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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의 시조 휘(諱)를 후손인 제가 “류차달”하는 것은 불효이고 김선궁(金宣弓)도 大丞公이지만 선산김씨들은 諡號인 順忠公이라 하고 있으나 그래도 일부에서는 김선궁을 대승공이라 하기에 대승공 보다는 감히 휘(諱)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2. “류차달 대승공 탐구 시리즈”는 1/4∼4/4까지 인데 “뿌리깊은버드나무”카페에 초안을 공개하여 댓글을 받고 문헌을 확인하여 수정보완하였으나 1/4의 내용이 2/4에서 증복되는 부분이 있지만 1/4은 문화류씨족보에서 태조를 지원한 내용과 배경을 위주로 했고 2/4는 1/4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며 3/4은 서남해안 전투에서 군량미를 제공한 내용이며 4/4는 대승공 사우입니다. 3. 제가 발표한 글에서 처음에는 참고문헌이나 그 단어 설명의 각주를 그 페이지 끝이나 논문 끝에 달았는데 제글을 읽는 대부분 종원들꺼서 각주자체를 이해를 못하고 있어(페이지 아래 써놓은 글이 무슨 말이냐 등) 각주를 문장 중간에 넣게 되었으니 양해 바랍니다. 4. 제가 어렸을 때 영암 모산 어른들(그 어른들도 윗대어른들에게서 들었던)로 부터 들은 구전 내용을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1990년대는 이곳 시립이나 대학 도서관과 관련 신간서적을 구입(한줄의 대승공, 흥률사 글 때문에 책을 사기도 했음)하여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서 한자 한 글자를 옥편에서 찾다 못 찾아(한자를 정자가 아닌 약자를 자기필체로 흘려 쓴 한자) 한자를 잘하신 분을 찾아간 경험이 있고 타문족보를 복사해 와서 대조하다가 2010년대는 인터넷으로 모르는 한자도 찾고 조선왕조실록도 볼 수 있어 과거 조선조에 선조들이 고위관리가 아니면 접근하기 어려운 자료를 검색할 수 있어 조사한 자료를 정리 하였습니다. 5. 지금은 다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구전이 대부분 사실이지만 하정공후손과 관련 내용이 많아 이번 대승공 자료에는 하정공 자료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6. 대승공에 관련 자료를 그동안 “뿌리깊은 버드나무”카페에 올리면서 완성된 글이 아니기에 의견을 주고 다음에 완성되면 글을 올리겠다고 했는데 미완성 대승공 관련 글을 퍼 나르기하여 자기 성씨 홍보 자료로 문화류씨에서 이런 글이 있다라고 인용하신 분은 이번 대승공 시리즈를 참고 하십시오. 그러나 전에 올린 대승공 자료는 미흡한 점이 있으나 나름대로 참고할 만한 글인데 이번 씨리즈에는 전에 글에서 많은 부분을 줄였기에 소소한 글에는 전번 대승공 글이 참고 될 것입니다. 7. “류차달 대승공 탐구 시리즈 1/4”은 2019년 문화류씨 유주춘추에 투고한 글이며 2/4 3/4 4/4는 추후 유주춘추에 투고할 예정이지만 유주춘추를 매년 1,500부를 발행하는데 문화류씨가 2008년 무자보 수단에 317,846명이였고 2010년 인구통계에서 문화류씨는 류씨 90,313명+문화유씨 237,314명=문화 柳씨 합계 327,627명으로 대부분 柳씨가 유주춘추를 볼 수 없고 여자분들도 친정에 관심 있으신분은 각종 柳 씨 카페나 밴드에 활동하시기에 이번에 1/4, 2/4, 3/4, 4/4를 “뿌리깊은 버드나무”카페에 올리고 대종회홈페이지에도 올리겠습니다. |
先蹟探究
대승공 사우와 파종중 탐구
하정공파광주종친회장
대승공 33세 류재균
1. 서론
견훤은 892년 5천명으로 무진주(현 광주)에서 후백제의 왕이 되는 견훤은 26살 나이에 후백제를 세웁니다. 견훤은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라했는데 전주로 옮기는데 본인이 신라관리라 했기에 서남해안 호족들은 장보고를 죽인 신라를 조정으로 생각하지 않기에 서남해인 호족들의 보이지 않는 저항으로 9년만에 전주로 옮깁니다.
① 류문이 알고 있는 대승공(이하 선조 존칭 생략함)께서
○ 흥률사에 가서 왕건이 군량미가 없으니 도와주라는 꿈을 꾸었다.
○ 흥률사에 간 날의 100년전 四海皇帝가 흥률사에서 만났다.
○ 2등개국공신이다.
○ 903년 나주 침투 때 류천궁 선박수리소에서 지원 받았다,
○ 오다련이 왕건의 침투로를 안내했다.
② 왕건을 적극 지원한 류천궁 오다련은 처족이라 개국공신 명단에 없지만 대승공은 다른 개국공신처럼 시호를 받은 기록이 없기에 서원에서 유림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임란후에 대승공 큰아들이라는 조작 인물이 나오면서 대승공 공훈을 가공인물이 했다는 일이 있었지만 개국공신이 된 이유를 문화류씨 족보에 있는 내용중에 대승공께서
○ 왕건에게 점령지에서 군량미를 확보하면 천심(인심)을 얻지 못하기에 군량미 걱정을 말라고 군량미를 지원하였고
○ 흥률사 뜰에서 졸고 있을 때 왕장군을 도와 달라는 꿈을 꾼 시점이 4명 해상황제(호족)가 흥률사에서 만난지 백년후 대승공 祖父와 왕건 祖父 작제건과 만난 기록이 흥률사증수기에 있고 903년 나주 출천 때 류천궁은 선박과 家兵을, 대승공은 군량미를, 오다련은 침투로 안내를 할때 대승공 나이가 20대이며 대승공父와 용건(왕건父)과 교류가 이어졌기에 궁예 관심법에 걸리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왕건의 나주 침투를 도와주게 됩니다.
2. 유주의 대승 지방관 대승공
왕건은 896년에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장수가 되었습니다.
후백제와 교전에서 거듭 승리하여 전라도 나주와 경상도 서부 지역에서 견훤의 군사를 여러 번 격파하고 906년 상주의 사화진,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와 나주를 공략했고 이어 충주와 청주 등의 충청도 지역과 경상북도의 상주 등을 점령해 태봉국의 세력권을 넓혔습니다.
나주를 공략해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 태봉 국력을 확장시켰습니다.
뛰어난 전과를 바탕으로 궁예에 총애를 받아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에까지 올랐고 918년에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웠습니다.(출처 : 미디어인천신문)
태조 18년(935)에 신라왕 김부(金傅,경순왕)가 항복하자 신라국을 없애고 경주(慶州)라 하고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하여 부호장 이하 관직 등을 주관토록 하였습니다. 이에 여러 공신들도 또한 이를 본받아 본주의 사심관으로 삼으니, 사심관은 여기에서 비롯하였습니다.【『고려사』권75, 「지」29 [선거3] 전주 사심관】
대승공은 태조의 사심관 정책에 따라 대승 지방관으로 5대손 寵대 까지 유주에서 살다가 6대손(대승공7세) 公權선조 때 중앙(개경) 정게로 진출하여 三韓甲族으로 명성을 갖게 됩니다.
3. 파종중
① 을유보(영조41년 乙酉,1765) 대는 파종중이란 개념이 없이 모두 문화류씨종원 이었습니다.
무자보 총목 93쪽 을유보서1에 의하면 “근래 숙종 기사(1689)년간에 宗丈 處厚께서 또 5권의 족보를 편수하였으나” “목천애 사는 종인 지평 匡國씨가 자기 派로써”처럼 이 때는 派 를 영남 호남 정도로만 사용하였으며 ○○종장, ○○씨라 불렸습니다.
② 정사보(순조3년 癸亥,1803)
무자보 총목 97쪽 정사보 서문에 의하면 “十世始分封文化則甲乙二派晉州全州瑞山善山四派則姓貫雖異而本則同豊山柳氏出於襄毅公一派, 10세에 이르러 비로소 분봉하였으니 문화는 갑을 2파로 나뉘고 진주 전주 서산 선산 4파는 본관이 비록 다르나 그 근본은 같고 풍산류씨는 양의공(하정공 파보는 襄懿公로 표기 됨)에서 나온 일파” “四世五公之稱自文簡公至文正公忠成公貞愼公章敬公, 4세5공이란 호칭이 있었으니 문간공으로부터 문정공 충성공 정신공 장경공에 이르기까지” 등으로 갑파 을파가 이 때부터 생겼습니다.
“하정공, 양의공, 송암공, 서산공, 지후사공, 좌의정공, 그 밖에 각파에 고귀한 관작이 연잇고” 로 기록하여 派를 지정하지는 않고 ◎◎公후로 표기하았습니다.
③ 병인보(丙寅,1926)
무자보 총목 103쪽 서문에 의하면 “봉군이 6인이 있으니 문산, 서령, 곤산, 문평, 전성, 진산이요 또 4세에 5공이 상계하여 국가의 성전을 크게 올렸으니 문간공, 문정공, 정신공, 장경공, 온정공이 곧 그 시호입니다”
※ 파종중은 정사보 이후 자연스럽게 발생한 듯합니다. 4세 5공을 정사보에 있는 충성공을 병인보에서 빼고 온정공으로 교체합니다.
④ 一家六封君
高麗後期 1200年代 대승공 9세 樞密院事 諱 淳 一家는 모두 封君을 받았으니 우리나라 歷史上 前無後無한 光榮입니다.(대승공 10세분들)
㊀ 諱 成比 文山君 諡號 忠誠 正憲大夫左右衛上將軍判禮賓寺事
㊁ 諱 資成 文山君 贊成
㊂ 諱 成澗 瑞寧君 卿相
㊃ 諱 元庇 文平君 左贊成
㊄ 諱 良梓 全城君
㊅ 諱 仁庇 晉山君
※ 대승공12세에 諱 鎭 文化君, 諱 仁琦 文化君이 계십니다.
※ 일부종원 오류 : 諱 孝金은 좌윤공(左尹公)이신데 문화군(文化君)이라 하는 종원이 있으며 갑파 을파를 없애자는 종원이 있는데 선조들이 지금까지 사용해온 갑파을파를 없애자고 하지 말고 본인이 스스로 사용하지 않으면 됩니다.
4. 대승공 사우(祠宇)
대승공이 왕건에게 처음으로 군량미를 지원 했던 전투가 나주전투이기에 나주에 대승공 사우를 건립하기로 합니다.
① 大東祀誌에 1933년(계유) 사우건립을 통문을 경향각지 종원에게 보내고 1934년(갑술) 10월 19일 경성 시흥 족선조 고양공 제각(都有司 約堂 柳起赫, 고양공종회장 류민성님 祖父)에서 전국종원회의를 하기로 했으나 일경 방해로 모이지 못하고 경성 광화문밖 족인집에서 류대승 사당을 장단군 진서면 전재리(영조조에 류대승 사우자리)에 견립하기로 결의하여 터를 잡고 役事를 진행중에 관계자(관암 류상열)가 일경에 구금되어 役事를 중단하였으나 1945년 “나주는 고려의 동쪽 도읍으로 신라 고려 조선에 明賢碩德이 많이 배출하였고 본손들의 세거지으로 하늘에 계신 선조 영령들께서 이곳에 陟降(혼령이 오르고 내림)하시는 곳”이라면서 나주 동호리 대승공 사우를 건립하기로 합니다.
※주1 : 나주가 고려의 수도라는 것은 1010년 거란침략때 현종이 나주로 피신왔으며 본손의 세거지라는 것은 하정공후(영암) 중문지후사공후(담양) 좌상공후(본량) 검한성공후(화순) 충경공후(무안) 들의 세거지가 나주목 관할이었습니다.
有司가 정해지고 걍향각지 일가와 유림과 외손의 헌성금과 좌상공 서산(諱 自湄, 대승공 16세)공 후손들의 재물과 役事 제공하여 祠堂인 大東祠를 완공하고 1946년 성균관에 “대동서원”을 등록한 후 9월 19일 대승공 신위를 모시고 유림주관으로 향사를 모십니다.
② 나주에 1946년 대동사를 창건한 이유로 903년 대승공이 처음으로 왕건(궁예장수)를 군량미를 지원했다는 근거를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며 류차달은 애비 없는 자식이냐?고 하면 현재 작제건(왕건 조부) 오부돈(오다련 아버지) 최우달(최응 아버지)처럼 대승공父 기록이 없는데 그렇다고 알에서 태어낳다(김알지) 박에서 태어낳다(박혁거세) 지네 꿈을 꾸고 임신했다(견훤) 오이 먹고 임신했다(도선국사)는 설화를 만들라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대승공 祖父나 아버지는 계시지만 지금까지 이름을 알지 못하는데 설화를 만든다는 것은 불효이며 대승공 선계를 찾는 노력을 계속해야 후손의 도리 입니다.
③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은 후손 윤관이 있는 것처럼 대승공 후손에 류공권(대승공7세)이 있어 류공권 묘지명에 당시 풍습대로 4대까지 아버지 총(대승공6세) 조부 보춘(대승공 5세) 증조 노일(대승공4세) 기록이 있고 안동권씨 권보(權簿) 부인 문화류씨 묘지명(대승공10세 류승 정신공 딸)에 대승공 류차달(1세시조) 류효금(2세) 류금환(3세) 기록에 의한 문화류씨 선계 기록을 믿어야하는데 대승공 윗대는 기록이 없는데 “애비 없는 자식이다”라고 비하하는 말을 하면 스스로 품격을 낮추는 경우가 되고 대승공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5. 나주 완사천
완사천공원에 완사천(전남기념물 95호)은 왕건과 장화왕후의 러브스토리가 담겨있는 곳입니다. 공원으로 조성된 완사천에는 왕건과 장화왕후의 만남을 형상화한 현대적 조각작품이 설치돼 있습니다.
완사천 인연으로 오다련의 딸은 왕건의 아내가 됐습니다. 이런 사연이 없었더라도 왕건은 오다련의 딸을 아내로 맞이 했을 것입니다.
지지기반이 약했던 왕건은 정략결혼을 통해 지방호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완사천 러브스토리는 어쩌면 이런 정략결혼을 정당화하고 미화시키기 위해서 후세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왕건은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국호를 고려라 하고 철원 포정전에서 왕으로 즉위했지만 고려의 군사력은 견훤의 후백제에 비해 열세였습니다.
왕건이 신라호족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전세는 역전되었습니다.
결국 신라 경순왕이 935년 고려에 투항하고 견훤에 이어 신검도 936년 왕건에게 항복하여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는데 대승공이 처음으로 왕건에게 군량미를 제공한 사실을 홍보하고 있지 않습니다.
① 나주시청에서는 오다련이 나주목 압해현(목포) 생활무대이고 나주에 本家가 있는 것을 배경으로 장화왕후가 결혼 전에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 왕건에게 주었다는 왕사천(나주시청앞 소재)과 영산강 황포돛배 “왕건호”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으며
② 광주 광산구청에서는 “희여재 누리길”을 삼도동 석문산 희여재 일원에 누리길을 조성하는 사업을 사업비 5억 원을 투입하여 5km를 희의재라 홍보하고 있습니다.
왕건과 나주 오씨부인(장화왕후)의 나주전투에 6년 머문 동안 왕건은 사랑을 이뤄 아들 무(고려 2대 임금)를 낳았고 왕건이 개경으로 떠날 때 행군을 멈추고 오씨부인이 사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재회를 다짐한 곳이라 합니다.
③ 영암군은 1010년(현종 원년)에 거란이 군사 40만을 이끌고 침략하였고 1011년(현종 2) 현종이 나주로 피란하여 남해포(현 영암군 시종면)에서 자고 있을 때 꿈에 백발 수신(水神)이 무안 몽탄으로 피신하라는 암시를 주어 거란군 위험을 피할 수 있었기에 해신당을 짓고 인근 6개 고을(영암, 나주, 해남, 강진, 영광, 함평)의 수령들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합니다.
※주2 : 현종에게 백발 수신이 피신하라는 부분은 왕건이 영암 덕진포 전투에서 몽탄강을 건너라는 부분과 동일합니다.
④ 무안군은 나주 나씨 집성촌의 마을 - 청호1리 주룡(청룡) 마을을 왕건이 서남부 지역을 공략하면서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해서 주룡’이라고 현종을 왕건을 바꾸어 선전합니다.
6. 대동사 홍보
대동사입구에 “희여재 유래” 같은 대승공과 나주전투 안내판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대동사원지에 나주가 동방의 성지(광명의 터)라서 대승공 사우를 창건한다는 기록인데 왕건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홍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① 류천궁이 왕건을 지원한 근거자료(전남 나주시 한국콘텐츠진흥원의 Culturing) 류천궁편에서 “~~류천궁과 왕건이 처음 연결을 가진 것은 왕건이 나주를 정벌하러 갈 때인 903년 무렵이었다~~”에서 패서지역 정주호족 류천궁은 대승공 가문과 함께 활동했기에 Culturing처럼 대승공이 903년 왕건을 지원한 것입니다.
903년 나주1차 전투는 권훤이 왕건군대가 오는지 몰랐다니 소규모 병력이였고 910년 나주2차 전투는 견훤이 3,000명을 방어 했다니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었을 것이며 위 자료처럼 수천명 병력 동원에 군선과 군량미가 필요했고 914년 나주3차전투에서는 더 많은 군량미가 필요했는데 궁예가 무섭고 또 궁예 장수인 왕건에게 류천궁이 도움을 부탁할 사람은 대승공뿐이었습니다.
나주전투는 3차이지만 912년 영암 덕진포전투와 몽탄전투에서 위험에 처한 왕건을 구해준 백발수신 도움과 고려 건국후 927년 안동 공산성전투에서 신숭겸과 옷을 바꾸어 입고 탈출한 왕건이 덕진전투 몽탄과 공산성에서 2번 죽을 고비를 넘기는데 평산신씨대종회와 곡성 신씨문중에서는 신숭겸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데 문화류씨는 대승공께서 군량미를 제공한 사실을 홍보하는 것이 미흡하기에 대동사가 성역화되면 대대적으로 홍보해야 합니다.
① 912년 견훤은 덕진포에 주둔하고 왕건은 영산포에 주둔하였고 칼을 간 숫돌을 채굴한 礪石山天池(현 영암군 신북면 월평리)는 왕건의 부인(오다련 딸)이 여석산 숫돌에 용천검을 갈아서 왕건에게 건네주었고 다음 날 왕건은 전투에서 대승할 수 있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자료)는데 나주시처럼 영암군에서는 여석산천지를 홍보 하지 않고 있습니다.
② 수많은 전투에 군량미를 제공한 대승공의 선조는 류차달 선조 “컬처링”에 “~~ 얼마 후, 류씨 부친(문화현 장교)이 사망해 장례를 치르면서 묏자리를 정하고 땅을 파니 호랑이가 나타나 막아서 파지 못하게 했다. 이어 호랑이는 다른 산으로 가서 땅을 발로 파기에 그 자리에 부친의 묘를 썼다. 그 뒤에 대승공이 태어나 승상의 자리에 올랐고, 이 사람이 문화(文化) 류씨 시조이다.”라 하고 있다.
※주3: 한국콘텐트진흥원 자료에서 류차달 부친이 문화현 장교였다는 것과 대승광 관직이 승상이라는 것이 오류이며 수정을 요구했으나 답변이 없습니다. 문화현 장교는 문화현 호족으로, 승상은 대승으로 수정을 요구했습니다.
③ 류차달 선조에 대한 오류
류차달선조는 부친묘(호랑이가 정해줌)→문화현 장교→류차달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류씨 족보에는 대승공이 서해안 해상무역에 종사하여 부를 축적하여 유주 문화현으로 이주하였고 대승공 아들 류효금이 호랑이를 구해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4 : 도선국사가 용건(용륭)에게 집을 크게 짓고 성씨를 왕씨로 고치면 천하는 다스릴 후손이 나온다고 한 것이 왕건이 태어난 것이고 문화현 장교에게 호랑이가 부친 묘터를 잡아주고 태어난 인물이 류차달이란 것이 왕건과 류차달 이야기 흐름이 비슷합니다.
④ 대동사 창건 주도하신 류상렬
관암 류상렬 자료 : 호남기록문화유산홈페이지/관암유고(경은유고耕隱遺稿)
7. 결론
① 나주목 역사
나주목은 757년 금산군(錦山郡또는 錦城郡)으로 고쳐 무주(武州:광주)에 예속시켰고 영현으로 회진현(會津縣,나주다시일대) 여황현(艅艎縣,광주본량동일대) 철야현(鐵冶縣,나주봉황면일대)을 두었습니다.
1018년 나주목은 5개의 속군(무안 담양 곡성 낙안 남평)과 11개의 속현(철야 반남 안노 복룡 원율 여황 창평 장산 회진 진원 화순)을 거느렸고 고읍으로 압해현(押海縣)이 있었습니다.(나주시,다음백과)
그래서 1945년 대동사를 창건할 때 나주군 본량면 신촌에 좌상공후손, 무안에 충경공후손, 담양에 중문지후사후손, 화순에 검한성공후손, 나주비읍에 하정공후손 세거지입니다.
② 대동사 원지에 나주가 동방의 성지라는 것은 태봉국 왕건이 나주를 기반으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고 고려 태조가 나주백성의 기반으로 고려가 Korea로 되어 오늘에 이르기 까지 대한민국을 만들어준 곳이며 대동사터를 도선국사와 무학대사가 “文千武萬 滿月掛西”의 성지라해서 대승공 음덕으로 자손만대 번영을 약속한 땅입니다.
그리고 당시 나주땅인 여황(본량) 무안 담양 곡성 화순 비읍(모산)에 대승공 후손들이 대승공 홍복으로 살아온 곳에 대동사를 창건하게 되는 것은 문화류문의 행운입니다.
③ 1974년 3월 柳根榮(고양공종회장 류민성님 父)선조님을 주도로 문화류씨 대종회를 창립하면서 나주(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 신촌)에는 대승공 사우가 있으니 대종회관은 대한민국의 중앙인 대전에 두기로 홥니다.
④ 1946년부터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 대동사에서 유림봉사로 대승공 향사를 모시고 2019년 포천 모성사에 대승공 향사를 자손 봉사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공주 동계사는 (사)숙모회 주관으로 신라충신 박제상과 함께 대승공 향사를 봄 가을로 모십니다.
첫댓글 좋은 정보 잘 보았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연구하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