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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8.대민(주일낮)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호11:1-11)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는 '사랑' 이라는 단어입니다. 아니, 오늘날 뿐 이 아니라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여전히, '사랑' 은 우리 인간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주제가 됩니다.
그런데 사랑의 정의를 딱히 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정의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사랑을 몇 가지를 설명한다면 사랑은 헌신. 희생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거미는 교미한 후에 수컷이 암컷에게 잡혀 먹힌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암컷이 알을 만드는데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는 죽고 새끼와 어미가 살아가라고 희생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기주의 에는 사랑이란 단어는 없습니다. 이타주의가 되어야 사랑이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은 섬김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섬김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신 것처럼(요 13:4-11) 예수님은 섬기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공생애 사역 기간에 주님은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치심으로써 병자와 불구자들을 섬기셨습니다. 모든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심으로써 병자와 불구자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거리에서, 집에서, 산에서, 들에서, 바닷가에서 현실적으로 베풀어졌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허물을 가리 워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대의 부족한 점을 덮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덮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의 허물을 끄집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한 평생을 바칠 수 있는 일을 발견한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은 항상 남을 부러워하며 사는 사람이다. 존귀한 사람은 남에게 봉사하되 그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은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하는 일이요,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에게나 무슨 일에나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이 아름다운 사랑이 타락하고 변질되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가짜 사랑이 진짜 사랑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 중에 제일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계산적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이며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갚으려고 해도 갚을 길이 없는 사랑입니다.
사람의 사랑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힘들면 떠나지만 하나님은 힘들면 더 가까이 오십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했던가를 아주 절실하게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호세아라는 선지자는 주전 8C기에 이스라엘이 가장 어둡고 부패했던 시대, 영적으로 침체 되었던 시대의 예언자였습니다. 여로보암 이라는 왕이 다스리고 있었던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고 우상에게 분향하며, 우상에게 예배하며 우상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누구보다 우리의 아픔을 이해해 해주시는 분, 나보다 나의 아픔을 더 잘 아시는 그분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 이십니다. 우리의 연약을 아시기에 우리를 버리실 수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11장 4절에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라고 하였습니다. 짐승은 노끈으로 이끕니다. 전쟁 중의 장수는 무력으로 병졸들을 이끕니다. 통치하는 임금은 권력의 힘으로 이끕니다. 이른바 인륜의 도덕은 계율과 감화로 이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죄인들의 영혼을 '사랑의 줄', 곧 '십자가의 줄'로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의 반복되는 배신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고 돌아오기를 참고 기다리는 인내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뜨겁고 무더운 여름날에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열심히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1.어렸을 때부터 사랑하셨습니다.(1-3)
[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랑을 잊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지 못하고 수시로 배반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도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떠나버린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앞부분에서는 미워도 미워할 수 없는 아내로 이스라엘을 표현했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아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인간이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아무리 서로가 마음이 상해서 ‘호적에서 네 이름을 지워버리겠다’고 말해도, 또 자식이 ‘나 이제부터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혈육으로 맺어진 관계는 서로가 합의 하에 관계를 끊는다 하더라도, 법적으로는 관계를 정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관계가 끊어질 수 없습니다. 간혹 아버지 가운데 자식을 버린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언제나 자식이 잘 되는 것입니다. 자식 망하기를 바라는 아버지는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특별히 성경시대에 아버지는 자식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존재였습니다. 양육하는 것도 아버지의 몫이었고, 가르치는 것도 아버지의 몫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말씀합니다. 1절에서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아버지와 아들’로 관계맺음을 했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내 아들” 이라는 표현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구원해내신 이스라엘 백성을 집합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 아들이라는 말은 그 의미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데 국한되지 않습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 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 2:15) 동방박사들이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묻자 헤롯 대왕은 그것을 듣고 그 아이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베들레헴 근처에 사는 어린아이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애굽으로 피신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헤롯 왕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헤롯 대왕이 죽고 그 아들 헤롯 아켈라오가 왕이 되었는데 이 사람도 대단히 잔인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신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헤롯 아켈라오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나사렛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호세아 11장 1절의 말씀을 마태는 예수님께 적용한 것입니다. 내 아들이란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적용되고 예수님께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시대에 사자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받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어렸을 때부터 사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라는 말은, 시기적으로 이스라엘의 초창기부터를 말하는 동시에 또한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이 아직 스스로 아무 능력 없는 아이와 같이 약할 때를 가리킵니다. 즉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의 첫 출발점부터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적인 의지와 능력으로만 이루어졌음을 상기시켜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갓난아이와 같은 이스라엘 편에는 스스로의 구원에 대하여 아무 능력이 있을 수 없는 상태였는데, 오직 하나님 편에서 작정하시고 손을 드셔서 그들을 불러내심으로써 출애굽이라는 큰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어렸을 때”는 “젖먹이 때”를 말하는 것으로「무경험」 혹은「무능력」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2장에 보면 애굽에 살고 있던 히브리인 부부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왕의 영아 살해령이 내려져 있던 때라 이를 피하여 3개월 동안 숨겨 기르다가 결국은 나일강에 버렸습니다. 3개월 된 영아는 자기 힘으로는 자기를 구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의 딸을 그때 나일강에 보내 그 영아를 건져내게 하셨습니다. 그가 곧“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쓰시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부르시고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1절 후반부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강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약했습니다. 종살이하고 있었습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막내 아들로 형제들 중 제일 약한 아들이었습니다. 예수 불러 세운 12제자들이 모두 그 시대에 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어부들이요 죄인 취급을 당한 세리였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은 어렸을 때부터이며 약할 때의 사랑입니다.
2.사랑의 줄로 이끌어 주셨습니다.(4-7)
[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5]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7]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표현을 많이 하셨습니다.
본문에도 하나님께서 가지 백성을 사랑하신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에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줄’이란 짐승을 끄는 줄과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사랑과 은혜로 이끄는 줄’이라는 뜻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란 말은 짐승에게 지웠던 멍에를 느슨하도록 뒤로 들어 올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람이 짐승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서 지웠던 멍에를 느슨하게 풀어 음식 등을 편히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도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지워졌던 멍에를 풀어 가볍게 해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 된 멍에를 지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그 멍에를 벗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영광과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게 해 주셨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에게 무거운 멍에를 지운 후 짐승처럼 부리며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지워진 멍에를 가볍게 해 주셨으며, 그들을 짐승처럼 이끌지 않고 사랑과 은혜의 줄로 인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광야생활을 하는 그들의 앞에 먹을 것을 두셨는데, 만나를 비롯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셨습니다.
탈무드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으면 탯줄을 끊습니다. 탯줄을 끊는 순간 천사가 와서 어머니와 아이 간에 사랑의 줄을 매어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속에는 놀라움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어머니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늘 그리운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서 사랑의 줄이 이어져 있습니다. 어릴 때 보면 시골에서 어떤 아줌마는 아이들은 많고 김은 매야 되는데 시간이 안 되고, 돌보아 줄 사람이 없으니 2~3살 아이가 위험해서, 아이들의 발에 부드러운 천을 맵니다. 그리고 반대쪽은 엄마의 허리에 맵니다. 아이가 기어가다가 줄이 당기면 더 이상 가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아가야!”하고 불러서 아기를 안전한 곳에 놓고 일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냥두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짐승에게 상할 수도 있고, 도랑에 빠질 수도 있고, 함정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늘 줄을 매놓고 일을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다고 합니다. 오늘도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사랑의 줄로 여러분을 이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랑의 줄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에게는 도망가는 습성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풀어놓으니 멀리 가고 풀어놓으니 도망 가버립니다. 이제 사랑의 줄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묶었습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 가시를 두고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너무 큰 은혜를 받아 그냥 두면 교만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로 사랑의 줄을 만들어 묶었습니다. 묶어서 겸손하게 만들었고 은혜의 세계에 머물도록 만들었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바울을 겸손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사람은 다 비슷합니다. 조금 나아졌다하면 교만하고, 조금 튀었다하면 으시대고, 조금 높아졌다하면 오만불순해집니다. 그래서 그러하지 못하도록 묶었습니다. 건강하니 도망갑니다. 하나님 질병을 주셨습니다. 돈 있으니 도망갑니다. 돈을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줄에 묶인 것처럼 불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가까워지게 한 것이라면 그것이 질병이든 고통이든 사랑의 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뒤에서 우리를 밀거나 우리의 목에 개 줄을 매어서 우리를 잡아당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셨을 때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430년이나 애굽에서 살아서 여호와를 아는 신앙이 까마득히 잊혀 져 가고 있는 그 때에, 애굽의 종살이를 숙명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었던 그들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이끄신 하나님의 방법은 까? 그들로 하여금 저항하며 '우리를 보내 달라'고 애원하고, 그리하여 결국은 갈 길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무작정 짐 꾸려서 와락 쏟아져 나오도록 만든 것은 하나님의 강제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기적을 행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믿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줄로 끈 것이 아니라, 홀로 앞서 가셔서 홍해를 여시고 만나를 내리시고 적군들을 쳐부수시고 메추라기를 보내시고 반석을 터뜨려 샘물이 쏟아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가셨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따라왔습니다. 거역했던 사람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었지만, 그러나 새로 태어난 세대들은 하나님이 앞서 가시고 그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가나안 땅까지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전쟁터로 그들을 밀어 보내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땅을 주셨고 싸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명령은 하나님이 하셨지만 칼 들고 뛰어 나간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런 사랑의 줄에 매인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줄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매셨습니다.
이상하게 상상할지 모르지만 신앙의 깊이는 하나님께서 매어 놓은 줄의 길이에 반비례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매어 놓은 줄이 먼 사람들은 아직까지 한 발을 질질 끌면서도 갈 데 안 갈 데 돌아다니면서 하나님한테 얻어맞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샬롬'을 파괴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매이면 매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전에는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있었는데 이제는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이전에는 내가 벌어서 내가 썼는데 이제는 내가 벌어서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 재능, 내 재물, 내 건강, 내 젊음을 사용해야지만 내가 비로소 기쁘고 즐겁고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줄로 점점 더 묶어서 우리로 하여금 더 세상을 본받지 않고 온전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 사랑을 안 사람들은, 이제는 그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전의 방법대로 지금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거듭난 인생은 거듭난 방법으로 살아가야 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삶은 이제 새로운 삶의 형식 속에 담겨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런 사랑의 줄로 이끄셨습니다. 여러분을 바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런 사랑의 줄로 이끄셨다고 직접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은 곧 우리를 사랑의 줄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줄에 붙들린바 되어 남은 생애를 멋지게 쓰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3.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사랑하셨습니다.(8-11)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10]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11]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뜨거운 사랑입니다.
본문 8-11절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서1장6절 하반절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더 이상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말에는 겉으로 드러난 뜻이 있고 그 안에 숨겨진 뜻이 따로 있게 마련입니다. 더 이상 긍휼히 여기지 않겠으면 그냥 놔 두면 됩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강조하고 싶을 때에 즐겨 사용하는 반어법입니다.
젊은 연인들을 보면 종종 “미워 죽겠어!”라는 말을 합니다. 진짜 미워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진짜 상대방이 미워서 죽고 싶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말 뜨겁게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본절 8절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하였습니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 근처에 있던 성읍입니다. 그런데 그 성읍들은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멸망당할 때 함께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신명기 29:2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하나님께 범죄하고 등을 돌리고 우상을 따라간다 하더라도 그런 성읍들을 멸망시킨 것처럼, 그렇게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며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마치 집 나간 자식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과도 같습니다. 내 마음이 돌고, 내 마음이 움직이고, 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너희들의 망하는 것을 보고 있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끈끈합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너는 나에게 등을 돌려도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비록 죄인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사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그 아드마 나 스보임 의 죄 에 비하여 조금도 가벼울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의 죄의 경중에 그대로 비례하는 것이라면 이스라엘 역시 소돔과 고모라 신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만큼은 도무지 그러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는 이 심정 때문이었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라는 말은 이스라엘 쪽으로 돌아서신 하나님의 마음 상태가 도무지 바꾸어질 수 없는 상태로 완전히 굳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 마음이란 것은 바로 '긍휼로 불붙는 듯 한 마음'이었습니다. 그처럼 이스라엘을 향하여 불처럼 타오르는 사랑은 하나님 스스로도 달리 어찌하실 수가 없는 당신의 속성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이런 사랑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처럼 악하고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긍휼의 사랑으로 불붙는 마음이란, 사람 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마음이 하나님 편에서는 가능한 것은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참된 하나님에게만 있는 한없는 사랑의 속성이 여실히 증거 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주 어린아이 같이 미성숙하고 불완전할 때부터 사랑해 주셨습니다.(1-3) 그리고 언제나 인정의 끈과 사랑의 줄로 묶어서 등에 업고 다니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애정 그 자체 때문에 우리를 놓아 버릴수가 없으십니다. 자녀에게 걸음마를 가르치고 넘어졌을 때 팔로 안아 일으켜 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자상한 아버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를 짓고 고통당할 때 우리만 고통당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로 하나님께서 더욱 상처 받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즉 나의 죄가 하나님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고통을 헤아리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숙할 때, 우리의 조건이 불완전할 때부터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루도 쉼 없이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묶어서 등에 업고 다니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하나님 자신이 가진 애정으로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목숨을 바친다 해도 우리를 위해 바치신 희생적인 사랑을 갚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목숨이라도 드리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행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에 대한 우리의 보답입니다.
1.어렸을 때부터 사랑하셨습니다.(1-3)
2.사랑의 줄로 이끌어 주셨습니다.(4-7)
3.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사랑하셨습니다.(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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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 뜨거움 늘 기억하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