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은 적응(adaptation)이 아니라 부산물(by-product) 또는 부작용(side effect)이라는 이야기가 진화 생물학계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것 같다. 나는 저명한 진화론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여러 번 봤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식이다.
So, for example, belly buttons aren’t adaptations—they have no function—they’re side effects of umbilical cords, which do have functions.
그러니까, 예를 들어 배꼽은 적응이 아니다. 배꼽에는 기능이 없다. 배꼽은 기능이 있는 탯줄의 부작용이다.
(『Why everyone (else) is a hypocrite』, Robert Kurzban, 123쪽)
하필이면 이 책에서 인용한 이유는 내가 Kurzban과 이 책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대량 모듈성(massive modularity) 테제와 자기 기만(또는 인지 편향 또는 사고 왜곡)의 진화를 알기 쉽게 잘 다루고 있다.
내가 Kurzban을 아주 좋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다음 논문 때문이다.
진화 심리학 대박 논문: Modularity in Cognition(Barrett, Kurzban)
http://cafe.daum.net/Psychoanalyse/J3xI/67
배꼽이 탯줄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면에서 배꼽이 탯줄의 부산물 또는 부작용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탯줄은 적응이며 영양분 공급과 같은 기능이 있다. 분명히 탯줄의 진화에는 자연 선택이 작동했을 것이다. 굳이 연구해 보지 않더라도 탯줄이 영양분을 효율적으로 공급하도록 진화했을 것이 뻔하다. 그리고 탯줄이 없었다면 배꼽이 진화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꼽은 적응이 아니다”, “배꼽에는 기능이 없다”라고 말한다면 문제가 있다. 배꼽에는 기능이 있다. 탯줄이 통과하던 자리를 잘 메꾸는 것이 배꼽의 기능이다.
분명히 배꼽의 진화에도 자연 선택이 작동했을 것이다. 바람이나 물이 통과할 정도로 큰 구멍이 뚫린 배꼽이 있는 사람은 잘 번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자그만 충격에도 망가지는 배꼽도 번식에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배꼽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투자했던 사람도 남들보다 번식의 측면에서 뒤졌을 것이다.
배꼽이 부산물이기 때문에 배꼽의 모양도 천차만별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배꼽이라는 현상의 한 측면만 보기 때문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지문도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잘 미끄러지지 않게 물건을 잡도록 하는” 지문의 기능의 측면에서 볼 때 사람들의 지문은 서로 매우 닮았다. 마찬가지로 “탯줄이 있던 자리를 튼튼하게 메꾸는” 배꼽의 기능의 측면에서 볼 때 사람들의 배꼽은 서로 매우 닮았을 것이다.
오징어에는 맹점이 없지만 인간에게는 있다. 맹점 자체는 오징어와는 다른 인간 눈의 생김새의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경우 시신경이 망막이 있는 눈의 안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인간에게는 평소에는 맹점이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기제가 진화했다. 그리고 그런 기제는 적응이다.
태아 시절의 인간에게는 탯줄이 있다. 만약 탯줄이 있던 자리를 그냥 놔 두면 배에 구멍이 생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래서 그 구멍을 효과적으로 메꾸는 배꼽이 진화했다. 배꼽의 진화는 망막에 있는 구멍(맹점)이 번식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이것을 메꾸는(?) 기제가 진화한 것과 비슷하다.
내가 맹점 해결 기제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얼핏 읽은 내용으로 볼 때 상당히 기발한 해결책인 것 같다. 내가 배꼽의 구조에 대해서 아는 것은 거의 없지만 깊이 파고들면 배꼽의 경우에도 자연 선택의 “지혜”에 대해 감탄할 만한 것이 있을 것 같다.
나는 진화 생물학계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인간은 원숭이의 후손이 아니다”라는 명제에도 시비를 건 적이 있다.
인간은 원숭이의 후손 맞다
http://cafe.daum.net/Psychoanalyse/NSiD/402
나는 “인간은 원숭이의 후손이 아니다”와 “배꼽은 적응이 아니다”에 시비를 거는 진화론자를 본 기억이 없다. 이런 것들이 진화 생물학계에서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것이 나에게는 미스터리다.
이덕하
2013-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