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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문]
연변조선족예술집성작업의 제 단계와 그 특점
연변예술집성판공실 전병칠
공화국창건이래, 연변의 각급 문화예술부분과 여러 문화예술인들은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예술유산의 발굴, 수집, 정리, 연구작업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하였고 혁혁한 성과들을 이룩하였다.
70년대말기부터 시작된 연변예술집성작업은 건국초부터 시작된 민간문학예술유산의 발굴, 수집, 정리, 연구작업의 연장이며 총화이다.
아래에 연변조선족예술집성작업을 력사적시기에 따라 단계를 더듬으면서 그 특점을 간추려 살펴보려 한다.
첫번째단계: 발굴, 수집, 정리작업의 초창기
건국전 우리 연변에는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이 기본상 없었다. 있었다면 기껏해 개별적예술인들의 개인계승을 위한 수집, 정리였다.
새중국의 창립과 1952년 9월 3일의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은 연변조선족으로하여금 정치상에서 다른 형제민족과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자기의 고유한 문화권의 향수를 받게 하였는바 자치주정부는 초기부터 민간예술유산의 발굴과 계승사업에 큰 중시를 돌렸다.
자치주 제1임주장인 주덕해동지는 예술일군들과 민간예술을 발굴, 수집할데 관한 의견을 여러차례 나누었으며 민간예인 대부분이 고령인 실정에 비추어 일찍 《불끄러가는 소방차의 속도》로 민간예술발굴작업을 다그치라고 지시하였다.《동북조선인민보》는 《민간문학예술에 중시를 돌리자》등 제목으로 글을 실어 민간문예발굴, 계승사업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였다.
1953년대중기, 정부의 이러한 지지와 사회여론에 고무된 예술일군들은 조선족이 집거해있는 마을을 찾아다니며 민간예술을 발굴, 수집, 정리하고 학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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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예술에 대한 사회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런 과정에 민간가수 김문자, 조종주, 우제강, 박정렬, 리금덕, 신옥화, 민간무용수 하태일, 김룡옥, 퉁소연주가 리임룡, 장단연주가 리병렬 등 재능있는 예술인들을 발견하였으며 발굴, 수집한 민요 49수를 정리해 《민요곡집》으로 묶어 1954년도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하게 하였다.
1952년에는 연길시에서 가야금을 발굴했고 1953년에는 훈춘시에서 또 가야금을 발굴했다. 그 바람에 성악배우들이 가야금연주를 배우는 열조가 일어났으며 1955년도에는 민족기악발전을 위해 연변가무단의 김진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립음악대학에 류학생으로 파견하였다.
1953년 연변가무단의 조득현 등은 민간무용가 김태익을 모셔다 3개월간 4시간나마 긴 《농악유희》를 한자국 한자국 걸음발을 익히면서 수집, 학습하였다. 그해 10월, 길림시에서 있은 《전성민간예인콩클》에는 113명으로 구성된 연변예술대표대가 참가하여 《농악무》,《칼춤》,《부채춤》,《학춤》을 춰 최상을 받았다. 1957년 연변가무단에서는 민간무용의 발굴과 수집을 위하여 전문 무당들을 청해놓고 돼지를 잡아 접대하면서 무속무용을 수집, 학습하였다.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과 함께 예술인들은 이 시기 민간예술발굴에 기초하여 《처녀의 노래》,《좋은 종자 가려내세》등 많은 민가를 창조하였으며 연변가무단에서는 1955년도에 민요 《새타령》을 가야금병창으로, 《농악유희》를 《농악무》로 무대에 올렸고 1956년에는 새로 창작한 판소리 《떡메의 증오》를 무대에 올렸다.
1957년에는 연변예술학교를 건립하고 민족무용, 민족성악, 민족기악 등 전업을 두었으며 높은 로임으로 민간예인들인 박정렬, 김문자, 신옥화, 리금덕 등을 교원으로 초빙하여 민족예술후계자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공화국창건 10돐이 되는 1959년은 민족민간예술의 무대공연에 열조를 일으킨 한해였다. 주문화처에서는 70여명 로인이 참가한 《민간예인무용콩클》을 조직하여 100여개 무용종목을 무대에 올렸다. 그해 3월 14일, 연길시에 《신창극단》이 성립되여 창극 《흥부와 놀부》를 무대에 내놓았으며 연변가무단과 연변예술학교에서는 함께 대형민족악대를 조직하여 가야금산조를 개편한 민족관현악곡과 고대전통기악곡인 《령산회상》 등을 무대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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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 50년대를 포함한 이 시기의 민간예술발굴, 수집, 정리작업은 수집도구가 극히 락후한 상태에서 선전과 동원을 동반한 학술적인 연구보다는 실용적인 학습, 리용을 위한 민간예인 및 민간악기의 발굴, 민요와 민간무용의 발굴, 수집으로 그 특점을 보여준다. 이런 실용적인 학습, 리용을 위한 발굴, 수집은 당시 갓 성립된 민족자치주의 민족예술무대번영과 민족예술교육발전을 힘있게 추동하였다.
두번째단계: 수집, 정리작업의 제1차고봉기
60년대의 상반기 즉 1960년도부터 1966년도까지 이 단계에 속한다.
1961년 연변에서는 국가문화부와 중국음악가협회의 련합통지정신에 근거하여 《연변미간문예연구조》라는 전문조직기구를 내왔다.
연구조는 맨 처음 안도현 석문향에 가서 점을 잡고 발굴, 수집작업을 진행한 다음 1962년말과 1963년초에 연변을 비롯한 길림, 료녕, 흑룡강성의 60여개 현, 시의 200여개 향과 촌을 돌아다니면서 5000여명의 군중을 찾아 사회조사와 수집작업을 진행하였는데 전통무용사진 200폭을 수집하고 800여수의 민요를 발굴하였으며 120개의 록음테프를 록음하고 선후로 조선민요 180수를 묶은 《민요곡집》, 항일가요와 구전동요 80수를 묶은 《혁명가요와 동요곡집》을 등사본으로 내놓았다.
이 시기 룡정, 훈춘, 화룡, 안도 등 각 지방에서도 민간예술발굴작업이 널리 진행되였는데 안도현에서만도 등사본 《민요곡집》을 5권이나 내놓았다.
주문화처에서는 여러차례에 걸쳐 민간예인모임을 가졌는데 주덕해, 요흔, 김문보 등 지도자들이 출석하여 중요한 연설들을 하였다.
이 시기 연변예술학교에서는 민족예술의 체계적인 연구에 힘썼는바 김진과 조순희는 민간예술인들한테서 배운 가야금곡들을 기보하여 다섯권은 가야금곡집을 묶었으며 정준갑은 김문자, 박정렬, 신옥화 등 민간예인들의 민요를 수집하여 민요집 세권을 묶었다. 이 밖에 또 1962년부터 1964년 사이 김진, 고자성, 엄상준, 박정렬, 신옥화 등 음악교원을 중견으로 창극연조를 내오고 《춘향전》창극본을 정리하였으며 《광한루》의 한개 장면을 공연까지 하였다.
이 기간의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은 초창기에 비해 조직기구가 비교적 완정하고 수집, 정리범위가 광범위하고 동원된 문예일군들이 많으며 수집한 민간예술작품 또한 전례없이 많은것과 발굴, 수집에 따른 정리작업이 궤도에 오르고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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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술연구대오가 형성된 특점을 보여준다.
세번째단계:《민족문화혈통론》에 의한 매몰기
우리의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이 한창 열기를 올리고 민족전통음악이 한창 생기발랄하게 발전하던 좋은 시기에 《문화대혁명》이란 대동란 이 중국땅을 휩쓸었다.
《민족문화혈통론》에 의한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의 매몰기로 취금되는 이 시기, 무대와 민간에서는 《어록노래》나 《본보기극》노래만 불렀지 민가를 부를수 없었으며 민족전통예술연구사업에서 거둔 모든 성과들은 죄다 말살되고 이 작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잡권신》,《복고주의》,《제왕장상》등 터무니없는 감투를 썼다. 동시에 다년간 수집, 정리한 전통예술연구자료들과 록음테프들이 죄다 《독초》로 몰리워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은 좌절을 당하고 매몰돼버렸다.
네번째단계:수집, 정리작업의 제2차고봉기
1976년 10월, 《4인무리》가 꺼꾸러지자 민족예술도 해빛을 보게 되였다.
1977년, 주문화국에서는 천여명이 참가한 《민가연창대회》를 조직하여 《아리랑》을 비롯한 30수의 민요를 해방하였고 1978년에는 《전주과외민요콩클》과 《전업예술단체민족음악콩클》을 조직하였따.
1978년, 국가문화부 등 유관부분에서는 통지를 내여 민족예술유산을 수집, 정리하여 《중국민간가곡집성》,《중국민족민간무용집성》등 10부의 예술집성책을 2000년전으로 편집, 출판할것을 지시하였다. 여기에 호응하여 주문화국에서는 1979년, 해체되였던 민간문예수집조인원들을 재조직하여 민가집성판공실을 설립하는 등 적극적인 조치를 대여 다시 민가수집 등 민간예술수집작업을 시작하였다.
1981년 6월까지 민간예술수집일군들은 록음기를 둘러메고 길림, 통화, 연변 등 지역의 11개현과 시 55개 마을을 찾아 380명 민간예인을 취재하고 500여수의 민요를 수집하고 록음하였으며 이것을 기초로 400여수의 민요집성의 초고를 편집하였고 365수의 《민요곡집》을 출판하였다.
본론을 떠나 여기서 재미있는 이야기 두가지를 하겠다.
리황훈이라면 연변음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50년대말 조선족미가를 수집하기 시작해서부터 1990년 불치의 병에 걸려 사망하기 직전까지 그는 옹근 36년이란 긴 시간을 민가수집, 정리, 편찬사업에 흔신을 다 바쳤다. 갓 민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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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판공실이 설립되여 사무실이 없고 경비가 부족되니 그는 자기의 집을 사무실로 1년나마 내놓았고 일손이 딸릴 때면 안해와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자료정리를 시켰다. 대동란기간, 그가 수집한 민간예술유산자료들이 홍위병들에 의해 불속에 던져졌다. 《태우면 나를 태웠지, 이것만은 못태운다.》그는 비판투쟁을 받으면서도 불속에 뛰여들어 그 자료들을 끄집어냈다. 한번은 이런 일까지 있었다. 민가도 많이 알고있는 맹인민간예인 한분을 취재하게 되였는데 밤중이 되니 배가 고프다면서 개고기를 먹고싶다고 하는것이였다. 한밤중에 어디에 가서 개고기를 사온단 말인가. 그 사람은 개고기를 사지 않으면 노래를 안부르겠다고 딱 잡아뗐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일이였다. 리황훈 선생님은 입씨름하다 못해 그 맹인한테 무릎을 꿇고 사정하고 또 사정하였다. 《래일은 꼭 개고기에다 찰떡까지 사서 대접하겠으니 마저 불러주십시오.》쇠로 만들어지지 않은 이상 그 누구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랴. 맹인예인은 끝내 자기가 알고있는 민가를 죄다 털어놓고말았다. 기염만장해 달려든느 반란파앞에서 그처럼 도고했던 선생님이 어떻게 보면 남들앞에서 고스란히 머리를 수그리고 무릎을 꿇는것까지 마다한 리유는 뭘가.
류사한 일들은 너무나도 많다.
1978년 민가수집조의 리동구, 김봉관 두 선생님이 화룡현 숭선향 남석촌에 갔을때의 일이다. 독보조에서 박남선로인이 민가를 잘 부른다고 하기에 찾아갔더니 미리 알고 스그머니 하천에 있는 딸집으로 피신을 갔었다. 7-8리 길을 걸어 로인을 찾아 상급의 문건들을 내놓으면서 찾아온 리유를 말하니 죽어라고 민가는 안부른다고 했다. 결국 수집조일군들에 의해 설복되였는데 로인은 쌈지에서 담배종이를 꺼내놓으며 《내가 소리를 해도 죄가 없다구 여기에 쓰고 도장을 찍소.》라고 했다. 한심한 일 같지만 리해는 할수 있었다. 이전에 민가를 많이 불렀다는 죄로 문화대혁명기간에 투쟁까지 맞아 소리는 물론 술까지 끊고 조용히 살아간다는 로인, 수집조일군들은 로인이 시키는대로 쓰고 민가집성사무실의 도장을 찍었따. 박남선로인이 부른 《초한가》등 민가는 이렇게 수집된 것이다. 줄거리를 벗어나는 얘기지만 하고싶다. 그날 로인은 초한가의 1절을 부르고 끼억끼억 울었다. 그토록 부르고싶은 내 민족 내 노래를 부른것이 죄가 되여 투쟁맞은 어제가 통분하고 술대접까지 받으며 그 노래를 다시 통쾌하게 부르는 오늘이 눈물나도록 기쁘다는것이였다. 정녕 민족이란 뭐고 전통이란 또 무엇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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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에는 일찍 해방전에 만주국성립10주년경축대회때 장춘에 가 농악유희를 공연하여 상까지 탄 안도현 장흥향 신촌의 《농악유희》를 발굴하였다.
1979년의 연변문학예술연구소의 성립과 1981년의 연변예술학원 민족예술연구소의 성립은 문예집성작업을 비롯한 민족예술사업을 한층 더 높은 차원에로 끌어올릴수 있는 조직적담보를 제공해주었다.
1980년, 조종주,박정렬 두 민간예인은 북경에서 열린 《전국소수민족민간가수대회》에 참가하여 수도인민들의 절찬을 받았다.
1982년, 연변인민출판사와 연변음악가협회에서는 다년간 발굴, 수집한 민가 300수를 묶어 《민요곡집》을 출판하였다.
1983년 3월, 주문화국에서는 제1차민간음악집성회의를 열고 민족음악집성사무실을 내오고 민간음악수집작업에 성과가 돌출한 단위와 개인을 표창하였으며 그해 10월에는 성 문화청에서 전 성 집성사업회의를 열고 연변민가집성판공실에 축기를 드림과 동시에 안도현 문련과 문화관을 선진집체로 표창하고 조종주, 리황훈, 김태갑, 김성민 등 30여명 연변의 민간예술인과 집성사업일군들에께 각기 출연, 기보, 정리, 번역 등 면에서의 우수상을 발급하였다.
이 기간 민간예술수집작업과 함께 민간예술에 대한 연구사업도 활발히 전개되여 《민요연구》(조정일 저), 《조선족민족음악특징》(전화자 저), 《중세기이래 조선족음악발전》(최순덕 저), 《조선족민요장단에 대한 분석》(리황훈 저), 《조선족전통민요분류》(왕보림 저), 《판소리기원과 우리 나라에서의 류전》(김창호 저), 《조선족민간음악개론》(정준갑 저) 등 리론저작과 론문들이 륙속 출판, 발표되였다.
1976년말부터 1984년말까지를 포함한 이 시기의 민간예술수집, 정리 작업을 보면 민간예술수집작업의 조직회복과 함께 민간예술수집범위가 광범위하고 수집한 작품 또한 풍부한 등 제1차고봉기와 같은 특점을 보여주고 있는 동시에 수집도구가 비교적 선진적인 특점, 지방내부의 미간예술수집으로부터 국가적인 예술집성에로의 전이, 수집과 리론연구의 밀착된 결합 등 특점을 보여준다.
다섯번째단계: 민족전통예술의 정립을 기한 대집성기
1985년 1월, 연변예술집성판공실의 정식성립은 민간예술수집에서 다년간 온정된 상설기구가 없고 고정된 수집, 정리, 편집일군들이 없이 여기저거 문화예술부분으로부터 이 사람 저 사람 빌려쓰던 국면을 종말짓고 믿음직한 국가재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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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담보로 전문인원을 배치하고 사업경비를 해결함으로써 예술집성작업발전에 탄탄대로를 편쳐주었다.
이때로부터 연변예술집성판공실에서는 국가문화부 예술과학계획령도소조의 구체배치에 따라 국가예술과학연구 중점째마인 《중국민족민간문예10부집성》에 수록될 조선족희곡지, 조선족구연지, 조선족민가, 조선족민간무용, 조선족기악곡, 조선족구연음악, 조선족희곡음악 등 7대 예술집성(문학에 속하는 민담, 민간가요, 속담 등 집성작업은 상급지시정신에 따라 연변민간문예가협회 등 단위에서 맡음)의 편집사업을 일제히 전개하였다.
우선, 몇십년래 수집, 정리한 민가들을 중앙의 《범위가 넓어야 하고 품종이 구전해야 하며 질이 높아야 한다》는 편집방침에 따라 재심사, 재편집하였으며 수십차례에 걸친 중앙집성총부의 회의에 책임편집들이 직접 참가해 중앙과 성 유관부문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전국성적인 통일방안에 따른 수차의 반복수개작업을 하였다.
잇달아 예술집성일군들은 희곡지, 구연지의 자료와 민간무용, 민간기악곡, 민간희곡음악, 민간구연음악 등을 수집, 정리하는 한편 록음, 편집, 수개 등 작업을 활바하면서도 깐지게 벌려나갔다. 한단락의 문자자료, 한음의 기보라도 의혹이 생기면 무더기로 쌓인 자료를 다시 뒤졌고 록음자료테프를 몇번이고 다시 들었으며 몇십리길을 다시 다녀왔다.
1997년 9월에 출판된 《중국민가가곡집성·길림권》은 우리 연변민간예술수집일군들이 수년간의 피와 땀으로 수집, 정리한 1,500여수의 민가중 315수를 선정하여 개술, 주해, 역문 등 문자자료와 함께 악보자료 50여만자를 수록하였다.
1994년 6월 중국민간가곡집성총부에서는 북경에서 《제1차동북3성조선족민가출판협조회의》를 열고 동북3성에서 련합으로 조선문판 《중국조선족민간가곡집성》을 출판하도록 결정지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출판하게 될 소수민족문자집성책이다.
《중국민간가곡집성·길림권》출판에 앞서 1988년 10월에 출판된 《중국희곡지·길림권》에는 조선족의 희곡으로 창극을 소개하고 전통 극목으로 《춘향전》,《흥부전》,《심청전》,현대극목으로 《붉은 자매》,《룡강송》등을 올린 동시에 《적성가》등 8개 소리단락음악과 함께 복장, 도구 등 자료 20여만자를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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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0월에 출판된 《중국민족민간무용집성·길림권》에는 우리 연변에서 다년간 수집, 정리한 민간무용 《승무》,《원무》,《농악무》,《칼춤》, 《탈춤》, 《양산도》, 《학춤》, 《아박춤》,《지게춤》,《물동이춤》, 《갓춤》, 《살풀이》, 《접시춤》,《무당춤》,《삼삼이춤》,《손춤》,《손벽춤》,《부채춤》,《장고춤》등 19종을 수록하고 무용도구와 함께 복장, 음악, 소도구 등 내용을 50여만자되게 상세히 소개하였다.
조선족민간기악곡수집, 정리작업은 1984년도부터 시작되였다. 수집일군들은 연변의 8개현, 시의 몇백명 민간예인들을 방문하고 단소, 저대, 피리, 해금, 새납, 퉁소, 가야금 등 여러가지 기악곡의 분포상황을 조사한 기초상에서 130여수의 민족기악곡을 수집하고 정리하였다. 1991년에는 성 예술연구소와 연변예술학원의 지지와 협조를 받아 거의 매몰되여가던 조선족전통기악협주곡 《시나위》,《삼현륙각》,《령산회상》,《농악》을 수집하고 정리하였으며 록음록화까지 하였다. 조선족기악소개를 비롯한 인물전기 등 문자자료와 75수의 조선족전통기악곡을 수록한(30만자)《중국민족민간기악곡집성·길림권》은 2000년 12월에 출판되였다.
1999년에 출판된 《중국구연음악집성·길림권》은 조선족 판소리음악 《춘향가》등 전통극목을 비롯해 해방후에 새로 창설된 설창음악들인 《연변창담》,《북타령》,《평고엮음》의 소리단락 63수와 함께 중국에서의 판소리발전상황, 선률, 조식, 장단, 창법 등 음악적특성과 창본의 묘사수법, 가사결구형태 등 문학적특성을 포섭한 개론 등 문자와 악보자료 20여만자가 기재되였다.
《중국희곡지·길림권》의 자매편인 《중국희곡음악집성·길림권》은 1999년 6월에 출판, 조선족전통창극극목 《춘향전》,《심청전》,《흥부전》,《토끼전》과 현대극목들인 《김삿갓》,《붉은 자매》등 극목의 36수의 소리단락을 망라하여 《개론》,《무대미술》,《인물》 등 자료 15만자를 수록하였다.
이상 두편에 수록된 구연음악과 희곡음악의 소리단락들은 전부 가사부분에 국제음성기호로 표기를 달아 중국은 물론 세계 어느 민족이나를 막론하고 우리말로 가창이 가능하도록 했다.
《중국구연음악·길림권》의 자매편인 《중국구연지·길림권》은 연변구연대사기를 비롯해 조선족전통구역종목들인 판소리, 설화, 재담, 만담과 해방후 중국 조선족 예술인들이 자체로 창조한 3로인, 연방창담, 북타령, 평고엮음 등 구연종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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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곡종소개, 대표극복, 표연예술, 인물전기 등 음악, 문자자료 15만자를 수록. 이미 총심사를 마치고 출판을 기다리고 있다.
민족전통예술의 정립을 기한 대집성기인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민간예인들과 예술집성일군들이 사회의 보다큰 중시와 배려를 받게 되였다.
1987년 9월 15일, 중국민간문예가협회 연변분회에서는 룡정현 합성촌에서 조종주, 박정렬 두 로인에게 민간가수 칭호를 수여하였고 1993년 1월 7일, 연변예술집성판공실과 연변예술학원 예술연구소에서는 공동으로 신옥화예술생애60돐기념가창대회를 가졌으며 1995년 7월 2일, 연변예술집성판공실과 연변민간문예가협회에서는 민간가수 조종주로인의 서거 3돐에 즈음하여 룡정시 조양천진 합성촌에 있는 그의 묘지에 《저명한 조선족가수》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1997년 11월, 국가문화부 전국예술과학계획령도소조에서 소집한《전국문예집성사업회의 및 성과표창대회》와 1998년 3월, 길림성 문화청에서 소집한 《전 성 예술집성성과표창대회》에서 김남호, 최호욱, 김창호 등 연변예술집성사업일군 45명이 각기 중아과 성의 여러가지 영예상과 성과상을 탔고 연변예술집성판공실은 다년래 예술집성편찬사업에서 성적이 돌출하여 성문화청으로부터 예술집성사업선진단위로 표창받았다.
1998년 5월 18일, 연변예술집성판공실에서는 《연변예술집성성과소식공개회》를 열고 다년간 거둔 예술집성성과들을 전 사회에 광범히 선전하였다.
상기한 사실들은 이 단계에 와서 우리 연변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이 개별적 민간예술의 수집, 정리작으로부터 전반 민간무대예술의 수집, 정리작업에로의 전이, 지방내부적 수집, 정리로부터 민족전통예술의 정립을 기한 국가급고차원의 수집, 정리에로의 전이를 엿볼수 있는바 넓어진 집성의 대상성, 고차원의 목적성, 거시적인 전략적리론연구로 독특한 특점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연변예술집성작업이 걸어온 길을 력사적시기에 따라 다섯 개단계로 더듬어보면서 그 특점을 살펴보았다.
사실, 공화국창건이래 수십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민간예술집성작업에 참가하여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수많은 농가의 무턱을 드나들면서 수천명의 민간예인들을 만나 단절된 민간예술의 맥락을 이어놓고 사그러져가는 민간예술의 불씨를 되살리는데 기여를 하였다. 장기간 우리의 전통예술을 위해 힘써 오신 선배들인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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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주, 박정렬, 김말순, 류준선, 김문자, 우제강, 신인순, 구룡환, 김경모, 리복제, 신철, 강성기, 신옥화 등 수많은 민간예술인들은 우리 전통예술의 발굴과 계승, 및 후대양성에 피타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분들 대부분은 세상을 떴다. 그리고 건국후 우리 민족전통예술수집, 정리작업을 열심히 해온 리황훈, 김승경, 김태갑, 리동구, 김원창, 상설산(한족), 왕보림(한족), 정준갑 등 선생님들도 오늘 우리곁을 떠났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연변예술집성판공실 전체 성원을 대표하여 이분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시한다. 우리는 지금 그들이 다 하지 못한 일을 계승하고 있다. 민족전통예술의 정립을 기한 민족전통예술집성작업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사업이다. 오늘, 우리는 전통예술유산을 학습, 연구, 계승하여 우리 민족예술사업의 발랄한 발전을 위해 땀을 흘리고 또 흘려야 할 의무를 한층 더 깊이 느끼고 있다.
이상으로 천박한 견해를 피력하면서 여러 선배님들과 학자선생님들의 기탄없는 지도와 편달이 있기를 충심으로 바라는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