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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관계
잠언 18:24,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찬송가 92장(위에 계신 나의 친구)
오늘 본문 말씀은 친구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친구를 얻으면 그 만큼 풍성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사귀면서 얻는 유익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라고 지혜자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교우 관계란 친구의 정을 나누는 관계로서 서로에게 큰 유익을 주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친구에게 긍정적인 영향도 많이 주지만 부정적인 영향도 그만큼 강력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3,34 말씀에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은 서로에게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에 좋은 영향도 그만큼 크지만 나쁜 영향도 그만큼 강력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윗의 큰 아들 암논은 사촌 형제인 요나답을 친구로 삼았습니다. 요나답에 대하여 사무엘하 13:3 말씀에 이르기를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
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암논은 서열상 다윗의 큰 아들이니 황태자가 될 서열이었습니다. 그러니 요나납은 미래 권력의 일순위인 암논을 친하게 지낸 것입니다. 진정한 우정이 아니라 목적을 가진 접근으로 친구가 된 것입니다. 그는 진정한 친구라면 잘못된 마음과 행동을 하면 제지하고 막고 충고를 해주어야 하지만 암논이 못된 생각을 하니까 그 욕망을 이룰 수 있는 자세한 방책을 알려줌으로써 악에 빠지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훗날 동생 압살롬에 의하여 암논이 죽임을 당할 것을 알았을 때에도 아주 냉정하고 이기적이었습니다. 간교한 자를 친구로 삼는 자는 어리석습니다. 결국 그렇게 사악하고 어리석은 친구를 선택하여 사귀고 그를 신뢰한 일로 인하여 뼈아픈 대가를 지불하게 되며 몰락했을 때에는 그 악한 친구는 곁에 더 이상 함께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친구 많다고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술 친구 많이 사귀었다고 자랑할 것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도리어 큰 해가 되고 큰 손해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친구는 가려 사귀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친구란 어떤 사람인가요?
먼저, 서로에게 의리와 신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에게는 진실한 친구가 있었으니, 그는 그를 잡아 죽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초대 왕 사울의 큰 아들 요나단이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보다 나이가 배나 많았을 것이지만, 홍안 소년 다윗이 물 맷돌로 적장 골리앗을 죽일 때 처음 만난 즉시 다윗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고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신분을 뛰어넘고 나이를 뛰어넘고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깊은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사울의 창과 칼날로부터 친구 다윗을 지켜내려고 늘 노심초사하였으며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사무엘 선지자의 예언이 있다는 것을 안 후에는 당연히 다윗이 왕이 되고 자기는 그 밑에 있을 것을 받아들이는 대단한 우정을 보였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관계였는데, 이 두 사람은 생전에만 그렇게 신실했던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죽은 뒤에도 그 신실한 우정은 계속되었습니다.
훗날 그들의 우정은 자식대에게 이어졌으니, 사울 왕과 요나단이 죽고 그 사울 가문이 망하고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에 요나단의 아들 미비보셋을 수소문하여 예루살렘 궁정에 데려와서 자기의 아들들 곧 왕자들과 한 식탁에서 매일 식사를 하면서 돌봐주었던 것입니다. 친구는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 잠언 27:10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신실함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친구입니다.
또 좋은 친구란 친구가 잘못을 범할 때 직언해주는 사람입니다.
다윗에게 또 다른 훌륭한 친구를 들 수 있으니 그는 나단 선지자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 왕이 범죄하였을 때에 다들 쉬쉬하면서 눈치를 살피고 뒷전에서 수군거리기만 하였으나 그는 비록 왕이지만 하나님의 선지자이자 다윗의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였기 때문에 다윗에게 찾아가서 직언하며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그 결과 다윗이 자기의 잘못을 나단 앞에서 인정하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주시는 은혜를 입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단은 다윗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다윗 왕 앞에 언제든지 출입하는 사람이 되었고 다윗을 조언해줄 수 있었습니다. 훗날 그의 아들 사붓도 솔로몬의 벗이 되었으니, 다윗 왕가와는 이렇듯 대를 이어서 깊은 우정을 나누는 복된 가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잠언 27:5,6 말씀에 이르기를
“면책(얼굴을 마주 보고 책망함)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고 하였으며, 잠언 28:23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좋은 친구를 얻을 수 있는가 하면, 바로 자기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책망해주는 친구를 가까이 할 수 있는 아량이 있는 사람입니다. 듣기 싫은 말을 해주는 친구의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좋은 친구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그 길을 막고 책망하지 않고 내버려두거나 그 일에 동참하거나 아첨하는 사람들만 가까이 하면 결국은 좋은 친구는 떠나고 아첨꾼들과 나쁜 친구들만 곁에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좋은 친구는 친구가 고난을 겪을 때에 그 고난을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그의 나이 약 50세, 55세 즈음에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옴으로 아무 준비도 없이 있다가 서둘러 예루살렘을 떠나서 정처 없이 동쪽 요단강쪽으로 도망해야 하는 절체 절명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 때 압살롬의 군대에는 쓸만한 사람들이 많이 가담하였으니, 그들은 의리보다는 이익을 바라고 신흥 세력 압살롬과 합세하여 권력을 노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다윗의 오랜 동지였던 아히도벨이라는 지략가도 있었습니다. 오랜 전쟁터의 동지이자 지략이 뛰어난 모사로서 다윗 왕의 오른팔 노릇을 하던 아히도벨의 배신은 다윗에게 큰 충격이자 큰 위협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의 지략은 심히 날카롭고 적절하여서 전쟁터에서 늘 아히도벨의 방책을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모두가 받아들일 만큼 출중하였습니다. 그런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섰으니 다윗은 큰 일 났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이 맨발로 예루살렘 성문을 나와 가족들과 신하들과 함께 성문 동쪽 감람산 길을 걸어갈 때 그 발걸음이 얼마나 무겁고 얼마나 허둥지둥했겠습니까? 바로 그 때에 한 사람이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덮어 쓰고 다윗을 맞이하였으니 곧 왕의 오랜 친구 아렉 사람 후새였습니다. 후새는 모든 것을 잃고 아들에게 쫓겨가는 친구 다윗 왕을 위로하고자 급하게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런 후새에게 다윗 왕은 부탁하기를, 자기를 따라 피난길을 함께하기보다는 차라리 예루살렘 성에 도로 들어가서 압살롬에게 거짓 항복을 하고 아히도벨의 모략을 깨뜨릴 수 있게 하라고 청합니다. 그 말을 듣고 두 말 없이 후새는 성에 들어온 압살롬의 진영에 들어가서 아히도벨의 전략을 무너뜨렸습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 앞에서 회의를 할 때에 그 날 밤에 다윗을 쫓아가서 당장 죽이는 전략을 내놓았는데, 후새는 화려한 언변으로 압살롬 앞에서 아히도벨의 지략을 지혜롭게 깎아내리면서 다윗이 도망칠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는 책략을 내놓았습니다. 어리석은 압살롬은 후새의 화려한 언변에 아히도벨의 좋은 책략을 버리고 후새의 책략을 채택하였습니다. 결국 후새 덕분에 다윗은 그 날 살아남았고 요단 동편 마하나임에서 재기의 기회를 노려 결국 압살롬 군대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호랑이 굴에 들어갔던 후새는 다윗의 진정한 친구였습니다. 이렇듯 고난과 시련 중에 있는 친구를 위하여 기꺼이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참된 친구입니다.
또 좋은 친구란 친구의 행복과 성공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자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고 공적 생애를 시작하자 자기에게 몰려들던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세례 주는 곳으로 몰려갔을 때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사실을 고했을 때 이렇게 대답해주었습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한복음 3:27~30)
예수님께서 등장하자 자기에게 몰려들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예수님께 몰려갔을 때에 세례 요한은 도리어 기뻐하며 감사하면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친구가 자기보다 더 성공하고 행복을 찾을 때 질투심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크게 기뻐하며 마음을 다하여 축하해주는 사람이 참으로 좋은 친구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좋은 친구들을 곁에 둔 사람은 참으로 큰 성공자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복된 친구를 가진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진실하고 신실하고 서로를 깊이 이해해주고 서로 돕고 지켜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돈으로 셀 수 없는 가장 큰 힘입니다. 선조 때의 재상 유성룡과 이순신도 좋은 친구였는데, 이 두 사람은 사람들의 시샘을 잘 피하면서 조심스럽게 우정을 잘 가꾸어감으로써 임진왜란의 국난을 헤쳐나가는 일에 두 분이 크게 쓰임받았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회, 모든 세상에서도 사람들 간에 아름다운 우정은 소중하고 귀한 것이거늘, 신앙 안에서 우정은 더더욱 귀하고 아름답고 복스럽지 않겠습니까?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동일한 한 주로 모시고, 동일한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함께 주님의 지상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동참하는 주님의 백성들은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친구들입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 우정을 나누는 신자들의 관계를 일컬어 ‘교우관계’라고 말합니다. 한잣말로 ‘가르칠 교’자와 ‘벗 우’ 자를 합쳐서 교우관계라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신앙 안에서 우정을 귀하게 여기고 서로 진실한 친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우리의 신자들의 우정의 근본은 물론 우리 구주 예수님과의 우정입니다. 요한복음 15:12 말씀이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몸으로 이 땅에 계실 때에 지상 교회의 대표들인 사도들과 나눈 대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한복음 15:12~15)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제자들에게 숨김없이 다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여행하고 함께 잠을 자고 함께 주님의 사역을 나누셨습니다.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과 자기를 믿는 자들의 영생과 천국에 대한 비밀도 다 그들에게 숨김없이 일러주셨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다 내어주셨습니다. 그렇듯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으니, 이보다 더 큰 친구의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이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동일한 믿음 안에 있는 성도들끼리는 정말 한 가족보다 더 귀하고 더 깊은 우정을 가진 영원한 친구들로서 서로 사랑해야 마땅한 줄 믿습니다. 진정 뜨거운 믿음을 가진 교우들은 육신의 부모 형제들보다 더 뜨거운 형제 자매요 가장 절친한 영원한 친구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 혹시라도 신앙 생활하다가 친구를 다 잃어버렸다고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이상 아쉬운 마음 버리십시오. 가장 완전하고 가장 여러분을 사랑하고 여러분 자신보다 여러분을 사랑하여 자기 생명까지 내어준 참된 친구가 여러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누가 자기를 위하여 생명까지 내어준 놀라운 사랑을 가진 친구를 소유한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바로 그런 친구를 가진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친구가 없다고 아쉬워하지 말고, 외로워하지 마십시오.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진심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면 동일한 믿음을 가진 친구들이 우리 곁에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축복 속에서 함께 웃어주고 축하해주고 슬픈 일을 겪을 때 함께 울어주고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항상 기도해주는 진실한 믿음의 친구들이 바로 여러분 곁에 많이 있습니다. 이 믿음 안에서의 우정이 가장 복되고 영원한 우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정은 정말 끊어지지 않는 삼겹줄의 우정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우정에 동참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1:8~10 말씀에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을 두고서 하나님께서 친히 이르시기를 “나의 벗 아브라함”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벗이 되시기에 우리가 믿음의 교우 간에 절친한 친구가 될진대,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완전한 친구이신 구주 예수님과 우리의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우정에도 함께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해주시고 굳게 해주시고 도와주시고 끝까지 붙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가장 완전하신 우리의 친구와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고 이 우정을 더욱 힘써 가꿔갑시다. 늘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구하고 시간을 우리의 소중한 친구에게 드립시다. 이 복스런 우정을 흔드는 나쁜 친구들과 가까운 사귐을 조심하도록 합시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듯이, 친구를 보면 그 친구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갖는 주님의 친구들과 가까이 사귑시다. 시간을 함께 내고 함께 기도하며 친밀한 우정을 가꿉시다. 그리할 때에 우리 안에 완전한 친구이신 주님께서 자신의 우정을 우리에게 내어주실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점점 우리 속에 외로움, 허전함, 육신적인 허탈함, 허무함 이런 것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간다면서 공연히 울적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신적인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육신적인 즐거움만 추구하다 보면 도리어 마음 깊은 곳에서는 허전함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바닷물을 들어마시면 더 갈증이 커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좋은 친구들을 가려 사귀고, 신앙 안에서 복된 친구들과 우정을 더 잘 가꾸어갑시다. 방탕하고 세속적이고 탐욕과 교만과 자기 자랑에 잡힌 사람들을 멀리합시다. 주님을 사랑하며 충성스럽고 열심을 내며 동시에 의롭고 화평하고 온유하고 정결을 사모하는 사람을 가까이 합시다. 잠언 22:11 말씀에서도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이 정결함을 사모하고 우리 입술이 정결하면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임금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사랑하는 친구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잠언 18:24 말씀을 다시 한번 함께 읽어보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더 친밀하니라”
세상의 수많은 친구보다도 우리의 육신의 형제보다도 우리 주님은 더 친밀하신 참 친구이십니다. 우리의 참 친구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가족, 친구, 이웃이 다 우리 곁을 떠날지라도, 설령 우리가 죽음을 맞아 이 세상을 떠나가는 마지막 순간일지라도 우리 곁에 남아주실 것ㅇㅂ니다. 그는 우리의 마지막 길에도 우리 손을 붙잡아주실 것이며 우리 손을 끝까지 붙잡고 주님의 영광과 안식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해들이실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