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게 말(正語)합시다!
한 마디 말이 남의 가슴에 못을 박기도 하고 찡그린 얼굴에 웃음꽃을 피워 주기도 합니다. 적의(敵意)에 가득 찬 오해도 따뜻하고 바른 말 한마디에 봄 눈 녹듯 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심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달콤한 말은 듣는 순간에는 기분이 좋을지 몰라도 진실을 아는 순간 즉시 불쾌해 지는 법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짓는 행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마음으로 하는 행동 즉 생각, 사유입니다.
둘째, 입으로 하는 행동 즉 말입니다.
셋째, 몸으로 하는 행동 즉 표정, 동작, 일입니다.
입과 몸으로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게 되어 있으며, 가장 인간적인 행동은 바로 입을 통한 행동인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중요성은 동서고금의 모든 성현이 강조하신 것으로 불교에서도 그 중요성은 더욱 강조됩니다.
그것은 열 가지의 행위 즉 10업(十業) 가운데 마음으로 짓는 업과 몸으로 짓는 업은 각각 셋씩인데 비해 말로 짓는 업은 네 가지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서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빠른 마차라도 혀의 빠름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불급설(駟不及舌)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순자(荀子)』 「영욕편(榮辱篇)」에서는 ‘좋은 말을 남에게 베푸는 것이 비단 옷을 입히는 것보다 더 따뜻하다(善言煖於布帛)’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 중요한 말을 다룬 팔정도의 세 번째 지분인 바른 말(正語)에 관해서 살펴보고 같이 수행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바른 말은 부처님 당시의 인도 말인 빨리어로는 삼마와짜(Sammavaca)라고 합니다.
말의 효과는 육체적인 행위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마음의 행위보다는 직접적이며 어떻든 그 중요성은 결코 간과할 수 없습니다. 말은 생명을 살상할 수도 있고 적을 만들어 전쟁을 일으키는 나쁜 쪽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죽음에 처한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분열을 치유하고 평화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말을 받아쓰는 문자는 세계가 하나 되는 정보화시대에 여러 가지 기호로 바뀌어서 전 세계인에게 동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 있는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바른 말의 사용 방법으로 네 가지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첫째,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不妄語)입니다. 모든 거짓말 속에는 탐내고(貪), 성내고(瞋), 어리석은(痴) 3독(三毒)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신 또는 가까운 사람들의 물질적 이익, 명예, 편안함 등을 얻기 위해 하는 거짓말은 탐욕에 기초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거나 죽게 하고, 사업을 망하게 하거나 명예를 훼손되게 하는 거짓말은 성냄과 관계가 있습니다. 비합리적인 강박관념이나 침소봉대(針小奉大)의 과장, 웃기기 위한 거짓말 등은 그것이 얼마나 쓸모없고 하찮은 것인가를 모르는 어리석음에서 온 거짓말입니다.
부처님을 찾아온 스님들이 부처님 계신 곳을 묻자 장난끼가 발동한 라훌라는 부처님이 계신 곳과는 다른 곳을 가리키며 거짓말을 하고는 허탕치고 온 스님들을 보며 고소해 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안 부처님께서는 세숫대야에 물을 떠오게 한 뒤 그 물에 부처님의 발을 씻고 나서 라훌라에게 마시라고 하고, 그 물을 버리라고 합니다. 마실 수 없다고 대답하고 쉽게 버리는 것을 보고 부처님은 교훈을 주십니다.
“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데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에게 사문성(沙門性)은 이렇게 작고, 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며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에게는 사문성(samanna)이 이와 같이 버려진다.”
『맛지마 니까야』에 나오는 말씀인데 거짓말을 하면 결국은 수행에 의한 정신적인 경지 또는 그의 성취를 의미하는 사문성이 없어진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사문성은 요즘의 표현으로 하면 불성(佛性)이라고 해도 좋고, 좀 더 직접적으로 나타내면 ‘중 맛’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짓말을 계속하면 결국은 승려가 아니며 부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간질하거나 모략하지 않는 것(不兩舌)입니다.
“중상하는 말을 버리고 중상하는 말을 삼간다. 여기서 듣고 저기에서 그들 사이에 이간되도록 말하지 않는다. 혹은 저기에서 듣고 여기에서 이들 사이에 이간이 되도록 말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이간된 자들을 화합하고, 화합된 자들을 격려하고 조화에 즐거워 하고, 조화에 기뻐하고 조화에 환희하며, 조화를 만들어내는 말을 한다.”고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의식구조에서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의 5근(五根)이 각기 물질과 빛깔(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觸)을 받아들여 의근(意根)이 현상(法)과 함께 종합, 비교, 분석하여 그것을 잘 전달하면 좋은 지식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지식이 되어 나쁜 행동에 의한 악업(惡業)으로 쌓이듯이 한 쪽에서 들은 정보를 잘 판단해서 상대방과 나와 모두의 이익과 평화를 위해 바람직한 쪽으로 전달하는 것이 바로 화합된 말입니다. 그래서 바른 말의 구조하는 ‘나쁜 말을 하지 말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좋은 말을 하라’ 즉 바른 말을 하라는 정법 권유의 형식이 됩니다. 한마디 말에서 전쟁이 시작되어 사람들을 죽게도 하고, 그 말이 싸움을 중지시켜 살게도 하는 것입니다.
셋째, 쓸데없이 번지르르한 말을 하지 말라(不綺語, 不雜穢語)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말을 버리고 쓸데없는 말을 삼간다. 올바른 때에 말하고 사실에 맞는 말을 하며, 유용한 말을 하고 가르침(法)에 합당한 말을 하며, 계율(律)에 맞는 말을 하되 가치 있는 말을 적당한 때에 합리적으로 신중하게 의미 있도록 행한다.”
『앙굿따라니까야』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쓸데없는 말이란 초점이 없고, 의미가 없으며, 횡설수설에 가까운 농담과 함께 상대방의 마음에 들기 위해 억지로 행하는 아부성 발언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쓸데없는 말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말을 서로 나누는데 방해가 되고 결과적으로 상대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리게 되어 자신이 구하고자 하는 이득과도 궁극적으로는 멀어지게 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언어생활을 하면 바른 생활이 되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넷째, 추악한 말을 하지 말것(不惡口)입니다.
거칠고 상스러운 말로 듣는 이에게 불쾌감을 주는 추악한 말은 바로 욕설입니다. 비꼬는 말입니다. 모욕적인 말입니다.
“추악한 말을 버리고 추악한 말을 삼간다. 부드럽고 귀에 듣기 좋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와 닿고, 점잖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 받고, 많은 사람에게 유쾌한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러한 말을 말한다.”
욕설은 충돌적으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계산적으로 남을 이간질하는 양설(兩舌)보다는 의도적이거나 심각한 악업에 의한 과보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로해서 좋을 것을 굳이 악업을 지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와 있는 욕설은 모두가 어른들이 만들어서 어른들이 퍼뜨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나 해악도 모르는 어린이들까지 멋모르고 욕설을 해댐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성이 나빠질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X팔, XX하네, X하다 죽을XX -----등의 욕설을 함으로써 그 의미를 모르는 어린이가 무심결에 배워 쓰게 되면 그 해악은 심각합니다. 요즘 운전할 때나 인터넷 용어에도 그런 좋지 않은 말을 무심코 또는 재미로 하는데 이는 안될 것입니다. 의도가 업을 짓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설사 살인자나 강도를 만나 자신이 그와 같은 해를 당할지라도 화를 내어 악한 말을 하지 말고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고 『맛지마니까야』에서 가르치십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린다면 첫째, 거짓말하지 않고 참말을 하며, 둘째, 이간질하거나 모략하는 말을 하지 않고 화합시키고 칭찬하는 말을 하고, 셋째, 쓸데없이 번지르르한 말하지 않고 순수하고 곧은 말을 해서 믿음을 주며, 넷째, 추악한 말을 하지 않고 사랑스럽고 고운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잡아함(雜阿含)』 권28, 785경에 의하면 이 바른 말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첫째, 세속의 유루유취(有漏有趣)로서 선취(善趣)로 향하는 것과 둘째, 성스러운 출세간(出世間)의 무루불취(無漏不趣)로서 바야흐로 고(苦)를 다하고 고의 종말을 향하는 것이 있다. 망어(妄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기어(綺語)를 여의는 것을 세속의 유루유취로서 선취로 향하는 것이라 한다. 성제자(聖弟子)가 고(苦)를 고로, 집(集), 멸(滅), 도(道)를 집, 멸, 도로 바르게 사유하고, 사명(邪命)인 입(口)의 네 가지 악행과 모든 나머지의 악한 구행(口行)을 제하고, 무루(無漏)로서 원리(遠離)하여 착(着)하지도 고수(固守)하지도 않으며, 섭지(攝持)하여 범(犯)하지도 않고, 시절을 건너지도 않고 방한(防限)을 넘지도 않는 것을 성스러운 출세간의 무루불취로서 바야흐로 고를 다하고 고의 끝을 향하는 것이라 한다.”
앞에서 말씀드린 네 가지 말은 바로 세속의 유루유취로서 선취로 향하게 하는 바른 말입니다. 즉, 참되고, 화합되며, 곱고, 순수한 말은 그 자체가 중생계의 좋은 말로서 6도윤회(六道輪廻)중의 악취(惡趣)인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에는 떨어지지 않고 적어도 수라, 인간, 천상의 선취(善趣)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선취에 태어나는 그 힘을 한 단계 더 높이 승화시켜서 괴로움의 끝을 보면 생사(生死)가 하나이고 따라서 없어진 상태인 열반(涅槃)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바른 말이 바로 출세간의 무루불취로서 고를 다하고 고의 종말을 향하는 바른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四聖諦) 즉 고, 집, 멸, 도의 진리를 바르게 사유하여 그에 대해 바르게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4성제의 진리를 설명만 듣고, 생각도 해보지 않고, 자기의 몸과 마음속에 대비, 체험해서 자기화하지도 않으면 거기에서 확립된 바른 견해에 의한 바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출세간의 바른 말은 바로 사성제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 의미를 바르게 말로써 자신과 남에게 전달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바른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스스로뿐 아니라 어쩌면 남에게까지 더 영향을 미치는 업이라는 것을 생각해서 꼭 실천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