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단풍이었네 / 박헬레나
가을이 깊어간다. 건너다보이는 어린이대공원의 오색단풍이 석양을 받아 처연하게 빛난다. 여름 더위를 피해 숲 그늘을 찾아 오가던 인적이 갈바람에 뜸해지면서 공원은 쓸쓸함마저 감돈다.
일찌감치 땅에 떨어져 구르는 잎, 나무 위에서 빨갛게 , 노랗게 색 잔치를 벌이는 잎, 아직도 푸른색을 띠고 청청하게 매달려 있는 잎, 한 몸체에 생명줄을 잇대어 있는 잎들도 각각 생존의 길이가 다르다. 요절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백수를 누리는 사람이 있듯, 잎들도 제가끔 타고난 수명이 있다.
낙엽을 밟는다. 발밑의 감촉이 폭신하다. 구수한 낙엽 향, 어느 주검이 이토록 향기로울 수 있을까. 그 냄새는 아득한 기억 속의 황금들판에 가 닿는다. 베어 논바닥에 눕혀놓은 익은 벼의 향기, 그 위에 후드득 메뚜기가 뛴다. 손에는 골풀 줄기에 가지런히 꿴 메뚜기가 고물거린다. 먹을 것이 귀하던 그 시절, 저녁 짓는 아궁이에 구운, 설익어 푸르뎅뎅한 메뚜기를 우리는 다투어가며 꿀맛으로 먹었다. 생각만 해도 구토가 날 것 같은 그 맛은 다행히 기억에 없다.
타작 마당은 늘 신이 났다. '와롱와롱' 기계소리와 일꾼들의 고함소리, 이손저손 날아다니는 볏단, 마당에 쌓이는 알곡, 몇 달 후 메꽃 피는 보릿고개가 기다릴지라도 가을걷이 때만은 풍흉豊凶의 결과에 상관없이 들판이고 마당이고 사람의 마음까지도 풍성했다. 한들 가득 출렁거리던 가을은 곳간에 곡식가마니로 쌓이고 저장창고에는 과일상자가 키를 높였다.
햇곡이 날 때까지의 식량이요, 농비農費요, 우리들의 학비였다. 한 해 살림에 충분한 양은 아니었으나 마술을 부리는 어머니의 손끝에서 살림은 큰 낭패 없이 근근이 이어갔다. 타작 마당은 기계화된 세월에 밀려나고 볼을 때리며 날던 메뚜기도, 그때 그 사람들도 다 사라져가고 없으나 계절은 어김없이 가고 또 온다.
한 잎 두 잎, 나무들은 쥐고 있는 잎들을 가만가만 내려놓는다. 겨울나기 준비다. 앙상한 가지만 남을 때까지 끝없이 덜어내리라. 보일러 기름을 넣고 김장을 하고 잡곡을 사들이고, 인간이 월동준비로 소복소복 모아들이는데 반해 자연은 가진 것을 끝없이 덜어낸다. 가벼워지고 가벼워진다. 우리는 더 채우겠다고 앞만 보고 내닫느라 비움의 아름다운 표정을 살필 겨를이 없다. 자연과 인간이 이렇게 엇박자를 놓을 때 나는 갑자기 경건해져서 욕망과 꿈과 열정이 조신하게 제 길을 가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본다.
울긋불긋 물든 가을 숲을 걷는다. 제 할 일 다 마치고 삶의 이력대로 각각의 색깔로 물들어가는 자연, 순리를 받아들이는 겸손한 변신이다. 얼마나 맑게 살았으면 저리도 고운 빛깔로 물들었을까. 생각이 거기에 닿으면 나는 무슨 색깔로 물들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고르지 못한 보폭, 조금은 불안한 발자국을 찍어온 나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그 색깔에 자신이 없다.
숲을 걷는 나의 머리카락도 단풍 못지않게 울긋불긋하다. 그러나 아름답다기보다는 궁색하다는 표현이 맞을 성싶다. 머리 밑에서 솟아오르는 흰 가닥과 경계가 또렷한 염색머리, 붉게 탈색된 머리카락의 끝부분이 층을 이루어 거의 흉물에 가깝다. 지금 우리는 문명의 힘을 빌어 많은 것을 거스르며 산다. 본색을 감추고 덧칠하고 포장까지 한다. 그러기 위해서 웬만한 번거로움은 기꺼이 받아들인다. 사흘을 멀다하고 머리염색을 하고 외출 때마다 화장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성형까지는 아니지만 인공치아 임플란트도 했다. '머리에 먹물 들이고 이 빠진 데 박 씨 박는다.'는 옛 가사의 한 구절이 이 시대를 겨냥한 예언 같다.
얼마 전부터 머리염색을 그만두었다. 순리에 한 발 다가가고 싶어서였다. 조금 더 지나면 내 머리는 명주실타래 이고 가는 여인처럼 백발이 될 것이다. 가을이 깊어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이 나이에도 틈틈이 윤기 흐르는 검은머리의 유혹을 받는다. 염색을 하면 십 년은 더 젊어 보인다는 말이 귀에 꽂힐 때마다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흰머리가 어떻다고.
흰색은 모든 빛깔을 다 지워버린 무색이요, 어떤 것으로도 오염되지 않은 색의 바탕이다. 햇빛과 바람에 바래고 바랜 무명천의 빛깔이요, 유구한 세월 이 땅을 지켜온 백의문족의 민족혼이다. 굳이 감추고 싶었던 흰머리는 여한 없이 살아온 한 생애의 이력이자 힘을 다해 뿜어내는 마지막 광채가 아닌가. 그토록 궁금했던 나의 단풍빛깔이 흰색이었음을 나는 왜 오랜 시간 깨닫지 못했을까. 생명의 순환이 빚어낸 자연의 색, 영예로운 은발, 오! 그것은 나의 단풍이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