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루부=졸본부여라고 나는 우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면 그 시조는 누구일까요. 기록에는 이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관찰자님은 소서노의 본남편인 우태의 조상이 계루부의 조상이 아닐까 라고 했는데, 그리 좋은 추론은 아닐 듯 싶습니다.
왜냐하면 고구려 및 백제 건국에 관한 여러 가지 전승 가운데 우태가 졸본부여의 왕이라는 저능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온조왕조에 본문을 이루는 고구려-백제 건국 기록(이하 1번 전승)에는 우태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추모왕이 졸본부여의 둘째 사위가 되어 왕위를 계승했다고만 하므로,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졸본부여 왕실에서 우태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백제본기에 주석으로 달린 고구려-백제 건국 기록(이하 2번 전승)에는 우태가 등장하는데, 우태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라고 되어 있을 뿐이며, 소서노의 전 남편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우태가 무슨 역할을 했는지가 전혀 나와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추모왕이 왕위에 오른 후에 소서노를 비로 취한 것으로 볼 때 우태를 졸본부여의 왕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습니다.
관찰자님이 우태와 주몽이 종형제뻘이다고 했는데, 글쎄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 모르겟군요.
계다가 우태파와 주몽파라는 말도 이해가 안됩니다. 우태가 북부의 왕실의 서손으로 따로 떨어져 나와 우태가 부족을 창립했다는 것은 어떻게 추론이 되는지 모르겠군요. 우태가 해부루의 서손이란 글귀 때문에 그렇게 추론할 수는 없지요. 1번 전승을 보면 추모의 장인인 졸본부여왕이 있다는 결론입니다. 또 내가 주장한 추모가 부여에서 내려와 졸본지역인과 결합했다는 것은 1번 전승에 무게를 둔 주장입니다.
2번 전승에서는 우태가 따로 부를 형성했다고 볼 근거가 없습니다. 우태가 시조이고, 주몽이 중조격이라는 것은 우태가 부를 형성한 어떤 결론이 나와야 합니다.
게다가 해부루의 서손이라면 우태는 곧 부여인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졸본지역에 토착했던 민이 아닌 주몽보다 앞서 이주한 사람이라는 결론이 되니까, 이것은 사실로 볼 수 없지요. 우태에게는 부여에서 탈주하여 이동했다는 전승이 없습니다.
백제에 관한 중국 기록을 보아도
송서, 남제서 등에는 백제 시조에 대한 기록이 없고,
양서에는 단지 동이의 삼한의 한 나라라고만 되어 있고,
위서에는 단지 그 선조가 부여로부터 나왔다는 기록만이 있습니다.
주서에는 백제가 그 선대가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인 듯하다. 구태란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에 나라를 세우니, 그 땅의 경계가 어쩌고 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여기서 구태는 백제를 세운 사람으로 등장할 뿐, 졸본부여의 전왕이거나, 소서노의 남편으로 등장하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이 기록으로 구태를 졸본부여의 시조라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
남사는 백제가 동이의 삼한국이라고만 되어있고,
북사, 수서에서는 색리국에서 탈출한 동명이 부여의 왕이 된 기록이 나오고, 그 동명의 후손에 구태가 있으니, 그가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서 동명을 해부루라고 볼 수 있을지 없을 지는 논란이 된다고 하더라도, 2번 전승에서 구태가 그 서손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정착한 곳은 대방고지이지, 졸본지역은 아니라는 것이 됩니다.
혹여 우태가 추모에게 쫓긴 것이 아닌가(소서노의 전남편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아내를 빼앗기고 탈출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지나친 소설적 상상력이라고 하겠지요. 구, 신당서는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라고 했을 뿐입니다. 일본 측에도 다른 전승이 있기는 하지만, 우태를 졸본부여의 왕으로 볼 가능성은 없습니다.
굳이 계루부의 시조를 찾겠다면 그것은 당연히 추모왕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때부터 고구려의 왕실이 되고 의미있는 역사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군요. 구태지요. 내가 착각했습니다. 주서, 북사, 수서 등에 모두 우태가 아닌 구태지요. 구태는 지난번에 글을 쓴 바 있는데, 부여의 위구태란 자가 워낙 중원사가들에게 유명해서 우태가 혹여 구태로 잘못 게재되어 전승될 가능성이 있지요. 그렇다고 해도 구태가 졸본부여의 시조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예 분명 구태는 부여왕 동명의 후손이라고 나와 있지 졸본부여와의 관련성을 적은 사서는 없지요. 그런데 구태는 후대 기록에 나타난 인물이라 사실 어떤 인물이 잘못 게재되어 전승된 인물이었을 가능성을 배재할수 없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류계의 우태는 분명하게 백제(비류백제 혹은 온조백제) 건국 이전에 죽은
첫댓글 주서에 나타난 백제 건국자는 구태 아닌가요? 우태는 삼국사기에만 등장하는 비류 온조의 또하나의 아버지일 뿐 그와 구태는 동일인물이 아닌줄로 압니다. 그리고 고구려 건국년대에 관한 선생님의 글에 감사합니다. 오히려 글을 자세히 설명해주셔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대체로 백제 문제는 백제시조 구태-부여 위구태 계열 관계, 구태-비류계 관계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대륙백제와도 연결될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군요. 구태지요. 내가 착각했습니다. 주서, 북사, 수서 등에 모두 우태가 아닌 구태지요. 구태는 지난번에 글을 쓴 바 있는데, 부여의 위구태란 자가 워낙 중원사가들에게 유명해서 우태가 혹여 구태로 잘못 게재되어 전승될 가능성이 있지요. 그렇다고 해도 구태가 졸본부여의 시조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예 분명 구태는 부여왕 동명의 후손이라고 나와 있지 졸본부여와의 관련성을 적은 사서는 없지요. 그런데 구태는 후대 기록에 나타난 인물이라 사실 어떤 인물이 잘못 게재되어 전승된 인물이었을 가능성을 배재할수 없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류계의 우태는 분명하게 백제(비류백제 혹은 온조백제) 건국 이전에 죽은
인물이니 백제를 건국했다는 구태와는 다른 인물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우태-비류계-구태로의 전승도 한번쯤은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