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마을}에 제가 올린 ‘윤영상 <과연 바빙크 {개혁교의학} 중생론은 “혼란스러운 중생론”인가?>’, 이 글 댓글란에서 천지 목사님 질문 댓글에 대한 제 답변 댓글들을 두고 {양무리 마을}에 로빈슨크로소 윤영상 목사님께서 <박채동 님께서 {영혼의 의사} 내용을 잘못 알고 계신 부분 → ‘좁은 의미의 중생’과 ‘회심’이 동의어?>를 올리셨군요. 링크합니다.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OgJY/471
이 글에서 윤영상 목사님께서 천지 목사님 질문 댓글에 대한 제 답변 댓글을 두고 ≪1단계 “값진 생명의 씨앗을 뿌리심” 이라는 ‘좁은 의미의 중생: 생명의 씨앗을 심는 중생’과 4단계 “새로운 본성을 주셔서 태어나게 하심”이라는 ‘회심 사건’이, 즉 ‘좁은 의미의 중생’과 ‘회심 사건’은 “동의어”라고 하셨는데, 잘못된 이해와 주장이십니다.≫고 하셨습니다.
①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자’에게 ‘값진 생명의 씨앗ㅡ 바울 사도 용어로는 “새로운 본성, 새 사람”, 요한 사도 용어로는 “하나님의 씨”, 김홍전 목사님 용어로는 “믿음의 씨”, 조엘 비키 목사님 용어로는 “초자연의 씨”, 스펄전 목사님 용어로는 “믿음의 즉효약”ㅡ’을 주시는(뿌리시는) 사역을 하십니다. 개혁 신학 용어로는 이를 “거듭나게 하심(Regeneration)”1)이라고 부릅니다.
② ‘믿음의 씨를 품고 예정된 나무를 향해 불어오는 중생의 바람’, ‘중생의 바람이신 성령’, ‘성령의 내주’를 뜻하는 ‘하나님만의 단독 사역으로서 중생’, 이른바 “좁은 의미의 중생(Regeneration)”이 있게 되면 ㅡ피터 마스터스 외할아버지이신 스펄전 목사님 “믿음의 즉효 약”이 뜻하는 대로ㅡ 예정된 자는 당연히 즉시 거듭나게 됩니다. 즉, 한순간에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개혁 신학 용어로는 이를 “신생新生(New Birth)”라고 부릅니다.
③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엄마 젖을 찾듯 ‘다시 태어난 새 사람(중생자, 신생자)’은 ‘신령한 젖으로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을 향해 첫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중생자가 하나님을 향해 첫 발걸음을 내딛는 이 순간, 새 삶을 시작하는 이 첫 순간을 개혁 신학 용어로는 “회심(Conversion)”이라고 부릅니다.
④ “중생은 순간이다.”, “회심은 순간이다.” 하셨던 청교도 신학자들께서는 ‘①, ②의 중생’과 ‘③의 회심’을 ‘상호 교환(혼용)’해 쓰셨습니다. 즉, 중생론을 전개할 때 “중생”과 “회심”을 번갈아 가며 쓰셨습니다. 물론, ‘다시 태어나게 하심’을 ‘부활’과 같은 ‘하나님의 순간 사역’으로 가르치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위 ①, ②, ③’을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의 단독사역으로서 중생’과 ‘중생자 반응으로서 회심, 중생의 발현으로서 회심’을 포괄한 청교도 신학자들 중생 개념을 현대 개혁 신학은 이른바 “넓은 의미의 중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현대 개혁 신학 이른바 “넓은 의미의 중생”과 “좁은 의미의 중생” 개념은 ‘중생’과 ‘회심’ 사이에 ‘임신 기간’이라는 간격을 둔 연중론, “중생은 넓을 수도 있고 좁을 수도 있다.”는 연중론 개념이 아닙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과 ‘회심 사건’은 “동의어”라고 하셨는데, 잘못된 이해와 주장이십니다.≫??? 이 글을 보실 윤영상 목사님, 제가 천지 목사님께 드린 답변 댓글에서 ≪‘좁은 의미의 중생’과 ‘회심 사건’은 ‘동의어’입니다.≫고 했습니까? 아니면, ≪①(회심 1단계)에 적힌 “값진 생명의 씨앗”과 ④(회심 4단계)에 적힌 “새로운 본성”은 ‘동의어’입니다.≫고 했습니까? 왜 이 쉬운 문장 하나조차 독해를 못하십니까?
설사 ‘수태 시 주시는 생명의 씨앗과 출산 시 주시는 새로운 본성은 동의어가 아니다.’고 합시다. 그런데 {영혼의 의사}에서 ‘자연의 탄생’을 ‘영적 탄생’을 ≪아주 정확하게 말해 주는 예화≫로 주장하는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은 {영혼의 의사}에서 ≪출산 때 새로운 본성을 받는다.≫고 주장하십니다. 그러면 ≪영적 탄생을 아주 정확하게 말해 주는 예화≫라는 자연의 탄생에서 아기는 출산 때 ‘사람 본성’을 받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씨인 정자와 난자’ 속에 ‘사람 본성’이 담겨 있습니까?
‘새 생명의 씨에 새로운 본성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새 생명의 씨에 새로운 본성이 담겨 있으면 언제 새로운 본성을 받는 것입니까? 이른바 “수태” 시입니까? 아니면, 이른바 “출산” 시입니까? 이른바 “출산” 시가 아닌 이른바 “수태” 시가 아닙니까!!!!!!! ㅠㅠ.
윤영상 목사님께서 {페북} 윤영상 목사님 담벼락에 <박채동 님께서 {영혼의 의사} 내용을 잘못 알고 계신 부분 → ‘좁은 의미의 중생’과 ‘회심’이 동의어?>를 링크하시면서 ≪무슨 말을 하든지 분명한 근거 자료를 제시하면서 말해야 합니다. 박채동 님께서 “‘피터 마스터스 {영혼의 의사}’에 적힌 연중론 프레임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론, 아래 ①에 적힌 값진 생명의 씨앗과 ④에 적힌 새로운 본성은 ‘동의어’입니다.”라고 하셨더군요. 정말 큰일 날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의사}에는 절대 그렇게 표현한 문장이 없기 때문입니다.≫고 적으셨습니다.
≪{영혼의 의사}에는 절대 그렇게 표현한 문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 맞습니다. ‘생명의 씨앗’과 ‘새로운 본성’이 동의어임에도 ‘뒤죽박죽 좌충우돌 자중지란’ 서술을 하는 {영혼의 의사}, ‘새 생명의 씨앗과 새로운 본성은 동의어다.’는 개혁 신학 중생론 개념조차 정립 못한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은 {영혼의 의사}에서 ≪수태 시에 새 생명의 씨앗을 주시고, 출산 시에 새로운 본성을 주신다.≫는 ‘좌충우돌 뒤죽박죽 자중지란’ 서술을 하신 것입니다. ‘한국교회 연중론 목사님들 독해력을 망쳐 연중론 동굴 속 미로에 헤매게 만든 거짓 소설’을 쓰신 것입니다.
지난 5월 10일 {페북}에서 윤영상 목사님과 제가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제가 윤영상 목사님께 {개혁주의 마을}에 올린 제 글들을 링크해 드렸습니다. 윤영상 목사님, 이 글들을 자세히 읽어 보셨습니까? 링크해 드린 글들 가운데 두 글,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 외할아버지이신 스펄전 목사님’, ‘스펄전 목사님 중생론을 다룬 글’을 링크 겁니다.
참고로, 부흥과개혁사에서 펴낸 ‘이스데반 {이것이 중생이다.}’를 2013년 9월 하순에 {개혁주의 마을} 비밀댓글로 저에게 소개하신 ‘어울림’ 님은 {양무리 마을} 시절 ‘철수’ 님2)이십니다. 2011년 12월, 손성은 목사님과 윤영상 목사님께서 {양무리 마을}에서 강릉예명 목사님을 능멸함으로써 강릉예명 목사님으로 하여금 {양무리 마을} 탈퇴를 유도하실 때 제일 먼저 분개하셨던 철수 님, 노승수 목사님에게 강등을 당하시면서까지 거룩한 분노를 노승수 목사님에게 거침없이 쏟아내셨던 철수 님이십니다.
한국 교회 연중론의 산파産婆 부흥과개혁사 큰일입니다. ①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4ux/572
한국 교회 연중론의 산파産婆 부흥과개혁사 큰일입니다. ②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4ux/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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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영상 목사님 글에서 “generation”에는 ‘Re’가 빠졌습니다.
2) 2014년 2월에 {양무리 마을}에서 ‘송인규 교수님 제자 지계표 님’에 이어 ‘soon5908’ 님이 연중론을 비평하셨습니다. soon5908 님 글 몇 개만 읽어 보고, 저는 ‘감히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뛰어난 독해력과 탁월한 논리 전개로 손성은 목사님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는 분은 어울림 님이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페북}에서 그레이스 님께서 저에게 “soon5908’ 님이 누구인지 아세요?”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soon5908 님은 어울림 님이시라는 내 추측이 옳다면, soon5908 님께서 나로 하여금 자신을 어울림 님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상징 수법을 쓰실 것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이비락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soon5908 님은 다음과 같은 댓글을 {양무리 마을}에 남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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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5908 (14.02.22. 19:18)
로빈슨 크로소: 1. 이스데반 님이 썼습니다. ‘이것이 중생이다.(부흥과개혁사)’ 이것을 구입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이스데반 님이 쓰신 ‘중생이란 무엇인가’란 책도 있으니 구입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책 분량과 가격이 저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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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미 soon5908 님께서 ‘이스데반 {이것이 중생이다.}’를 {양무리 마을}에 소개하셨음에도, 이른바 “한국교회를 개혁할 연중론, 한국교회 연중론의 선두 주자”로 자처하는 한국교회 연중론 목사님들이 이제야 ‘이스데반 {이것이 중생이다.}’를 구입해 읽어야 하겠다, 하신 것은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첫댓글 사계님 반갑습니다. 제가 한국 사정을 아직 모를 때 시끄러웠던 사항인 것 같네요. 저도 존 머리를 열심히 따라 배웠는데... 그때 끼였더라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
끼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
저 같은 경우 ‘포괄(넓은) 의미의 중생 = 중생 + 회심 + 성화’, ‘엄밀한(좁은) 의미의 중생 = 중생’이라는 개념, 즉 이른바 “넓은 의미의 중생”에는 이른바 “좁은 의미의 중생” 개념이 포함된 개념이라는 것을 정립해 놓고도, 2012년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 때 “연속(연장) 중생 = 중생은 넓을 수도 있고, 순간 중생 = 중생은 좁을 수도 있다.”는 한국교회 연중론 목사님들 줄기찬 주장에 저도 모르게 세뇌돼 정립해 뒀던 개념이 흐트러져 혼란에 빠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혼란에서 다시 빠져나왔던 때는 여러 신학 교수님들께 연중론에 대해 문의하신 그레이스 님께서 {양무리 마을}에 ‘넓은 의미의 중생’과 ‘좁은 의미의 중생’ 의미를 설명해 주신 뒤였습니다. ㅠㅠ
@사계四季 그레이스 님이 잘 하시는 군요..^^ 덕분에 많이 정리되셨겠습니다. ^^
@참된 개혁 사계님이 굉장히 공부하시고 연중론의 문제점을 잘 아세요.
진리라면 설명이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워야 하는데 뭔말인지 저는 모르겠어요.
제 글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까?
@사계四季 장승업님은 연중론이 복잡하다는 뜻일겁니다.
@grace 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