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롯데 시네마에서 재경 고교 동기생들과 함께 기록영화 <건국전쟁>을 보고 와서 떨리는 가슴으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영화를 감상하면서 그동안 <의열단>의 고향 밀양 독립운동 대하장편소설 [떠오르는 지펑선]의 제2부 4권을 집필하면서 겪었던 저의 복잡한 생각들이 제대로 가닥이 잡히는 듯한 가슴 설레는 감동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대에 하와이에 건너가 각기 다른 방식의 독립운동을 펼치면서 갈등을 겪었던 대표적인 선각자 두 사람-
황해도 평산도호부 출신의 재미 독립운동가 이승만과 강원도 철원 출신 재미 독립운동가 박용만의 대립 관계가 새삼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3.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700만 명이나 되는 대일본제국의 군대를 상대로 불과 수천명밖에 안 되는 대한독립군으로 무력투쟁을 벌인다는 것은 중과부적이라며 <외교 독립론>을 주장하였으며,
1919년 4월에 서울에서 세칭 한성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외무총장에 선임되었던 박용만도 그해 9월 상해에서 각처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를 통합해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을 때도 역시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이승만에 맞서 <무력투쟁론>을 주장하면서 북경에 도착하여 신채호와 신숙 등, 이승만의 독립노선에 반대하는 인사들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를 결성하였지요.
그 후, 각 파벌간의 갈등 속에서 1923년 3월 중국 상해 인민대회당에서 국내외 각 계파의 민족 대표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국민대표자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박용만이 임시정부 불신임운동에 앞장서는 등, 계파간의 대립과 갈등이 고조되었는데,
그러한 혼란을 우려한 이회영은 아우 이시영과는 달리, 처음부터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의 위치에 서기도 하였지요.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이 앞선 나머지 독립운동 방략을 두고 각 계파의 갈등이 이렇게 극에 달하였던 그때 그 시절 상해 임시정부 외무총장이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실력양성론>,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 독립론>과
박용만, 신숙 등의 <무력투쟁론> 중에서 여러분들은 과연 어느 쪽의 주장이 시의적절하였다고 생각하시나요?
자유시 참변이 있었던 그 당시는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 직후라, 그들의 무력지원이 절실했던 고려공산당의 상해파 대표 이동휘를 비롯하여 여운형, 안병찬, 박헌명 등도 모두 무력투쟁론을 견지하고 있었지요.
그러한 갈등 속에서 불신임을 당하고 물러난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등을 지내며 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아직도 그 어느 쪽에도 선뜻 손을 들 수 없는 입장이라면 이번 기회에 반드시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절찬리에 상영되고 있는 기록영화 [건국전쟁]을 서둘러 관람해 보시기 바랍니다.
독립운동의 방략을 두고 배가 산으로 가는 식으로 사공이 많았던 그때와 다름없이,
왜곡된 역사적 진실을 까맣게 모른 채 아직도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이념 논쟁의 질곡에 함몰되어 있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역사의 진실부터 확실히 먼저 알고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6.25와 같은 비극을 두번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선진 조국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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