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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7강
그가 누구이기에
말씀 / 마가복음 4:35-5:20
요절 / 마가복음 4: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오늘 말씀부터 저자 마가는 예수님을 통해 일어난 4개의 기적을 연이어 기록합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 귀신 들린 한 사람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 12년 동안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쳐주신 예수님,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주신 예수님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기 위해 밟고 건너가야 하는 징검다리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 하나하나를 밟고 건너다보면 저편에 도달해 “아, 예수님이 이런 분이구나” 결론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4개의 기적 중 처음 2개, 곧 예수님이 풍랑의 위험으로부터 제자들을 구원하시고, 거라사에 있는 떼 귀신을 쫓아내고 고통하던 한 사람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해가 저물 때까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날이 저물어 가자,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을 섬기느라 좀 피곤했는데,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룰루랄라 기분이 좋았습니다. 힘차게 배의 노를 젓습니다. 순풍에 돛 단 듯 배는 갈릴리 호수를 가로지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호수 한가운데 들어서자, 갑자기 광풍이 불기 시작합니다.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고 배는 호숫물로 가득 차 침몰 직전이 되었습니다. 베테랑 어부 출신 제자들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사진)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으십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부르짖지만, 예수님은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배 뒤편에서 주무시고만 계셨습니다.
잠에서 깨신 예수님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바람을 꾸짖고 바다에게 명령합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초중고 학창 시절 자율학습 시간에 어떻습니까? 선생님이 교실에서 떠드는 학생들을 보면서 “얘들아, 조용, 조용하자!” 마치 이렇듯 바람과 바다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에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은 풍랑 앞에 호들갑을 떨며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40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여러분! 여러분은 제자들 같은 상황이면 죽게 생겼는데 두렵지 않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르쳐 주는 성경에서 가장 많이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항해에 비유합니다. 인생 항로에는 잔잔한 순풍이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오늘 본문과 같은 헤쳐 나가기 어려운 삶의 광풍을 만나기도 합니다. 인생 광풍은 우리 삶의 근본을 뿌리채 흔들어 버릴 수 있는 풍랑, 내 삶의 존재를 위협할 수 있는 거센 고난과 역경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생 속에서 오늘 본문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게 무엇일까요?
첫째, 광풍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이 행복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분 좋고 웃음 가득한 길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실상은 저마다의 인생길에 갑작스럽고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광풍이라는 말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들을 말합니다. 우리의 계획과 시간표에 상관없이 갑자기 불어닥치는 고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갑작스럽게 사고로 죽기도 합니다. 사업이 부도가 나서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기도 합니다. 직장 생활을 견디지 못해 사표를 제출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취업 시험에 여러 번 낙방해 이제는 도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친구나 사람 관계에서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마음을 드려 섬겼던 양이 어느 날 안 나오고 떠나겠다는 고별의 카톡만을 남겨두기도 합니다. 지나가는 이야기겠지만, 네잎 크로버 영상을 1분 동안 보면 복이 굴러들어 오고 좋은 일들이 생긴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믿는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우리 행복의 근원이심을 잘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걷는 믿음의 길에도 항상 봄날만 있고 꽃길만 있고 행운만 가득한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으로서의 우리 인생도 어떤 때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이런저런 일들과 고민 염려 앞에서 밤잠을 설치며 걱정과 불안 속에 지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하면 인생 광풍이 없는 게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더라도 인생 광풍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인생 광풍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무력하고 한계적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인생 광풍을 겪을 때 우리 마음은 겸손해지고 절실하게 예수님을 찾고 의지하게 됩니다. 사실 제자들이 만난 광풍은 예수님이 가자고 해서 나섰는데 만난 광풍입니다. 현재 예수님이 그들의 배에 함께 타고 계시는데도 주어진 광풍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핵심은 우리가 만난 인생 광풍 속에서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풍이 불 때 “어찌 이런 일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나에게 생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따지며 원망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인생이 술술 화장지 풀리듯 잘 풀리는 것 같은데, 왜 내 인생은 이 모양이냐며 하나님께 대듭니다. 심지어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생 광풍,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 속에 감춰진 세상의 불순물들, 즉 세상 욕심, 죄의 소욕, 자기 의지를 내려놓게 하고자 함입니다.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축복은 고난의 보자기에 담겨 주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 광풍, 인생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이 쓰실만한 정금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시고 빚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요, 고차원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바다에 태풍이 없으면 녹조 현상이나 백화 현상으로 바다가 못 쓰게 되어 해조류가 다 죽고, 바다 양식도 할 수 없고, 바닷새들도 굶어 죽는다고 합니다. 가끔 태풍이 불어 바다가 뒤집혀야 바닷속 깊숙이 산소가 공급되고, 더러운 것들과 썩은 것들이 다 쓸려나가고, 그래서 바다가 깨끗해지고 살아난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인생 속의 광풍도 우리 삶을 정화시켜 우리 신앙을 순수하게 만들어 줍니다. 전폭적으로 주님만 의지하고, 전폭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현재 내 삶에 인생 광풍이 휘몰아친다고 해서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인생 고난들을 통해 나의 믿음을 순수하게 하고, 이 땅에서의 재미와 소망 대신, 하나님 나라에서의 기쁨과 소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심히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과 그동안 동고동락하며 함께 지내왔지만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서 오는 놀람과 두려움입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지금까지 그들이 알고 따르는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시고 좋으신 선생님이었습니다. 광풍을 경험하면서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부로 살던 시절, 바람과 바다는 거대한 자연으로서, 내가 순응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누구도 바람과 바다는 거스를 수도 없고 대적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순응하며 거기에 맞춰 사는 것이 삶의 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떠십니까? 바람과 바다도 말씀 한마디로 순종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도 고치시고 귀신도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것은 또 다른 차원의 기적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해 가시는 표적이다.” 예수님은 성부, 성령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세상과 자연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하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인간 스승 정도가 아닌, 예수님의 존재 자체에 서서히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이제껏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인가보다는 자기들의 안전과 미래에만 관심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내 인생이 과연 잘 풀릴까? 그런데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들을 통해 예수님을 더 깊이 인격적으로 경험해 나가게 됩니다.
여러분! ‘믿음’이라는 게 뭘까요? 믿음은 나의 결심이나 확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지정의, 전인격적으로 아는 만큼 믿음이 생겨갑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되는 근본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신앙생활은 나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도우시고 인도해 가시는 예수님에 대해 눈 뜨고 인식해 가는 과정입니다.
파도는 어떻습니까? 한번 지나가면 더 이상 오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파도는 또 옵니다. 또 다른 파도가 옵니다. 그러면 파도가 올 때마다, 인생 광풍, 인생의 고난이 주어질 때마다 우리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까?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 자체만 보기보다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능력만 주시하다 보면 그와 같은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면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능력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신뢰할 때 우리는 요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기적도 행하실 수 있는 능력자이십니다. 자연 세계까지도 다스릴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대목은 기적 자체보다 기적 이면에 보이는 전능하신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고 목자임을 붙들어야 합니다. 한 목사님은 광풍은 나이에 비례해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한배를 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28:20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한배를 타고 가십니다. 예수님이 함께 할 때 파도를 즐기는 서핑 애호가들처럼 오히려 광풍을 웃으며 즐기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 항해 가운데 나와 함께하시고 도우시며 선한 길로 이끄시는 예수님을 확신하고 경험하면서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5장 1,2절을 보십시오. 고난의 광풍을 헤치고 마침내 거라사 지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커먼 뭔가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옵니다. 제자들의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오랜만에 쉬려고 떠난 여행이 광풍에다가 뭔가 오싹하게 만드는 것이 튀어나오니 공포 여행이 된 것 같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온몸이 더럽고 악취가 납니다. 뼈 골격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삐쩍 마른 데다가 상처투성이입니다. 옷은 입은 듯 벗은 듯 다 찢어져 있습니다. 그의 거처는 음산한 무덤가입니다. 뭐가 그리 억울하고 답답한지 늘 괴성을 지르며 돌로 자기 몸을 자해하며 피를 흘립니다.
우리는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귀신 들린 것과 정신질환은 구분됩니다. 정신질환은 질병이고, 귀신 들린 것은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귀신이나 악령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도 대개 주로 무서운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접해 왔습니다. 과거의 미신적 사상에 현대적인 상상을 더한 창작물만 보다 보니까 다 꾸며낸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귀신이나 귀신 들리는 일은 성경에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고 지금도 목격할 수 있는 현실입니다. 영화나 거짓 종교 등을 통해 이런 현실을 왜곡하고 과학과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귀신의 세력을 부정하게 하는 것은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외에 또 다른 인격적인 존재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천사들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을 가까이서 섬기도록 창조된 존재들로 사람처럼 육체는 없는 영적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영적 존재로서 육체의 죽음은 없습니다. 또 천사끼리 결혼해 또 다른 아기 천사, 수호천사를 낳지도 않습니다. 처음 창조된 숫자가 계속 유지됩니다. 천사는 영적 존재로 물리적 법칙에 제약을 받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처럼 전능하거나 전지하거나 편재하거나 영원하지는 않지만, 사람보다는 강하고 지혜가 있고 더 빠르게 이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더러운 귀신’이 나옵니다. 아까 천사 이야기를 했는데, 많은 수의 천사 중 실제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던 천사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사탄 혹은 마귀라고 부르는 악한 천사입니다. 또 그를 따라 함께 타락한 천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한글 번역 성경에서 ‘귀신’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조상들은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더러운 귀신 들렸다는 것은 결국 귀신들이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그 사람을 완전히 사로잡아 통제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의 특징은 그 어느 누구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자기를 제어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그를 제어하려고 쇠사슬로 매어두고 발에는 고랑을 채우기도 했지만, 이 사람은 귀신에 들려 그 힘이 엄청났습니다. 쇠사슬도 끊고, 고랑도 다 깨버리고 사람들에게 간섭받지 않는 이곳 음산한 무덤가로 와 있습니다. 이 귀신 들린 사람을 구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귀신은 군대 귀신, 즉 떼 귀신이라고 했는데 이 떼 귀신보다 더 강한 자만이 그를 구원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어떻게 도와줍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귀신의 세력들에 짓눌려 파괴적인 삶을 살고 있는 그를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명령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9절을 보십시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여기서 이름은 그 사람의 전 인격 존재를 의미합니다. 이 사람은 이제까지 자기 존재적 자아를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이름을 물으신 것은 귀신 들린 그 사람이 자기의 진정한 자아를 깨닫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지금까지 귀신들에게 속아 참된 자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귀신이 자기인지, 자기가 귀신인지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떼 귀신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 살았습니다. 귀신 들린 모습이 그 사람의 본래 인격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본래 이름이 아닙니다. 창세기에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이는 본문의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존재 자아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새로운 삶의 출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름을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귀신이 대답합니다.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떼 귀신이 이 사람에게 들어와 지배하고 있으니 그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정체가 폭로된 귀신들은 더 이상 그 사람 속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귀신들은 가까이에 있던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시자, 더러운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 떼에게로 들어갑니다. 귀신 들린 이천 마리의 돼지 떼는 갑자기 바다를 향해 달려가 몰사합니다. 다시 한번 귀신들의 폭력성을 보게 되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의문들이 생깁니다. 귀신들은 왜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을까? 돼지 떼가 몰사하면 귀신들은 어디로 갔을까? 예수님은 이천 마리나 되는 불쌍한 돼지들을 왜 죽게 내버려 두었을까? 등등. 물론 이런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고민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한 사람을 괴롭히던 악의 세력이 얼마나 강하며 파괴적인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무덤가에 있던 그의 모습을 보면, 소름이 돋고 끔찍합니다. 또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다에 뛰어들어 몰사하는 모습은 누구도 보지 못했던 끔찍한 장면입니다. 귀신이 떠나고 본래 자아를 회복한 그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던 사탄과 귀신들의 세력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 한 사람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긍휼을 볼 수 있습니다. 돼지 이천 마리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한 사람의 영혼을 더욱 가치 있게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한 생명을 구원하시고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세상 어떤 것도 아끼지 않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큰 위안을 얻을 수 있고 예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깊이와 너비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결국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몹쓸 죄에 빠지고 어떤 악한 사탄의 세력이 우리를 짓누를지라도 이 예수님은 그 무엇도 희생하며,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희생하더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까지 인도해 가십니다.
셋째, 예수님의 절대적 권위를 알 수 있습니다. 엄청난 힘을 가진 떼 귀신이지만, 그들조차도 예수님의 허락을 구하고 움직여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왜 멸하지 않고, 돼지떼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셨는지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성경이 밝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기서 멈춰야 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허락하셨을 때에야라 떼귀신이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욥기에도 보면, 하나님의 허용 아래 타락한 천사들이 욥을 시험할 수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자연계뿐만 아니라 영적 세계까지도 영향력을 끼치는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아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몰려왔습니다. 거기에는 귀신 들렸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17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기 지역에서 떠나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사람이 아닌 경제적인 돼지떼였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실 때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있기를 간구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19절을 보십시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거라사 지역 사람들에게 큰일은 돼지 이천 마리가 물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고침 받는 것은 작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귀신 들린 한 사람이 구원받은 것을 ‘큰일’로 생각하십니다. 죄로 쓸모없고 망가진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를 온전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만큼 이 세상에 ‘큰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온전하게 된 것도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큰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광풍들을 잠잠하게 하실 수 있는 권능의 주님이십니다. 떼 귀신도 제압하셔서 영적 세계도 다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구원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서론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징검다리 밟아가듯 예수님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배워가면서 예수님의 권능의 세계, 예수님의 깊고 넓은 은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