지하기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까?
▶몸뚱이는 병고가 있기 마련이니 원래로 형상이 없는 가운데 형상이 이루어진 까닭으로 필경에는 흩어지나니, 사대육신은 병고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잘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 잘 조화를 유지해 나갈 것 같으면 오장육부가 순환이 잘 되니 이러한 바탕에서 수행을 하면 무병하여 건강이 유지됩니다.
중한 병일 때는 병원을 찾고 그러하지 않을 때는 수행과 기도에 몰두하시면 됩니다.
⊙ 질문 ⇒ 저 개인적으로 큰스님을 존경하고 그 뜻을 받들어 살려고 노력하는 불자입니다. 저는 이제 초발심을 내며 열심히 불법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큰스님께서는 오직 화두참선만이 견성대오의 지름길이라고 하시는데요, 초발심자에게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부처님말씀이나 경전을 읽고 염불이나 절도 하면서 나중에 어느 정도 불법이 무엇인지 대강 알고 난 연후에 화두참선을 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화두를 아직 들지 못한 사람들에게 권할 있는 수행방법에는 어떤 게 좋을까요?
▶큰스님의 법문을 자주 듣고 신앙의 뿌리가 내린 연후에 바른 참구법을 지도 받아 바르게 지어 가십시오.
⊙ 질문 ⇒ 업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한 그건 가설 혹은 전설에 불과 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보죠. 다른 사람에 의해 홧병이나 다른 정신질환을 얻은 사람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할 말 다하고 하고 싶은 거 다하는 사람은 업도 없고 하고 싶은 말 못하고 하고 싶은 거 못하는 사람은 업이 굉장히 많이 쌓고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빌라에서 집 위에서 뛰는 얘들 뭣도 모르고 쿵쿵쾅쾅 뛰는 아이들은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피해 주고 화나고 업을 주면서 자기들은 업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업은 살생도 업인데 세균도 우리와 같은 생물이라고 말하던데 세균을 항상 죽이고 살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업이 없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인간이 태어나면 세균을 안 죽이며 살아갈 수도 없는 것이고 그건 자연스러운 것인데 업을 왜 부정적으로 보십니까?
그리고 그것이 큰 죄입니까?
그리고 모든 인연을 끊으려면 죄를 지어야 하는데 제가 모든 걸 버리고 산으로 간다면 우리 부모님 우리 식구들에게 죄를 짓는 것인데....
우리식구들은 저를 미워할 수도 있는 것이고 저 때문에 병이 걸릴 수도 있는 것인데 저 때문에 부모님과 우리식구들에게 업을 준다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너무 업, 업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를 준다면 다른 사람들은 업에 묶여 더 큰 죄를 짓게 되는 줄 압니다.
그리고 제가 봤을 땐 스님도 업을 쌓고 있는 줄 압니다. 깨달은 사람은 업이 없다는 건 말도 안됩니다.
사람은 항상 언제나 변하게 돼있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솔직히 오감으로 느끼게 되기 때문에 조실스님께서 신비한 힘을 보여주신다면 중생들은 조실스님을 더욱더 믿게 될것이며 중생들을 구원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들은 인간을 뛰어넘었다라고 하는데 도대체 뭘 뛰어넘었는지 사실 모르겠습니다.
▶인과(因果)와 죄와 복이 본래 공(空)한 줄을 알면 인과에 초연하나니 죄와 복이 공한 줄을 모르는 중생은 사사건건 보는데 집착하고 듣는데 집착함으로 이것이 업이 됩니다.
⊙ 질문 ⇒ 귀의삼보 하옵고...
삼가 묻습니다. 1년전 인연이 있어 원택스님으로부터 '마삼근'화두를 받고 참구하였으나 도무지 의정이 일어나지 않아 고민하던 중, 우연히 송담스님의 법문을 듣다가 최근에 '시심마'화두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화두에 의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화두를 바꾸어도 되는지요?
또 정안종사로부터 화두를 받지 않고 스스로 의심이 일어나는 화두를 찾아 들어도 되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덧붙여 조실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을 수 있을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엎드려 회답을 기다리겠습니다. 법체 평강하옵시기를... 합장.
▶화두는 처음부터 명안종사로부터 화두를 간택 받아 첫걸음부터 바르게 수행길을 향해야 할 것이며,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받지 않고 책이나 인연을 따라 화두를 지어 가는 것은 옳지 못함이니, 왜냐하면 공부도중에 사견(邪見)이 일어날 것 같으면 점검을 받을 기회를 잃음이니 시간만 허비하게 됩니다.
화두를 받고자 한다면 미리 전화를 하고 직접 참방하시면 받으실 수 있습니다.
⊙ 질문 ⇒ 변산구곡로에
석립청수성이라
무무역무무요
비비역비비라
▶견성구 운운함에 대하여서는 이것을 가지고 진가(眞假)를 내릴 수가 없나니 바른 견성법은 모든 부처님의 살림살이와 모든 도인의 법문을 한 꼬챙이에 다 꿰어야사 견성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 질문 ⇒ 나는 무엇입니까?
기도를 한답시고 법당에 앉아 허공만을 보았습니다.
꿈속에서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했다고 좋아한 나는 무엇입니까?
오로라에 이끌리어 한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는 무엇입니까?
뜬 눈, 감은 눈과의 구별이 가지 않은 나는 무엇입니까?
꿈속에서 가사를 받았다고 좋아한 나는 무었입니까?
지금 나는 바쁘다는 생각만을 하고 앉았습니다.
또 다른 나는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在相非相 卽見如來?
큰 스님께 3배를 올립니다.
제가 가야 할 길을 일러 주십시오. 부끄럽고, 또 부끄럽습니다. 죄송합니다.
▶열거한 나(我)는 다 환상의 나이니 참나가 아닙니다.
활구참선을 해서 정안(正眼)이 열리도록 정진에 몰두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전 평범한 청년이온데, 사람들을 대하다보면 아무것도 못하기가 다반사입니다.
돌덩어리처럼 마음을 먹으려 하다가도 막상 상황이 닥치면 그리 하질 못하고 또, 사람이면 자연스레 드는 생각을 의도적으로 끊는 것은 어딘지 부자연스럽다고 여겨집니다. 자연스런 감정도 업식에 의한 것입니까??
평소에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과 함께 생각하고 나누고 느끼면서도 자유로울 순 없을까요?
▶중생은 견물생심이라,
대자유인이 되고자 할진데 조사의 관문을 일일이 투과하여야사 크게 쉬는 땅을 얻어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하니 일상생활 하는 가운데 화두공부를 하고자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는 가운데 화두가 익어지면 바깥경계에 무심하게 될 것입니다.
⊙ 질문 ⇒ 귀의삼보 하옵고, 스님께 마음으로 삼배드리고 여쭙니다
아래는 대담내용입니다
-성철스님 생전에 학자들과의 돈점논쟁이 진행됐었습니다.
스님께서도 돈오돈수를 주장하고 계시지만 입장이 조금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서옹 : 성철스님은 돈오돈수하고 나면 모든 것이 해결돼 더 할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성철스님을 만나 돈오돈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투과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 점에 대해서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철스님도 깨달은 후의 더 깊이 들어가는 경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성철스님은 말씀이 없으셨다는데 스님은 어찌 말씀하실지 듣고 싶습니다.
어려우시면 대답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오래도록 건강하시기를 바라며 합장일배드립니다.
▶서옹선사의 투과하여야 한다는 것은 일리가 있음이로다.
돈오돈수하여 대오견성을 하면 자수용삼매를 누림이니 모든 불조의 일상생활입니다.
⊙ 질문 ⇒ 우리가 죽어서 다시 태어날 적에 바로 태어나지 못하고 기간이 지나 다시 태어나는데,
그 기간동안 영계에서 지낸다는 설이 있는데요, 영계가 사실로 존재 합니까?
너무나 허무맹랑한 질문을 들렸는지 모르겠네요. 좋은 답변 주시면, 제 인생에 좋은 길잡이로 살아가겠습니다.
▶업식(業識)에 집착을 하면 영혼이 업에 머물게 됩니다.
⊙ 질문 ⇒ 화두가 타파되면 진리를 체득하는가요?
진리는 말 그대로 순수하게 진리를 구하는 의도를 필요로 하는 거 같은데 저는 진리를 찾는 길은 스스로 찾아가야 하는 거라고 보는데. 화두를 잡는 걸 배우거나 염불을 하거나 하는 것은 결국은 자신이 진리를 찾으려는 의욕이 뭔가 조금이라도 부족했기 땜에 그런 거 같은데. 자신이 진리를 찾으려는 열의만 있다면. 원불교의 소태산 대종사처럼 어릴 때부터 집에서 뭔가 골똘히 생각한다던가, 그런 식으로 해서 자연히 입정에 들어 버려 시간과 공간의 분별이 사라지는 경계를 거쳐 진리를 찾는 거 같은데. 정말, 이 시대에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분 한 분만 더 오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혼자서 그렇게 크게 깨달으시는 분에겐 형용할 수 없는 존경심을 느끼게 됩니다. 큰 성인이 한 분 나셔서 진리의 법문을 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불교 용어도 아닌 기독교 용어도 아닌 순수한 사회적 용어로서 우리에게 설법하시면 이해하기도 쉬울 거 같아요. 수행자들은 너무 불교적 용어(선문답이나 기타 불교용어)에 찌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들 진리를 찾으십시오.
▶나고 날 적마다 불법과 위대한 선지식을 만나기를 서원을 세우고 기도 정진에 몰두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스님께서는 자주 ‘향상구’를 말씀하십니다.
향상구의 의미를 알려주십시오. 아울러 향상구의 유례가 있으면 그것도 설명해 주십시오. 합장.
▶향상구는 불교의 최고의 진리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법좌(法座)에 오르시어 좌정(座靜)을 하고 계셨는데 문수보살이 예(禮) 3배를 하고 여쭙기를 ‘법왕법이 이와 같습니다’하니 부처님께서 즉시 법좌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석두선사가 남악회양선사를 친견하러 가서 대뜸 묻기를 ‘모든 성인도 사모하지 않고 자기 영(靈)도 중요시 여기지 아니할 때 어떠합니까?’
‘그대가 대고생(大高生)만 묻고 향하사를 어찌 묻지 아니하는고?’
이러한 등등이 다 향상구에 속하는 법믄입니다.
⊙ 질문 ⇒ 다른 인터넷에서 보니 대한불교정맥전승회라는 단체에서 주장하기를, 대원 문제현이라는 법사가 아래의 오도송으로 어느 큰스님께 견성을 비밀로 인가받고 정법을 이었다고 하는데 과연 바른 법인지 선지식스님께서 이 게송으로 판단해 주실 수 있는지요? 합장()
해는 서산 달은 동산 덩실하게 얹혀 있고
김제의 평야에는 가을빛이 가득하네
대천이란 이름자도 서지를 못하는데
석양의 마을길엔 사람들 오고 가네
日月兩嶺載同模
金提平野滿秋色
不立大千之名字
夕陽道路人去來
바위 위에는 솔바람이 있고
산 아래에는 황조가 날도다
대천도 흔적조차 없는데
달밤에 원숭이가 어지러이 우는구나
岩上在松風
山下飛黃鳥
大千無痕迹
月夜亂猿啼
▶이러한 몇 구절의 싯구를 가지고 견성법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모든 부처님의 심오한 법문과 모든 조사의 심오한 법문을 일일이 투과하여야사 고인(古人)과 더불어 동참함이니 이러한 눈을 갖추어야사 견성입니다.
⊙ 질문 ⇒ 화두는 그 시대의 문화 환경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잣나무가 없는 지역에서 뜰 앞의 잣나무란 화두를 말할 수가 있을까요? 차를 마시지 않는 그런 환경에서 사는 사람에게 '차나 한 잔 마시게'라고 할 수 있을까요?
화두도 그 시대와 지역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따라서 현대에 맞는 새로운 화두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어리석은 생각이 듭니다.
▶법의 정안(正眼)을 갖추면 때와 장소를 관계하지 않고 자재하게 씀이로다.
⊙ 질문 ⇒ 귀의 삼보하옵고, 큰스님께 삼배 후 여쭙나이다.
제가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호흡을 가다듬어 명상을 하다가 명상도 유위법이 아닌가 해서 오직 그릇을 닦는데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다가 전신이 몹시 가벼운 걸 느끼고 문득 자신을 돌아보니 여전히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시간이 흘러가 버린 걸 알았습니다.
흘러간 시간의 길이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상수(想受)가 전혀 없어서 혹시 졸은 것은 아닌가 점검해봐도 그것은 아니고 그러면 의식이 있었나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혹 이러한 경우가 멸진정(滅盡定)이나 공(空)의 경계(境界)에 접한 게 아닌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멸진정은 호흡이 멈춘 상태라고 알고 있는데 저는 그 상태서도 제가 의식은 못했지만 그릇을 잡고 계속 서서 설거지 중이어서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부디 혜안으로 살펴주시기 바라옵나이다.
▶멸진정이나 공의 경계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무기(無記)의 상태가 흐름이니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활구참선을 지어가십시오
⊙ 질문 ⇒ 화두는 정신을 통일하는 데만 필요한 말인지요. 서양 사람들한테도 한국말로 화두를 주는 것입니까?
말이란 서로의 머리(가슴)속에 들어 있는 서로 인식하고 있는 관념입니다. 말이란 것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따라서 말로써 온전한 진리를 전하기 어려우므로 화두란 것을 이용하는 것으로 압니다.
화두 역시 말인 이상, 그 말이 통하는 사회가 따로 있다고 봅니다. 서양 사람에게 한국말로 화두를 줄 수 없듯이 현대인에게 수천 년 전의 문화유산인 말로서 화두를 준다는 것이 옳은 일인지 궁금합니다.
박민수 참선 교육원은 뭐 하는 곳입니까? 대답을 하로 온 것입니까? 아니면 스님의 감정을 받으러 온 것입니까?
▶화두는 만 사람이 일상 생활하는 가운데 진리를 추구하여 진리의 문에 들어가게끔 하는 법구(法具)입니다
⊙ 질문 ⇒ 스님, 글로서 삼배 드리옵고, 문의 드립니다. 부디 답변 주십시오.
'이 뭣고' 화두를 1년 정도 들고 있습니다. 특별히 호흡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그냥 단전에 화두를 올리고 있습니다만. 화두를 들면 단전이 뜨겁고 백회의 머리로 큰 기운과 압력이 느껴집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변에 먼저 감사 드립니다.
▶단전이 뜨거워지고 머리로 큰 기운과 압력이 느껴지는 것은 육단심이 들어감으로 인하여 그러한 작용이 일어남이니 화두는 육단심으로 챙기는 것이 아니라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일여하게 지어 나가는 것이 바른 참구법입니다.
⊙ 질문 ⇒ 제가 우주에 대해 생각하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주가 만들어질 때 바늘끝보다 작은 곳에서부터 에너지가 폭발하여 생성되었다고 하는데요.(빅뱅)
그리고 우주가 소멸할 때는 우주가 원래 있던 모습으로 수축한답니다. 그래서 팽창수축을 반복한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지금 이 글자수도 그리고 이런 글을 쓰는 것도 다 옛날에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그러니까 제 머리카락숫자까지 똑같은 게 아닌가 싶네요.
또 우주가 수축하여 모든 게 사라진 후 다시 팽창하여 만들어지면 또 똑같은 스님 해탈 이런 것들이 똑같이 있는 게 아닌가 싶네요.
그게 불교에서 말하는 수레바퀴가 아닐까요?
▶불교의 수레바퀴는 법륜(法輪)을 말하는 것이니, 우주의 생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는 대우주요, 사람은 소우주라. 대, 소의 기연(機緣)이 동일하여 생과 멸이 있습니다. 단지 시간의 길고 짧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데는 신경쓰지 마시고 참나를 밝히는 활구참선에 정력을 쏟으십시오.
⊙ 질문 ⇒ 원불교 대종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대종사 봉래 정사에 계실 때에 백학명 선사가 내왕하며 간혹 격의의 설로써 성리 이야기하기를 즐기는지라 대종사 하루는 짐짓 동녀 이 청풍에게 몇 말씀을 일러두었더니, 다음날 학명선사가 월명암에서 오는 지라, 대종사 맞으시며 말씀하시기를
"저 방아 찧고 있는 청풍이가 도가 익어 가는 것 같도다."
하시니, 선사가 곧 청풍의 앞으로 가서 큰 소리로
"발을 옮기지 말고 도를 일러 오라."
하니 청풍이가 엄연히 서서 절굿대를 공중에 쳐들고 있는지라, 선사가 말없이 방으로 들어오니, 청풍이 그 뒤를 따라 들어오거늘, 선사 말하되
"저 벽에 걸린 달마를 걸릴 수 있겠느냐?"
청풍이 말하기를
"있습니다."
선사 말하기를
"걸려 보라."
청풍이 일어서서 서너걸음 걸어가니, 선사 무릎을 치며 십삼세 각이라고 허락하는지라, 대종사 그 광경을 보시고 미소하시며 말씀하시기를
"견성하는 것이 말에 있지도 아니하고 없지도 아니하나, 앞으로 그런 방식을 가지고는 견성의 인가를 내리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겠는지요. 스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남의 살림살이에 떨어지지 말고 실답게 참구해서 실답게 깨달아야 쉬는 땅을 얻게 됩니다.
⊙ 질문 ⇒ 전 출가를 생각하고 있는 25세의 청년입니다.
한 달 전쯤 어떤 분의 불교관련 서적을 접한 후로 쉬지 않고 관련 책들을 읽었습니다.
남을 위한 삶과 현재 삶의 무의미를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방법을 몰라 헤매고 있었습니다.
한문에 어둡고 배움이 두텁지 않아 내년 일년을 입시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동국대 불교학과를 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관련 예절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체계적으로 행할 수 있을지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쉬지 않고 계속 공부를 할 것이며, 행(行)하는 이가 되고 싶습니다.
소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가는 철저하게 인생무상을 느껴야 하고 '무상을 뛰어 넘을 길이 없는가'의 길을 찾을 때 출가를 하게 되나니 이러한 신심이 정립될 때까지 잘 배우고 배우기 바랍니다.
⊙ 질문 ⇒ 깨달음에 대한 목마름은 누구나 한결같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부족한 우리 중생들은 인생을 걸어가다 힘겹고 고통스런 시간을 만나거나 삶의 참된 모습을 간절히 알기를 원할 때 어떤 길을 가야할까 고민합니다.
요즘 보면 여러 수행법이라 하여 세간에 알려져 있는 길들이 많이 보이고 많은 이들이 참으로 짧은 기간에 깨달음을 알았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자신을 알고자하고 삶의 참모습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 있다는 자체가 의미 있고 중요하겠으나 수행의 방법 또한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런 단기간에 깨달을 수 있다는 길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런지요.
참으로 궁금합니다.
▶대도를 성취하기란 참으로 어렵고 어려운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먼저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 바른 지도를 받아 꾸준히 닦아 행하여야 되는 것이니, 요즘 세간에서 유행하는 단기간에 깨닫게 한다는 등의 말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진제 큰스님께서도 인가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 당대의 큰스님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돈오돈수의 바른 도리를 향곡큰스님과 함께 밝히신 성철 큰스님의 법맥은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향곡스님과 성철큰스님은 일생도반입니다.
두 분을 쫓아서 한국선종의 향상구를 재창함이니, 성철선사의 살림살이는 향곡선사로부터 인정을 받음이라. 두 분의 안목을 능가하는 이가 없는 그러한 고준한 안목을 갖추신 분들입니다.
법은 어느 가문을 잇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 질문 ⇒ 제목그대로 자꾸 이성을 떠올리게 되는데... 당연히 공부는 안되구요.
비단 성욕 때문만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외롭거나 괴로울 때 이성이 절실해 집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물론 꾹 참고 화두를 지어가야 함을 알고 있지만 말근기의 중생으로서 그러기가 힘듭니다. 무슨 대책이 없을까요??
▶이러한 생각들은 다생의 중생의 습기입니다.
이러한 습기로 인해 오늘날 해탈법을 성취하지 못했음이니, 큰 신심과 발심을 내어서 다생의 무명초를 일도양단하고 대오견성 정진에 몰두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1700공안은 그 옛날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압니다. 왜 우리 한국 사람들이 과거의 중국 선종의 화두에 얽매여야 하는지요?
문화 수준이 생활 풍습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것보다는 현대에 한국에 맞는 새로운 화두, 수행자의 취향에 맞는 화두 그런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화두와 염불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네요. 화두에 의심 일념으로 파고들면 화두가 독파 된다면 염불 일념으로 정신을 통일 한 것과는 무엇이 다른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옛날 집신 장수가 한 선사가 주는 "즉심시불"이란 화두를 무식한 정신에 "짚신 세벌"로 알아듣고 그 말에 정신을 집중하여 마침내 깨치고 나서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화두는 정신 통일을 하는데 의미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화두. 화두가 무엇이며 화두의 역할에 대하여 확실한 대답을 얻지 못하여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입니다.
화두만 들고 있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화두가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화두는 진리의 문에 도달하는 바로 이르는 문이니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이는 바른 참선 바른 정진에 몰두하여야 일념현전이 되어 견성대오를 하나니 염불은 구경의 의심처가 없는 고로 이 진리의 문에 이르기가 어렵습니다.
⊙ 질문 ⇒ 안녕하세요. 저의 집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물어보는 것인데요.
저의 엄마께서 몸이 많이 안 좋아요. 이사까지 할 정도인데. 전에 살던 집에서 많이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전 보다 조금 덜하지만 다시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아요.
병원가면 신경성이라고 약만 먹고 있는데요. 자꾸 이상한 소릴 해요. 누가 옆에서 자꾸 말을 하는데 그게 엄마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하게 되구요. 옛날에는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신들릴 뻔했다고 하는데. 도무지 모르겠어요. 엄마.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집까지 나가고 싶을 때도 있었다고 해요.
머리가 괴롭대요. 자꾸 이상한 말을 한대요. 3년 전부터 그랬는데 저의들 생각이 나셔서 참으셨대요. 여기 있으면 안된다. 남편이랑 헤어져라 집을나가라 등 자꾸 이상한말만 들린대요. 병원가면 자꾸 신경통이라고만 해서 약만 먹고 있는데 너무 괴로워서 저녁엔 잠도 잘 못 잘 정도에요.
너무 심해서 절에 찾아가서 물어봤더니 얼마를 내면 고치게 해준다고 해서 혹시나 했는데 그것도 몇 백 들 정도였구요 거의 사기였어요. 저두 잘 모르겠어요. 평소엔 안 그런거 같아도 속으론 많이 괴로운거
같아요. 오늘도 약을 드시고 누워계시는데. 안색이 안좋아요.또 이런 말을 해요. 자꾸 들린데요. 정말 이상한 일도 많았어요. 말하자면 너무 길지만. 정말 많이 아프신 건가요?
그리고 이젠 좀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고칠 방법은 없나요?
제가 텔레비젼에서 본적이 있어요. 한 스님께서 몸 안에 귀신을 내보내시는거 혹시 그건 아닐까 많이 생각해요. 평소 엄마가 아닌 것 같이 느낄 때가 많거든요. 제가 이상한걸까요? 답변 꼭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세요. 그리고 답변은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 도와주세요. 벌써 지금 그렇게 씨름한 날들이 5년째랍니다. 뭘 어떻게 참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저의들 때문에 참고 계시는 것 같아요. 이상하게 생각하시지 마시고요 정말 도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물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보면 이러한 정신착란이 일어나 헛소리를 하게 되나니 이러한 증세가 계속 지속이 되면 본인도 괴롭고 주위에 보는 이도 안타깝게 됩니다.
이것은 마음의 병인지라 하루 아침에 좋아지는 것이 아니고 가까운 절에 찾아가셔서 법당에서 하루 천배씩 하시면 마음의 안정이 돌아올 것입니다
⊙ 질문 ⇒ 저는 얼마 전 스님의 법문을 듣고 화두를 들고 있는 직장인입니다.
스님 법문에서 화두를 들 때 의심을 지어가야하고 이 의심이 커야 깨달음에 가기가 쉽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화두를 들 때에는 화두를 드는 그 찰나에는 의심이 생겼다가 그 의심은 지속되지 않고 그냥 또렷한, 생각이 없는, 의식상태만 짧은 기간 지속이 됩니다. 그리고 순간순간 망상이 일어나면 다시 화두를 처음부터 끝까지 새겨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대화를 할 때에도 대화를 할 때에는 화두를 놓게 되고 대화가 끝나면 다시 화두를 들게 됩니다. 대화도중에는 도무지 화두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주십시요.
▶화두를 드는 가운데 행주좌와 어묵동정에서 순일이 되는 이러한 수행은 대단한 수행이니 조그마한 흉내를 내어 대번에 되는 것이 아니니 노력하고 노력하는 끝에 순일이 이루어지나니 마음에 우러나는 참구를 지어 가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제가 공부를 이렇게 지어갑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아니면 없습니까?
무
개에게도 불성이 있을텐데 왜 무라고 했지?
불성이 없진 않을텐데 왜없다고 했을까?
모든 것이 무니까 무라고하셨나?
이 무가 무슨 무인가?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무라고?
이무는 어떤 의미인가?
일체가 무니 무라고 하셨나?
있는 것이 없는 것이란 걸 알라는 것인가?
무가 곧 유고 유가 곧 무라는 걸 알라는 건가?
왜 없다고 했을까?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가?
그렇다면 그게 뭐지?
정말 왜 무라고 했단 말이지?
있고 없고를 분별하니까?? 여기서 어떻게 되지??
무라고?
이런 식으로 지어감이 사구선(死句禪) 아닌지 의심입니다.
다른 사람 의견은 필요 없고 선사님이 점검해주십시오
▶이러한 분별로써 화두를 짓지 말고
"어째서 개는 불성이 없다고 하였는고"
이렇게 간절히 드시기 바랍니다.
⊙ 질문 ⇒ 무자 화두를 들 때에,
1. "어째서 개는 불성이 없다고 하였는고"로 조실스님의 말씀처럼만 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2. "있다 없다의 무가 아니고 그냥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어째서 개는 불성이 없다 하였는고"
제목이 분명한 가운데 의심이 뒷받침이 되게 공부를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스님, 저는 큰스님들 말씀이나 부처님 말씀을 들으면
너무나 즐겁고 그렇게 평온할 수 가 없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는 것 보다 좋아요. 온몸은 금방 때를 밀고 나온 듯 가볍고요.
그리고 스스로 마음공부 열심히 오랜 세월 했습니다.
벼랑에서 떨어져도 보았고 진흙 속에 빠져 헤매어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너무 어머니께 감사합니다.
불교 집안에 태어난것이...
그런데요, 스님...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있으면 그렇게 좋던 부처도 중생도 마음공부도 모두 잊어버립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 있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아마도 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인연을 만나면 어찌해야 합니까?
그 사람은 부처니 불법이니 전혀 관심 없는 듯 합니다.
하지만 저는 목숨보다도 좋은 불법 버릴 수 없습니다.
어떤 스님은 인연 따라 살아야 한다는데...
이런 인연은 이를 물고 끊어야합니까?
저는 솔직히 냉정하게 끊고 싶은데요, 스님.
저는 그 사람도 좋지만 부처님 말씀이 더 좋아요.
방황도 했지만 결국은 다시 부처님께 돌아오고 또 떠났다 돌아오고 합니다.
사랑 뿐 아니라 다른 욕망도 그래요.
스님, 바른 길이란 어떤 길입니까
▶남녀 애정은 다생의 습기입니다. 그 애정의 습기로 인해서 과거. 현재까지 윤회고통을 받았나니 부처님법은 윤회고통에서 초연하고 생사해탈법을 성취하는 진리법이니 금생에 이 해탈법을 만난 김에 다생의 욕정에서 뛰어나지 못하면 무한한 후생에 고통을 받게 됨이니 대장부 뜻을 내어 금생에 대도를 성취하게끔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전 아직 청년입니다. 전 한마디로 인간을 만나기가 싫습니다. 모두들 제 무뚝뚝한 외모와 태도만 보고 오해를 하거든요.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아예 절 매도합니다.
그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는 맞장구도 치고 말장난도 하고 왜 있잖습니까,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런 그런 것 말입니다. 근데 전 그게 안 됩니다. 한없이 어색하고, 아는 사람이 말을 걸면 대답은 하지 않고 겁만 나고 그저 도망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들과 이런 제 자신이 답답하다 못해 그들을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전 너무 괴롭습니다. 배부른 소리겠지만 차라리 몸이 불편한 것이라면 나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업 때문인가요?
전 살생을 함부로 한 적도 없고 도둑질을 한 적도 없습니다. 단지 사람을 마주 대하기가 두렵고 그걸 피하고 싶은 것 뿐인데 다른 사람들은 절 정말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은 상담사이트에 올려야 합당할 줄 압니다만, 조실스님께 여쭈어 봅니다.
제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그래도 나름대로 수행은 하고 있습니다. 참선을요. 화두를 들다보면 번잡한 마음이 사라지다가도 그 사람들의 눈빛이라든가, 절 싫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다시 괴로워지고 화두도 잡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 사람과 접촉이 싫고 대화가 싫증이 나면 세상에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니,
산사에 출가를 하여 참나를 밝히는 참선수행에 몰두하면 마음의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진리의 정안을 갖추어서 대장부의 활개를 치게 될 것입니다.
⊙ 질문 ⇒ 제가 지금 존재하는 것이 환생을 해서 있는 것 같은데요.
사는 것이 실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방법이 해탈법 밖엔 없는 것 같은데요. 해탈을 하면 영원히 없어지는 것인데,
그건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영원히 없어진다고 하니 막막합니다.
▶중생은 업보의 소생(所生)이라, 고통이 없을 수 없나니,
부처님의 진리의 법을 잘 닦아서 구경의 안목이 열릴 것 같으면 몸을 천번 만번 받더라 하더라도 항시 깨달은 경계가 밝아서 진리의 낙(樂)을 수용하게 됩니다.
⊙ 질문 ⇒ 지금 제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그 영혼은 처음에 어디서 나온 건가요?
▶자기의 묻는 자의 주인공을 말하는가 본데 주인공은 본래로 시(始)와 종(終)이 없나니, 이러한 분별에 떨어지지 말고 정진에 몰두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큰스님께 여쭙니다.
화두를 들고 의심을 해나가다 보면 이마의 중앙부위에서 강하게 몽기는 느낌이 들며 머리가 아프지는 않으나 산듯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화두를 의심하는데 신경이 쓰이고 방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왜 이러하며, 또한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감사합니다.
▶화두를 항시 눈 앞 2미터 앞 아래에다 두고 가나, 오나, 항시 화두를 또록또록 챙기는 가운데 의심이 철저하게 같이 화두와 흘러가게끔 하고 힘을 쓰거나 분별심을 내지 말고 간절한 화두 의심이 흘러가게끔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현세 불구자로 고생하는 것이 전생에 악업을 많이 지어 그렇다면 왜 지옥에 태어나지 않고 왜 인간으로 태어났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리고 업은 본래 공한 것이라고 하는데 업이 본래는 없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왜 태어날 적에 불공평하게 태어나는지 의문이 생기네요.
▶윤회는 인연을 따라서 만나고 헤어지나니 선악이 있는 분상에서는 인과응보가 있음이니 이러한 것을 초연하고자 할진대는 부처님의 구경각을 성취하도록 정진에 몰두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조실스님께 화두에 관한 질문이 있어 글을 올립니다.
"마음도 부처도 아니요 이뭣고?"라는 화두에 관해 질문을 올립니다.
위의 화두를
(1)'나에게 한물건이 있는데 마음도 부처도 아니요' 이렇게 들면
'나에게 한물건이 있다'와 '마음도 부처도 아니요 이뭣고'가 이중의심이 되어서 화두가 잘 안 잡히고
(2)그냥 '마음도 부처도 아니요 이뭣고?'하면
나에게 있는 한물건이라는 의식을 안하게 되어 의심이 잘 안됩니다.
위의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방법으로 화두를 들어야하며 한 가지를 선택해서 화두를 들었을 때 위의 문제점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니면 다르게 드는 방법이 있는지 조실스님의 답변을 간절하게 기다립니다.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라 하니 이 무엇인고? 이렇게 참구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스님들의 목적은 해탈하는 거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탈하면 어떻게 되나요?
▶해탈을 하면 부처님의 깨달은 경지를 항시 수용하게 됩니다
⊙ 질문 ⇒ 조실스님, 이렇게나마 스님께 얘기드릴 수 있다는 게 기쁜 마음이 듭니다.
저는 지금은 선방결제는 들어가지 못하고 한 사찰에서 법당소임을 보면서 밤에 자기 전에 조실스님의 법문테이프를 들으며 발심하고 있습니다.
제가 조실스님께 드릴 말씀은 예불문에 관한 겁니다.
저는 작년 여름에 하안거 해제한 다음날 해운정사에 방부들이러 갔습니다.
방부 들일 때 선원장 스님이 지장전에 마지 올릴 사람이 필요하다해서 제가 지장전 마지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전에 지장전 마지 올리던 스님이 제게 소임을 넘겨주면서 소승의 아라한은 조실스님의 경계에선 수용할수 없으므로
예불문중 "영산당시 수불부촉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독수성 내지 천이백제대아라한"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저도 이해하고 지장전에서 그렇게 예불드렸습니다.
그렇게 며칠 지장전 마지 올리던 중 제게 사정이 생겨 결재는 하지 못하고 해운정사를 떠나왔습니다.
근래 제게 떠오른 생각은 영산당시 수불부촉 십대제자 십육성....제대아라한께
예를 드려야 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첫째이유는 먼저 십대제자 중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는 조실스님대까지 이어온 전법원류 중 초조와 이대조사에 해당되시며 또한 영산당시 부처님 부촉받은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독수성 제대아라한은 영적으로 진보한 분들이라 생을 바꾸고 바꾸어선 모두 역대전등 제대조사 천하종사 제대선지식 노릇하셨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조실스님이 20여년 넘게 기다리고 계신 지음자와의 만남이 늦어지는 것도 예불도 한 원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다른 한 가지 현실적인 이유는 해운정사에 계속 다니신 분들은 괜찮으나 모르는 일반불자들은 해운정사에서 예불을 경건한 마음으로 드리다가 도중에 당황하게 되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
예불이 한마음으로 이어져야 좋은데 그렇지 못 할 것 같습니다.
조실스님, 이렇게 결제 중에 본분사가 아닌 지엽적인 일에 끄달리고 큰스님이 정하신 일에 좁은 소승이 말씀올린 것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소승이 빨리 망상을 떨쳐버리고 본분사에 전념하도록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종전에 내려오는 절차에 있어서는 선지식과 나한의 차서(순서)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소승의 오백성중을 뺀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아라한은 선지식 대열에 들어가고, 소승의 나한들은 삼보중 승(僧)에 속하니,
"서건동진 급아해동 역대전등 제대조사 천하종사 일체미진수 제대선지식"(西乾은 인도를 말하고 東震은 중국을 말하며 海東은 우리나라를 말함)이란 예불문 속에 다 포함이 됩니다.
⊙ 질문 ⇒ 불법을 묻는 데는 예의를 갖추어야 하지만 지금은 예전과 달리 이런 신속함을 갖춘 매체들이 있지요. 일전에 기록에 의하면 대주스님의 저술을 마조스님인가가 보시고 인가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지면을 이용하여 인가를 결정할 수는 없나요?
▶세월이 흐르다가 보니 무수한 어록의 법문이 유전(遺傳)하여서 도 닦는 이로 하여금 지해(知解)의 알음알이를 많이 내는 그러한 시대인지라, 인가는 자세히 점검을 하는 과정을 거쳐야사 남의 신세를 버리지 않나니, 법을 아끼고 상대를 소중히 하는 뜻에서 직접 만나 자세히 점검을 받는 것이 서로에게 큰 덕이 됨이로다.
⊙ 질문 ⇒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고 다음 글에 대해 조실스님은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영안을 계발하는 수행을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미골끝의 쿤다릴니를 각성하여 육체의식을
초월하고자 합니다. 저의 수행길에 어떠한 잘못이 있는지 지적해 주십시요.
**** 다 음 ****
제3의 눈은 영안(靈眼,Spritual Eye),천안(天眼),혼의 눈 또는 지혜의 눈이라고도 합니다.
화두를 명상의 전부로 인식하고 있는 중국이나 한국의 불교에서는 영안이라는 개념은 찾아 볼 수 없지만 인도의 요가나 티베트의 밀교에서는 명상에서 영안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안이 개발되면 명상 수행 방법 중 어떤 방식보다 성취도가 비약적으로 빠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이마에 있는 점은 백호상이라 하는 희고 가느다란 터턱을 형상화 한 것인데 여기서 끊임없이 광명이 방사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일체 중생 구제와 불국토 실현의 의지가 표출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영안과 백호상은 동일한 것입니다
▶선종의 안목은 법왕(法王)과 정안(正眼)이 근본이 되나니, 정안, 법안을 바로 기점을 두고 수행에 몰두해서 구경의 정안이 열려야사 비로소 견성대오 안목을 갖추나니 인도의 요가나 티벳의 밀교의 영안(靈眼)은 선종의 정안과는 거리가 멀고 멉니다.
⊙ 질문 ⇒ 어젯밤에 엄마가 주무시다 가위 눌리셨다고 소리를 지르셨는데 저도 가끔 그랬습니다.
저의 경험으로 볼 때 마음이 불안하면 그러는 것 같은데요.
스님, 가위는 왜 생기며 자주 생기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리고 꿈에 대한 것인데요...
마음공부 열심히 해도 가끔 너무 못된 꿈을 꾸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 자신이 너무 못된 행동을 합니다. 잠에서 깨어나면 한숨이 나옵니다.
아직도 멀은 나의 마음공부에...
그래도 가끔씩 꿈에서도 마음공부하면 기쁩니다. 공부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요...
이것 또한 망상입니까?
▶화두공부를 꾸준히 잘 지어 몰두할 것 같으면 마음의 불안심리가 해소돼 서서히 없어지고 간절한 화두가 꿈속에도 지어 가나니 이렇게 지속될 것 같으면 불안한 마음 속 갈등이 다 없어져서 종전의 그러한 꿈의 공포심이 없어지나니 열심히 화두를 잡고 정진에 몰두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TV를 보니 자식들이 4명이 있는데
1명이 희귀명에 걸리니 다른 자식3명도 얼마 있다가 희귀병에 걸리게 되는데, 그건 유전이라 하더군요...
그렇다면 그 가족들은 어떤 업과 인연을 맺었길래 이토록 가족모두 희귀병에 시달려야 하는지 참 궁금합니다.
▶전생의 업으로 인해 이렇게 다 가까이 만나게 됩니다.
전생의 업은 성인도 면하기가 어렵다 하니 일상생활 속에서 모든 악업을 짓지 말고 선한 공덕을 많이 닦아야 할 것입니다.
⊙ 질문 ⇒ 마하가섭 존자는 견성한 분이라고 하는데 법화경에 보면 가섭존자도 무량한 세월 후에 성불한다고 합니다.
선종에서 견성성불이라고 하는데 법화경에는 어째서 그렇게 되어있습니까?
귀의삼보 하옵고 합장
▶성불이라 하는 것은 각(覺)이라, 이것은 자기의 성품을 깨달았다는 것이니 각이 곧 불(佛)이요 불이 곧 각이라.
심성을 바로 보면 곧 불이요, 부처가 곧 견성이니 이렇게 알기 바랍니다.
⊙ 질문 ⇒ 내용 삭제됨
▶정신이 맑고 깨끗한 분은 이러한 증상이 없나니,
정신이 혼미한 틈을 타서 잡귀가 침범하는 수가 더러 있으니 이러한 잡귀를 쫓는 방법은 맑은 정신으로 부처님 전에 기도하고 예배하기를 꾸준히 날마다 지속할 것 같으면 정신이 맑아짐으로 인해서 잡귀가 없으지나니, 이렇게 꾸준히 단련 연마를 하여야사 정신도 건강하고 몸도 겅강하게 됩니다.
⊙ 질문 ⇒ 화두를 들고 있긴 하지만 아직 간절함이 많이 부족한 초보참선자입니다.
참선 지도를 받고 있는데...
예전에 참선 지도를 받았던 환속하신 재가 불자님께서 화두 드는 도중에 발심을 위해선 자기를 관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셨는데 저는 그 말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화두 챙기기도 바쁜 햇병아리가 어수선하게 자기를 관하는 것이 과연 정말로 필요한 것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화두참구하는 분들은 화두일념이 지속되게끔 혼신의 정열을 쏟을지어다.
화두일념이 지속되어 화두를 타파하면 진리의 안목이 몰록 열리나니, 그러면 자기의 당처도 스스로 드러나게 됩니다.
⊙ 질문 ⇒ 이 대우주에 태양이 없어서 생명이 살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지요?
혹은 이 대우주에 생명이 살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지요? 그리고 영혼으로 지낼 때도 해탈을 할 수가 있는지요? 마지막으로 미래 과학이 고도로 발전해서 노병사가 사라지게 되면 살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태양이 없다는 것은 공상에 불과하며 대우주에 생명이 살 수 없다는 것도 공상에 불과합니다.
영혼으로 고준한 법문을 들음으로 인해서 해탈이 가능합니다.
생노병사는 자연의 법칙이니, 그러한 허황된 일에 사로잡히지 말기 바랍니다
⊙ 질문 ⇒ 화두를 들 때 전방 2미터 아래에 화두를 두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두는지 궁금합니다.
2미터 전방아래에 마음속으로 화두전체 글자를 선명하게 그려야하는지요? 예를 들면 "만 가지 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아니면 화두중의 의심부분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이나 아니면 화두제목 "萬法歸一一歸何處"을 선명하게 시야전방에 그려야하는지요
▶눈 앞 2미터 앞에 시선을 두고 눈으로 글을 그릴 필요는 없고 생각으로 간절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한 생각이 쭉 흐르는 물과 같이 간절히 흘러가게끔 들고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꼭 화두가 지속되게끔 노력하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조실 큰스님께서 '향엄상수화' 화두로 2년 정진 끝에 깨치신 후 '일면불 월면불' 화두에 막히셔서 다시 5년간 정진 끝에 다시 오도하신 내력과 연관된 질문 두 가지 입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한 번 깨치신 후에 다시 '일면불 월면불'화두를 드실 때는 이미 한 번 깨친 후이기 때문에 ① 5년동안 '오매일여'로 화두의심이 間斷없이 계속되신 것인지
아니면 ② 한 번 견성 후에도 화두 의심에 간단(間斷)이 있은 끝에 다시 견성 하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큰스님의 '백문백답'에 보면
"질문 : 화두 일념에 간단(間斷)이 있게 되면 화두가 해결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조실스님 답변말씀 : 그렇지, 그렇지. 일념(一念)이 간단없이 지속되어야만 깨달음이 온다는 것은 철칙이다. 그런데 지속되는 그 기간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거든. 며칠이거나 몇 달이거나 몇 년이거나,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른데, 내 경우는 그렇게 장기적으로 지속되지는 않았다."
⇒ 위의 문답에서 조실 큰스님의 답변 중 '내 경우는 그렇게 장기적으로 지속되지는 않았다'는 말씀에 대한 질문입니다.
'장기간 지속되지 않았다'는 말씀은 ① 화두가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된 후에 長期間(몇 달, 몇 년등)이 걸릴 필요 없이 短期間(몇 시간, 며칠 등의 기간내)에 견성하셨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② 화두 의심에 자꾸 간단(間斷)이 있었다는 의미인지요? 그리고 ③ 첫 번째 견성하실 때의 경계인지요, 아니면 두 번 째 견성하실 때의 경계인지요?
▶진의가 발동이 걸리면 시간에 관계없이 참의심이 지속되나니, 참의심이 돈발하면 보고 듣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지속이 되다가 홀연히 일기일경(一機一境)상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 질문 ⇒ 다름이 아니라 제가 5분 이상을 앉아 있지 못해요. 그리고 앉아 있으면 잡생각이 나고 해서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집중력을 기를 수 있는 방법 좀 가르쳐 주세요.
▶집중력의 방법은 내가 견성대오를 하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서서 마음에 우러나는 화두를 챙기면 5분이 아니라 50분도 찰라에 지나가나니 이렇게 마음에 우러나는 화두를 챙기면 모든 생각의 기멸심이 없어지고 화두가 성성한 가운데 참의심이 흘러가나니 이렇게 화두를 들기 바랍니다.
⊙ 질문 ⇒ 현생에서 지은 악업은 현생에서 받을 수도 있습니까?
생노병사라는 고통은 악업에 의한 것입니까?
▶현생에서 지은 죄는 금생에 받는 수도 있고 다음 생에 받기도 하나니, 생노병사의 근본업은 전생의 업을 쫓아 이루어지나니 이 해탈법을 성취하면 적적열반낙을 수용하게 됩니다.
해탈과 불성이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정(情:감각)이 있는 것은 다 존재합니다.
⊙ 질문 ⇒ 큰스님 법문보기 (제목: 참선이란 무엇입니까?)에 보니 아래 달라이라마가 소승보살상~이라는 대목이 나와서...............
티벳,중국, 일본, 한국은 대승불교로 아는데 왜 소승보살이라고 하신지 알고 싶습니다.
▶대승 가운데도 소승이 있고 대승가운데도 최상승이 있나니, 최상승은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추구하는 법이요 대승 가운데 소승은 보살이타행을 추구하는 것이니 이러한 차등이 있습니다.
동양 3국은 대승이라 하지만 소승에 국한해서 수행교리를 연구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 질문 ⇒ 안녕하세요.
화두가 저에게도 있긴합니다만 전혀 의심이 일지않는데, 그걸 억지로 생각으로 잡아야 할지.
이게 진정한 공부인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멍하게 있으니 심심하니까 (매번 자신을 관찰하는게 저는 일상화 되어있습니다만).........이런 저런 망상을 하게됩니다.
이게 옳지않겠지만 생각을 안하고 있으니 그냥 멍~~해요. 그래서 일부러 이 생각도 해봤다가 저생각도 해봤다가 제가 궁금한것은..........
화두에 의심이 없어도 생각으로 만들어 잡고 계속 있어야합니까?
혹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맨땅에 해딩하는 격이 아닌지요? 의심이 일지 않아도 문구만으로라도 계속 들고 있어야하는지 사실 정말 의심스럽고 알고 싶으면 자연적으로 의심과 하나가 되는 사람도 있던데.
생각으로 억지로 의심을 만들고 잡고 있으려니 뭔가 자신에게 못마땅합니다.
▶화두참구하는 것은 견성대오를 목표로 두고 정진하는 것이니 이러한 목표가 뚜렷하지 못한 자는 혼침망상, 집착등 온갖 분별에 시간을 다 소모함이로다.
이러한 자세는 수행을 한다고 할 수 없음이니 간절한 화두의심이 지속되게끔 마음에 우러나는 화두를
지어 가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먼저 이렇게 인터넷으로 글을 올리게 된 점 너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다름이 아니옵고 제가 여승이 되고 싶어 이렇게 여쭙니다.
스님...부디 저를 스님께서 받아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가까운 시일 내에 찾아뵙겠습니다. 저는 꼭 여승이 되고 싶습니다.
이렇다 저렇다 할 사정은 만나뵙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를 부디 스님께서 거두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조만간 찾아가겠습니다.
같은 사람입니다. 스님께서 받아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눈에 띄지 않은 다른 곳도 좋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않은 곳이면 더욱 좋습니다.
소녀의 간절 소망이오니 부디 여승이 되는 길을 알려주십시오.
아는 것 하나 없는 철없는 소녀지만 부처님 한분만을 바라보며 평생을 모실 수 있습니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발심하여 출가할 뜻이 분명하거든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안녕하세요, 대구 사는 사람입니다. 94년도에 대구시내 공원에서 도인을 봤는데요. 그 분이 김일성 사망일자를 노트에 연필로 94년 7월 8일 새벽 2시 사망이라고 적은 것을 보여줬습니다. 4년전에 적은 거라면서요. 이 분은 견성한 분입니까? 궁금합니다. 큰스님 이분은 사주팔자공부를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나고 죽는 이치를 정확히 아시는 것 같습니다. 사망일시를 정확히 아는 경지는 견성의 경지입니까? 사견입니다만 혹시 견성이 아니라면 견성의 경지에 얼만큼 가까이에 간 경지입니까? 감사합니다. 합장..
안녕하세요. 위에 있는 것과 같은 사람입니다. 첨가할 것이 있어서 이렇게 적습니다. 이분은 사람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능력도 가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일도 알아 맞췄습니다. 이분께 제가 물어봤읍니다. 꿈속에서도 공부가 됩니까? 되지.. 아주깊은 잠속에서도 공부가 됩니까? 내가 모르는 부분이 그림으로 떠오르지.. 하셨읍니다. 이분의 공부의 경계는 어떠한것입니까? 불교에서의 깨달음 견성과는 어떠합니까?.. 감사합니다.
▶사주를 보고 식파할 수 있고 또 수행을 하다보면 식(識)이 맑아서 아는 법도 있나니, 이러한 등등은 견성법과는 거리가 멉니다.
불가의 견성법에 있어서는 알고 모름에 국한됨이 아닙니다.
진리의 종안이 열려야사 바른 수행이요 진리의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 질문 ⇒ 가만히 화두를 들다가도 친구생각, 가족걱정이 들면 거기에 마음이 쓰이곤 합니다.
가까운 이를 떠올리며 기뻐하고 때론 걱정하는 것도 망상일 뿐인가요?
모든 생각을 끊고 화두를 들다보면 제가 때론 너무 이기적인 인간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떻게 행동하여야 할까요?
▶세간살이에 얽혀있는 이는 가사를 등한히 할 수 없나니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할애(割愛)를 하고 그 외에는 정진에 몰두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1. 티벳 불교역사에서 '삼예의 종론'이라 말하는 인도의 카말라실라스님과 중국 선종의 마하연스님의 논쟁에서 선종의 마하연스님이 논파를 당함으로서 티벳에서 선종이 배척되고 인도의 중관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데 당시 마하연스님이 선종에 대한 안목이 투철하지 못하여 논쟁에서 지게 된 것이라면 마하연스님이 어떻게 논쟁을 했어야 선종이 논파를 당하지 않았을지 궁금합니다.
<아래는 관련 내용입니다>
..<중략> 중국의 선승 마하연을 중심으로 선불교가 교세를 넓히게 되자 인도 불교를 따르는 쪽과 선불교를 추종하는 교도들 간의 다툼 이 벌어지게 되었다.
티송 데젠 왕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양쪽의 대표자를 초청하여 법의 논쟁을 공식화하기에 이르렀다. 인도쪽에서는 샨타라크시타의 제자인 ‘카말라실라’가, 중국쪽에서는 마하연이 대표로 나왔다.
‘인간은 어떤 일에든 사념(思念)해서는 안 되며 무사(無思)·무념(無念)하면 그대로 부처의 경지 에 들어 윤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무사·무분별·무행이야말로 무상(無相)이기 때문에 돈오하여 십지(十地)의 보살위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육바라밀은 수행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마하연의 ‘불사·불관’의 주장에 스승 샨타라크시타의 중관사상을 전해 받은 카말라실 라는 다음과 같이 대응하였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묘관찰지를 버리는 것이다. 올바른 근본지의 근원은 묘관찰지에 있다. 이것 없이 윤회를 뛰어넘는 반야의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다면 어떻게 일체법이 무자성(無自性)하다는 것을 깨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육바라밀의 수행을 거쳐야만 지혜의 완성과 덕행을 갖출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단순히 생각에 빠지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한다면, 정신을 잃었거나 마음이 산란할 때에도 분별이 없는 경지를 얻을 수 있지 않느냐고 일침을 가했다. 무념·무사에 의해 단번에 성 불하기 때문에 일체의 선행이나 육바라밀 등의 수행이 필요 없다는 마하연의 주장에 대해 방편과 지(智)에 의해 올바른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문·사·수(聞思修)의 삼혜(三慧)에 의하여 육바라밀 혹은 십바라밀을 행하고 십지를 닦아 성불한다고 하였다.
이에 마하연은 결국 패배를 시인하고 중국으로 떠나고 말았다. 이후 왕명에 의해 인도 용수의 중관사상이 널리 수용되었으며 실천에 있어서는 십바라밀과 십지를 수행토록 하였다. ..<중략>
2. 하택신회스님에 대한 질문입니다.
저의 짧은 견문으로 하택스님은 북종선계통의 점교를 맹렬히 비판하고 남종선을 일으켜 육조스님의 돈교법을 세상에 떨친 스님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대표적인 知解宗師로 비판되고 있어서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남종선이라면 돈오돈수이고 지해인이라면 돈오돈수와는 정반대인데 하택스님이 어째서 두 가지를 다 대표하고 있는지요.
3. 선종어록에 대한 질문입니다.
조사스님들의 어록들을 보다 보면 앞부분에서는 그 스님의 고준한 법문이 나오고 뒷부분에서는 스승으로부터 다시 법을 지도받는 듯한 일화가 나오는 것은 어록 편집에 시간 순서가 섞여있어서 그러한 것인지요.
예로 [위앙록]에서 앞부분에서는 위산스님과 앙산스님이 서로 相通하는 법담을 나누는 대목이 계속되다가 37번째 내용에서 위산스님이 앙산스님에게 (..그대의 信位는 환히 나타났다고 인정하겠지만,人位는 숨어 있느니라.) 라고 부족한 점을 지적한 대목이 나옵니다.
▶1)중국 마하연스님과 인도의 카말라실라 두 분의 소견은 한분은 무사(無事), 무념(無念)으로 선의 종지를 삼고 또 한분은 묘관찰지 6바라밀로써 수행의 과정을 삼음이니 두 분의 견처가 온당치 않다고 봅니다.
첫째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증득한 후에 무념, 무사를 수행할 수 있고 묘관찰지도 또한 수용할 수 있나니 두 분의 문답이 모순이 있습니다.
2)역사로 보건데육조스님의 사상을 많이 유포를 시켰으나 육조의 적자(嫡子)는 아닙니다.
3)위산 앙산은 중국 선종의 축을 이룸이라 앙산스님은 동양의 소석가라고 칭할 만큼 훌륭한 종사의 안목을 갖추었습니다. 이러한 한마디를 가지고 고인을 평할 수는 없습니다.
⊙ 질문 ⇒ 차별지를 알아야 한다 하셨는데,
차별지란 무엇인가요? 고인의 어느 구절에 차별지가 운운 되어 있는지요?...
▶백천 가지 깊고 깊은 법문이 다 차별의 법문이니 일일이 뚫어 지나 가야사 견성요사인이 됩니다.
⊙ 질문 ⇒ 방하착이란 무엇인가요?
일상사에 방하착하라는 말을 들었는데 참선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요?
▶모든 집착을 다 놓으라는 뜻입니다
⊙ 질문 ⇒ 전 이제 막 불교를 접한 청년입니다.
불교에 대해서 간결하게 배울 수 있는 경전을 추천 해 주십시오.
아함경? 화엄경? 육조단경??
▶불교성전을 본 연후에 육조단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직접 찾아 뵈야 할텐데 용기가 없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3년 전부터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습니다.
환청이 들리고 다른 사람이 나의 생각을 읽는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듭니다.
인생을 포기하고픈 생각도 드는데 진제스님의 한마디를 듣고 싶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시간이 있으시면 한 번 해운정사 구경도 할 겸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석가불께서 방편을 사용하시어, 중생들로 하여금 방황케 하신 점은 애석한 일인 것 같습니다. 모든 방편을 버리고, 진실만을 볼 때, 실제로 서방 아미타불 극락세계가 있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주문 수행을 해보아도 실제로 경전에 나오는 대로 좋은 일이 생기기보다 안 좋은 점이 훨씬 많은 점을 경험한 후 화두만이 진실이라는 의구심이 생겼기 때문이며, 이제는 주문에 대해서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화두는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깨달은바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다'는 것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미타불 극락세계에 대한 가르침이 원효스님, 관정스님, 일타스님 외증조모 일화 등에서 주장하듯이 실지로 있는지가 너무도 궁금합니다. 대오하면 그 멀리에 있는 극락도 볼 수가 있는지요. 혹시 직접적으로 말씀하시기 어렵다면, 이메일로라도 가르쳐주신다면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자기의 심성을 깨달으면 처처(處處)가 불국토이며 처처가 극락입니다.
⊙ 질문 ⇒ 화두드는 법에 대해 의문이 있는데요,
예를 들어 화두 중에 '부처가 무엇입니까? 삼서근이니라' 그랬는데,
꼭 위의 방법대로 참구해야 합니까? 아니면 그냥 '삼서근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참구해도 됩니까?
▶어째서 삼서근이라 하였는고? 이렇게 화두를 간절히 참구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재가에서 30분에서 1시간정도 짧게 좌선을 익힐 때 무리가 없다면 반가부좌보다 결가부좌 자세로 집중하는 것이 자세면에서 더 효과가 높은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반가부좌나 결가부좌에 차등이 없는 것인지요?
▶다리에 혈액순환을 생각해야 되니 반가부좌를 권하고 있는데 결가부좌를 해도 무리가 없다면 상관없습니다.
⊙ 질문 ⇒ "뜰 앞의 잣나무"라는 화두 방망이를 휘두르며 전진하고 있습니다.
참구 시에,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의 의미를 어떻게 새겨야 합니까?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물었는데, 왜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을까?", 라고만 밀고 나가도 되겠습니까?
아니면, "불법의 극한 핵심을 물었는데, 왜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을까?"라고 뜻을 새겨 참구해야 합니까?
▶어째서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는고? 이렇게 화두를 챙기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일상 생활 중에 화두를 들고 있는 재가불자입니다. 활구참선을 한지는 약 3달 정도가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이마 중앙이 강하게 뭉치는 느낌과 후에 머리에 열을 동반한 두통이 있었고 3주쯤 전에 머리에서 싸르르한 느낌과 함께 두통은 사라졌습니다. 요즈음에는 열과 두통은 없는데 이마위 머리털난 가장자리로부터 정수리 근방까지 머리를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화두를 들어 집중해 나가면 두피가 약간 아프며 손으로 만져주면 해소되었다가 금방 또 그런 현상이 나타나서 지속적으로 화두 들기가 곤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경을 독송하거나 들으면 완화가 된다고 하던데요.
조실스님의 가르침을 알고 싶습니다.
▶화두를 챙기는데 있어서 힘이 들어가니 그러한 현상이 있음이로다. 화두는 생각으로 간절히 챙기는 것이지 힘이 들어가면 안 되나니 마음에 우러나는 화두를 간절히 챙기면 상기는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 질문 ⇒ 깨달으면 어디나 극락이라는 법문은 이미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깨달으신 분이 아니면 누구에게 질문을 할 수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부디 자비를 내리셔서 가르쳐 주십시오.
모든 방편을 버리고, 진실만을 볼 때, 실제로 서방 아미타불 극락세계가 있는 것입니까?
아미타불 극락세계에 대한 가르침이 원효스님, 관정스님, 일타스님 외증조모 일화 등에서 주장하듯이 실지로 있는지가 너무도 궁금합니다.
대오하면 그 멀리에 있는 극락도 볼 수가 있는지요.
깨달으면 어디나 극락이라는 법문은 이미 들었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아미타불 정근을 하고 있는데, 깨달은 마음 뿐 아니라, 서방에 아미타불극락세계가 실제로 있어서, 경전대로 진실로 있는지 궁금합니다.
종교의 본질과 관련하여,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만일 극락을 볼 수 없으시다면, 볼 수 없다라는 법문이라도 듣고 싶습니다. 만일 그것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여 말할 수 없다면 저의 e-mail로 보내주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깨달음은 이루기 어렵고, 재가자들이 아미타불을 염불하는데, 재가자들의 대부분은 아미타불의 극락을 원하는 것 외에 어찌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극락이 없다면 그것은 부처님과 연을 맺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 사기극이 아니겠습니까?
자비를 베푸셔서 진실을 알 수 있도록 해주시면 더 없이 감사하겠습니다.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마음 땅의 고향이 극락세계요, 심성(心性) 이것이 아미타불이라 이렇게 알면 착오가 없을 것입니다
⊙ 질문 ⇒ 옛날에 어디선가 읽은 얘기 입니다.
어떤 스님이 출가를 했는데 그의 부모님이 스님을 잊지 못해서 항상 원망하고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한번은 돌아가시기 전에 그 스님의 절에서 아들을 만나고자 문을 두드렸지만 스님은 전혀 관심두지 않았고 그 부모님은 결국 아들을 만나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스님의 꿈에서 부모님은"네 덕분에 애욕을 끊어 천상에 났다."
하며 감사하더랍니다..
부모에 대한 애정, 애인에 대한 애정, 친구에 대한 애정, 이 모든 것이 그저 집착이고 망상이고 끊어야 하는 것입니까?
▶모든 애정은 윤회 속박의 근본이니 출가자는 그러한 반연을 다 일도양단하고 이 부처님의 진리를 깨닫는데 주력을 할지어다.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일자(一子) 출가에 구족(九族)이 생천(生天)한다고 하셨습니다.
⊙ 질문 ⇒ 첫째, 천상이 있다면 부처님은 왜 인간으로 태어났는지요?
둘째, 우주의 고통을 받아도 계속 살아야 하는가요?
아니면 해탈을 해야 하는가요?
▶부처님은 사바세계에 교주의 인연이 있어서 사바세계에 오셨습니다.
중생은 가지가지의 전생에 지은 업이 있어서 그 고통을 면하기가 대단히 어렵나니 고를 받는 가운데 이 부처님의 진리를 깨닫는 공부를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얼마 전에 증산도라는 종교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증산도란 종교를 조금 알고 나니 불교와 비슷하단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불교를 굳게 믿고 제가 살아가는 하나의 길잡이입니다.
그런데, 증산도를 제가 불교를 믿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은 증산도를 굳게 믿더군요.
저는 불교를 종교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인간에게 아주 중요한 공부를 가르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증산도를 접하고 나서, 옛날의 불교와 지금의 불교는 달라져 있었습니다.
저는 증산도를 믿진 않지만, 증산도의 신자들이 자신의 종교를 굳게 믿는 것을 보고, 그 사람들이 저와 불교를 바라보았을 때, 그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불교는 많은 종교 중에 하나인지 아니면, 불교란 종교는 특별한 것이며, 진실만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꼭 불교를 믿어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종교를 믿어도 되는건지 헷갈리고 갈등이 납니다.
▶견성성불법을 제창하는 종교는 오직 부처님 법에 있나니 다른 종교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말지니 어린아이 울음을 달래는 종교입니다.
⊙ 질문 ⇒ 저는 참선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아직 화두를 든다는 개념조차 잘 모르지만 그냥 곧잘 앉아 있기는 한답니다.
물론 돌을 갈아 부처를 만들 수 없겠지만 앉아 있는 시간을 늘려가는 것만으로도 공부하고 있다고 얘기 한답니다. 그런데 화두 중에 일어나는 망상들은 저절로 없어질 때가지 내버려 둬야하는 건지 물론 화두를 잘 든다는것 자체가 망상이 없는 상태이겠지만요. 모든 번뇌 망상은 화두에 갖다 대는 것만으로도 없어진다고 하더이다만.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공부하는 사람의 저자신의 현재 수준은 어떻게 알수 있는건가요
가르침 주십시오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는 중에 기멸망상이 끊임없이 침범하나니 이것은 모든 초학자의 분상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발심을 하여서 분심과 의정이 돈발하여 화두가 지속이 되면 모든 분별심이 없어지게 됩니다.
현재 상태는 선지식에게 점검을 받으셔야지 본인은 모릅니다.
⊙ 질문 ⇒ 인간(영혼)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인가요? 아니면 고통스런 삶을 벗어나려고 해탈할려고 태어난 것인가요? 굳이 어려운 해탈까지 해서 벗어나려면 처음부터 안 태어나면 되는 것 아닌가요? 도대체 누가 인간(영혼)을 만들었는지요?
▶생사는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 질문 ⇒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이 많아 사람들을 대할 때 너무 불편합니다...
제 마음이 적개심으로 가득차 있어여..
그리고 제 마음이 너무 over되서 눈으로 나오네요....
▶모든 사람을 적개심으로 대하지 말고 부모 형제와 같고 나와 더불어 같다고 인식을 하면 모든 적개심이 저절로 없어지게 됩니다.
⊙ 질문 ⇒ 안녕하셔요...조실스님...
부처님의 그 무한한 자비심과 평온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요?
▶시방세계가 한집이요, 유정무정이 나와 둘이 아님이니 이러한 진리의 눈을 갖출 때 무한한 자비심이 나오게 됩니다.
⊙ 질문 ⇒ 참선수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분보장을 마련하셔야 합니다.
요즘 불교신문들에 보면, 돈 몇백 만원 주면 마스터 자격증을 주는 단체와 조직이 연일 대문짝처럼 나오고도 있습니다. 교학자들은 논문 하나 작성하면 소장학자 소리를 들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선수행하는 사람들은 스님네로 편입해가지 않으면, 결국 미친놈'소리만 들어야 합니다.
공부를 하라고만 해서 될 일이 아닌 듯 싶습니다. 방법을 찾아 주십시오.
▶박사 학사증이 수두룩하다 해서 그것이 실다운 살림살이가 아닙니다.
정진을 해서 부처님의 살림살이 정안을 갖추면 인천의 스승이 됨이니 선지식으로부터 인증을 받는 것이야 말로 천고에 빛나는 증서인 것입니다.
⊙ 질문 ⇒ 요즘에 명상이나 기도를 하였을 적에, 신비체험은 뇌의 활동이 정지되었을 적에 일어나는 뇌의 활동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중생들은 현재만 보고 살아야 합니까? 아니면 미래를 보고 살아야 합니까? 아니면 중도를 지켜야 합니까?
미래를 내다보지 않는다면, 자신은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현재와 미래를 향해서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저의 공부 지어가는 법을 확인 받고 싶습니다. 부디 제가 쓴 글이 아닌 저를 보시고 알려주십시오.
1. 내가 왜 빛이 보이냐고 스님들께 여쭈어 보아도 그냥 신경쓰지 말라고 하시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무엇인가 잘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우연히 스님의 법문 중에 눈으로 화두를 꼬아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원인인 것 같습니다. 화두를 목전에 두고 눈으로 힘을 주어 챙긴 것 같습니다. 마음으로 지어간 것이 아니라요. 이것이 원인이 될 수 있습니까? 마음으로 지으니 나아지는 것 같은데요.
2. 저는 큰스님 뵈올 기회가 되지 못해 그냥 해운정사 홈페이지에서 얻은 부모미생전 화두를 들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계속 밀고 나가도 될까요? 아니면 스님을 직접 뵙고 다시 받아야하나요? 의심은 생기는데 아직은 막힌 의심입니다.
3. 만일 화두를 선지식한테 꼭 받아야한다면 제가 믿음이 가는 스님이어야 합니까? 솔직히 저는 100% 믿음이 가는 스님은 스님뿐인데 집이 부산에서 멀어서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까운 곳에 절은 많지만 100% 믿음이 가는 스님을 아직은 만나지 못했으니 어찌합니까? 이것은 저의 어리석음에서 나온 것인 줄 알지만, 그래도 믿음이 안 생기는 것을 어찌합니까? 어떻게 인연을 맺고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합니까? 저는 이 공부의 중요성을 알지만, 그리고 맛도 보았고요. 하지만 아직은 양다리를 모으지 못하고 엉거주춤 벌리고 있습니다.
4. 저의 어머니는 열심히 절에 다니십니다.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잘 모르지만요. 하지만 저의 어리석은 눈으로는 마음이 아픕니다. 열심히 믿으시지만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 아닌가하고요. 아무리 제가 부처님 법을 말씀드리려 해도 읽혀온 생각을 쉽게 버리려하지 않으시고요. 저는 요즈음 많이 생각합니다. 진정한 효도는 좋은 옷, 좋은 음식보다는 정법으로 인도하는 것이라는 것을요.
이젠 75세의 연세이시니 마지막 인생동안 열심히 불법 배우셔서 다음 생엔 좋은 집안에 좋은 인연 만나 꼭 성불하시길 원하는 마음뿐 입니다. 저의 어머니를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요.
5. 만약 누군가가 저의 옆에서 숨을 거두고 있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을 위해서요. 염불을 해주는 것이 좋은가요? 아니면 무슨 다른 것을... 꼭 알려 주십시요. 다음 생에 좋은 인연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6. 무심도인은 업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슨 업이 있길래 해탈을 못하고 윤회를 합니까?
▶화두는 생각으로 간절히 챙기는 것이라 눈 시야에서 챙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화두 간택은 선지식을 찾아가서 간택하는 것이 바른 길이니 왜냐하면 공부를 하다가 소견이 나서 진가를 가릴 수 있는 선지식이 아니면 그릇 사도에 빠지게 하나니 그런고로 선지식께 화두를 간택하시기 바랍니다.
가까이 있는 분이 임종을 하시면 그 영가들을 위해서 금강경 독송을 하여 주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 질문 ⇒ 성철스님께서는 오매일여 내외명철하여 한눈 뜨면 그게 견성이다 하셨는데, 도인의 아주 깊은 잠에서 내가 모르는 부분이 그림으로 떠오르지 하신 것은 성철스님의 말씀과는 다른 것입니까?
이분께서는 나는 나를 안다. 답을 안다. 그리고 88년도에 답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진제조실스님께서는 성철스님과 4번 가량의 법담에서 큰스님의 깨달은 경계를 성철스님께서 인정하신 한마디는 무엇입니까?
▶상세히 알고자 한다면 방문하여 물으시기를 바랍니다.
⊙ 질문 ⇒ 조실 스님께서 보고 계신 이 세상에 윤회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제가 가장 궁금한 화두이옵니다. 답을 내려주시옵소서..스님..
▶인생은 옴이 있으면 감이 있나니 이것이 다 과거의 인연치사(因緣致事)입니다.
⊙ 질문 ⇒ 죄 안 짓고 수행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직업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직장에서 맡은 일에 성실하게 생활하는 가운데 참나를 찾는 정진에 몰두하면서 생활을 하면 바른 인생 생활이요, 값진 인생 생활이 됩니다.
⊙ 질문 ⇒ 다들 큰스님 큰스님 하시길래 큰스님이시구나 생각하고 있는데...여하튼 참선하는 법은 큰스님께 배워야 한다길래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경주땅에 사는 저는 동국대학교 한문학과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참선을 하고 싶은데..아니 생각을 죽이고 싶은데...그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요...거기에 가면 아무때나 가르쳐 주시는 겁니까...이런 거 배우는 데도 돈을 내야합니까...그렇다면 외상으로 해주십시요..가난해서 돈이 없걸랑요...꼭 답을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불교에 관심이 많고 공부를 하면서도 정작 참선하는 법은 배운 적이 없어서...이렇게 찾아서 글을 올리는 겁니다...참선해서 생각을 죽이면 그게 진정한 공부라기에 이렇게 간청을 드립니다. 자라나는 새싹, 하고자 하는 이 놈에게 부디 힘을 주시고 방법을 일러 주십시요...기다리겠습니다....
▶화두를 드는 것은 돈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식을 참방하여 바른 화두 참구법을 배워서 일상 생활하는 가운데 잘 지어나가면 됩니다.
⊙ 질문 ⇒ ①선관책진에서 광덕화상께서는
"좌선을 하면 호흡이 자연히 원만해진다, 보통시는 일분 간에 16회전후가 되지만 좌선 중엔에는 1분간에 5회내지 1,2회로 줄어든다"
하였는데 본인은 話頭에 集中하면 확확달아오르는 疑心때문에 1분에 호흡이 60여회 되지 싶습니다..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②얼마전 청량법문이 듣고 싶어서 모선지식을 찾아뵈옵고 곽시쌍부의 이유를 물었더니 師曰:"세건 쫌 들라" 했습니다..
무슨 뜻 입니까? 사실 얼마 전부터 붓다의 두발땜에 공부에 적잖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불사에 바쁘시더라도 답변해주시기를 원합니다..
강녕하시옵소서...
▶①정진하는 분상에서는 호흡에 무관하며 화두가 지속이 되게끔 노력하는 것이 근본이 되나니, 호흡의 장단을 다 놓아 버리고 화두에 참의심이 발로되어 일념이 지속되게끔 정진에 몰두하시기 바랍니다.
②곽시쌍부는 분명한 뜻이 있음이니 부처님께서 때로는 꽃을 들어 보이셨고 때로는 자리를 나누어 앉으셨고, 때로는 두 발을 내미셨다.
이 세 가지 공안을 투과하여야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아시어 미래제가 다하도록 수용할 것입니다.
⊙ 질문 ⇒ 귀의 삼보하옵고....큰 스님께 삼배드립니다.
법을 청합니다.
태고(?)선사께서 한 스님께 물었습니다.
"공겁(空劫)이 어디로 부터 나왔느냐?"
"태고로부터 나왔습니다."
태고스님은 인가를 해주셨습니다. 스님께선 어떠하십니까?
見處와 心處에 차이가 무었입니까?
간절함으로 청하니 자비심으로 ....
▶"공겁이 태고로 쫓아 나왔다"
이를 쫓아 인가를 얻었다 함이나 이 물음 전에 무한한 문답이 전개됨으로 인해서 흡족해 하시어 인가를 함이니 이 견성이라는 것은 모든 부처님과 조사의 살림살이를 꿰뚫어야 동등한 살림살이를 갖춤이니 이것이 견성입니다.
⊙ 질문 ⇒ 제가 입학한 대학은 동국대 불교대학입니다..
법명을 가지고 절에 다니지는 않지만 사춘기때부터 접하기 시작한 불교라는 철학에 매력을 느껴서 참선도 알게 되고.. 불교대학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질문이란 다름이 아니라 ......
불교학 강의를 처음 들어봤는데.. 왠지 제가 배우고자 했던것과는 다르다는..뭔가 겉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불손한 말이 되겠지만 말장난같다는....이럴 바에야 비슷한 다른 대학학과에 지원하는 것이 나을 뻔 했다는 것이 섣부른 첫인상이었습니다..
불교대학에서 학문으로서 불교를 공부하는 일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일까요? 아니면 그냥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를 하는 것이 최선일까요??
솔직히 아직 출가를 할 용기는 나지 않습니다만......
제가 어떤 자세로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할지 조언을 해주십시오...
▶불교의 근본진리는 문자에 있지 않나니, 팔만대장경을 다 섭렵하여도 진리의 눈이 열리지 못하면 힘이 되지 못하나니 불법의 깨달음은 심성을 밝히는데 있나니 참나를 알고자 한다면 정진을 하여 참나를 깨닫는데 있습니다.
⊙ 질문 ⇒ 세존이 관에서 두발을 꺼낸 도리를 참구하다 눈이 열리니 점검을 받겠습니다.
바람이 부니 풍경이 웁니다.
▶바람이 부니 풍경이 웁니다가 아니라
어째서 두발을 내민 뜻이 분명히 있으니 확실히 참구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화두참구하는 방법에 생각이 나뉘어 여쭙니다.
저는 스님께 `부모에게 나기전 어떤 것이 참 나던고?'라는 공안을 받았습니다.
좌선시에는 이대로 드는 데 일상사에서 걷거나 일을 할 땐
`-어떤 것이 참 나던고?'라고 드는 것보다 `-어떤 것이 참 나인가?'라고 드는 것이 화두도 잘 잡히는 듯 합니다.
`-어떤 것이 참 나던고?'라고 큰 스님이 주신 글자 그대로 새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행주좌와에 걸림없이 화두를 들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어떤 것이 참 나인가?'라고 들면 스님께서 주신 의미와 어긋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앞섭니다.
제가 문자에 얽매이는듯 싶기도 하고 문자를 쫓아 그 이전 자리를 참구하는 자리니 글자 한 자 토씨하나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도 없다는 심정입니다.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는 스님께 삼배드립니다.
▶똑같은 말입니다. 언어구절에 떨어지지 말고 일념이 지속되도록 정진에 몰두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한 가지 화두에 꼭 한 가지 답이 있는 것입니까?
화두를 드는 이유는 생각이전의 자리를 보고자 함인데 이미 선문답이라는 것은 인간의 말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진정으로 마음에 평안이 깃들면 그때는 인가가 무슨 상관이고, 방 할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백천공안은 진리의 문에 들어가기 위한 길입니다. 공안을 투과하지 못하면 불교의 살림살이를 식파하지 못함이니 진리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진리의 눈을 뜨고자 한다면 화두를 들어 화두공안을 들어 투과하여야 옳은 것입니다.
백천공안의 화두의 낙처가 각각 뜻이 있음이니 이러한 안목을 갖추어야 요사인의 선지식이 됩니다.
⊙ 질문 ⇒ 스님 저는 지금 대학교 1학년남학생입니다. 한 1년 반 정도 전에 책으로 불교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갔다 오면 그냥 않아서 관했습니다. 한 50분 정도 앉아 있으면 흰빛이 온세상에 소복히 내려 깔리고 생각이 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건 3시간도 지속되지 않았고 저도 '이건 아닌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후에 천수경을 외우려 책을 펴놓고 독송을 하는데 문득 신묘장구 대다라니에서 눈앞에 금빛물결이 흐르며 이상한 경계를 찰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 참후 어떤 책을 읽었더니 무자 화두가 좋다길래 지난 여름방학 때 매표소에서 일하면서 화두를 들었었습니다. 그런데 몇일 후 문득 잠에서만 빼고 화두가 떠나지 않고 길가거나 대화를 할 때 어디서 일어난지 알 수 없는 흰 빛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보였습니다. 그리고 일상을 여의지 않은 정에 들어서 용광로에 떨어진 눈송이처럼 화가 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몇일 후 그렇게 화두를 들다 잠자리에 들려고 누운 찰라에 어느 할머니가 나와서 "내 아들 내놔라" 그러면서 화를 내는데 그 할머니가 화를 내는 게 저한테 다 투영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화두만 들고 있었습니다. 또 다음날 에는 또 잘려고 눈을 감은 찰라에 온갖 엄청난 양의 생각과 잠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폭발하듯이 생기는데 제가 제어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다음에 진짜 선지식을 찾아가 화두를 받아 참선을 해야지 생각하고 화두를 놓았습니다. 화두를 놓은 다음날 자고 일어났는데 그날 하루 종일 무슨 정에 들은 것 같이 생각이 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하려는데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스님에게 가서 참선하는 법을 배우고 싶은데 가능한지요. 안녕히 계세요.
▶화두는 선지식으로부터 간택을 해야 바르게 참구를 하고 허송세월이 없나니 시간을 만들어 한번 오도록 하십시오.
⊙ 질문 ⇒ 제가 마조스님의 일화를 읽었는데요, 하루는 마조스님이 제자 한 명과 함께 산책을 나갔다가, 물새들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제자에게 '저것들이 어디로 날아가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는 '그냥 날아가 버렸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마조스님은 그 제자의 코를 잡아 비트시며, '날아가 버렸다고? 그들은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 순간 그 제자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참으로 궁금합니다..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 순간 그 제자는 바로 깨달은 것이 아니고 사찰에 들어와 방에 들어 침식을 잃고 용맹정진한 후 깨달았으며, 깨달은후 마조스님을 찾아가 "어제는 코가 아팠는데 오늘은 코가 아프지 않습니다" 라고 말씀을 올리고 추후 깨달은 것이 확실한지 마조스님의 점검을 받았습니다.
⊙ 질문 ⇒ 나는 누구인가? 라는 화두를 들고 있습니다..
그 때 그저 나는 누구인가.... 요 생각만 붙들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것저것 떠올리며 그 답을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까? 그저 의정을 들고 있는 과정이 중요하다 생각했는데 화두마다 자리가 있고 답이 있다면 그 답을 찾아내어야 하는 것인지요..
무지한 미물이 예도 갖추지 아니하고 삿된 질문을 드려
죄송합니다..
▶ 화두를 간절히 들어서 의심과 제목이 한덩어리가 되어 밤낮으로 지속이 되어야 합니다.
⊙ 질문 ⇒ 안녕하세요. 저는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입니다.
언젠가부터 지금 배우는 이 모든 학문과 사리분별을 일으키는 주위 모든 것들이 허망해서 언젠가 인연이 닿아서 스님이 된다면 모조리 버려야 되고 비워 내야할 것들이란 걸 알고 난 뒤로부터 학교 공부에 아무런 비중을 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생이 책을 안 보게 되면 학생이 아닌지라 학생도 아니고 스님도 아닌 어정쩡한 생활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제 마음이 집중이 되지 못해서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입니다.
큰스님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더 이상 학교에서 배우는 마른지식에는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면 꾸짖어 주시고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될지 길을 열어 주십시오.
▶ 부처님 법은 나고 죽는 고통에서 영구히 벗어나 부처님의 해탈법을 성취해서 열반의 낙을 누리는 것이니 이러한 경지를 누리고자 한다면 대장부 기질을 갖추어야 하나니 이러한 대장부 기질을 갖추지 못하면 출가를 한들 큰 소득이 없나니 그러하니 자기 마음을 반조해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먼저 조실스님께 삼배드리옵니다...
스님, 저는 '삼서근'을 화두로 삼고 정진하고 있습니다. 화두를 든지 꽤 오래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의심이 자꾸 줄어들고만 있습니다. 화두의 핵심은 의심하는 마음이라고 했는데 의심이 들지 않으니 어찌해야하겠습니까?
큰스님의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견성할 의욕이 없는가 봅니다.
의심이 없어진다고 퇴보하면 견성할 분이 없음이니 대신심과 대용맹심을 내서 이 관문을 뚫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저는 전북익산에 살고 있는 황성민이라는 30살의 불자입니다.
불법공부는 백양사 서옹대종사 문하에서 하고 있습니다. 삼가 질문 한 가지를 드리겠습니다.
질문 : 부처님 은혜 높고 높고 높습니다, 또한 아무것도 아닌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은혜 넓고 넓고 넓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연에 의한 것일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연과 짝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삼가 불조의 혜명을 이을 수 있도록 대답해 주십시오.
▶허공이 땅에 떨어진 때를 기다려 그대를 향해 일러주리라.
⊙ 질문 ⇒ 질문으로서는... 요즘, 제3수행법서부터, ‘도’가 없고, 없다는 것도 없어서, 모두가 여여한 것이라는 등, 다들 한목소리입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맞는 거 같다가도 영 틀려지는 소리 같기도 합니다. 이런 류의 책들도 잘도 만들어 냅니다. 같은 종문인 것 같다가도 아닌 것 같기도 하군요. ‘도’가 있다는 것도 허물이거늘 없다는 것은 더 큰 허물이 아닌지요?
▶ 유와 무를 다 놓아 버리십시오.
⊙ 질문 ⇒ 제 글이 다른 분들에게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어느날 불교 책방에 무료로 배부하는 책을 보았는데 어느 스님이 큰스님이시고 지장보살 화신이고 천도나 소원성취등 여러 가지 신기한일들이 적혀있더군요.
책만 봐도 좋아진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또 앞에는 여러 절 스님들이 이 스님은 지장보살의 화신이다라고 싸인도 했다는 페이지도 있구요. 절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몬지 몰라도 저의 수많은 궁금중을 풀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전화하고 큰스님 면담 하러 갔습니다..이상한 꿈도 많이 꾸고 (꿈에 스님들이 보이거나 앞으로 성불할거라는 수기를 받는 꿈을 반복해서 꿈..)꿈이 글구 실제로 꿈에 본 장면이 현실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여러가지 이상한 현상이 경전 읽든 안읽든 나타나서 그런거에 대한 질문도 할겸..갔어요.
사람들 사이에 앉아서 제차례가 되길 기다렸죠.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갔더니..아주 젊은 스님이 앉아있더군요 더구나 낭낭한 목소리로 나이가 많아 봐야 20대 초반..전 속으로 의아했어요 큰스님이라면 나이도 많구 글구 약간에 싸투리도 있을 줄 알았는데 아주 젊고 또렷한 표준어로 목소리도 그리 낭낭한 게 좋았습니다. 단도입적으로 말씀하시더군요. 머리깍고 출가하라고..다 안다면서요. 저에 대해 제가 무엇땜에 왔는지 말 안해도 안다고 하셨읍니다..전 싫다고 했어요. 그 이유는 절에 가면 스님들이 절 싫어하거나 무언가 안 좋아 집니다..또 시도 하면 꼭 실패했거든요..그래도 출가해야한데요 저는..맘이 심정이 몹시 복잡해서 나왔어요. 한 몇 년간은 출가는 생각도 안했는데 그 후 며칠 뒤 결국 출가했지만 말에요. 밑에 스님들이 절 무지 싫어했습니다. 원수 대하듯..그게. 이상하게 들리지몰라도..제가 가길 바라고..너무나도 미워했습니다. 귀신처럼 절 노려보고. 노골적으로 가라고 절 세워두고 공갈도 햇어요...암튼 전 주지스님이 말리셨지만 결국 절을 나왔습니다. 첨엔..용기 있게 집을 나와 출가했지만 지금은 막상 절을 나와 갈려고 하니 갈 때가 없었습니다. 집에 가기 전에 그 절에 갔습니다..저보고 출가하라고 말한 큰스님에게로요. 근데..왠일인지..
갔더니..그 젊은 스님이 아니라 나이도 무지 많구..뚱뚱하시고 주름이 많구..싸투리가 너무 심해서 무슨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 들을 정도로 심한 억양의 노스님이었습니다..분명히 그 절에 있는 지장보살상을 닮은..무지 젊고 어린스님이 저리 나이 먹은 노스님이라니 전 황당했습니다. 저보고 그걸 못견디고 나왔냐고 하셨어요..나머지는 사투리가 심해서..못알아 들을 정도였구요. 너무나도 이상해서 접수받는 보살님보고 다말했어요. 그 젊은 스님은 대리로 상담 하냐고요 어디에도 그 노스님 외에 대신 상담한 애기 스님이 없다네요. 그 어린 스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제가 말한 이절 큰스님은 저 노스님이고 제가 그날 상담한 스님도 그 노스님이라네요 ..전 정말 실제로 아주 젊은 애기스님하고 저보다 어린 스님과 상담했지 저리 나이 많은 노스님은 본 적도 없는데 말이죠 그 보살님 말씀인즉슨..아마 지장보살의 화신을 본 걸 거라고 했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된건지 전 모르겠어요.
전 지금도 바보처럼 제가 뭘 해야할지 모르고 있습니다..허송세월 보낸다고 해야할까요 제가 뭘 해야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전 경전이나..진언같은 걸 수행하면 이상하게 안 좋은게 느껴집니다. 마장이라고 말해야할지..아주 심할때는 극심합니다..근데 예전보다 주의환경은 많이 좋아집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님이나 형제라든지 주의환경이 온순하고 착해집니다..부모님의 나쁜 버릇이나 행동도 사라지고요. 괴롭히던 친척들도 전화안합니다. 자그마한 소원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 졌습니다. 또 돈이 생기기도 합니다. 경전 같은걸 읽으면 여기저기서 돈 가져가라고 오빠나 할머니가 돈 가져가라고 전화 하시고 하다못해 친구도 돈을 줄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경전이나 다라니를 읽으면 몸이 무거워지거나 잠이 많아지고 약간 이상해 집니다. 몹시 몸살이 심하거나 성질이 포악해지기도하고 전엔 무지 심했어요. 조금만 읽어도 정신없이 졸립고 또 읽어야지 생각만해도 부모님이 귀신같이 알고 마구 욕하고..고기 안먹고 경전 읽어야지 하면 희한하게 고기 반찬만 상에 올려진 채 부모님이 억지로 먹으라고 윽박질르면서 제얼굴만 뚜러져라 봅니다. 기도하려고 작심하면 그날부터 그래요.. 무지 심했는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님. 경전 읽어도 인젠 뭐라고 안하시고..아버지가 외도바람을 몇 년간이나 피셨는데 경전 읽는 그 순간부터 안 하세요.
글구 절에서 행자 생활하면서 힘들다가도 천수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힘이 마구 넘쳐난 적도 있었습니다. 무거운걸 들고 다녔는데 인대가 안 늘어났구요..
제가 뭘 해야할지 몰라서 항상 그걸 알려고 선지식도 찾아가보고 싶었고, 또 기도도 많이 해봤지만 제가 스스로 알아야하는지 그거에 대한 해답은 안 가르쳐 주시네요. 근데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경전책만 보면 이상해집니다(법화경 읽는 중).첨엔 괜찮다가 이거 한권 며칠 두고 다 읽어야지 하고 맹세하면 안좋아져요..비참한 생각을 하고 몸이 컨디션이 안좋아지고 글면서도 읽긴 열심히 읽지만요 아주 비참한 생각만 자꾸 들게 되고 신경이 날카로와지고 친한 사람에게 심한 행동이나 말도 합니다. 나이는 있는데 무얼 해야할지 몰라 아직도 방황합니다. 이 방황이 언제 끝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상한걸까요? 나이는 31살 쥐띠인데 새삼 이 나이에 공부해서 대학 들어가도 전 어릴 적에 사람 살아가는 거나 나고 죽는거 병들고 서로 다투는 거에 대해서 부처님처럼 회의가 심해서 공부를 열심히 안했습니다. 주로 명상만 했어요.
지금 와서 공부해서 제가 대학 들어가서 제 진로를 선택하기엔 넘 늦은건지..이 또한 욕심이요 망상인지 모르겠읍니다..
쓸때없이 글올린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출가 수행인은 견성목표가 뚜렷해야 하나니 이 견성법을 성취하려고 하면 생사를 떼어놓고 정진에 몰두해야 됩니다. 이러한 신심이 없는 사람은 출가해야 큰 소득이 없나니 잘 생각해서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전 불교를 처음 알게 되면서 스님이 천수경이나 관음경 광면진언 같은걸 하면 좋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끝까지 하기 무지 힘들었습니다.
하면 무지 졸립고 목이 아프고 몸살로 안 아픈데가 없어어요. 그래서 며칠하기로 하곤 끝까지 하질 못하고 관두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영험담에서 혈사경 얘길 보고 보문품을 혈로 쓰면서 손을 살짝 화상입거나 교통사고 연속으로 2회 입원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연속으로 차가 절 자석붙은 것모냥 마구 쫓아 오고 ..멀쩡히 서있던 차가 뒤로 구르고 멀쩡히 잘만 타던 택시가 앞뒤로 차가 박고 ..다행이 살짝 뒨거고 교통사고도 물리치료 받곤 괜찮아지고 휴유증이 다행이 없어요. 차가 절 쫓아올 때랑 화상입을때 오히려 맘이 편하고 기쁘더군요. 업이 녹느라 그런거란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면서 그순간 오히려 기분이 좋았읍니다.
하지만 뭐든지 끝장을 못봅니다..사경도 상하 노트 다 작성못하고 경전이나 다라니도 하다 관두게 되고요 끝을 못보는 이유가 몰까요 ㅜㅜ
끝을 보고 싶어도 중도 하차합니다..교통사고 나서 병원에 입원했어도 몰래 혈상경했는데 근데도 끝을 못봤습니다..지금도 경전이나 다라니 읽어도 마찬가지고요 인내가 부족하고 끈기가 없나봐요. 단 한번도 끝까지 마스터한적이 없습니다..남들은 잘만 사경하고 잘만 기도 한다는데 전 장애도 많지만 인내도 부족합니다..
▶답변입니다.
세상에 만가지 일이 다 꾸준한 끈기가 필요하며 도를 닦는 마음의 자세도 반석과 같은 부동의 신심이 있어야 하고, 하나를 시작하면 끝까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노력하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하해와 같으신 스님의 정언 삼가 감사 드리옵고............
<378글> 제가 윤회가 사실인지 여쭈었을 때 스님께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즉 "인생에는 오고, 감이 있다" 고 하셨습니다.
<<<<< 진짜로 인생에는 오고, 감이 있는것이옵니까??? >>>>>>
제가 어디서 왔으며, 제가 어디로 가는지요? 너무나 아리송합니다...........
부디 미혹한 중생에게 고견을 내려 주소서......
▶답변입니다.
인생은 인연치사로써 이루어지나니,
옛도인께서 말씀하시기를 전생사를 알고자 한다면 금생에 받는 것을 보라. 내생사를 알고자 한다면 금생에 지은 바를 보라 하셨습니다. 전생과 내생은 행하는 바에 있습니다.
⊙ 질문 ⇒ 부처님 말씀하시길,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라 하셨습니다..
처자도 부모도 재산도 곡식도, 친척이나 모든 욕망 까지도 다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파멸의 문에서 말씀하시길, 자기를 풍족하게 살고 있으면서, 늙어 쇠약한 부모는 돌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파멸의 문이라 하셨습니다..
둘 다 맞는 말이 온데, 처자도 부모도 버리라고 말씀하시고, 또 늙은 부모를 버리지 말라고 하시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영 헷갈립니다..
그리고 파멸의 문에서 말씀하신 늙은 부모를 모시라 하였는데, 그러면 부모를 모시고 열반을 위해 수행을 하란 말씀인지요?
▶답변입니다
부모의 은혜를 입어 성장함이니 부모의 은혜가 지중하니 응당히 노부모를 공양하는 것이 인생의 도리입니다. 노부모가 세상을 뜬 후에는 수도에 열중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 질문 ⇒ 죽음이란 것이 있어, 사람 인생은 허망하고 고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만약, 죽음이란 것이 행복하고 좋은 것이라면, 그야 말로 인생은 즐겁고 살만 한 것일텐데 말이죠..
하지만, 죽음이란 것은 너무 부정적이며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스님께서 死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주시면, 정말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스님께서는 깨달은 성인이시고, 모든 걸 깨쳤으니,
죽음에 대해 잘 알거라 생각이 듭니다..
죽음에 맞이한 사람은 이제 영영 없어지는건지 혹은 윤회를 하여 다른 몸을 받아 태어나는 건지 확실히 깨우쳐 주십시요....
▶답변입니다
이 세상은 상대적 원리로 이루어지나니 남의 상대는 죽음이고 죽음의 상대는 남이며, 生이 곧 死요 死가 곧 生이라. 생사의 두 굴레를 벗어나면 홀연히 열반락을 누리게 됩니다.
⊙ 질문 ⇒ 부처님 말씀하시길,
콧물, 점액, 진물, 지방, 피, 관절액, 담즙, 기름이 있다.
또 그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 나온다.
눈에서는 눈꼽, 귀에서는 귀지, 코에서는 콧물, 입에서는 담즙을 내거나 가래를 뱉는다.
온 몸에서는 땀과 때를 배설한다.
또 그 머리는 빈곳(空洞)이 있고 뇌수로 차 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무명(無名)에 이끌려서 그것을 깨끗한 것으로 안다.
부처님께서 이 몸뚱이는 부정하고 악취를 풍긴다 말씀하시어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하시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것이 더럽다 할 수 없는 것 아닌지요?
모든 것은 매한가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뚱이가 부정하다면, 그건 이치가 맞지 않습니다..
아홉 구멍에서 나오는 부정한 것은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니며, 자연스러운 것인데, 그것을 부정하다면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지요?
▶답변입니다
불법의 눈을 갖추면 추한 것이 추한 것이 아니요 조촐한 것이 조촐한 것이 아닌지라, 이러한 원리를 알면 피안의 낙을 누리게 됩니다.
⊙ 질문 ⇒ NO 382의 질문을 통하여 호흡과 화두의 관계에 대한 답변에 감사드리면서, 나의 공부가 아래와 같사오니, 큰스님께서 자비심으로 잘못을 일러주십시요.
1.간혹 자면서 솟구치는 의심때문에, 잠에서 깨어납니다.
이때는 심장의 박동수가 거의 오토바이 엔진같은데,
이러다 죽지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물론 낮시간에도 이와같습니다.
2.화두를 참구할 때 의심이 솟구치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청담선사의 법문집에 보면, 벌떡거리는 화두는 잘못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해야 벌떡거리지 않습니까?
1년 전에는 하루에 한번정도(30분 남짓)위와 같았으나,
요즘에는 시간당 대략20~30분정도 이렇습니다.
한시간 앉았다가 10분정도 걷고 있습니다만, 그때는
몹시 어지럽고 그렇습니다.
추위와 관계없이 몸떨림 현상도 있습니다.
답변을 희망하오니 자비심으로 일러주십시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항상 강녕하옵소서.
▶답변입니다
화두는 육단으로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의심을 지어감이니 항시 눈 앞 2M 앞 아래에다 화두를 두고 일념이 흐르는 물과 같이 흘러가게끔 하면 헐떡거림이 다 없을 것이니 이렇게 참구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소리를 들으면서 (귓부리가 아닌 마음으로)
"듣는 이것이 뭐꼬"하니까 쉽게 정에 듭니다. 이렇게 참구해도 되겠습니까?
간절히 원하오니 답변 주십시요. 안녕히계십시요.
▶답변입니다.
소리가 들리나 안 들리나 화두를 일여하게 지어가야 되나니 본참화두를 간절히 챙겨 가시기 바랍니다.
⊙ 질문 ⇒ 오늘은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오는 날입니다.
화두를 잘 챙겨서 열심히 공부하는 건 아니지만 화두를 잡고 앉아 있다보면 엄청 화가 납니다. 무엇에 대한 화이냐면 이렇게 앉아 있는데도 정말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인식할 때 정말 저 자신에 대해 분노가 일어난답니다.
어떤 상태인건지 궁금하고 그리고 앉아서 망상을 피우다보면 망상이라는 것은 어차피 뿌리 없는 것이어서 지나가는 현상일 뿐이며 굳이 없애지 않아도 스스로 소멸하는 것인데 망상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습니다. 저의 생각이 바른 공부를 하고 있음인지 그렇지 않음인지 말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 망상분별이 일어나거든 망상분별을 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화두만 간절히 챙기면 저절로 망상은 없어지게 됩니다.
⊙ 질문 ⇒ 1. 어느 법문 중에 경을 수백 번 읽는 것보다 참선의 觀을 제대로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원을 이루기 위해 기도나 독경을 하는 것보다 화두를 觀하듯이 할 수 있다면 그것을 觀하는 것이 나은 것인지요? 큰스님께서 일을 성취하려면 따로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라고 하신 것은 이런 禪법을 제대로 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요?
2. 예를 들어서 일을 열심히 해서 콩심은데 콩이 나듯이 복을 얻는 경우도 있고 기도등을 통해서 자기가 원하는 복을 얻기도 합니다. 기도 등은 실제 그 결과를 마음에서 원할 뿐인데 어떻게 자기가 원하는 果를 얻게 되는지요.
3. 禍福이 마음에 있다면 도인들은 마음을 활용할 줄 아니 복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인연에 구애를 받는 것입니까.
4. 흔히 '불줄이 센 집안''불줄이 있는 사주'등등 흔히 말하는 '불줄'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지요?
▶1)소원이 있어 성취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좋고 지혜를 얻고자 하는 데는 참선정진이 옳습니다.
2)복은 지어야 오고 큰 원의 성취는 과거 선근의 인(因)이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3)무사인의 경계는 중생과 다릅니다.
4)불가의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