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종교개혁을 이룬 후 분명 개신교회는 가톨릭보다 우월했었다. 그것은 가톨릭이 성경보다 교권의 우월성을 주장할 때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바티칸과
목숨을 건 투쟁에서 교인을 설득해야할 루터의 입장은 95조의 반박성명을 위시하여 지속적인 반론의 강의를 해야 했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을
제시하는 유일한 방법이 강론이었다.
그는
사목신부가 아니었고 수사신부로 신학교의 교수였다. 회중을 미사집례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이루는 신비의 제사보다 부패한 교권의 도전이
급선무였다. 그런 와중에 생명의 위협을 받고 도피생활을 하며 성경번역에 착수하고 미사전례를 간소화한 것이 오늘날 개신교의 예전이 강의식
말씀중심의 회당의 예전을 모방한 예배로 정착하면서 그 권위를 목사의 사제직에 맞추게 되고 마치 용상과 같은 의자를 만들고 제단이 노일 자리에
목사가 좌정하여 회중과 마주 앉음으로 하나님의 자리에 정좌하게 하는 관습이 세월과 함께 목사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실제
있었던 농촌목사의 의식을 소개한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점심식사시간에 담임 목사가 독상을 받고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젊은 집사가 들어왔다. 그
집사를 불러 밥상에 마주 앉히며 하는 목사의 말에 주위에 있던 의식이 있는 교인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XX 집사! 어서 오게,
나하고 이렇게 마주앉아 식사하면 이것이 바로 성찬식이야!”
이 말을 듣는 순간
교인들이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막혀 했을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것이다.
무의식중에 실수라 하기에는
비슷한 사례가 비일 비재하다. 신의 대언자란 말을 즐겨 쓰는 목회자일수록 교인을 섬기는 자세가 아니고 군림하고 그들의 대화는 상대를 얏 보고
반말을 주로 사용한다. 자신의 유식함을 자랑하고 학위를 내세우며 공부하지 못한 교인을 무식하다고 하대하며 함부로 대한다. 목사들은 은혜를 끼치는
사람이란 고정관념이 집사가 늦게 도착하여 목사의 밥상에 마주앉게 되었을 때 그 목사가 한 말에 숨겨진 의식이 엿보인다.
당연히
교인을 종 부리듯 함으로 자신은 종의 종임을 잊고 기고만장하는 목사들의 의식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착된 것이고 이것은 개신교의 예전이 바로
되지못함으로 세월과 함께 그들의 의식이 바뀐 결과로 온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 털어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제사장이 신 앞에 대부분의 시간을 왕의 용상과 같은 의자에 회중을 마주하고 앉아 제사를 드리는 나라가
있을까? 이렇게 마주 앉은 자는 제사를 받는 사람의 모습이다. 심지어 회중의 죄를 고하는 대표 기도자도 회중을 마주하고 앉아 제사를 받는 다면,
이것은 착각도 이만 저만한 착각이 아니란 것이다. 이제 저런 모습으로 제사를 지내는 사제의 입장은 신을 적당히 조정하면 되는 것이다. 사제의
요구에 따라 축복을 빌면 축복하고 저주를 빌면 저주를 주는 신으로 인간인 사제의 조정을 받는 신으로 전락하고, 필요에 따라 사제는 축복 권을
활용하고 목적을 달하면 된다.
법보다
도덕성을 강조하고 도덕과 율법보다 인간의 심성을 감찰하는 신앙의 세계는 당연히 이성적이고 인격적이어야 한다.
잘못된 예전은 엄밀히 이야기 하여
사제도 스스로 속고 회중은 사제에게 속는 ‘속고 속이는’ 사술의 노름이란 것이다.
거짓말하는 습관은 영혼에 사형(私刑)을 가하는 것과 같은 해를 입힌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거짓말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사람이 저지른 첫 번째 죄는 속임수의 결과였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느님이 내린 명령은 금지된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와는
그것을 만지지 말라는 명령이었다고 말했다. 그 뒤로도 역사를 통하여 거짓말은 온갖 잔혹과 유언비어, 사기극의 어머니가 되어 왔고 살인과 전쟁의
전주곡이 되었다. 남에게 아픔을 가하는 잔혹한 행위, 남의 고통과 절망을 모른 척하거나 나아가서 즐기는 행위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보지
못한 결과로 파생된 것이었다.
한국개신교
예전은 목사는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 연출한 십자가 사건의 재연이라도 수백명의 교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십자가를
타고 넘기를 몇번씩하는 이런 무례한 예배가 행해진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 십자가상에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 (가상 7언) / 볼륨을 높여주세요!
십자가를 외면하고 돌아 앉아 예배하는 목사님들의 의식이 궁금합니다.
* 십자가를 등지고 돌아 앉은 목사님들은 마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제사장들 모습 같아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왜? 돌아 앉아야 하는 지요?
십자가의 사건은 범죄 한 인간을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리기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인데 당연히 하나님을 향하고 십자가를 향해야
한다.
그 정신을 외면하고 느끼지 못하는
목회자들의 자세를 보며 어이가 없었다. 기획된 연출이라도 전 교인을 고난주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심의 현장에 참석케 하고 그 앞에서
무덤덤하게 돌아 앉아 있는 목사들의 이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여야 할 것인가? 가상 7언에 가슴 찢어지는 한숨과 아파하는 교인의 심성과
그 모습 앞에 십자가를 등지고 않아 있는 목회자들 - , 그 무뎌진 심정에 놀랄 뿐이다.
가톨릭의 미사전례는 감실에
성체가 모셔지고 제대에 성골이 모셔진 상태에 이루어진다. 성체와 성골이 모셔지면 교인은 성당 중앙통로를 중심으로 좌 우로 이동할때 필이 무릎을
끓고 경배을 하여야 이동이 가능한것이다. 보이지 않는 성체와 성인의 유골에도 이렇게 경외심을 가지고 미사를 드리는 모습과 십자가를 타고 넘고,
십자가를 등지고 예배를 드리는 개신교의 목사들의 모습은 너무도 극과 극을 치닫고 있음을 보게된다.
미사는
한편의 연극처럼 완벽한 연출을 통해서 진행된다. 사제와 사제를 돕는 부제, 그리고 아동들로 이루어진 복사, 촛불, 등, 재, 성만찬의 빵을 드는
행위 등등, 참으로 볼거리가 많다. 내가 여기서 가톨릭의 미사를 폄하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들은 그것 나름으로 신학적 의미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우리 개신교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줄여져 말한다면, 그들의 미사는 많은 것을 '보여줌'에 그 특징이 있고 우리
개신교의 예배는 오직 말씀을 '들음'에 있다.
인간의
종교적 감정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 정통 교회의 리터지(예전)라는 것도 결국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정서적이고 심리적으로 종교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라는 점에서 말이다.
기독교 예배의
리터지(예전)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감정과 심리를 고조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고 훨씬 심층적 영성을 깨우는 데에 목표가 있다.
개신교의 예배는 기념의 의미이다 몸으로 살아가는 삶의 제사가 아닌 것이다. 이는 목회자의 의식이 잘못된 데서 오고 잘못된 의식은 예전의 잘못이
낳은 열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