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산 여행5 - 함파정을 보고는 내려와 함파구에서 버스로 루산박물관에 가다!
여행 7일째 10월 22일 루산(여산) 에서 여유관광차 카드를 제시하고 버스를 타고 회의중심
정류소에 내려 运管所(운관소) 에서 东缐(동선) 버스를 갈아타고 여림호수 를 지나
한퍼커우 含鄱口(함파구)에 내려 오르막길을 10여분을 걸어 함파정 (含鄱亭)을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내려와 한퍼커우 含鄱口(함파구) 정류소에 이르니 오른쪽 긴 줄은 오로봉을
거쳐 삼첩천(三疊泉) 폭포로 가는 버스인지라 우리는 왼쪽 짧은 줄에 가니 역시나
여직원이 교통 카드를 기계에 넣고 오른쪽 검지 손가락 지문을 확인후에 버스에 탑니다.
미니 버스는 나무가 울창한 산속을 내려가 여림호 호숫가에 위치한 여산박물관
庐山 博物馆 에 서기로 내려 안으로 들어가니 붉은 단풍 나무가 우릴 반깁니다.
여산박물관 입구 뜰에는 무슨 쇠 기둥 같은게 보이는데 이건 명나라 가정 2년인 1523년에
제작한 "천문의" 로 옛날에 천문관측을 하던 기구의 일부가 남은 것이라고 합니다.
사슴 조각상 이 서 있는 작은 연못 옆에는“ 庐山 革命遗地 (여산혁명유지)”라는
간판이 보이는데 중국 공산당에게는 이곳이 중요한 유적지인가 봅니다?
방문객에게 한자 붓글씨 를 써 주고 있는 노인을 지나 여산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동양화 가 보이고 그 옆에 푸른색 서예 편액 이 나오는데
이 힘찬 초서체 글씨는 중국 100대 명필에 속한다는 "모택동의 글씨" 입니다.
다음 방에는 모택동의 사진 이 보이고 그 다음으로는 주은래와 등소평에...
또 회의를 진행중인 공산당 간부들의 사진이 많이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들을 훑어보니 산에서 찍은게 많은데... 그럼 마오등 공산당 지도자들이 여기
여산에 올라 사진을 찍었다는 말인데, 여산이 장개석 국민당 정부의 여름 수도 였고
2차 세계 대전후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 정부의 여름 수도 였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다음 사진은 1959년에 여기 루산(여산)에서 개최된 공산당 회의 에서 중국공산당
중앙 위원회 부주석이자 국가주석인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 가 여기
박물관에서 500미터 떨어진 당 회의장소인 인민극원 앞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그는 1959년 루산 庐山(여산)에서 열리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마오쩌둥에 이어 국가
주석이 되어 10년간 중국의 제1인자로 군림했으나 1968년 문화대혁명에서 ‘반마오쩌둥
실권파의 수령’으로 비판을 받고 제9기 전국인민 대표대회에서는 모든 공직이 박탈 됩니다.
류샤오치 는 장시성에 인접한 후난성(湖南省) 출생으로 1920년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하고
1922년 중국노동조합 서기가 되었으며 상하이에서 5·30사건을 지도하고 국공분열
(國共分裂) 후 1932년 장시(江西) 소비에트구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담당후 서기에 오릅니다.
1943년 옌안(延安)에서 인민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중앙서기처 서기가 되어 마오쩌둥
(毛澤東) 다음가는 이론가 로 꼽혔으며 1954년 중국공산당 1기 전인대에서 헌법 초안
제안설명을 하고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을 거쳐 1959년 마오쩌둥에 이어 국가주석 이 됩니다.
다음은 저우언라이 周恩來(주은래) 인데 항일전 발발후 공산당의 대표로서 국민 정부의
국방위원회등 요직에 있으면서 국공관계의 처리를 맡아 탁월한 정치적·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으며 문화대혁명을 거쳐 최후까지 공산당에서 지도적 위치를 유지하였습니다.
강소성 지주, 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17년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早稻田大學)에서
수학하고 톈진 난카이대학 재학중 5·4운동 에 참가해 투옥, 퇴학당하였고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대학에서 공부하면서 1922년 중국공산당 파리 지부 를 창설합니다.
저우언라이 는 프랑스에서 귀국후 1924년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대리에 발탁되었고
1927년 북벌군에 호응하는 상하이 봉기 를 지도하였으며 그후 장제스(蔣介石) 의
반공 쿠데타를 피하여 우한(武漢) 으로 가서 노동자 무장규찰대를 조직해
난창(南昌) 봉기 를 지도하고 광저우 코뮌을 조직후 광시성 소비에트구로 들어갑니다.
1936년 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서 장정(長征)에 참가하였고 장학량의 시안(西安) 사건
때에 국공(國共) 내전 정지와 항일연합전선 결성에 힘썼으며 항일전이 발발한 후에는
공산당 대표로서 장개석 중화민국 정부의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합니다.
국공내전에서 이겨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후 문화대혁명 을 거쳐 최후까지
공산당에서 지도적 위치를 유지하면서 27년간 총리로 국내외 문제를 해결 했으니
주은래가 실각하지 않은건 온건한 합리주의자로 처세를 원만하게 했기 때문이라 봅니다.
옆방에 동양화가 몇점 보이더니 뜬금없이 태극과 음양오행을 설명하는 태극도설(太極圖說)
을 지은 성리학의 시조인 "주돈이(周敦頤)" 에다가 주돈이의 제자인
정호, 정이 형제를 이어받아서 조선에 전해진 주자학을 만든 주자 朱熹(주희) 가 보입니다.
그리고 이어 남송의 충신 岳飞(악비) 에 대시인 도연명 과 書聖(서성) 왕희지 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 의 초상과 프로필등이 새겨져 있기로 의아한 마음이 드는데...
苏轼(소식) 과 李白(이백) 도 보이니 그럼 모두가 루산 庐山(여산) 에 올랐나 보네요?
동아시아에만 존재한 정치가, 관료, 학자, 도덕가에다가 문인인 이른바 "선비" 는
북송 시대에 범중엄, 구양수, 왕안석, 사마광 그리고 남송의 주희,
진덕수 등이 나타나 저마다 일가를 이루고 한 시대를 풍미했으니....
모든면에 두루 뛰어났으며 치우치지 않은 선비가 있었으니 동파(東坡) 소식 입니다.
소식은 촉(蜀) 땅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 소순(蘇洵)은 두 아들과 함께‘삼소(三蘇)’라
불리며 당송팔대가 일 만큼 문장인데 큰아들의 이름은 수레의 앞턱에 붙이는 손잡이를
뜻하는 '식(軾)’으로 작은아들의 이름은 수레바퀴 자국을 뜻하는‘철(轍)’로 지었습니다.
형인 소식 은 일찌감치 글재주를 뽐냈으며 21세에 개봉에서 열린 진사시에 합격한후에
이듬해 에부 주관 2차 시험에 합격했는데 시험을 주재하던 구양수 는 소식의
답안을 읽고는 놀라서 “이제 이 늙은이의 시대는 가는구나!
30년이 지나면 아무도 구양수라는 이름을 말하지 않게될 것이다”라고 격찬했다 합니다.
최종 관문 전시(殿試) 에서는 인종황제 가 “짐의 자손에게 봉사할 재상감을 얻었다”며
기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어머니 삼년상 을 치른후 소식은 아버지,
동생과 함께 한수와 장강을 따라 수도 변경으로 가는 도중에 걸출한 시인
삼부자는 100수가 넘는 시를 지었으니 하나로 엮어 남행집 이라는 책으로 내었다고 합니다.
소식(蘇軾) 은 33세가 되던 1068년에 변경으로 되돌아 왔는데 인종에서 영종을 거쳐서
신종이 등극하니 왕안석의‘신법 운동’이 일어나는데 인종 말기에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소식도 황제 에게 올리는 상소에서 “국가재정의 결핍, 허약한 국방력,
관리 선발의 불공평함”이 3대 개혁과제라고 제시하는 등 개혁의 의지 가 뚜렷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맹렬한 반대가 일어나니 조정은 왕안석과 신진 관료들을 중심으로 하는
‘신법당’과 한기, 부필, 문언박, 사마광 등 중진을 중심으로 하는‘구법당’으로
나뉘었는데 소식은 구법당에 속했으나 사마광과는 달리 제도개혁의 필요성 은 인정
하지만 신법 자체 보다는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들의 사람됨과 태도를 못미더워 했습니다.
왕안석은 얼굴빛이 검어질 정도로 세수나 목욕을 하지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채로 재상의
일을 보았는데 이는 세상사에 초연한 정도를 넘어서 자신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독선,
나아가 ‘청렴한 사람’임을 과시하려는 위선의 냄새가 풍긴다고 보았으니 이를 비난합니다.
소식이 왕안석의 제도개혁에 반대했던 것은 1071년“과거에서 시문을 없애고 경전의 이해
수준만 평가해 선발한다”는 것이었으니 시문은 음풍농월이나 하는 잔재주일 뿐이라는
얘기로 빼자는데 소식은 문학이야말로 인간적인 것이며 교양을 쌓고 인격을 도야하게
해주며 세상을 두뇌만이 아니라 가슴으로도 바라볼수 있게 해주는 길잡이라고 본 것입니다.
문학의 가치에 대한 논쟁은 조선 시대에 조광조와 남곤의 대립 에서도 반복될 것이지만
소식은 과거에서 문학을 없애버리려는 왕안석을 용납할 수가 없었으니 그러다가는
조정이 온통 이정, 여혜경 같이 겉으로는 인의도덕을 말하고 뒷구멍으로는
권모술수 에 힘쓰는 가짜 군자, 추악한 소인배들로 채워지게 될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옛말에 백 사람의 의견이 전부 다 잘못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법을 반대하는 의견은 백 사람이 아니라 천하 만민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폐하는 온 천하를 상대로 고집을 부리시는 것입니까?”
소식은 중앙관직에서 해임되어 8년동안 항주등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는데 신법당에서는
부패누명을 씌워 제거해 버리려고 했으나 신종은 왕안석을 신임하는 한편 소식의
재주도 아꼈으므로 그 정도에 그쳤던 것인데 수도를 떠난 소식은 오히려 홀가분
해졌으니 시, 서, 화에서 전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이르렀고 황정견등을 발굴해 키웁니다.
동파 소식(蘇軾) 은 항주에서 서호에 제방을 쌓아 아직도“소씨의 제방(蘇堤)”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으며 서주에서는 황하가 범람하여 도시가 잠길 위기를
맞자 군민과 함께 잠도 자지않고 제방을 보수하여 서주성을 구했으니
중국에서 관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천재지변을 이겨낸 귀한 사례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소식은 신법당에 의해서 황주에 유배되는 처량한 신세가 되지만 문학과 예술은
물론이고 불교 와 도교를 깊이 공부하고 동파(東坡) 에 밭을 일구었으니
시골에 은둔해 소박한 삶을 가꾸는 꿈을 꾸기도 하고.... 단약을
제조하여 신선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으니“적벽부” 도 이때 씁니다.
“조조도 주유도 일세의 영웅이었지만 흔적도 없군! 인생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하는
한탄에 “강물도 흘러가고 우리도 흘러가고 모든 것은 흘러가지만, 흘러가는 동안
우리는 저 달빛도, 이 바람도, 이 술도, 마음껏 즐길 수 있지 않은가. 무엇이 더 필요한가”
하며 달관한 듯한 자세를 보여주는데 오늘날에도 인기가 있는‘동파육’을 창안합니다.
소식은 은퇴하여 살고있던 왕안석 을 방문했으니 비판하기도 하고 또 옛 앙금을 털어버리고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는데 동병상련의 심정도 있었을 것이니 얼마후 신종이 죽고
어린 철종을 선인태후가 섭정하면서 신법당이 일거에 몰락하며 구법당이 집권하는
상황이 벌어지니 왕안석은 실의에 빠져 죽었고 소식은 다시 관리가 되어 수도로 가게됩니다.
수도에서 사마광은 한풀이하듯 왕안석의 제도라면 무조건 뒤엎었으며 정호, 정이 형제를
비롯한 성리학파와도 사이가 나빠졌는데 사마광이 죽고 장례일이 공교롭게 정부의 축하
행사와 겹치자 정이 는“논어에 곡을 한 날에 노래를 하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다”며
조문을 막자 소식은“노래를 한 날에 곡을하지 말라는 말은 없지 않느냐?”며 조문합니다.
정이가 상주를 협박해서 조문을 하지 못하게 만들자 소식은 “이런 답답하고 촌스러운
사람을 보았나!”고 소리쳤으니 이 일로 소식은 정통 주자학자 들에게 “글재주
밖에 없는 비천한 인물”로 낙인찍히게 되고 1093년에 선인태후가 죽고
철종이 친정을 하자 신법당이 재집권하면서 소식은 다시금 귀양살이를 떠나게 됩니다.
이번에는 오지에 속했던 해남도 인지라 한동안 자포자기했으나 차차 마음을 다잡고 생활에
적응해가던중 휘종이 즉위하자 그는 사면되었고 상경하는데 1101년 5월 바뀐 기후에
쇠약해진 몸이 견디기 어려워 상주 땅에서 이질로 추정되는 병을 얻어 7월에 숨을 거둡니다.
앞에든 사람 말고도 얼굴이 나오는 사람이 더 있으니 중국 전국을 두루 여행한 徐霞客
(서하객) 과 죽은자를 살려내고 비를 내리게하며 호랑이를 부렸다는 董奉(동봉) 이며
1898년 청나라 광서제로 하여금 변법자강안 조칙을 내리게한 康有爲(강유위) 가 그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