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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5목-0512일) 삼태극 하나님과 삼일의 하나님 그리고 성령의 시대
삼태극 하나님과 삼일의 하나님 그리고 성령의 시대
삼태극 하나님과 삼일의 하나님
태극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형이상(形而上)의 태극이고, 둘째는 형이하(形而下)의 태극이다. 후자는 만물의 근원으로서 태극을 말하고 전자는 만물의 창조주로서의 태극을 말한다. 형이하의 태극은 만물과 본질이 같고 형이상의 태극은 다르다. 창조의 관점에서 범신론(汎神論)은 부정된다. 우상숭배니깐, 형이상의 태극은 창조주 하나님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삼태극(三太極) 하나님이다. 태극 이외에도 무극(無極)과 황극(皇極)이 있다. 무극은 하나님의 근본이다. 무한자, 절대자 그 자체로서 인간은 전혀 알 수 없는 영역이다. 태극은 인간이 그래도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이 태극을 성리학에서는 태즉리(太卽理 : 태극은 곧 리다)로서 리(理)로 말한다. 원리, 법칙이다. 성경에서는 이를 말씀으로 기록하였다. 말씀의 원어는 로고스(Logos)다. 로고스의 의미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理)와 같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하나님과 말씀”이 나온다. 무극과 태극이다. 같은 절에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성리학에서도 무극과 태극을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 무극이 곧 태극이다)으로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이 브라흐만(Brahman)과 아뜨만(Atman)의 관계다. 힌두교에서는 범아일여(梵我一如 : 브라흐만과 아뜨만은 같다)로 말한다. 중용에서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을 말한다. 이것도 같은 내용이다. 하늘이 명한 것이 성(性)이다는 것으로 하늘이 무극이고, 성(性)이 태극이다. 성(性)은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는데, 그 성(性)을 리(理)로 말한다. 성즉리(性卽理), 이것들은 즉 무극과 태극, 하나님과 말씀, 브라흐만과 아뜨만, 하늘과 성(性)은 하나님의 두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과 알 수 있는 영역, 구분하자면 미지의 신과 기지의 신이다. 미지신(未知神)과 기지신(旣知神), 미지신을 두고 초월신(超越神) 또는 초월아(超越我)라고 하고 기지신을 두고 내재신(內在神) 또는 내재아(內在我)라고 한다. 이 둘을 합쳐 성경에서는 성부 하나님으로 말한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로고스(Logos)로 믿고 있다. 요한복음의 저 서술로 인해서, ‘하나님과 말씀’에서 하나님은 성부 여호와 하나님이고, 말씀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4절)을 보면 고개가 갸우뚱하게 된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고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빛(light)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 아닌가? 그렇다면 말씀 안에 생명이 예수님이라는 것이 되는 것 아닌가? ‘말씀’과 말씀 안의 ‘생명’은 구분되는 것이다. 어떤 번역본에서는 이것이 걸려서 ‘그 안에서’를 ‘그에게서’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 안에서(엔으로 1722번)’가 맞다. 영어 성경에서도 말씀 안의 생명(Life in Word)으로 번역하고 있다.
[NIV] (요한 1:4) <In> him was life
[KJV] (요한 1:4) <In> him was life
[NASB] (요한 1:4) <In> Him was life
예수님을 말씀 안의 생명으로 말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성육신 전까지 예수라는 인격은 존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존재는 있었다. 생명으로, 이것에 대한 이해는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란(受精卵)이나 태아가 적당할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고, ‘말씀’은 하나님 어머니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부성성(父性性)과 모성성(母性性)이다. 인간적으로는, 예수라는 인격은 성육신 한 이후에 생긴 것으로 그 이전에는 없었다. 그 이전에는 말씀으로 즉 성부의 인격으로 있었다. 성부의 인격은 비인격이라고 할 수 있는 초인격(超人格)이다. 하나님은 형이상자(形而上者)이니, 우리 안에 있기도 하지만 인간이 볼 때는 없는 것과 같다. 그에 비해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격을 지니고 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격은 신성하지만, 성부와 성자에 대한 이해는 영혼(soul)과 육체(body)로 보면 된다. 또는 속사람(internal man)과 겉사람(external man)으로 보면 된다. 이 둘을 두 사람이라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라 하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부와 성자를 이해해야 한다. 기독교식으로 로고스를 성자 하나님으로 믿고 영원 전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사도 요한이 말씀을 제시한 이유는 예수님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하나님이라고 하니, 그렇지만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지 않은가? 그분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존재로 그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해졌고 그것으로 제시된 것이 로고스(Logos)인 것이다. 예수님을 말씀으로서 묘사를 한 것은 하나님이 두 인격이다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본질, 기원이 성부 하나님이다고 말하기 위해서다. 성부 하나님에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추가해서 말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구원한다고 할 때 다른 하나님을 보내서 구원하는 그림을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다.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그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사야 9:6)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이다.”
(이사야 25:9) “그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황극(皇極)에 대한 이해는 창조를 생각하면 된다. 하나님에게 미지신(未知神)과 기지신(旣知神)만 있는 것이 아니다. 리(理)라는 것은 법칙인데 그 법칙만으로 우주를 창조할 수 없다. 법칙은 이율곡 선생님이 말했듯이 발할 수 없는 것이다. 리발(理發)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발하는 것은 기(氣)이지 리(理)가 아니다. 기발이승(氣發理乘 : 기가 발하고 이가 타는 것) 이 한 가지만 있을 뿐이다. 이를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라고 한다. (요한복음 1장 4절)의 “말씀 안의 생명”은 하나님의 에너지인 기(氣)를 가리킨다. 이것이 황극(皇極)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생명력, 활동력, 창조력으로서 기(氣)를 말한다. 태일(太一)이다. 태극일기(太極一氣), 이 대생명은 우주 만물을 있게 한 창조의 근원이며, 성육신 이전의 예수님을 가리키고, 성육신을 일으킨 지극히 높으신 이의 권능을 가리킨다.
(누가복음 1: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이 대생명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구약의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과 신약의 성령(Holy Spirit)이다. 이 둘은 형이하(形而下)의 신성한 에너지다. 태극(太極)으로부터 양의(兩儀) 즉 음양이기(陰陽二氣)가 나온다. 양기(陽氣)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 즉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고, 음기(陰氣)는 성령을 가리킨다(양은 위에 있고 음은 아래에 있다). 하나님의 영은 높은 곳에 있고 성령은 낮은 곳에 있다. 구체적으로 성령은 겉사람(external man) 중심인 물라다라 차크라(Muladhara chakra : 회음부)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속사람(internal man) 중심인 사하스라라 차크라(Sahasrara chakra : 정수리)에 있다. 구약의 안수는 하나님의 영의 입류로서 그 목적은 속과 겉을 통하게 하는 것과 쿤달리니(Kundalini) 각성이고, 신약의 안수는 성령의 입류로서 겉사람을 통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영만으로도 구원의 역사가 가능할 정도의 사람의 상태와 조건과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상황이 악화되었다.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과의 연결에 기인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흐르는 생명에 기인한다. 사람은 속사람과 겉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속에서 겉으로 에너지가 흘러가야 한다. 여기서 장애와 막힘이 발생하여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원인은 죄다. 죄를 치워야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겉으로 입류할 수가 있다. 이것이 처음에는 형통하게 흘러 괜찮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것이 어려워졌고 나아가서는 막히는 일이 발생했다. 물론 완전히 막히면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말하자면 그 통로가 협소해져서 미미하게 흐르게 된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막힘은 뚫릴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원위치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되어 갈수록 하나님의 역사와 사람의 구원이 요원(遙遠) 해지는 중이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이 내려오실 때쯤에는 극한의 상황까지 와 있었다. 영계의 환경 변화가 결정적, 그래서 그 당시를 택하셔서 사람으로 오시게 된 것이다.
쿤달리니가 거주하고 있는 물라다라(Muladhara)에는 쿤달리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상과 부모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유전성(遺傳性)도 있다. 성리학에서는 이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말한다. 에덴동산(Garden of Eden)에는 생명과(生命果, the tree of life)와 선악과(善惡果, the tree of good and evil)가 있다. 에덴동산은 물라다라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생명과는 쿤달리니를 가리키는가?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엄밀히는 아니다. 생명과와 선악과는 창조된 것이 아닌가? 유전된 것이 아닌가? 쿤달리는 신성한 에너지다. 그러나 선악과(善惡果)가 유전성(遺傳性),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가리키는 것은 명확하다. 유전된 성품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기 때문이고 기질지성 또한 선악을 겸하고 있다고 하고 가선가악(可善可惡 : 선도 있고 악도 있다.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하다고도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명과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창세기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이 휘돌며 감싸고 있는 ‘물’이 생명과(生命果)를 가리킨다. 신학적으로 이 물을 남은 것(remains)이라 칭한다. 그것은 사람 안에 남은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 남았는가? 당연히 선한 것이다. (창세기 1장)은 문자에서와는 달리 영적으로는 사람의 거듭남(regeneration)을 다루고 있다. 즉 사람의 재창조를 다루고 있는 것이 (창세기 1장)이다. 이 관점에서 ‘물’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할 때 그 근거, 또는 바탕이 되는 인간 안에 있는 선한 요소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효심이나 형제애나 이웃사랑 같은 것을 말한다. 이 바탕이 되는 성품이 파괴되면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이 물 위를 휘돌고 있는 것이다. 원어로 라하프라고 하는데 뜻은 새가 알을 품고 있는 것을 뜻한다. 이 물 주위에는 짐작할 수 있듯이 선악과인 기질지성(氣質之性)이 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있다’는 서술이 그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깊은 물’이 유전성을 가리킨다. 혼돈과 공허(formless and empty)는 좋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황폐하다는 것을 말하고, 무질서하다는 것을 말한다. 영적으로는 선과 진리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 상태에서는 짙은 어둠 즉 무명(無明)과 거짓만 있는 것이다. 그 어둠이 위에 있는 깊은 물(deep water)이 뜻하는 것은 욕망, 탐욕, 정욕을 의미한다. 거듭나기 전의 사람의 본질적인 상태가 이렇다는 것을 말한다.
형이하(形而下)의 태극(太極)은 만물의 근원으로서 근원과 그 근원으로부터 유출된 것의 본질이 똑같다. 태극에 대한 기본 이해 이렇다. 성리학자들은 이 우주 이외의 다른 세계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공자가 말했듯이 ‘사는 것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요’가 그들의 태도이고 신념이었다. 물론 도교에서는 무(無)를 말하긴 하고(도덕경 40장) 또 그들도 주역을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불교를 접해서 사후세계나 그 이상의 세계에 대한 지식도 있었지만 태극에 대한 이해가 보통은 이러했다.
사람의 구원에 있어서 형이하(形而下)의 태극(太極)을 말한다면 남은 것(remains)인 ‘물’을 가리킨다. 물론 물 그 자체로는 아니다. 그것은 반쪽자리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뿌리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거기에 하나가 더 추가되어야 한다. 그것이 (창세기 1장 3절)의 빛(light)이다. 빛과 물의 관계는 정자와 난자로 이해하면 된다. 둘이 만나면 생명체가 생긴다. 즉 수정란(fertilized egg)이 발생한다. 거기서 사람이 나오듯이 영적인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인격도 거기서 나오는 것이다. 수정란은 태극이 음양사상팔괘(陰陽四象八卦)로 나아가듯이 그렇게 세포 분열한다. 과학에서도 빛과 물이 만나면 생명체가 탄생한다고 한다. 진화론에서도 공동 조상을 말한다. 하나의 근원이 있다. 우주도 마찬가지다. 거기도 형이하의 태극과 같은 것이 있었다(원시 우주, 母 우주). (창세기 1장 3절)의 빛은 영적으로는 복음 전파를 가리킨다. 말씀의 선포와 가르침을 말한다. 그 내용은 주님의 강림과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이다. 이 가르침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갈 때 거듭남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옥토(沃土)도 형이하의 태극을 상징한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Now is the age of the Holy Spirit)
(창세기 1장 2절)과 (누가복음 1장 35절)의 말씀은 통한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물을 휘돌며 감싸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성모 마리아를 덮는다고 하고 있다. 말했듯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은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을 가리킨다. 차이점은 성령의 유무(有無)다. 하나님의 영이 속사람에서 겉사람으로 임하면 쿤달리니(Kundalini)는 잠에서 깨어나 상승, 활동할 수밖에 없다. 구약에서는 특별히 성령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성령의 역사가 즉 성화(Sanctification)가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에,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틀어져서 곤란해졌지만 그래서 예수님이 오실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개개인이 인성을 거룩하게 만들어 가면 되는 환경이었으나 그것이 감당이 안 되는 상태로 인성이 악화되고 그것에 비례해서 영적 환경도 악화되어 - 지옥의 영들이 1층천을 점령하고 2층천까지 침입하여 혼란을 발생시키고 3층천까지 넘보는 상황이라, 3층천까지 건드리면 인류는 끝나기 때문에 영계의 이런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 참조 (순정 기독교 121항) -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이고 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의 짐을 지게 된 것이다. 사람 스스로 죄를 처리할 수 없고 악과 싸워 이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시게 된 것이고 십자가를 지고 죽고 부활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정들로 인해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영의 대한 기록은 있지만 성령(Holy Spirit)에 대한 기록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세 곳에 있었다.
(시편 51:11) 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님의 <성령>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
(이사야 63:10) 그러나 그들은 반역하고, 그의 <거룩하신 영>을 근심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도리어 그들의 대적이 되셔서, 친히 그들과 싸우셨습니다. 11 그들은, 지난날 곧 주님의 종 모세의 날을 생각하며 물었습니다. "그의 백성 곧 양 떼의 목자들을 바다로부터 올라오게 하신 그분이, 이제는 어디에 계시는가? 그들에게 그의 <거룩한 영>을 넣어 주신 그분이, 이제는 어디에 계시는가?
(임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순정기독교 TCR 158항) “구약의 말씀에서 성령이 언급된 것은 하나도 없고 다만 거룩함의 영으로 그것도 세 곳에, 즉 한 번은 시편서(51:11)에, 두 번은 이사야서 (63:10,11)에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말씀에는 즉 사도행전이나 사도들의 서간에서와 꼭같이 복음서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처음으로 성령이 비로서 존재하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주님만이 거룩하시기(묵15:4) 때문이며 그 까닭에 또 천사 가브리엘이 어머니 마리아에게 거룩한 이가 네게서 나겠다고 말했습니다(눅 1:35). 또 예수님이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한 고로 성령이 아직 안계셨다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엘리사벳에게 충만했다(눅 1:41) 그리고 스가랴(눅 1:67), 그리고 시므온(눅 2:25)에게 충만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아버지 여호와의 영으로 충만했다는 뜻인데, 그때 벌써 세상에 계셨던 주님 때문에 성령이라고 불리운 까닭입니다. 이것이 구약 성서에서는 아무데서도 예언자들이 성령에 의해서 말했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여호와에 의해서 말했다고 되어 있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곳에서는 늘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 네게 임했다.], [여호와의 말이다.], [이같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라고 기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한 점의 의문도 있을 수 없으니 나는 예레미야서에서만 유사한 표현이 있는 곳을 지적하면 대략 예레미야 1장-40장, 42장-51장에 기록된 말씀들을 읽을 수 있겠습니다. 유사한 표현들이 모든 다른 예언서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느 예언서에서도 성령이 그들에 의해서 말했다던가 여호와께서 성령에 의해서 말했다고 한 것이 없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성령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해서 성령의 역사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에는 더욱 그렇다. 예수님께서 오시고 부활하신 이후에는 성령이 전면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무도 하나님의 영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람들의 속과 겉을 소통을 막고 있었던 것을 치우셨기 때문이다(영계도 정리). 즉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이 속에서 겉으로 입류하는데 방해되는 그 무엇도 없게 완전하고도 영구적으로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마 27:51) “이에 성소(나오스)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막 15:38) “이에 성소(나오스)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눅 23:45) “성소(나오스)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이 찢어진 휘장은 주님의 언약궤(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십계명)와 그룹(언약궤를 보호하는 천사)이 있는 거룩한 것 중의 거룩한 것인 지성소와 거룩한 것인 성소 사이에 있는 가림막을 가리킨다.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1년에 4번 출입할 수 있는 곳이다. 대속죄일(욤 키푸르)인 7월 4일에, 그에 비해서 성소는 제사장들이 출입하는데 제약이 없다. 이 휘장의 찢어짐이 의미하는 것은 첫째로는 주님의 인성과 신성의 영광화 즉 하나됨을 가리키고(천계비의 2576 [5]), 둘째로는 속사람과 겉사람 사이를 막고 있는 입류를 방해하는 죄의 제거를 의미하고, 셋째로는 영계의 무질서한 상황의 정리를 가리킨다(속량). 첫째는 둘째와 셋째의 원인이다. 또 첫째는 죽으심의 결과 또는 죽으심으로 성취한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영화가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 또한 완전하고 영원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속과 겉의 입류를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이제는 있을 수 없게 된 것을 말한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사람 안과 영계의 환경,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의 영의 시대(The Age of the Spirit of God)가 아니라 성령의 시대(the Age of the Holy Spirit)로 불리는 것이다.
(임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천계비의 2576) [5] 주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는 것(마태 27 : 51; 마가 15 : 38; 누가 23 : 45)은 주님의 인성의 영광화를 뜻합니다. 즉 인성(성자)과 신성(성부)의 하나됨입니다.
(히브리서 10:19,20)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하기온)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예수의 육체라
(히브리서 9:1) 첫 번째 언약에도 예배 규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2 한 장막을 지었는데, 곧 첫째 칸에 해당하는 장막입니다. 그 안에는 촛대와 상이 있고, 빵을 차려 놓았으니, 이 곳을 '성소'라고 하였습니다. 3 그리고 둘째 휘장 뒤에는, '지성소'라고 하는 장막이 있었습니다. 4 거기에는 금으로 만든 분향제단과 온통 금으로 입힌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와 언약을 새긴 두 돌판이 들어 있었습니다. 5 그리고 그 언약궤 위에는 영광에 빛나는 그룹들이 있어서, 속죄판을 그 날개로 내리덮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것들을 자세히 말할 때가 아닙니다. 6 이것들이 이렇게 마련되어 있어서 첫째 칸 장막에는 제사장들이 언제나 들어가서 제사의식을 집행합니다. 7 그러나 둘째 칸 장막에는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만 들어가는데, 그 때에는 반드시 자기 자신을 위하여, 또 백성이 모르고 지은 죄를 사하기 위하여 바칠 피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8 이것은 첫째 칸 장막이 서 있는 동안에는 아직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드러나지 않았음을 성령께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9 이 장막은 현 시대를 상징합니다. 그 장막 제의를 따라 예물과 제사를 드리지만, 그것이 의식 집례자의 양심을 완전하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10 이런 것은 다만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예식과 관련된 것이고, 개혁의 때까지 육체를 위하여 부과된 규칙들입니다. 1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일어난 좋은 일을 주관하시는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만들지 않은 장막, 다시 말하면,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더 완전한 장막을 통과하여 12 단 한 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는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13 염소나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려도, 그 육체가 깨끗하여져서, 그들이 거룩하게 되거든, 14 하물며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 15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재자이십니다. 그는 첫 번째 언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에서 사람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약속된 영원한 유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성령의 활약만 남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서 사람들을 살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겉사람 즉 인성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성령의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여 그 인성을 거룩하게 성화(Sanctification)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령이 모든 사람 안에서 깨어나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이 남아 있다. 그것은 당연하게 주님을 믿고 침례(浸禮, baptism)를 받는 것이다. 주님을 구세주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무덤의 돌을 굴러내고 부활하셨던 것처럼 성령께서 자신의 상승을 막고 있는 바위를 굴러내어 사람을 구원하는 활동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이 성령세례(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이고 거듭남(Regeneration)과 성화의 역사(Activities of Sanctification)다.
(행전 8:15) - 베드로와 요한 - 두 사람은 내려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16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을 뿐이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아직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던 것이었다. 17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행전 19:3) 바울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4.바울이 말하였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5.이 말을 듣고,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6.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했는데,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갈라디아서 6:7)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8.자기 육체에다 심는 사람은 육체에서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에다 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9.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10.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갈라디아서 5:16)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17.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18.그런데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육체의 행실은 환히 드러난 것들입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20.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21.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22.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23.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24.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2.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3.육신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미약해져서 해낼 수 없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죄를 없애시려고 그 육신에다 죄의 선고를 내리셨습니다. 4.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5.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6.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7.육신에 속한 생각은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으며, 또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8.육신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9.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10.또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을 얻습니다. 11.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12.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육신에 빚을 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13.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14.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무극(無極), 태극(太極), 황극(皇極)을 삼태극(三太極)으로 말한다. 이것을 성경의 하나님에 적용할 수 있다. 무극과 태극을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말씀’에 대입할 수 있다. 황극은 (1장 4절)에서 말하는 말씀 안의 ‘생명’에 대입할 수 있고, 삼태극은 하나님의 세 속성을 말한다. 하나님은 미지신(未知神), 말씀은 리(理)로서 기지신(旣知神), 생명은 일기(一氣), 이를 성경에서는 성부 하나님이라고 하고, 예수님은 그 성부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오신 분이시고, 성령은 그 주님으로부터 발출 하는 거룩한 영을 가리킨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고, 성자 예수님은 구원주 하나님이고, 성령 하나님은 성화주 하나님이다.
(요한 20:22) (부활하신 이후)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성령은 이미 사람 안에 있었다.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삼태극 하나님으로부터 음양이기(陰陽二氣)가 나오는 것이기에, 리기(理氣)에 대하여 성리학에서는 불상리(不相離 : 분리되어 있지 않다) 불상잡(不相雜 : 섞여 있지 않다)으로 말한다.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 성(性) 즉 리(理)다. 리는 태극이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 성을 성즉리(性卽理)라고 해서 리(理)로서만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리(理)에는 반드시 기(氣)가 있기 때문이다. 불상리(不相離)로서, 그러므로 상기(上記)의 구절에 대한 바른 이해는 예수님께서 사람 내부에서 성령을 겉사람에게 내려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속사람과 겉사람 사이를 막고 있는 죄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치워 버렸다. 안과 밖에서,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속사람을 거쳐 겉사람에게 생명이 흐르는 길 즉 수슘나(sushumna) 중도(中道)를 영구적으로 안전하게 확보를 하였다. 지금부터는 누구나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면 사람 안에서 잠들어 있던 쿤달리니가 상승해서 활동할 수 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서 보여주었던 것이다.
성령은 예수님이 부활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에게 줄 수 없었다.
(누가 12:49) 내가 불(성령)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요한 7:37-39)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영(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영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 성경의 서술)
삼태극(三太極) 하나님은 지금은 성부로 칭해진다. 성부는 무형상이다. 무극이든 태극이든 황극이든 기본적으로 형이상(形而上)이다. 이에 비해서 성자는 형상이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으며 손으로 만질 수 있다. 성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고 성자는 보이는 하나님이다. 성부는 하나님이고, 성자는 하나님 인간 즉 신성한 인간(the Divine Human)이다. 성부는 영혼(soul) 또는 속사람(internal man)으로 말할 수 있고 성자는 육체(body) 또는 겉사람(external man)으로 말할 수 있다. 영혼과 육체, 속사람과 겉사람을 두 사람이라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라고 하지, 성령은 그 한 사람의 활동력을 가리킨다. 결과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을 가리킨다. 삼일(三一)의 하나님이다.
(출 33:20) 네가 내(여호와 하나님)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골로새서 1:15)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골로새서 2:9)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십니다. (고린도후서 4:4)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요한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사람을 아무개라고 할 때 그 겉사람을 두고 아무개라고 하지 속사람을 두고 아무개라고 하지 않는다. 보이고 나타나시고 인격적으로 교류하는 분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오늘날은 성령의 시대임과 동시에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시대다. 사람의 속사람과 사람의 활동이 그 사람의 것으로 당연하게 취급되듯이 성부에 속한 것도 성령에 속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속된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면서 구주 하나님이시고 성화주 하나님이시다. (이사야서 9장 6절)에서 이르는 것과 같이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이사야 9:6)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이다.”
인간은 주님의 보혈과 성령의 강림으로 거듭난다. 다른 누구에게서 가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친자이고 우리는 양자라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죄를 피로 사하시고 성령으로 그분의 혈통을 이어받게 하신 분은 예수님으로서 우리에게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은 여호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시이다.
(요한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 사람은 그 빛을 증언하러 왔으니, 자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14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영(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인성이 나왔다는 것을 말하고, 세상을 떠나 아버지에게로 간다는 것은 다시 아버지 하나님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구약과 달리 진전된 아버지 상으로서,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형상으로서 말이다.
(요한 16: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