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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1598년)
8. 일본에서의 평가
대부분 말년의 히데요시가 멀쩡히 있던 조선과 명나라를 괜히 건드려서 벌어진 실책으로 취급한다.
임진왜란에 의한 전체적인 국력 소모도 명과 조선에 비교해서 매우 적은 편이고,
그냥 히데요시 집권기의 분탕질 정도로 생각하는 정도.
이를 계기로 에도시대가 열렸음도 잘 알려지지 않아서 임진왜란,
그러니깐 분로쿠-케이쵸의 역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
일본 전국시대를 다룬 작품에서도 이 부분은 이순신만 짧게 언급하고 히데요시의 삽질이라는 것만 언급하고
넘어가는 등, 동아시아의 국제 정치적 측면에서도 엄청나게 큰 의미를 갖고,
일본의 정치 사회적 격변의 시점이 되는 사건임에도 결국에는 패배한 전쟁이라
그런지 인지도가 매우 낮다. 조선인 포로 10만 여명과 활자, 서적,
그림, 도자기, 두부 기술 등을 약탈함으로써 일본의 문화가 발전하는 기회가 되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히데요시가 개인적으로 일으킨 전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며 사실상
이순신 같은 일부 인물들 외에는 조선에서 명의 원군과 싸웠다는 서술이 많으며 이는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때문에 일본인들도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사실상
임진왜란은 조선을 교두보로 명과 치른 전쟁으로 인식하며 당장 전국
시대 관련 드라마만 봐도 명과 싸우러 간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렇게 유명한 전국 시대에서 임진왜란은 흑역사급으로 취급받는다. 기껏 얘기를 할 경우에 하는 말은 '필요 없는 전쟁이었다' 정도. 창작물에서도 "히데요시가 명을 치려다가 조선과 전쟁을 했다. 근데 졌다. 끝" 정도. 크고 아름다운 영웅들의 일대기를 그리는데 자세하게 하기도 힘들었을 듯. 가토가 호랑이 잡았다, 고바야가와가 벽제관에서 명군을 조졌다, 시마즈가 사천에서 명군을 조졌다, 노량 해전에서 시마즈가 이순신을 저격했다 정도.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소설)는 무려 32권짜리 역사 소설임에도 임진왜란 부분은 한 페이지 뿐이다. 임진왜란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에서 꽃놀이 하는 부분은 몇십페이지씩 차지함에도. 소설내에서 전쟁에 대한 비중이 매우 높음에도 무려 7년씩 끌었던 임진왜란에 대한 분량이 없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
뿐만이 아니라 같은 작가의 소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직전까지만 글을 쓰고 끝내 버린다.
이를 요코야마 미츠테루 7권짜리 만화로 만들었는데 마지막 페이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말년에 노망이 들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끝." 달랑 이 문장 뿐이다.
야마오카 소하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유명한 역사 소설 작가들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기 작품도,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시키면서 끝난다. 전국 시대를 배경으로한 무협 소설 작가인 시바타 렌자부로의 "무사"에서 임진왜란 진행 사항이 1페이지 반에 걸쳐 기술되었는데, 고작 무협 소설보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임진왜란을 묘사한 책을 찾아 보기 힘들다.
일본에서 임진왜란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서애 류성룡이 쓴 징비록이다. 현재까지 일본인들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성호사설에서 저자인 이익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서 번역한 저자 미상의 한 역사 평론에서는 임진왜란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수길 공이 본래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편안히 할 만한 술법이 없으면서 한갓 쓸데없이 군사를 일으켜 멀리 이웃 나라를 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군량과 무기를 천릿길에 운수하여 우리의 생령을 못살게 한지라, 이 때문에 신명에 죄를 얻어 그 몸이 죽고 3년이 못 되어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으며, 그 아들 수뢰공까지 마침내 원화(元和)의 전역에 죽었다. 그러므로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치는 자는 앙화를 받는다 한다.
이 외에도 강항의 간양록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있는데, 당시 강항과 대화를 했던 일본의 승려 등 몇몇은 조선의 처지를 동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당시 강항도 간양록에서 '일본 애들 중에도 사람 꼴하고 사는 사람들은 꽤 있구나' 하는 견해를 표했다고 한다.
역사저널 그날에서 패널로 나왔던 일본 교수는 색다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며, 일본 본토와 조선에 끼어 있던 대마도주 때문에 전쟁이 확대, 장기화됐다는 주장이다. 애초에 대마도 번주는 대 조선 무역을 위해서도 조선과 관계를 적절히 유지해야 했지만, 그러면서도 일본과의 관계 또한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이 번주가 일본이 조선을 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지 여부를 염탐하기 위해 보낸 통신사를 조선이 일본의 명나라 공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항복 사절로 자기 맘대로 목적을 바꿔 전했다는 것. 도요토미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자기가 명나라를 치면 온 조선이 자신의 편을 들어 합세할 것이라고 생각한 와중에 조선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반역으로 규정, 코나 귀를 베는 등의 잔인한 진압을 했던 것이라는 것.
일본의 임진왜란 관련 저작을 여러권 본 사람이 말하기를 그 어느 책도 임진왜란을 잘했다고 한 책이 없으며 언제나 무익하고 허무하다고 평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은 적어도 한 줄은 있고 비중이 높아지면 적의 장군이 아니라 “주인공”
도요토미 히데요시빠와 논쟁이 붙을 경우 임진왜란만 거론해도 한방에 데꿀멍시킬 수가 있다. 그만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생 전체에서 최악으로 삽질한 행동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일본에서는 히데요시가 말년에 치매를 앓아서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은게 아니냐는 주장까지도 있다. 실제 도요토미는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치밀한 전략가로 명성이 높았고 그런 행보를 보여줬는데 임진왜란기 도요토미의 행보는 과대망상&어딘가 나사빠진 행보로 악명높았다.
일본어 위키 백과에서 한국사 전반에 대한 묘사가 그렇긴 하지만, 특히나 임진왜란 부분은 한국과의 사료 해석이 극명하게 갈리며, 조선에 대한 틀린 묘사가 그득하다. 그 일례로 전쟁 전개 과정 설명 전 양측 전력 비교 문서에선, 조선군의 화포는 초기 사석포 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사거리가 100m도 채 안 되며, 조선의 활은 일본의 하고유미 보다 사거리가 현저하게 떨어지며 조총보다 낮은 수준이라고 수년째 아직도 명기되어 있다. 하지만 징비록에 따르면 신립이 조총을 낮게 평가했는데 임진왜란 직전 당시 고위층은 조총이 뭔지 다 알고 있었다. 소 요시토시가 조선에 왔다 가면서 조총을 선물로 줬기 때문인데 그런데도 신립이 낮게 평가한 이유는 쏘는대로 다 맞겠냐는건데 실제로 이 시대의 조총은 명중률과 사거리가 활보다도 떨어졌다. 즉 신립이 조총을 우습게 생각한 데에는 그 이유가 있지만, 이는 당시 조총이 다수의 인원이 일제사격하여 화망을 형성해 공격하는 무기였음을 간과한 것이다. 참고로 명중률을 확보하기 힘든 사정거리 이상의 적에게 화망을 형성하여 공격한다는 개념은 기원전 이미 중국 등지에서 확립된 개념이므로 신립이 말한 '쏘는대로 다 맞겠느냐'라는 말은 당시 조총 부대운용법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했던 소리다. 게다가 조총은 활과 달리 군집으로 쏘아대면 활보다 몇 배나 위력이 세다는 점도 간과하였다. 조선 후기의 군제에서 조총의 사격 사거리는 활보다 더 먼 거리에서 쏘게 법으로 정했다.
8.1. 조선 - 일본 내의 적장 인식
조선에서 아는 일본 장수가 수괴인 풍신수길 외에 선봉장이자 외교를 담당했던 '가등청정'과 '소서행장' 딱 2명 뿐이었다. 그외에 몇명이 사서에 이름이 나와 있기는 했는데 일본 장수 이름을 한자 그대로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이라고 적으면 후대의 우리가 "아!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를 뜻하는구나!"라고 알겠지만 당시 당대 조선 사람들은 일본 장수의 이름을 발음이 들리는 대로 한자로 적었다. 그 바람에 사서에 나온 사람이 누군지 현재까지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서에는 보통 '왜구', '왜적', '적'이라고 표기되었을 뿐이다. 적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그 외에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풍신수길의 뒤를 이어 일본을 지배하게 된 덕천가강 정도만 알려져 있다. 그나마도 일본을 지배했다. 끝. 이 수준이었다.
이는 일본 측도 마찬가지였다. '징비록'이 일본으로 전래되기 전에는 일본에서 아는 조선 측 장수라고는 '이순신', '균'(원균), '모쿠소 한간'(牧使 判官, 진주 목사 김시민), '세루토스'(함경북도 병마 절도사 한극함) 등 4명 정도이다. 이순신을 제외한 3명은 일본군에게 패전하거나 죽었다는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 일본은 이긴 전투와 이긴 상대방만 유명해졌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그림책이 대유행 하였는데, 이런 책에서는 모쿠소 한간이나 세루토스 등이 최종 보스급으로 나온다. 이순신은 그냥 거북선을 사용한 장수로 나온다. 심지어 '균'보다 비중이 적다. 잘해야 노량 해전에서 패배하여 죽은 장수라는 개소리로 언급되는 정도. 다만 거북선이라는 것이 워낙 충격적이었는지 이순신이 등장하면 조선 수군이 전부 거북선이 되어 나온다.
이순신과 균이 누군지 더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고, 일본 측에서는 뭐가 어떻게 잘못 전달된 것인지 모쿠소 한간은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담당하는 조선 최강의 장수로, 세루토스는 강원도,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를 담당하는 조선 국방의 책임자로 알고 있었다. 진주 목사 김시민의 경우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지만, 일본 측에서는 이 사실을 모른 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후임자였던 진주 목사 서예원의 목을 베고 이것을 조선 최강의 장수인 모쿠소 한간의 목이라며 일본의 히데요시에게 보냈었다. 세루토스의 경우 더 황당한데 함경도 끝까지 진격했던 가토 기요마사에게 함경 북도 병마 절도사 한극함이 항복하였다. 이를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의 국방 최고 책임자이자 북쪽 4개도를 담당하는 세루토스라고 선전한 것이다. 세루토스는 절도사의 발음이 일본식으로 변한 것인데, 김시민의 일본식 직책인 '모쿠소 한간'처럼, 일본에서는 고유 명사화되었다.
이러한 일본 측의 착각은 17세기 말 류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으로 건너가 번역하여 보급됨으로서 대부분의 착오들이 바로 잡혔고 이때서야 이순신의 이름이 일본 측에도 높이 평가되게 되었다. 조선 측 장수들의 정확한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으며, 일본 장수들이 활약한 전투가 이때서야 재조명되기도 하였다. 다만 '세루토스'만은 비슷한 글자도 없고 해서 끝까지 세루토스와 한극함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조선에서도 착각하여 세루토스를 조선에 표류한 외국인으로 오해한 조선 시대 기록물도 있을 정도다.
9.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의 평가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히데요시가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은 Alessandro Valignano가 1592년에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벌써 조선국을 정복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전쟁은 아무런 명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히데요시)의 정복욕에 의한 것입니다.
또한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조차도 일본군의 침략에 비판적이였다.
아무도 원하지 않은 전쟁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모함에 의해 저질러졌다
세스페데스 신부의 보고서 中
10.1. 조선, 일본, 명의 3대 대첩
조선의 3대 대첩은 진주 대첩, 행주 대첩, 한산도 대첩이다. 그러나 일본 측에서는 이 전투들을 잘 모른다. 모쿠소 한간 때문에 진주성 전투가 좀 유명한 정도. 행주 산성 전투는 조선 내 일본군 주요 다이묘들이 초호화 드림팀을 구성해서 10:1이라는 압도적인 병력으로 공격했다가 대패한 전투이지만 역시 잘 모른다. 17세기 경에 <징비록>이 일본에 유입될 때 까지, 일본인들은 행주 산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이긴 것이 명군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조선정벌기> 같은 당시 일본책에서는 이 전투를 안남성 전투라고 부르며, 털옷을 입은 이국적인 병사들이 산위에서 내려와 일본군을 공격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일본 내 주요 장수들이 다 출전한 진주성 전투, 행주 산성 전투와는 달리 한산도 해전은 일본에서 완전 듣보잡인 와키자카 야스하루 같은 C급 장수들만 출전한 전투라 일본 측에는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다.
반대로 일본 측에서 3대 대첩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벽제관 전투 (1593년), 가토 기요마사의 울산성 전투 (1597년 ~ 1598년),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천성 전투 (1598년) 이다.
벽제관 전투는 명나라 군이 기세 좋게 지원 왔다가 벽제관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대패하여 평양까지 도망간 전투로 역사책에 반드시 언급되는 중요한 전투이다. 또한 명나라가 더이상의 피해를 보지않기위해 일본측에 휴전을 제안하게되는 계기가 된 전투다. 울산성 전투와 사천 전투는 한국에서는 완벽한 듣보잡. 역사 매니아 아니면 도저히 모를만한 전투이다. 울산성 전투와 사천 전투는 조명 연합군이 임진왜란을 끝내기 위한 마지막 대공세인 사로병진 작전의 일환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조명연합군이 4방향으로 병진하여 육상 방향 3군데에서 패했는데 일본은 이를 임진왜란 최대의 대첩으로 보고 있지만, 반대로 우리는 남은 한 방향인 바다에서 진린과 이순신의 조명 연합 수군의 전투 노량 해전만 중요한 전투로 기억하고 있다. 서로 이긴 전투만 기억하는 것이다. 다만 일본은 노량 해전을 이긴 전투로 계산하고 있다.
조선 3대 패전을 쌍령 전투, 용인 전투, 칠천량 해전으로 보고 있고 그중 두개가 임진왜란 때이지만, 왠일인지 일본은 그 두 전투를 빼놓고 듣도 보지도 못한 전투를 3대 대첩으로 분류하고 있다.
조선의 가장 큰 패배였던 용인 전투와 칠천량 해전이 아닌, 듣도 보지도 못한 전투 3개를 일본이 3대 대첩이라고 한 것은 3대 대첩의 지휘관이 일본 내에서 유명한 장수라는 점과, 조선과 일본의 전투가 아니라 명나라와 일본군 간의 전투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벽제관 전투는 평양성에서 명군에게 패배하여 몰리다가 한방에 뒤집은 중요한 전투였고, 울산성 전투와 사천 전투의 경우 명나라가 패배하기는 했지만 일본군도 처절하게 싸운 전투이다.
일본의 임진왜란 3대 전투로 이치 전투, 평양성 전투, 벽제관 전투로 꼽는 평가도 있다.
명나라에서는 평양성 전투. 행주 대첩, 벽제관 전투를 임진왜란 3대 전투로 치기도 한다.
11. 조선, 명나라, 일본의 전후 상황
11.1. 조선의 전후
조선의 역사는 명백하게 임진왜란 전과 후로 갈린다.
왜란이 일어난지 7년 동안 조선은 전국을 다 합쳐서 막대한 인명 피해와 물자 피해 등을 보았으며 전쟁동안 일본군들이 상륙하여 전국 각지를 공격하며 조선 병사들을 몰살시키고 양민들도 학살하였으며 농토와 농촌 지역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대거 참전을 하였던 영향으로 젊은이들의 피해가 컸으며 미처 피난가지 못한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처녀와 부녀자들도 잇딴 피해를 입었고 여자들은 일본군에 의해 성추행, 성폭행, 임신까지 당하는 등 육체적, 정신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전쟁 범죄의 책임은 물론 조선군과 명군에게도 있는데, 조선군 역시 종종 민간인들의 물자를 털어먹었고 개중에는 조직적인 약탈도 있었다. 명군도 마찬가지. 명군은 남해 지역의 민간인들을 일본군의 앞잡이로 몰아 학살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조선 도적들은 이때다 싶어 힘없는 다른 조선인들을 유린하기도 했다.
문화재도 대거 피해를 입었다. 류성룡의 징비록과 이를 따른 선조 수정 실록에 따르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3궁이 방화로 없어졌고 여러 이설에 대해서는 여기 참고, 그야말로 종묘와 보신각, 사대문을 제외하고는 궁성과 육조가 다 타버렸다. 그나마도 일본군이 입성하면서 한번 더 손실을 입었다. 그 밖에 일부 사찰과 가옥들도 (당연히) 불에 타 없어졌으며 이 중 일부 문화재는 일본군이 약탈하여 일본 열도로 반출되어 버렸고 일부는 파손되었거나 완전히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없어지기도 하였다. 고려 실록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조차 전주 사고의 판본 1질만 남기고 다 소실되었다.
농업 및 산업 기반도 대거 파괴되었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150만결에 달했던 경작지가 임진왜란 후엔 30만결로 대폭 줄어들어버렸다. 이후 잇따른 가뭄과 호란, 몇십년 후 경신대기근 등의 천재가 겹쳐 조선이 임란 직전의 경제 규모를 완전히 회복하는 것은 영조 때 가서였다.
전후 조선의 국민 감정은 때려잡자 풍신수길 즉 반왜(反倭), 척왜(斥倭) 성향 및 호국 의식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전후 복구와 경제 회생 등에 총력을 기울였다.
보통 전쟁, 특히 방어전의 경우 무장들이 전공과 대중의 지지를 얻어 정치계에 큰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의 경우엔 좀 달랐다. 당시로선 고도로 발달한 중앙 집권, 관료제 국가였던 조선은 원래 공직자인 무장들은 물론 향촌에서 일어난 의병들을 국가의 통제 아래 편입시키려 노력했고 성공했다. 무엇보다 도원수 권율이나 왜란 이후 의병 활동을 명분으로 집권한 북인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지휘관 중에 적지 않은 수가 문신이었기에 무관들이 치고 올라올 여지가 별로 없었다. 굳이 뽑자면 이순신 정도가 치고 올라갈 여지가 있었고, 선조도 이를 알기에 엄청나게 경계했지만, 알다시피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한다. 이순신의 예에서 보듯이 유능한 무장의 상당수가 전쟁에서 전사했기에 고려 말 신흥 무장들의 집권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 힘든 환경이기도 했다.
다만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재난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라는 학계의 주장도 있었다. 파병만 했을 뿐인 일본과 명나라도 망했는데, 모든 재난을 뒤집어 쓰고 나라가 초토화된 조선은 아무일도 없다는 듯 이후 몇백년을 거뜬히 버텨 나갔다. 모든 책임을 져야할 조선 왕 선조가 물러나거나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죽을 때까지 더 강화된 왕권으로 호의호식하다가 죽었다. 조선의 어떤 정치 체계가 바뀌거나 주자학 사상이 무너지지도 않았다. 워낙 중앙 집권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어 어떤 재난을 겪어도 조선의 통치 체계는 끄떡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보다 국방력이 어느 정도 강화된 정도. 다만 조선 초기보다 국방력이 강화되었냐고 보자면 '글쎄올시다'이다. 그냥 사상 최악이였던 선조 초기보다 괜찮아진 정도이다. 즉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도 바뀐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일부 분야는 조선 초기보다 퇴보하였다. 예를 들어 과학이나 국방력 같은.
하지만 조선이 바뀐 것 하나도 없다는 주장은 이제 학계에서는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오히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일대 국란을 겪고도 그 체제를 유지한 개혁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더 집중하는 추세. 즉 16세기부터 계속되었던 폐단들이 어떻게 17세기를 거치면서 개혁을 할 수 있었는가에 집중하고 있다. 예를 들면 대동법
11.2. 명과 일본
명나라는 조선에 대군을 파병한 이후로 쇠퇴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조선과 일본에 집중하느라 여진족을 방치한 탓에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 - 청 왕조가 성립되어 심각한 위협을 주게 된 것.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경진년의 대기근까지 겹치며 이자성, 장헌충 등의 농민 반란까지 겹쳐서 일어나며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명나라는 이자성의 반군에게 베이징을 함락당하고 숭정제가 자살하였으며, 연달아 일어난 후금의 침략으로 완전히 멸망의 길을 걷고 만다.
하지만 임진왜란 탓에 명나라가 망했다는 말은 직접적 인과 관계가 없음을 유의해야 한다. 명나라는 조선을 돕느라 막대한 전비와 군사력을 동원해 이후 멸망한 것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으나, 사실 멸망까지는 몇십년의 세월이 더 소요되었다. 이미 만력제가 즉위하면서 이미 명나라는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는데 만력제가 얼마나 막장 황제였냐 하면 후한의 영제(靈帝)에 비견되는 암군이었던 것. 따라서 이 당시 명나라는 후한 말에 비견될 정도로 이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결국 임진왜란이 아니었어도 다른 경로로 인해 왕조가 멸망했을 가능성이 높았던 상황이었다. 다만 수많은 원인 중에 하나이며, 임진왜란으로 인해 그 시기가 앞당겨졌다고 보면 된다.
일본은 7년에 걸쳐 침공을 반복했으나 당장은 별다른 성과 없이 물러나야 했다. 침공을 주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위신이 심각하게 떨어졌으며, 경제적으로도 도요토미 파는 막대한 물자를 헛되이 써버린 탓(다이묘들은 피해가 적었다.)에 큰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버리자, 히데요시가 억누르고 있었던 전국시대 말기의 라이벌들, 특히 파병을 회피하며 세력을 온존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일본 역사를 크게 본다면 학자와 기술자 납치, 불상과 서적 등 문화재 약탈을 통해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살던 일본 서쪽 다이묘들과 그 백성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상식적으로도 명나라조차 조선 파병으로 재정이 흔들렸을 정도인데, 명나라보다 경제력은 떨어지고 병력은 더 보낸 일본이 아무 문제도 없었을 리가 없다.
또한 일본은 병사들만 보낸 게 아니라 병량 등 물자의 수송을 맡은 인부들, 왜성의 건축 등을 맡은 인부들도 잔뜩 보냈다.(戦夫라고 불렀다) 전후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일본 서부 지방의 백성들은 막대한 병역과 부역으로 인해 피폐해졌으며, 이걸로 인해 반란이 일어났고, 히데요시 정권이 흔들릴 정도였다. 오죽 일본 백성들의 고생이 심했으면 1594년 서생포왜성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가 자기 영지인 히고의 인부들에게 '지금이라면 집단으로 히고로 돌아가더라도 대관의 단속이 없으니 도망치려면 지금이다"라고 지시를 내린 문서가 발견될 정도였다. 일본 측 최고 지휘관 중 하나가 자기 인부들에게 도망치라고 종용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지는 알만하다. 아무튼 이 시대의 기록들을 보면 일본 백성들이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나오는데 일본 사극에서 임진왜란이 묘사될 때 비판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도 이 영향일듯. 다만, 일본에는 조선왕조실록이나 명사(역사책)같은 국가 편찬 정사 역사서가 없고, 정식 사료는 유력 가문들의 행장기 등을 통해 볼 수밖에 없는지라 일본 측이 전체적으로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는 집계하기가 힘들다.
서기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일본을 지배하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은 모두 이미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탓이며 자신은 오히려 그 도요토미 일족을 몰아냈고 침략에도 나서지 않았다며 전후 조선과 외교 복원을 요청하였다. 현대 시점에서 보면 매우 형식적이고 완전하지도 않았지만 전쟁 당시 일본군이 포로로 붙잡아온 조선 사람들을 어느 정도는 도로 돌려주는 사과 절차도 거쳤다. 그리하여 1609년에 조선과 일본은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화해하고, 양국 간의 통신사 사절단을 파견하게 된다.
12. 기타
• 일본군 사망자 중 군의 수장급 인물은 일본군 9군을 이끌다 거제도에서 병사한 하시바 히데카츠밖에 없고, 다이묘급은 당포 해전에서 전사한 도쿠이 미치유키, 명량에서 전사한 구루시마 미치후사 형제와 수원에서 매 사냥하다가 조선군의 기습으로 죽은 나카가와 히데마사, 부산에서 전사한 에가미 이에타네로. 총 4명으로 그 외에 다이묘급은 아니지만 야규 가문의 후계자 역이자 장남이던 柳生久三郞도 전사. 나머지는 모두 병사했다. 죽지 않은 나머지는 모두 돌아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6군 대장으로 참여한 고바야카와 다카카케는 휴전 중 일본으로 귀국 후 병사했다). 물론 다이묘들도 죽을위기에 처한 다이묘들은 많아서 . 행주 대첩 당시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 사단장급인 이시다 미츠나리, 참군 안코쿠지 에케이, 연대장급인 킷카와 히로이에 이들 장수들이 모두 승자총통에 맞고 중상을 입었지만 병사들이 업고 뛴 덕에 다들 목숨은 부지했다. 수군에서는 함대사령관급 인물인 도도 다카토라가 명량 해전에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노량해전에서도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대는 다이묘 하나 살리기 위해 거의 90%의 손실을 감수해가며 도주한다.
이렇게 일본 다이묘들은 전투에서 패해 할복하는 경우는 많지만 전투 현장에서 전사하는 경우가 드문 편이다. 그 이유는 위의 사무라이처럼 부하 사무라이들이 자기 목숨을 바쳐가며 필사적으로 영주를 지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인이 유독 충성심이 강해서가 아니다. 조선, 명 등 군인이 국가의 소속이고 상관이 전사해도 자신의 책임이 크게 없으면 평범하게 직무를 유지하는 관료제 국가와 달리, 봉건제 국가 일본에서는 군인은 국가가 아닌 다이묘의 소속이고 다이묘가 패해서 죽으면 휘하 사무라이들은 보통 로닌이 되어 알거지로 떠돌며 비참하게 생활하다 죽게 되기 때문인데, 조선에 파견된 일본 고위 무장 중에 전사자가 거의 없는 것도 이러한 일본의 사회 체제에 기인한 것으로 실제 노량해전의 경우처럼 일본군은 병사들은 다 죽더라도 다이묘 한명은 살리려고 기를 쓰고 노력했다
• 조선의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다시피 했지만 유일하게 제주도만은 전화를 피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왜구가 출몰해서 노략질을 하는 등의 피해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제주도를 공격 점령했다면 고립된 제주도는 일본에게 장기간 점거당했을 수 있었을 것이나 소규모 왜구들의 준동과 대규모 정규군의 상륙전은 엄연히 달라서 일본군은 제주도에 대한 공격을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 다만 이건 일본의 사정이고, 조선에서는 일본군이 제주도를 침공할 수 있다며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적이 있었다. 당시 제주 목사 이경록이 병력을 선발해서 본토에 지원할 것을 건의했지만, 조정에서는 제주도의 방위가 매우 우려스럽다며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대신 제주도에서 가축과 식량 등의 물자 지원을 하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제주도에서 소나 돼지 등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몇 차례 나온다.
• 언어 면에서는 반치음이 이쯤해서 소멸되며, 사람들이 하루에 얼마나 쓰는지도 모를 만큼 많이 쓰는 주격 조사 '-가'도 이 시기 쯤에 생겨났다(같은 역할인 '-ㅣ'는 체언에 받침이 있을 때만 쓰이게 된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으나 적자면 헤아릴 수가 없으니 각설하고, 고등학교 1학년 과정 국어와 국사를 공부하면 많은 내용을 알 수 있다.
• 국어학계에서는 정철 어머니의 서간문에서 '가'를 발견하고, 이것이 후대의 주격 조사 '가'의 전신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여기에서의 '가'는 동사 '가다'의 어간인 '가-'와 명확한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회의론자들도 존재한다. 일부 책에서 인선 왕후가 보낸 서간문에도 주격 조사 '가'가 발견되었고 1550년대의 일이라고 말하지만 역사상 인선 왕후는 효종의 비이고 최소 1650년대의 일이다. 위에서 말하는 인선 왕후는 인종의 비인 인성 왕후'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주격조사 '가'가 나타났다는 구절을 보면 조금 재미있는 것이 정철의 어머니의 서간문에는 '찬 구들에서 자니, 배가 세니러서(꼿꼿이 일어나서, 여기에서는 폭풍같은 설사가 일어나서) 자주 (화장실에) 다니니'라는 구절이고 인선 왕후 어필에서는 '두드러기가 불의예 도다 오르니'라는 구절로 모두 영 좋지 않은 상황에서 쓰였다는 것.]
•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이 점령한 조선 지역에서 양반 출신으로 추측되는 여자 아이를 주워다 자신의 양녀로 삼고 키웠는데 그녀가 줄리아 오타아(ジュリア おたあ)이다. 그녀는 고니시 유키나가로부터 영향을 받아 천주교를 믿고, 줄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면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당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 그녀는 자라면서 굉장한 미인으로 성장했는데 이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무척이나 아끼고 좋아했다. 하지만 당시 천주교를 탄압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줄리아 오타아에게 천주교를 그만 믿을 것을 권유하지만 줄리아 오타아는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천주교에 대한 신앙을 지켰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줄리아 오타아를 유배보냈는데 줄리아 오타아는 유배지에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 흑인 용병들이 조선군에 고용되어 참전하기도 했다. 명과 교역하던 포르투갈의 해군에서 용병으로 일하던 흑인 노예들을 참전시킨 것. 이들은 해귀(海鬼)라 불리는 해군 잠수병으로 복무했으며, 이들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고 실록에도 기록이 있다. 사실 이들이 특별히 전투 중에 이룬 업적은 없었지만, 국가 권력자가 술까지 주었다는 말이 있는걸 보아 매우 특이한 존재로 인식하긴 한 모양.
•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고추와 담배가 국내에 들어왔다. 조선 시대 이후의 곰방대는 결국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존재하는 것이며 지금의 배추절이 김치, 통칭 묵은지 역시 임진왜란 이후부터 먹기 시작했는데 그 전의 조선의 김치는 동치미같은 백김치, 짠지에 가까웠다.
•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만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망이 나는 시점으로 표현한다 / 본작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많이 띄워주는 편이라 임진왜란을 보고 이에야스가 "저 인간이 미친거 아닌가?"하고 히데요시를 까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다테 마사무네는 히데요시를 "조선이 순순히 길을 내줄 거라 믿은 멍청한 노인네"로 표현한 내용이 나온다.
• 유튜브에 어느 서양인이 8개월간의 한, 중, 일의 자료 조사를 토대로 9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이 있다. 영어로 되어 있으나 상당히 자세하고 양질의 자료를 정리해두었다. 1화 전투신은 불멸의 이순신, 징비록(드라마), 임진왜란 1592 등에서 따왔는데 일부는 제작자가 별도의 편집(효과음 및 배경음악 추가, 컷신 조정 등)을 가했다. 그 외에도 제작자가 보충을 위해 직접 단 댓글을 보면 상당히 디테일하게 자료를 조사했다는 흔적이 역력하다. 권율이 46세까지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거나 행주 대첩 때 일본군이 축차적으로 병력을 투입했으나 격퇴된 상황도 자세히 정리하고 있다. 조선이 명나라에게 원군을 청하자 명나라가 '혹시 조선이 명나라를 속이고 일본과 함께 명나라를 공격하려 드는게 아닌가?'라고 의심하는 대목에서는 한국사에서 역대 중국 왕조와 벌인 전쟁들의 목록(왕검성 전투,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 나당전쟁, 고려-거란 전쟁 등)을 열거하며 '역사상의 경험으로 인해 명나라는 조선이 그토록 빨리 무너진 것을 믿을 수 없었다'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기까지 한다. 이 때 배경으로 나오는 삽화는 안시성 전투를 묘사한 기록화이다. 또한 이순신은 거의 주인공처럼 묘사되며 이순신에 대한 해외 네티즌들의 찬사는 덤. 국명을 '명'(Ming), '조선'(Joseon)이 아닌 '중국'(China), '한국'(Korea)으로 통일하였는데, 유럽에서는 이것이 일반적인 명칭이라 혼동을 주지 않기 위해 저리 표기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영상이 지워지고 없다. 작중에 불멸의 이순신 관련 영상이 많다는 이유로 KBS가 저작권에 클레임을 걸었기 때문. 제작자는 한동안 채널을 중지하겠다는 발표문만 남겨놓고 채널을 잠궈놨다. 무슨 멍청한 짓이냐 KBS 이 영상 덕분에 한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외국인들이 많다는 점을 보면 자폭이 따로 없다.
• 호남은 한국전쟁의 낙동강방어선 역할을 하며 조선군이 임진왜란에 승리하는데 일조했다.비록 정유재란시기 남원성전투에서 지며 잠시 점령된적이 있지만 이치와 웅치전투 그리고 먼치킨장수인 이순신 권율등이 호남의 육군과 수군을 이끈덕에 왜군은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신나게 공격했지만 먼치킨들의 활약덕에 패하고 우회해 진주성을 공격하며 진출을 시도했지만 진주성은 철벽방어선 역할을 하며 실패했다. 그예가 바로 경상우수영 좌수영은 왜군에게 불타 소실되어졌지만 전라좌수영 우수영은 아직도 남아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출병을 명령한 공문서가 처음 발견되었다고 아사히 신문이 2019년 3월 28일에 보도했다.
• 아프리카 서부에 있는 나라, 가나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날 뻔 했다. (출처: 차이나는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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