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대해 전문가 수준으로 공부한 적도 없고 앞으로 할 생각도 없다. 따라서 이 글이나 이 글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나 뚜렷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 노동가치설은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만드는 데 들어간 노동 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요인들과 단계들이 개입되어 가치는 가격이 된다.
“가치는 노동 시간에 의해 결정된다”는 거대 이론이며, 가치가 가격이 되는 과정에 개입되는 것들은 중간 이론이라고 이야기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주류 경제학의 가격 이론에는 노동가치설에 상응하는 거대 이론은 없는 것 같다. 수요-공급의 법칙 같은 것은 가격의 다른 측면을 다루고 있으며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도 기꺼이 인정한다.
과학적 측면에서 볼 때, 마르크스는 노동가치설이라는 거대 이론이 현상 설명이나 현상 예측의 측면에서 커다란 기여를 한다고 이야기한다. 예컨대 마르크스는 노동가치설에서 출발하여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를 거쳐 “이윤율 저하 경향”을 이끌어내며 이것 때문에 공황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를 거쳐서 “노동자 계급의 상대적 빈곤화”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도덕 철학적 측면에서 볼 때, 마르크스는 노동가치설이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를 설명한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얼마나 명시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나는 아주 오래 전에 <자본론>을 2권까지 읽는 적이 있다) 적어도 그런 이야기가 그의 글에 암묵적으로 녹아 있는 것 같다.
그는 이윤과 잉여가치와 착취를 사실상 동의어로 사용한다. 따라서 자본가가 이윤을 남기면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이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윤을 전혀 남기지 않아야 한다(엄밀히 따지면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지만 무시하기로 하자).
마르크스가 도덕적 함의를 가득 담고 있는 “착취”라는 용어를 쓴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는 “노동자가 가치(마르크스의 개념)만큼 보상 받아야 한다”라는 도덕 명제를 전제하고 있는 것 같다.
“가치만큼 보상 받아야 한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마르크스는 착취 현상을 설명했다기보다는 착취를 그냥 그런 식으로 정의한 것이다. 이것은 설명이 아니라 입장 표명이다.
“가치만큼 보상 받아야 한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마르크스의 착취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다. 전제를 거부하면 그 이후의 논리적 단계는 무시해도 된다. 그런 사람은 마르크스에게 “당신이 착취를 어떤 식으로 정의하든 당신 마음이다.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착취는 ‘부당하게 쥐어짠다’는 의미의 통상적으로 쓰이는 착취 개념과는 무관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게다가 “가치만큼 보상 받아야 한다”라는 명제를 정말로 일관되게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장애인 복지가 잘 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장애인이 비장애인을 착취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가가 노동하지 않고 이윤을 벌어들이는 것이나 장애인이 노동하지 않고 복지 수당을 받는 것이나 불로소득인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더 가관인 것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에 대해 논할 때에는 “가치만큼 보상 받아야 한다”라는 도덕 명제를 주창하는 듯하다가도 공산주의에 대해 논할 때에는 “각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는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도덕 명제를 주창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치만큼 보상 받아야 한다”라는 명제와 정면으로 모순된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다”라는 거대 이론에서 출발한 천동설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아주 지저분해졌다. 여러 중간 이론들을 삽입하여 현상에 부합하도록 했다. 결국 설명력은 거대 이론에서 나온다기보다는 비대해진 중간 이론들에서 나온다. 이러니까 끼워맞추기식 설명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마르크스주의 경제 이론도 비슷해 보인다. “가치는 노동 시간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거대 이론에서 출발하지만 온갖 중간 이론들을 삽입한다. 그래서 겨우 현상과 부합하는 설명이 된다. 이렇게 중간 이론들이 비대해지면 거대 이론의 가치가 의심 받을 수밖에 없다.
거대 이론이 쓸모 없다는 비판을 면하기 위해서는 거대 이론이 없는 주류 경제학에 비해 나은 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럴 듯한 수학적 모델을 동원하여 이윤율 저하 경향과 같은 독특한 예측을 실증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나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가 이런 과업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즉 노동가치설이라는 거대 이론을 품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강력함을 실증적으로 입증한 사례를 본 적이 없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쓸데 없는 노동가치설을 끌어들여서 현상을 더 지저분하게 재기술하는 것에 불과해 보인다.
만약 노동가치설의 가치를 입증하는 실증적 근거가 없다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결국 “가격과 노동 시간 사이에는 모종의 상관 관계가 있다”는 뻔한 이야기로 전락하게 된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주류 경제학에서 가격을 논할 때 재료와 기계 설비, 임금, 이윤 등을 고려한다. 그리고 임금은 당연히 노동 시간과 상관 관계가 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다섯 시간 일할 때보다 열 시간 일 할 때 더 많은 임금을 받는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강력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가격과 노동 시간 사이에는 모종의 상관 관계가 있다”는 뻔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윤율 저하 경향과 같이 다른 이론이 예측하지 않는 현상을 실증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강력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적 정신 과정이 있으며 그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뻔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것과 마찬가지다. 정신분석의 강력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같이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독특한 현상을 실증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내가 알기로는 어떤 정신분석가도 이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지 못했다. 오히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는 반대되는 명제인 “인간은 근친 상간을 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쌓이고 있다.
뉴턴의 중력 이론이 “대체로 물건들은 아래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뻔한 이야기만 했다면 뉴턴이 그렇게 대단한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뉴턴의 이론에는 우아한 수식이 있으며 그 수식은 대단히 정밀하게 현상과 부합한다. 물론 더 나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등장하여 왕좌를 빼앗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턴의 이론의 우아함과 정밀한 예측력은 대단하다.
주류 심리학과 주류 경제학에는 거대 이론이 없다. 그들은 작은 이론이나 중간 이론으로 소소한 것들을 설명하는 것에 만족한다. 반면 정신분석,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진화 심리학에는 거대 이론이 있다.
진화 심리학의 거대 이론인 자연 선택 이론은 심리학 영역에서도 조금씩 그 가치를 남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권위 있는 학술지에 진화 심리학자들의 논문들이 점점 더 많이 실리는 것으로 드러난다. 예컨대 진화 심리학자들은 자연 선택 이론 없이 일했던 심리학자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현상을 많이 발굴했다.
내가 정신분석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거대 이론이 거대 이론다운 힘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뉴턴의 중력 이론과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이 거대 이론다운 힘을 어떤 식으로 보여주었는지 살펴보라.
2013-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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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